157화
말에 박차를 가하면서도, 혹시 모를 습격에 대비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마을에 도착할 때까지 습격은 없었다.
하지만 마을의 풍경은 처참했다.
“세상에.”
경악한 아이나의 중얼거림이 모두의 심정을 대변했다.
마을 전체가 잿더미가 되어 가고 있었다.
거의 모든 집이 불길에 휩싸인 가운데, 주민들은 이미 전멸한 듯했다.
불길 속, 혹은 밖에서 쓰러진 채 움직이지 못하는 주민들의 모습이 선명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크지 않은 마을이지만, 열 가구가 넘게 거주했다.
근처에는 경비병들이 머무는 초소도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순식간에 잿더미가 되어 버리다니.
“아무도 없는가!”
아이나가 목소리를 높여 생존자를 찾았다.
다행이라 해야 할지, 마을 주민들이 문자 그대로 전멸한 건 아니었다.
마을 전체를 뒤진 끝에 생존자 세 명을 찾을 수 있었다.
칼에 맞았지만 간신히 목숨은 건진 남자 한 명과 숨어 있다가 아이나의 부름에 모습을 드러낸 아이 두 명이었다.
칼에 맞은 남자는 말도 하기 어려울 만큼 큰 부상을 입었다.
두 아이들은 크게 다친 곳은 없었지만 울기만 했다.
“자. 괜찮아. 이제 안전해.”
아이나가 자상한 표정으로 달랬지만 아이들은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순식간에 살고 있던 마을이 잿더미가 되어 버렸고, 아이들의 부모는 아마 살아남지 못했을 테니까.
아이나는 영주 딸의 체통도 신경 쓰지 않고 아이들을 직접 안아 가며 달래 주었다.
흙과 재, 피가 묻는 것도 개의치 않은 아이나의 위로에 아이들도 울음을 그쳤다.
마침 다른 생존자도 정신을 차렸다.
보고를 받은 아이나는 함께 온 경비병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저 사람은 어떤가?”
“목숨은 건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빨리 타 지역의 경비대에 연락하여 이 지역을 조사하고, 주변 지역의 경계를 강화하라고 해.”
“알겠습니다.”
영주군이 아닌 왕국군이 영주나 영주의 딸의 명령을 꼭 따를 필요는 없다.
하지만 상황이 상황이라 누구도 아이나의 말을 거스르지 않았다.
능숙하게 상황을 수습한 아이나는 정신을 차렸다는 남자에게 다가갔다.
“정신이 드나?”
“…….”
“나는 영주의 장녀 아이나 홉킨스다. 대체 뭐가 어떻게 된 일이지?”
남자는 정신을 차렸음에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저 눈물만 흘릴 뿐.
한참 뒤에야 정신을 차린 남자의 입이 열렸다.
“그, 그야말로 지옥이었습니다.”
“대체 누가 이런 짓을 한 거지?”
“모르겠습니다. 갑자기 복면을 한 자들이 쳐들어와 사람들을 죽이고 불을 질러서… 크흑!”
큰 충격을 받은 남자는 더 말하지 못했다.
다른 생존자인 두 아이들의 말도 비슷했다.
복면을 한 자들이 마을을 이 지경으로 만든 뒤 유유히 사라졌다는 것이다.
상황을 안 아이나는 함께 온 경비병들에게 따졌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마을과 거리가 멀다면 모를까, 멀지 않은 마을이 이렇게 될 때까지 너희들은 대체 뭘 하고 있었나? 그러고도 너희들이 왕국군이고, 이 지역의 경비병들인가?”
“죄송합니다, 아가씨.”
경비병들 누구도 반박하지 못했다.
사울도 그런 아이나를 말리지 않았다.
마을이 이 지경이 된 만큼 경비대의 책임은 피할 수 없었으니까.
하지만 경비대의 무능만을 탓할 수는 없었다.
사울 눈에는 이 지역의 경비대가 썩 무능해 보이진 않았다.
병사들이 입고 있는 갑옷과 들고 있는 무기를 봐도, 그리고 군기를 봐도 기강이 잡혀 있었다.
그럼에도 마을이 이 꼴이 났다는 건, 사건을 저지른 자들의 실력이 뛰어났다는 뜻이다.
‘피닉스인가?’
사울은 피닉스를 첫 번째 용의자로 두었다.
피닉스라면 작은 마을 하나쯤은 순식간에 불바다로 만들고 사라질 능력이 있다.
하지만 피닉스에게 이런 마을을 멸망시켜야 할 이유가 어디 있다는 말인가.
전략적 요충지이거나 중요한 자원이 나는 곳도 아닌데.
사울은 직접 생존자들에게 이것저것 물어보았다.
