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화
사울은 목적지인 버려진 마을로 출발하기에 앞서 작전을 세웠다.
수많은 병력이 우르르 몰려가면 로터스가 마을에 도착하기 전 낌새를 눈치채고 도망칠 수 있다.
이에 사울은 자신의 일행과 최정예 병력 몇 명만 데리고 가기로 했다.
“병력이 너무 적지 않습니까? 좀 더 병력을 데리고 가시는 것이…….”
아직 사울을 많이 겪어 보지 않은 외교관이 걱정했지만, 사울은 한마디로 일축했다.
“괜찮아요.”
외교관의 걱정에도 일리는 있다.
하지만 사울은 늘 그렇듯, 걱정 섞인 의견을 따르지 않았다.
특히 이번에는 더더욱 양보할 수 없었다.
쓸데없이 많은 병력을 데려가 적에게 들키느니 다소 위험을 감수하는 게 낫다는 게 사울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른 사람들도 쉽사리 물러나지 않았다.
외교관의 걱정이 전염되기라도 한 듯 모두들 한마디씩 했다.
“이번 작전은 다소 위험한 것 같습니다.”
아르멜의 말이었다.
“좀 더 병력을 데리고 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카스텔마저도 조언을 했다.
카스텔까지 반대하니 사울도 한 발 물러서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최소한의 병력만 데리고 가는 게 아니라, 좀 더 전력을 충실하게 갖춘 뒤 출발하기로 했다.
그렇게 작전을 세운 사울은 무언가를 깨닫고는 아이나를 은밀히 불러 물었다.
“유독 이번 작전에 대해 걱정이 많은 것 같아요.”
아이나가 대답했다.
“사실대로 말씀드려도 될까요?”
“네. 솔직한 의견을 들으려 그대를 부른 것이니까요.”
“실은… 이번 작전을 두고 전하께서 다소 무리하시는 것 같다는 말이 있었습니다.”
“처음 듣는 말은 아닌 것 같은데.”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평소보다도 심하신 것 같다고…….”
사울은 말끝을 흐리는 아이나에게 캐물었다.
“그대의 생각은 어떤가요?”
아이나는 한층 정중한 자세로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전하.”
“내가 너무 서두르는 것 같다고요?”
“솔직히 그렇습니다.”
사울은 표정을 관리하려 노력하면서도, 속으로는 한숨을 내쉬었다.
원수를 앞두고 감정적인 모습은 보이지 않으려 노력했는데, 완전히 숨기지는 못한 것인가.
“전하.”
문밖에서 부르지 않은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카스텔이었다.
“무슨 일인가요?”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사울의 방에 들어온 카스텔은 아이나와 눈인사를 주고받았다.
그렇게 아이나, 카스텔이 사울과 마주 앉았다.
늘 그렇듯 카스텔은 감정을 읽기 어려웠다.
하지만 눈빛은 평소와 조금 달랐다.
사울은 그 눈빛에서 카스텔이 무슨 소리를 하려는 지 짐작했다.
“이번 원정 때문에 온 건가요?”
“네, 전하.”
“선생님도 이번 원정에서 내가 서두르고 또 무리하게 움직인다고 생각하나요?”
“…….”
카스텔은 대답 대신 아이나를 바라보았고, 아이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하려던 말을 아이나가 대신했음을 깨달은 카스텔이 말했다.
“그렇습니다. 저는 무엇보다 전하의 안위가 우선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알고 있어요. 왕자인 내가 목숨을 잃거나 크게 다치는 건 왕국의 안위와도 직결된 일이니. 하지만 난 죽을 마음도 없고, 죽음을 각오할 마음도 없어요. 이번 일도 마찬가지예요. 내가 직접 챙기고 움직여야 하는 일이라 직접 움직였고, 서둘러야 했기에 서두른 것뿐이에요. 다소 경솔하게 보였을 수는 있지만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어요.”
사울의 말에도 카스텔도, 아이나도 쉽사리 수긍하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사울은 입에 발린 몇 마디로 쉽사리 넘어가기 어려움을 깨달았다.
역시 지나치게 몰입한 건가.
냉정하게 움직이기 위해 노력했음에도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그렇지 않은 것일까.
‘안 되지. 아직 시작에 불과한데 이러면 안 돼.’
사울은 다른 사람이 아닌 자기 자신을 질타했다.
그동안 숱한 고생을 해 온 이유가 무엇인가.
다른 무엇보다도 전생의 원한을 갚기 위함이 아니었는가.
드디어 그 원한을 갚을 수 있는 길이 본격적으로 열렸다.
그런데 그 길을 걷기 전부터 이런저런 문제가 터지다니.
