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화
결국 사울은 일행의 도움은 물론, 외교관의 도움까지 받으며 장거리 원정을 떠났다.
그런 사울에게는 또 다른 도우미도 있었다.
“누님께서 보낸 자들인가?”
“그렇습니다, 전하.”
루시아가 보낸 지원군.
“쿠루굴 족장이 보낸 자들인가?”
“그렇소.”
복수를 위해 새로운 거주지로 떠나는 대신 이 지역에 남기를 택한 코볼트들.
어느 쪽이든 도움이 되는 자들이었다.
루시아는 자신의 수하 중에서도 유능한 자들을 뽑아 보냈고, 코볼트는 척박한 중립 지대에 익숙한 병사들을 보내왔다.
오래잖아 성과가 나타났다.
몇 명의 피닉스 조직원들을 붙잡았고, 늘 그렇듯 심문 끝에 아는 것을 모두 실토했다.
엘프, 드워프, 오크, 인간.
피닉스는 종족과 신분을 가리지 않았다.
개중에는 대신전이나 카멜 산에서 중립 지대를 관리하기 위해 파견한 자들도 있었다.
“돌아가신 대신관이나 대족장이 알면 기막혀 하겠군.”
사울은 슬슬 신중하게 행동해야 할 때라 생각했다.
아무리 상대가 피닉스 조직원이라지만, 계속 독단적으로 잡아들이고 심문하는 건 문제가 될 소지가 컸다.
이에 사울은 대신전과 카멜 산 양쪽에 그쪽 출신의 피닉스 조직원을 붙잡았음을 통보했다.
다행히 양쪽 모두 사울의 통보에 적대적인 반응을 보이진 않았다.
대신전은 새로운 대신관을 뽑는 문제로 바빴기에 피닉스 문제는 사울에게 맡긴다고 했다.
카멜 산 쪽에서도 상대가 피닉스가 확실하다면 사울에게 맡기겠다고 답변해 왔다.
덕분에 사울은 계속 움직일 수 있었다.
때로는 어느 정도 규모를 갖추어서, 때로는 소규모로, 때로는 카스텔 혼자 보내 포로를 계속 붙잡았다.
그만큼 피닉스에 대한 정보들, 그리고 로터스에 대한 정보도 차곡차곡 쌓였다.
“로터스와 손을 잡았나?”
“그렇소.”
“로터스가 피닉스에서 맡은 일은 무엇이지?”
“가멜다 왕국의 다른 조직원과 정보를 관리하는 일을 하고 있소.”
포로의 증언을 들은 사울은 속으로 미소를 머금었다.
이것으로 세 번째로 나온 증언이다.
각기 다른 곳에서 잡은 포로 셋이 같은 증언을 했다면 틀림없는 사실일 것이다.
거기에다 이번에는 증언 이상의 수확도 있었다.
피닉스 조직원이 로터스에게 전달하기로 된 편지였다.
편지는 암호로 되어 있었지만, 그렇게 어려운 암호는 아닌 듯했기에 해독하려면 충분히 해독할 수 있었다.
모든 게 잘 풀려 가고 있는 느낌이었다.
“로터스라는 자가 피닉스와 관련이 깊은 건 틀림없는 사실인 것 같아요.”
사울의 말에 아이나가 동의했다.
“이자를 잡을 수만 있다면, 피닉스에 대해 꽤 많은 것을 알아낼 수 있을 거예요.”
“문제는 이자를 어떻게 잡느냐 하는 것이지요.”
로터스가 가멜다 왕국령에 있을 땐 함부로 손을 쓸 수 없다.
다르센 왕국의 왕자가 가멜다 왕국령에 있는 귀족을 죽이거나 잡아 온다면 선전포고나 다를 게 없는 행위다.
“일단 이자를 자기 나라에서 끌어낼 필요가 있어요.”
“어떻게 말입니까?”
사울은 잠시 생각하다 아르멜에게 물었다.
“가짜 편지를 써 보는 게 어때?”
“우리가 피닉스를 가장하고 그를 끌어내자는 말입니까?”
“그래.”
“쉽지 않을 겁니다.”
“알고 있어. 하지만 그동안 우리가 피닉스와 싸우면서 모아 온 정보들도 상당해. 거기에다… 진짜 편지까지 손에 넣었으니까.”
사울은 입수한 피닉스의 편지를 들어 보였다.
암호로 기록되어 있어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읽을 수 없다.
하지만 편지를 가지고 있던 포로라면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이 편지의 내용은 무엇이지?”
“나도 모르오. 그저 ‘까마귀 암호’라고만 들었소.”
피닉스와 로터스가 접촉할 땐 꽤나 보안에 신경을 쓴 모양이다.
편지 전달자도 모르는 암호라니.
“아르멜, 까마귀 암호가 뭔지 알아?”
“들어 본 적은 있습니다.”
“그럼 이 편지를 해독할 수 있겠어?”