하지만 대답은 다르지 않았다.
‘복면을 쓴 정체불명의 누군가’가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 범인이 인간인지, 이종족인지도 알 수 없다고 했다.
생존자 조사에서 성과를 거두지 못한 사울은 마을을 조사해 보았다.
쑥대밭이 된 마을을 살펴본 결과, 몇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실력이 뛰어나면서 냉혈한인 자들의 소행이군요.”
사울의 분석에 모두들 동의했다.
뚜렷한 마나의 흐름 같은 것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수십 명의 주민들이 잠깐 사이에 몰살당했다.
개중에는 저항하려 한 듯 농기구나 도끼 따위를 들고 있는 주민도 있었지만, 손도 못 쓰고 전멸했다.
심지어 아이까지 하나하나 베어 버리는 잔악함을 보여 주었다.
반면에 범인으로 보이는 자들의 흔적은 전무했다.
시체는커녕 정체를 짐작할 만한 옷가지나 무기, 장식품 하나 보이지 않았다.
안타깝지만 사울 일행이 이곳에서 더 머무른다고 해결될 일은 아닌 듯 했다.
“일단 사제타로 가지요. 영주와 함께 의논해야겠어요.”
사울의 말에 아이나는 고개를 떨구며 말했다.
“네, 전하.”
* * *
사제타.
홉킨스 가문의 영지인 갈레트 지방의 중심이자 영주가 머무는 곳.
사제타의 풍경은 사울의 기억과 거의 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주민들의 분위기는 달랐다.
“그 소문 들었나?”
“웬 놈들이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는 것 말인가?”
“그래. 그것도 한두 곳이 아니라네!”
주민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정체불명의 누군가가 마을을 공격한 사건을 이야기했다.
공격은 한 번으로 그치지 않았다.
사울이 본 마을을 포함하여 총 세 곳의 마을이 쑥대밭이 되었다.
세 곳 모두 작은 마을이었지만, 마을 전체가 쑥대밭이 된 터라 사망자는 백 명이 넘을 것이라 했다.
기가 막힌 건 불과 하루 만에 세 곳의 마을이 쑥대밭이 되었음에도, 범인의 꼬리조차 못 잡았다는 사실이었다.
이에 홉킨스 가문 영지 전체가 비상이 걸렸다.
왕자를 맞이하는 환영 행사는커녕 연회마저도 취소되었다.
사울 일행은 곧바로 영주의 저택으로 향했다.
소영주 칼랜드가 저택 밖에서 그런 사울을 맞이했다.
“어서 오십시오, 전하.”
“네, 반가워요.”
사울은 곧장 저택으로 들어가며 칼랜드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도 오면서 마을이 쑥대밭이 된 것을 직접 보았어요.”
“네. 전하께서 보신 마을은 물론, 총 세 곳의 마을이 더 공격을 받았습니다.”
“그럼 총 네 곳인가?”
“그렇습니다.”
“내가 아는 곳보다 한 곳이 더 늘었군요.”
“그 이상의 피해는 보고되지 않았습니다.”
영주 던칸은 회의실에서 대책 마련에 여념이 없었다.
회의실 문이 닫힌 가운데, 던칸의 목소리가 바깥까지 새어나왔다.
“지금 그것을 말이라고 하시오!”
“아, 아니. 그게 아니라…….”
“네 곳의 마을 중 세 곳이 왕국군 경비대 근처에 있었소. 그런데도 아직 범인들을 붙잡기는커녕 놈들의 정체조차 파악하지 못했는데 내게 책임을 묻는 거요?”
“책임을 묻는 게 아닙니다. 그저 왕국군의 책임만은 아니라는 게…….”
“그 말이 그 말 아니오!”
회의장의 분위기를 엿들은 사울은 뒤늦게 회의장 문을 열었다.
회의장에는 던칸을 비롯한 영지의 거물들이 거의 다 모여 있었다.
영주인 던칸, 그리고 왕실에서 파견된 감찰관 피에르의 모습도 보였다.
방금 전 소리를 높인 건 던킨이고, 그에게 변명한 건 피에르였다.
사울을 본 던칸은 일단 분노를 가라앉히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서 오십시오, 전하.”
“오랜만이에요, 홉킨스 경.”
격식에 맞춰 제대로 인사를 주고받을 상황이 아니다.
모두와 간단히 인사를 나눈 사울 일행과 칼랜드는 곧바로 회의에 참석했다.
회의장은 소속에 따라 자리 배치부터 두 파벌로 나뉘어져 있었다.
던칸이 중심이 된 ‘영주파’.
그리고 왕실 인사들이 모인 ‘왕실파’였다.
방금 도착한 사울과 카스텔, 아르멜은 자연스럽게 왕실파 쪽에 자리했다.