사울은 다시 한번 스스로를 다잡기로 했다.
이제 복수를 향한 문턱을 막 넘어서려 하고 있다.
문턱에 걸려 넘어지는 건 어이없는 일이 아닌가.
무엇보다 눈앞의 두 사람을 납득시키는 게 시급했다.
둘 다 진심으로 자신을 걱정하고 있다.
이들에게 모두 털어놓을 수는 없지만, 어설픈 거짓말 따위로 넘어갈 수도 없다.
결심한 사울은 방금 자신이 한 말을 수정했다.
“아니, 아니에요. 내가 확실히 지나쳤군요.”
“그렇습니다. 전하.”
“선생님의 말대로예요. 솔직히 말하자면 이번에야말로 한 건 제대로 올릴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어요. 피닉스는 물론 다르센 왕국까지 관련된 일이니까요. 이번 일을 제대로 마무리 지으면 정말 큰 성과를 거둘 수 있다는 생각에 무엇보다 소중한 내 안위를 소홀히 했어요. 미안해요.”
사울은 진심을 담아 말했다.
그저 진심을 모두 다 말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러자 아이나도, 카스텔도 고개를 끄덕였다.
“전하, 전하께서는 혼자가 아니세요.”
아이나의 말에 사울은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그대는 모르겠지만 이 일만은 나 혼자의 몫이에요. 지금 이 세상에 전생의 나를 기억하는 자는 나 혼자뿐일 테니.’
누구에게도 터놓을 수 없는 진심.
반면에 눈앞의 두 사람은 진심으로 자신을 걱정해 주고 있다.
사울은 한편으로는 고마움을 느끼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지독한 아이러니를 느꼈다.
전생의 자신을 죽인 ‘검은 흉성’이 이젠 진심으로 자신을 걱정한다는 아이러니 말이다.
* * *
이야기를 끝내고 사울의 방에서 나온 아이나와 카스텔은 곧바로 헤어지지 않았다.
“카스텔 씨.”
“네.”
“차나 한잔하실까요?”
“알겠습니다.”
초대를 받은 카스텔은 아이나의 방으로 향했다.
아이나는 사울 일행 중 두 번째로 좋은 방을 쓰고 있었다.
하지만 말이 ‘좋은 방’이지, 귀족 영애가 머무르는 방치고는 굉장히 검소했다.
말 그대로 개인 방을 쓰는 것에 만족해야 할 수준이었다.
시녀 등을 부리기도 마땅찮은 환경이라 차도 아이나가 손수 끓였다.
하지만 아이나나 카스텔이나 검소한 환경에 익숙한 사람들이라 큰 문제는 되지 않았다.
“자. 다 되었어요.”
카스텔은 아이나가 직접 끓인 차를 내려다보았다.
마치 금속을 넣고 끓인 듯 은빛으로 빛나는 차.
“백금차로군요.”
“그래요. 전하께도 대접해 드린 적 있는 차예요.”
변방 지역에서나 즐겨 먹는 값싼 차지만, 이곳에서는 감지덕지다.
그렇게 카스텔과 아이나는 값싼 차와 말린 과일로 간단히 다과를 나누었다.
“카스텔 씨의 몸은 전보다 나아진 거죠?”
“네. 대족장의 약이 효험이 있었습니다.”
“다행이네요. 그 약은 오랫동안 복용해도 괜찮나요?”
“수도의 의사들에게 조언을 구했는데, 괜찮다고 했습니다.”
잠시 나눈 안부 인사가 끝나자 아이나가 본론을 꺼냈다.
“카스텔 씨는 이번 전하의 행동을 어떻게 생각하세요?”
“지나치게 서두르셨습니다.”
“맞아요. 전하가 과감하게 움직이신 건 한두 번이 아니지만, 이번처럼 서두르셨던 적은 없어요.”
“먹잇감을 놓치고 싶지 않으신 것이겠지요.”
카스텔의 말에 아이나는 의아한 표정이 되었다.
“먹잇감… 이라고요?”
“네. 그 로터스라는 자 말입니다.”
“그자가 전하의 먹잇감이라는 말인가요?”
“그렇습니다.”
먹잇감.
아이나로서는 납득이 가질 않는 표현이었다.
“전하께서 전부터 그자를 노려 온 것이라는 말처럼 들리는군요.”
“제가 보기에는 그렇습니다.”
“어째서요? 나도 로터스라는 자에 대해 조금 알아보았어요. 그렇게 유명하거나 대단한 인물은 아니더군요. 게다가 저나 전하가 어릴 때 가멜다 왕국의 정계에서 쫓겨났다던데… 전하가 그런 자를 먹잇감으로 생각하실 이유가 없잖아요.”
