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화
“이제 한 가지 문제만 남은 것 같군요.”
사울의 말에 조나단이 물었다.
“또 무슨 문제가 남았다는 말이냐?”
“작전대로라면 요새의 병력을 이끌고 코볼트 부족을 도와주러 가야 하니까요.”
조나단은 사울의 말을 알아들었다.
코볼트 무리와 생사를 건 공성전을 벌인 게 불과 얼마 전이다.
그런데 이제 와서 코볼트를 돕는다고 하면 누가 쉽게 납득하겠는가.
‘이 코볼트는 나쁘고 저 코볼트는 착하다’는 논리가 쉽게 통할 상황은 아니었다.
하지만 조나단은 자신만만했다.
“말하지 않았느냐. 그건 걱정할 것 없다.”
* * *
사울과 조나단은 며칠 동안 작전을 준비했다.
코볼트와 함께 움직일 병력은 사울을 비롯한 소수이며, 소수인 만큼 최정예가 투입되었다.
사울과 카스텔, 아이나와 아르멜.
그리고 조나단 역시 뛰어난 기사 몇을 뽑아 주었다.
조나단이 뽑아 준 기사들을 면담해 본 사울은 믿을 만한 자들이라 여겼다.
“이 정도 전력이면 부족하지는 않겠군.”
“일이 생각대로 잘 풀리면 그렇겠지요.”
아르멜의 말에 사울이 물었다.
“걱정되는 게 있는 거야?”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무슨 이야기인데?”
조언이 필요하다 싶으면 항상 거침없이 입을 여는 아르멜이 말을 주저하는 건 드문 일이다.
무언가 대단한 사정이 있는가 싶었다.
“실은… 왕녀 전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루시아 누님이?”
“네. 전하의 신변에 문제가 생기면 제게도 책임을 묻겠다고 말입니다.”
“…….”
그런 사정이라면 걱정할 필요가 없다.
죽거나 다칠 생각은 추호도 없었으니까.
한참 준비하던 사울에게 병사 한 명이 찾아와 알렸다.
“전하.”
“형님이 보내셨나?”
“네, 연병장으로 오시랍니다.”
사울은 아르멜과 함께 연병장으로 향했다.
요새 연병장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꼭 필요한 경비 병력을 제외한 장교, 기사, 병사 등 거의 모든 요새의 병력이 조나단의 명령에 한자리에 모였다.
연병장 한쪽에는 대형 연단도 마련되어 있었다.
먼저 온 카스텔과 아이나도 연단 위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의 주인공은 카스텔이나 아이나도, 사울도 아니다.
사울도 연단 위에 올랐지만, 중심에 서지 않고 얌전히 구석에 섰다.
얼마 후, 위풍당당하게 차려입은 조나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번쩍이는 갑옷을 입고 사열을 받으며 연단 중심에 선 조나단의 모습은 말 그대로 위엄 넘치는 왕자 그 자체였다.
그렇게 연단에 오른 조나단은 연설을 시작했다.
“오늘은 귀관들에게 알릴 것이 있어 모두들 모이라고 하였다.”
“…….”
“얼마 전 코볼트 무리와의 전쟁은 실로 영웅적인 전투였다. 감히 이 제르넬 요새를 공격한 놈들은 비참히 패해 달아났고, 우리는 빛나는 승리를 거두었다.”
조나단의 말에 연단 아래의 병사들이 의기양양해졌다.
모두에게 아직 승전의 기억이 생생한 것이었다.
하지만 의기양양한 분위기는 조나단의 다음 말에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나는 귀관들에게 쉽지 않은 선택을 내렸음을 말해야겠다. 지금부터 우리는 코볼트 부족을 도우러 간다.”
웅성웅성.
왕자가 직접 연설을 하는 자리임에도 곳곳에서 동요했다.
당연한 반응이었다.
얼마 전 공성전까지 벌이며 치열하게 싸운 자들을 돕겠다니.