“저는 해독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왕녀님이라면 가능할 겁니다.”
확실히 루시아의 권한이라면 왕국 정보부 인력을 동원해서라도 암호를 해독할 수 있을 것이다.
암호 자체가 수수께끼라면 모를까, 어떤 방식의 암호인지 안다면 푸는 것도 훨씬 수월한 법이니까.
암호를 해독할 수 있다면, 새로운 암호 편지를 작성할 수도 있을 테고 말이다.
“아르멜, 이 편지를 누님 편으로 보내서 우리가 원하는 내용으로 가짜 편지를 만들도록 해. 또 암호 해독법 등도 요청토록 하고.”
“알겠습니다, 전하.”
아르멜은 군말 없이 사울의 명령을 받들었다.
사울은 아르멜의 눈빛이나 표정에서 조금 위화감을 느꼈지만, 크게 신경 쓸 일은 아닌 것 같아 넘겼다.
* * *
보름 후.
루시아에게 답장이 왔다.
“이것은 왕녀 전하께서 보내신 편지입니다. 그리고…….”
루시아의 사절은 자그마한 상자를 내밀었다.
상자는 작지만 튼튼했고, 마나의 기운도 느껴졌다.
사울은 눈앞의 상자가 마법으로 봉인된 것임을 알아보았다.
“이건 선물이라고 하셨습니다.”
“선물이라. 알았어. 감사히 받겠다고 전해 드려.”
“네, 전하.”
사절이 물러가고, 사울은 루시아가 보낸 편지를 뜯어 보았다.
편지가 두툼하다 싶었는데, 그만큼 내용도 알찼다.
먼저 사울이 요청한 편지의 해독문이 있었다.
편지 내용은 생각보다 간단했다.
피닉스에게 약속한 지원금이 늦어지고 있다며 이를 독촉하는 편지였다.
그리고 암호를 해독하는 방법에 대한 설명, 그리고 새로 만든 가짜 편지도 포함되어 있었다.
가짜 편지의 내용은 사울이 미리 짜 놓은 대로였다.
‘사울 왕자의 공격으로 피닉스가 큰 피해를 보고 있다. 이 사태의 해결책을 의논하기 위해 우리와 그쪽이 비밀리에 만날 필요가 있다.’
“미끼는 준비되었군. 그가 미끼를 물어 주면 좋겠지만.”
사울은 루시아가 따로 보낸 편지도 읽어 보았다.
공적인 내용이 절반, 나머지는 안부 인사였다.
편지 내용은 거의 다 예상 범위 내였지만, 딱 하나 신경 쓰이는 대목이 있었다.
‘네가 일을 열심히 하고 있다고 들었다. 하지만 다소 감정적인 모습도 보여 주고 있다더구나. 나는 너를 믿고 있다. 하지만 만에 하나 나의 믿음을 깨트리는 일은 없도록 해라.’
편지를 다 읽은 사울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르멜이 자신의 모습이 심상치 않다며 보고한 게 분명했다.
‘녀석이 내 모습에서 무언가를 느꼈나.’
분명 사울은 이 일에 사적 감정이 들어갔음을 들키지 않으려 노력했다.
하지만 날카로운 아르멜의 눈에는 무언가가 보였던 모양이다.
물론 사울은 여기에서 멈출 마음은 없었다.
더 주의하기로 할 뿐이었다.
“그리고 이 상자는…….”
마법으로 봉인된 작은 상자.
이 상자를 열려면 마법으로 세밀하게 봉인을 풀어내거나, 강력한 힘으로 파괴하는 방법밖에 없다.
내용물은 짐작이 갔다.
봉인을 풀든, 상자를 부수든 카스텔이 나서면 순식간에 해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사울은 직접 봉인을 풀어 보기로 했다.
이 또한 루시아의 시험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이 봉인의 구조는…….’
마법 봉인을 푸는 건 마나를 이용해 퍼즐을 푸는 것과 같다.
해답을 알면 의외로 금방 풀 수 있지만, 해답을 모르면 섬세한 계산을 통해 차근차근 마나를 다루며 풀어내야 한다.
결국 마나를 다룬 경험과 기술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아니면 강대한 힘으로 봉인 자체를 파괴하거나.
사울은 파괴가 아닌 온전히 푸는 쪽을 택했다.
해답을 모르는 퍼즐이라 처음에는 쉽지 않았다.
하지만 전생과 현생의 지식과 기술을 총동원한 결과, 생각보다 빨리 해답을 찾을 수 있었다.
사울의 마나 다루는 기술은 카스텔마저도 인정할 정도였으니까.
한 시간 가까이 씨름한 끝에 상자가 열렸다.
내용물은 사울의 예상대로였다.
“예쁜데.”
정교하게 연마된 황색 토파즈가 붙어있는 반지.
토파즈 속에 마나의 빛이 영롱하게 빛나는 게 똑똑히 보였다.