그리고 아이나는 영주파 쪽에 자리했다.
모두들 자리에 앉은 가운데 자연스럽게 주도권을 넘겨받은 사울이 말했다.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지요?”
“전하. 그것이…….”
감찰관 피에르가 설명을 해 주었다.
요약하면 총 네 개의 마을이 공격받아 전멸한 가운데, 책임 소재를 놓고 서로 다툼이 벌어진 상황이었다.
공격받은 네 마을 중 세 곳이 왕국군 부대나 왕국군 경비대 근처에 있었기에 그만큼 왕실의 책임이 크다는 게 영주의 입장이었다.
이는 왕실을 대변해야 할 사울로서도 반박하기 어려웠다.
영주가 자치권을 가진 영지에 왕국군의 필요에 따라 곳곳에 군대를 주둔시켰다.
그만큼 왕국군이, 그리고 왕실의 책임도 큰 것이다.
“그렇군요, 홉킨스 경.”
“네, 전하.”
“이번 일은 왕실을 대신하여 내가 먼저 사과하지요. 나아가 피해 보상을 원한다면 그 역시 협조하겠어요.”
“…….”
“하지만 지금은 그보다 이 일이 대체 왜 벌어진 것인지 알아내는 게 더 중요해요.”
“옳은 말씀입니다.”
왕실 측 인사들은 모두들 사울의 말에 동의했다.
던칸도, 다른 영주 측 인사들도 반대하지 않았다.
“나는 이번 공격으로 쑥대밭이 된 마을을 직접 목격했고, 또 조사도 해 보았어요. 이 사건을 저지른 자들은 보통 놈들이 아니었어요. 굉장히 뛰어난 실력을 가진 자들이 치밀하게 준비하고 움직인 게 분명해요.”
소영주 칼랜드가 사울에게 물었다.
“전하께서는 누가 범인인 지 짐작이 가십니까?”
“그건 모르겠어요. 내가 직접 본 현장에서는 어떠한 증거도 찾을 수 없었거든요. 듣자 하니 다른 현장에서도 마찬가지였다지요?”
“네, 전하.”
“확실한 건 일개 도적이나 잡범들이 할 짓은 아니라는 거예요. 총 네 건의 사건은 모두 하나의 조직의 소행으로 보이고, 그렇다면 그 조직은 실력자들을 치밀하게 움직일 수 있을 만큼의 역량을 갖춘 곳이겠지요. 이 율렌 섬에서 그 정도의 힘이 있는 조직이 얼마나 될까요?”
던칸이 대답했다.
“가장 유력한 용의자라면 역시 가멜다 왕국일 겁니다.”
“그렇겠지요.”
가멜다 왕국은 이런 짓을 할 역량이 충분했다.
또 이런 짓을 할 이유도 있다.
국경 지대에 위치한 홉킨스 가문 영지를 혼란에 빠트리면, 언제 시작되어도 이상하지 않을 두 나라 간의 전쟁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용의자는 가멜다 왕국 외에도 있었다.
“피닉스일 가능성도 있어요.”
던칸도 사울의 말에 공감했다.
“말씀대로입니다. 이미 전하께 알려드렸듯, 최근 제 영지에서도 피닉스의 움직임이 관측되고 있습니다.”
“그 움직임은 어느 정도인가요?”
“이종족 사이에서 피닉스에 대한 소문이 퍼지고 있고, 나아가 동조하는 자들이 늘고 있습니다.”
이 회의장에서 피닉스에 대해 모르는 자는 없었다.
그들이 위험 분자라는 것도.
이에 이번에는 왕실 측에서 볼멘소리가 터져 나왔다.
“영주님은 그런 자들을 보고만 있었단 말이요?”
“정말 그자들이 이번 일을 벌인 것이면 어쩔 셈이오?”
사울은 자기편이 언성을 높이는 것을 말렸다.
“그만하세요. 지금은 누구 탓을 하기 보다는 상황을 판단하고 대책을 세워야 할 때니까.”
“죄송합니다, 전하.”
“내 생각에 이번 사건의 범인은 가멜다 왕국, 혹은 피닉스가 유력해요. 하지만 다른 자들의 소행일 수도 있지요. 킬리안 비셔스라던가.”
“킬리안 비셔스라면 쫓겨나지 않았습니까?”
“그를 쫓아내고 왕국 내 그의 세력도 상당 부분 제거했지만 아직 그는 죽지 않았어요. 그의 부하들도 건재하니 이런 짓을 벌일 능력이라면 충분할 거예요. 문제는 그가 내 목숨을 노린다면 모를까, 뜬금없이 이 영지를 공격할 이유가 있겠냐는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