연단에 선 것이 왕자가 아니라 어설픈 기사 따위였다면 바로 욕설이 나왔을지 모른다.
“모두들, 조용히 하라!”
목소리를 높여 병사들을 진정시킨 조나단이 진솔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도 알고 있다. 코볼트는 우리의 적이었다. 또 우리가 이겼지만 그 과정에서 아군도 피를 흘렸음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이번 코볼트 전쟁은 코볼트들이 자의로 일으킨 게 아니었다.”
웅성웅성.
“그들도 이용당한 것이었다. 물론 이용당한 건 어리석은 일이며, 그 대가는 이미 패전으로 치렀다. 하지만 그들 중 그나마 영리한 자들이 다르센 왕국의 위광에 굴복했다. 자신들의 어리석음을 뉘우치고 우리들에게 자비를 빌었다. 그래서 나는 자비, 그리고 우리 왕국의 위광을 보여 주기로 했다.”
“…….”
“이번 작전은 지난번 코볼트 전쟁을 일으킨 어리석은 자들을 모조리 쓸어버리고, 우리 왕국의 위광에 굴복한 자들은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물론 아직 코볼트를 용납하기 어려워하는 자도 있겠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우리의 진정한 적은 코볼트 따위가 아니다. 가멜다 왕국이야 말로 우리의 진정한 적이다. 이번에 코볼트를 돕는 원정은 가멜다 왕국을 무너뜨리기 위한 첫걸음이라고 생각하라.”
연설을 하는 조나단에게서 위엄과 진솔함이 느껴졌다.
연단 위에서 지켜보는 사울에게도 그것이 느껴졌으니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병사나 기사들에게는 말할 것도 없으리라.
그렇게 분위기가 점점 달아오르는 가운데, 조나단은 마무리 발언을 했다.
“모든 것은 왕국을 위해, 그리고 우리 모두의 진정한 영광을 위한 것이다. 나와 내 동생 사울, 그리고 모두가 함께 코볼트를 도울 것이다. 그리고 우리 왕국의 위엄 아래 굴복한 그들을 받아들이고 이 지역을 완전히 평정하여 우리의 진정한 적인 가멜다 왕국을 상대할 것이다!”
“와아아아!”
조나단의 연설에 호응한 병사와 기사들이 한마음으로 소리를 질렀다.
덕분에 조나단은 만족스럽게 연단 아래로 내려갈 수 있었다.
조나단은 자신을 뒤따라 연단을 내려온 사울에게 말했다.
“어떠냐. 내가 괜찮을 것이라 하지 않았느냐?”
“네, 형님.”
이번만은 사울도 진심으로 조나단의 능력을 인정했다.
번지르르한 말을 꺼내는 건 누구나 할 수 있지만, 그것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건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다.
연설이라면 사울도 해 본 적 있지만, 지금의 조나단만큼 잘한 것 같지는 않다.
조나단 역시 남들의 위에 서는 사람으로서 재능을 가지고 있는 것이었다.
* * *
조나단의 연설을 한 다음 날.
약속대로 코볼트 족장이 다시 요새를 찾아왔다.
“우리는 모든 준비를 마쳤소.”
“나도 마찬가지다. 그럼 작전대로 사울과 일부 병력이 너와 함께 움직이고, 동시에 내가 요새의 병력을 이끌고 부족으로 원정을 나가 합류하겠다.”
“총 병력은 어느 정도요?”
“500명 정도 되겠군.”
500명의 병력.
대군이라 하기는 힘들지만 현재 요새에 주둔하고 있는 총 병력이 천 명 정도임을 고려하면 결코 적은 숫자는 아니다.
“그 정도 병력이면 충분할 것 같소.”
“음.”
문득 조나단은 굳은 표정으로 족장에게 말했다.