“저도 이유는 모릅니다. 저 역시 전하를 어릴 때부터 모셔 왔지만 로터스라는 자와 얽힌 기억은 없습니다.”
아이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수수께끼로군요. 뭐 전하는 원래 수수께끼가 많은 분이시지만.”
“그렇습니다.”
“…카스텔 씨도 나와 같은 느낌을 받은 적 있나요?”
“저도 전하는 수수께끼투성이인 분이라 생각합니다. 전하를 처음 뵈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그렇군요. 정말 모를 분이에요.”
자신보다 훨씬 오랫동안 사울과 함께해 온 카스텔조차도 그의 속내를 알지 못한다.
아이나는 왠지 모를 안타까움을 느꼈다.
그리고 또 다른 감정도.
“카스텔 씨가 조금은 부러워요.”
카스텔이 의외라는 눈빛으로 물었다.
“제가… 말입니까?”
“그래요. 전하를 오랫동안 모셔 왔으니까요. 카스텔 씨는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전하 같은 분을 오래 모실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부럽다고 생각해요.”
카스텔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전하를 오래 모신 건 제게 있어 큰 행운이었습니다.”
“그렇겠지요.”
“하지만 저는 당신이 부럽습니다.”
“내가요?”
의외라는 표정을 짓는 아이나에게 카스텔이 말했다.
“당신은 전하의 친구가 될 수도 있고, 그 이상의 존재가 될 수도 있는 분이시니까요.”
아이나가 피식 웃었다.
“그렇지 않아요. 전하와 친구가 되는 것도 쉽지 않은 걸요. 우리 가족들은 전하와 친해지라고 하지만, 반대로 거슬려 하는 사람도 있으니까요.”
“그렇습니까?”
“네. 카스텔 씨도 알잖아요? 우리 가문과 왕실과의 미묘한 관계 말이에요.”
“그렇군요. 하지만 저보다는 낫지 않습니까. 당신은 귀족 영애이고, 저는 괴물 취급을 받고 있으니.”
카스텔의 말에 당황한 아이나는 손까지 내저었다.
“괴, 괴물이라니요.”
“물론 당신이 절 그렇게 보지 않음은 알고 있습니다. 국왕 폐하를 비롯하여 저를 좋게 보는 사람도 적지 않다는 것 또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괴물이라고 생각하거나, 두려워하는 자들도 많습니다.”
“…….”
아이나는 언뜻 들은 카스텔의 과거 이야기를 떠올렸다.
비록 상대는 반역자였다지만, 반역자를 잡으러 온 왕국군마저 경악했다는 학살의 현장.
학살을 일으킨 장본인이자 피바다 속에서 홀로 살아남은 괴물.
떠도는 소문이 사실이라면, 6년 전쟁에서 활약하기 전 카스텔은 그야말로 이야기 속에서나 나올 법한 잔혹한 괴물이었다.
지금의 카스텔을 보면 상상하기 어려운 이야기다.
물론 적에게는 여전히 냉혹하지만, 전장 밖에서는 성격이나 행동거지가 좀 특별할 뿐, 나쁜 사람은 아닌 것처럼 보이니까.
아이나의 속내를 읽은 카스텔이 자조 섞인 미소를 지었다.
“아마 당신이 알고 있는 제 이야기는 사실일 겁니다. 다소 과장된 부분도 있겠지만.”
“…….”
“그래서 저는 당신이 부럽습니다. 저 같은 괴물은 전하 곁에 있을 순 있고, 전하의 선생이 될 수는 있지만, 그 이상은 꿈도 꿀 수 없으니까요. 그 이상을 꿈꿀 수 있는 당신이 부럽습니다. 진심으로.”
카스텔의 표정은 무뚝뚝했지만, 아이나는 그 속에서 처연한 감정을 느꼈다.
“전하께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실 거예요. 카스텔 씨는 전하의 선생님이니까요. 누구보다 가깝게 생각하시지 않을까요?”
“…그렇습니까.”
“맞아요. 카스텔 씨가 날 부러워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카스텔 씨는 전하가 어릴 때부터 함께 그분을 지켜보고 많은 것을 가르쳐 주셨잖아요. 오히려 내가 부러워요. 전하와 좀 더 일찍 만났다면 가문이니 뭐니 하는…….”
아이나는 말을 멈췄다.
아무리 상대가 카스텔이라지만, 이 이상 마음을 드러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었다.
그런 아이나의 모습에 카스텔은 무언가를 깨달은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아, 알겠어요.”
어색한 분위기 속에 카스텔을 배웅한 아이나는 홀로 한숨을 내쉬었다.
“어쩌면 카스텔 씨도 나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