들은 대로 사울이 입수한 마법 보석의 절반만이 사울의 몫이 되었다.
마법 보석을 나누는 건 굉장히 힘든 일이지만 그 힘든 과정을 거쳐 절반은 사울이, 나머지 절반은 조나단의 것이 되었다.
솔직히 조나단에게 마법 보석의 절반을 넘겨준 건 지금도 아까웠다.
하지만 이걸로 조나단에게 단단히 빚을 만들어 둔 셈이다.
그가 공을 세우게 돕고 또 마법 보석까지 넘겨주었다.
언젠가 이 빚을 받을 수 있을 때, 제대로 받을 생각이었다.
사울은 반지를 껴 보았다.
반지가 손가락에 들어간 순간, 몸속의 마나가 반응하는 게 느껴졌다.
반지에서 흐르는 마나와 사울 몸속의 마나가 이질적으로 움직이는 것도 잠시, 곧 한 덩어리가 되어 몸속을 순환하기 시작했다.
“이거 괜찮은데.”
마법 보석의 힘을 빌려도 예전보다 더 강한 마법을 쓸 수 있는 건 아니다.
같은 힘을 오랫동안 유지할 수 있도록 지구력을 키운 것일 뿐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실전에서는 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곧 사울은 일행을 불러 모았다.
사울은 먼저 도착한 아르멜에게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루시아 누님이 편지를 보냈더군. 잘 받았어. 역시 누님은 대단한 분이야. 내게 선물도 주었고, 부탁한 일도 잘 처리해 주셨어. 또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충고까지 해 주셨지.”
아르멜은 아무것도 모르는 척 대답했다.
“다행입니다, 전하.”
사울도 더 말하지 않고 모두에게 반지를 보여 주었다.
그리곤 루시아가 보낸 가짜 편지를 들어 보이며 말했다.
“이걸로 준비는 끝났어요. 이 가짜 편지는 누가 봐도 진짜처럼 정교하게 만들어졌고, 아마 로터스 그자도 속아 넘어갈 거예요.”
아이나가 물었다.
“그자를 어디로 부르셨습니까?”
“바로 이곳이에요.”
사울이 점찍은 곳은 중립 지대의 한 버려진 마을이었다.
과거에는 수십 명의 주민들이 거주했지만, 몇 년 전 몬스터 습격으로 지금은 버려진 곳이라고 했다.
버려진 마을을 목적지로 선정한 이유는 실제 피닉스나 로터스 같은 녀석이 접선 장소로 쓸 만한 장소이기 때문이었다.
버려진 지 몇 년이나 된 데다 대신전이나 카멜 산에서도 관리하고 있지 않으며, 다르센 왕국이나 가멜다 왕국 영역과도 떨어져 있는 곳.
은밀한 일을 하기에는 더없이 좋은 장소다.
물론 누군가를 붙잡거나, 한바탕 전투를 벌이기에도.
“이 버려진 마을에서 놈을 잡을 거예요.”
듣고 있던 카스텔이 물었다.
“병력은 얼마나 데리고 가실 겁니까?”
“많은 병력을 데려갈 필요는 없지만, 전력이 부족해서는 안 되어요. 놈이 바보가 아니라면 호위 병력 정도는 데리고 올 테니까. 이번 작전은 우리가 피닉스를 쫓아온 이래 가장 중요한 작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만에 하나라도 실패해서는 안 되요. 반드시 놈을 사로잡아야 해요.”
“…….”
웬지 모르게 카스텔은 대답을 하지도, 고개를 끄덕이지도 않았다.
하지만 사울의 작전에 반대하지도 않았다.
이렇게 로터스 체포 작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 * *
사울은 왕국 정보부 요원을 통해 로터스에게 가짜 편지를 전달했다.
얼마 후, 요원은 로터스의 답장을 피닉스가 아닌 사울에게 가져왔다.
“이 편지는 로터스가 직접 작성한 건가?”
“그렇습니다. 전하.”
“그를 직접 만나 보았나?”
“네. 잠시 대면했습니다. 저나 편지에 대해 의심하는 기색은 없었습니다.”
요원은 그동안 얻은 정보를 바탕으로 피닉스인 척 가장하여 로터스를 만났다.
무사히 돌아온 것을 보면, 일단 의심을 사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정보원이 가져온 로터스의 편지는 역시나 암호로 작성되어 있었다.
하지만 루시아가 암호를 푸는 방법을 알려 주었기에 해독에 큰 문제는 없었다.
암호 해독 결과, 사울이 원하는 내용이 나왔다.
‘사울 왕자 문제’를 해결하고, 또 지원을 위해 버려진 마을에서 만나겠다는 내용이었다.
사울이 기억하기로 로터스는 욕심은 많을지언정, 멍청한 인간은 아니었다.
스스로 중립 지대까지 움직이는 건 위험한 일이니, 자기 딴에는 철저히 준비를 하고 올 것이다.
그 준비를 깨부수고 놈을 사로잡아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