“이번 작전은 우리도 많은 것을 걸었다. 무엇보다도 왕자인 나도, 그리고 내 동생도 위험을 감수하고 있지. 그대들의 잘못으로 실패하는 건 결코 용납하지 않겠다.”
“알고 있소. 나도, 내 부족도 모든 것을 걸었소.”
“그래야지, 사울.”
“네, 형님.”
“조심해라.”
“형님도 조심하세요.”
그렇게 형제간의 인사를 마치고, 사울 일행은 코볼트 족장에게 합류했다.
* * *
사울 일행은 코볼트 족장과 함께 요새를 빠져나와 은신처로 향했다.
이번 작전에 필요한 코볼트 병력이 모인 곳이었다.
은신처로 향하던 중 사울은 아직 코볼트 족장의 이름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일이 끝나면 다시 볼 일이 없겠지만 그래도 함께 행동할 때는 어느 정도 가까워질 필요가 있다.
서로 사이가 나쁘다는 이유로 작전에서 실패하는 것만은 사양이었다.
“족장, 당신은 나에 대해서 아나요?”
“사울 왕자님이 아니시오.”
“나는 당신에 대해서 잘 모르는데, 알려 줄 수 있나요?”
“…족장 쿠루굴이오.”
쿠루굴.
인간 기준으로는 이상하게 들리는 이름이지만, 코볼트 기준으로는 평범한 이름이 아닐까.
“그렇군요. 쿠루굴 족장, 이번 작전은 그대와 나 모두의 역할이 중요해요.”
“잘 알고 있소. 아마도 머릿수에서는 아군이 밀리지 않을 거요. 문제는 피닉스지.”
피닉스 조직원의 실력은 아직 수수께끼다.
순식간에 코볼트 부족장 몇을 생포하고 나아가 부족을 장악한 것을 고려해 상당한 실력을 가졌다고 짐작할 뿐.
하지만 사울은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실력이라면 우리도 지지 않아요.”
“그렇게 자신의 실력에 자신이 있으시오?”
“전장이라면 꽤 다녀 보았으니까요. 그리고…….”
사울은 곁에서 묵묵히 따르던 카스텔을 슬쩍 바라보았다.
“카스텔 선생님도 함께니까.”
쿠루굴은 카스텔이 누구인지 모르는 듯했다.
그래서 사울은 카스텔의 본명보다 유명한 별명을 가르쳐 주었다.
“선생님은 일명 검은 마녀로 불리지요.”
“검은 마녀?”
쿠루굴의 눈이 커졌다.
카스텔이라는 이름은 몰라도, 별칭인 ‘검은 마녀’는 들어 본 모양이었다.
“정말 저 여성이 그 검은 마녀라는 말이오?”
“그래요.”
“가면을 쓰고 있지 않은데?”
“선생님이 가면을 벗은 지는 꽤 되었어요.”
쿠루굴이 카스텔을 바라보는 눈빛은 공포나 혐오 같은 게 아니었다.
종족은 다를지언정 막강한 강자를 바라보는 ‘경외’의 감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다른 코볼트에게도 순식간에 소문이 퍼졌다.
“#$^#%^$$”
자기들의 언어로 지껄이는 코볼트의 말을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분위기가 나쁘지 않다는 건 알 수 있었다.
그렇게 고조된 코볼트 무리와 함께 사울은 목적지인 은신처에 당도했다.
은신처는 모르고 보면 뻔히 보고도 알아보기 힘들 만큼 교묘하게 숨겨진 동굴이었다.
입구는 두 사람이 함께 지나가기 어려울 만큼 좁았지만, 안은 상당히 넓었다.
“@#$%@#$%$”
동굴 안의 코볼트들은 쿠루굴은 반갑게 맞이했지만 사울 일행은 경계했다.
쿠루굴이 무어라 설명을 해 주자 경계를 풀었지만, 의심 어린 눈초리는 사라지지 않았다.
애초에 종족이 다르고, 또 얼마 전 싸우기까지 했으니 경계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사울은 그 점은 신경 쓰지 않았다.
대신 쿠루굴이나 다른 녀석이 혹시나 쓸데없는 짓을 하지 않도록 철저히 감시하려 했다.
하지만 코볼트를 본 경험도 드물고, 말도 못 알아들으니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사울은 이종족에 대해 자신보다 잘 아는 아이나에게도 코볼트 감시를 맡겼다.
아이나가 사울에게 조용히 다가와 말했다.
“특별히 이상한 모습은 없어 보입니다.”
“그렇군요. 계속 살펴 줘요.”
“네, 전하.”
쿠루굴과는 일시적으로 동맹을 맺은 것과 다름없지만 그럼에도 의심을 완전히 버릴 수는 없었다.
쿠루굴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쿠루굴의 부하들이 사울이나 그 일행을 날카롭게 바라보는 광경을 몇 번이나 보았으니까.
서로 믿지 못하는 이종족이 손을 잡고 벌이는 작전.
쉽지 않겠지만, 꼭 성공해야 한다.
오리무중인 피닉스의 정체를 찾고, 나아가 사울이 지금보다 높은 위치에 오르기 위해서라도.
사울은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마친 쿠루굴에게 다가가 물었다.
“일은 순조롭게 될 것 같나요?”
“그런 것 같소.”
“출발은 언제 할까요?”
“모두가 준비되는 대로 바로 움직이면 될 거요.”
사울은 계획을 다시 떠올려 보았다.
이 은신처에서 날이 저물 때까지 이동하고, 하룻밤을 지샌 뒤 또 날이 저물 때까지 이동하면 목적지에 닿는다고 했다.
그렇게 도착한 뒤 피닉스 세력을 토벌하고 코볼트 족장을 구출하면 된다.
“기회는 한 번뿐이니 반드시 성공해야 해요.”
“그렇소. 부탁하겠소. 꼭 성공하도록 도와주시오.”
쿠루굴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진솔해 보였다.
사울은 고개를 끄덕였다.
* * *
사울 일행과 코볼트 병력은 큰 문제 없이 목적지에 닿았다.
목적지인 ‘사보 구릉지’는 낮은 산에 둘러싸인, 완만한 언덕으로 이루어진 곳이었다.
그래서 병력이 움직이는 것은 큰 문제가 없었지만, 다른 문제가 있었다.
“저기 가장 높은 언덕에 족장들이 있을 것이오.”
쿠루굴이 가리킨 언덕을 본 사울은 주변을 살핀 뒤 혀를 찼다.
“들키지 않고 잠입하는 건 거의 불가능하겠군요.”
“안타깝게도 그렇소.”
목적지인 가장 높은 언덕도, 다른 곳들도 나무 한 그루 없이 돌과 바위만 가득한 구릉지다.
몇 명이라면 모를까 수십 명은 되는 무리가 몸을 숨기고 목적지까지 잠입하는 건 불가능했다.
“어설프게 끝까지 몸을 숨기려다 적들에게 발각되면 오히려 역공을 허용할 뿐이에요. 잠입할 수 있는 곳까지는 잠입한 뒤, 한꺼번에 적들을 공격하는 게 좋겠어요.”
사울의 의견에 사울 일행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고, 쿠루굴도 반대하지 않았다.
“그보다 좋은 전략은 없을 것 같소.”
“곧 해가 저물 테니 잠시 기다렸다 움직이도록 해요.”
시간에 맞는다면 머잖아 조나단 형님의 병력도 지원을 올 것이다.
그렇다면 더더욱 존재를 숨길 수가 없을 터.
조나단의 병력은 마무리를 위해 불렀다.
아무도 놓치지 않게 주변을 포위하고, 남은 적들을 쓸어버리는 게 그들이 할 일이다.
그 전에 구할 자는 구하고, 쓸어버릴 자는 쓸어버리는 건 자신들의 몫이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마침내 해가 저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