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화
사울은 잠시 페로 요새에서 머무르며 루시아의 일을 돕기로 했다.
루시아는 그런 사울에게 자신의 부관 역할을 맡겼다.
“여기 서류들을 모두 검토해 보고 내용을 요약한 뒤, 네 의견을 보태서 내게 줘.”
“네, 누님.”
“문서의 형식 같은 것은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중요한 건 얼마나 내용을 잘 이해하느냐, 그리고 네 의견이니까.”
사울이 받은 문서들은 율렌 섬에 관련된 온갖 정보를 다룬 것이었다.
자국에 대한 것은 물론 적국인 가멜다 왕국에 대한 것.
중립 지대나 변방 지역에 대한 것.
심지어 율렌 섬 바깥의 대륙에 대한 정보도 있었다.
자국이나 적국, 중립 지대 등에 대한 정보는 사울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이에 사울은 먼저 자신에게 낯선 율렌 섬 바깥의 정보 쪽을 향했다.
‘에센 상회라… 전에도 이야기가 나왔었지.’
에센 상회.
사드온 대륙 최고의 상인 집단 중 하나.
다르센 왕국과 가멜다 왕국 모두와 철광석 독점 공급 계약을 맺고 있어 율렌 섬에서도 에센 상회의 지위는 무척 높았다.
왕실에 에센 상회의 사절이 한번 찾아오면 대륙의 웬만한 강대국 사절 못지않게 정중히 대접할 정도였으니까.
서류에 적힌 내용은 간단했다.
예전부터 상회에서는 철광석 가격을 올리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그러다 결국 다음 달부터 철광석 공급 가격을 올리겠다고 통보했다는 것이다.
율렌 섬은 풍요로우나 철이 적게 나는 곳이다.
그렇기에 에센 상회에서 공급하는 양질의 철광석은 전쟁 준비를 위해 꼭 필요했고, 에센 상회의 요구를 거부하기도 어려웠다.
다르센 왕국에서 전쟁 준비를 다시 시작했는데 철광석 공급이 끊기기라도 하면 그야말로 최악의 사태일 것이다.
하지만 일방적인 가격 상승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다.
‘이런 정치적인 문제에 내 의견이 큰 의미가 있을진 모르겠지만.’
사울이 무언가 특별한 의견을 낸다고 해도 그대로 진행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 정도로 중대한 사안은 아바마마를 비롯하여 국정에 직접 참여하는 사람들의 몫이다.
설령 루시아라 해도 이 일에 어디까지 관여할 수 있을지 의심스러웠다.
하지만 사울은 맡은 일을 가볍게 넘기지 않았다.
그게 무엇이든 맡은 일이라면 최선을 다할 뿐이다.
사울은 문제의 철광석 건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담아 문서에 기록했다.
그 외에는 크게 눈에 띌 만한 건 없었다.
무엇보다 지금 가장 궁금한 ‘피닉스’에 대한 정보는 거의 없었다.
사울은 문서를 꼼꼼히 작성하고 검토한 뒤, 루시아에게 가지고 갔다.
“누님, 다 끝났어요.”
“알았어.”
루시아는 하던 일을 멈추고 사울이 가져온 문서를 검토했다.
문서를 읽는 속도는 빨랐지만, 분명 한 글자 한 글자 꼼꼼히 읽고 있는 것이리라.
문서를 다 읽은 루시아는 냉정한 표정으로 물었다.
“에셀 상회에 대한 네 의견은 저들의 요구를 그대로 들어주자는 거야?”
“네, 누님.”
“그렇게 생각한 이유가 있겠지. 우리 왕국에서 그렇게 하면 무엇이 좋고, 또 무엇이 나쁠까?”
“그 결정의 장점이라면 상단과의 관계를 해치지 않을 수 있고, 당분간은 정해진 가격대로 철광석을 보급받을 수 있다는 것이겠지요. 우리 왕국의 국고가 그 정도도 감당 못 할 정도는 아니니까요.”
“단점은?”
“다소 무리한 요구를 수용한 만큼 상단에서는 기회가 되면 또 철광석 가격을 올리려 하겠지요. 그때에도 우리로선 그 요구를 어느 정도는 들어주어야 할 가능성이 높고요.”
사울의 의견을 들은 루시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너는 그 단점들을 고려해도, 장점 쪽이 더 매력적이라 생각하는 건가?”
“네. 머잖아 전쟁이 터질 가능성이 있으니까요. 그렇다면 전쟁에 꼭 필요한 철광석/은/ 다소 무리해서라도 안정적으로 확보할 필요가 있어요. 아마 가멜다 왕국도 그렇게 생각할 테고요.”
루시아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내 생각도 같아. 아마 아바마마 생각도 같으실 테고, 귀족들 중에서도 특별히 반대하는 자는 없을 거야.”
“그럼 합격인가요?”
“솔직히 기대에는 못 미치는 대답이야. 아바마마도, 나도, 다른 귀족들도 생각하지 못할 획기적인 답변이 나오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
대체 얼마나 높은 기대를 한 것일까.
하지만 기대 이하일지언정, 실망한 건 아닌 듯했다.
상식적인 생각이나 의견도 못 내는 녀석들도 많을 테니까.
“그럼 그 철광석 건은 역시 상단의 요구대로 처리될까요?”
“아마도 그럴 거야.”
루시아는 사울이 정리한 다른 문서들도 검토한 뒤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피닉스 쪽을 이야기해 볼까.”
루시아는 사울이 가져온 피닉스에 대한 문서를 펼치며 말했다.
“피닉스 문제는 나도 관심을 가지고 있어. 하지만 아직 별다른 성과는 없지, 어쩔 수 없는 일이야. 생각 같아서는 정보부의 인원을 대거 투입해서라도 피닉스를 철저히 조사하고 싶은데…….”
“예산이나 인력이 부족한가요?”
“둘 다 부족해.”
“누님의 힘으로도 어떻게 안 되는 것일까요?”
“예산이든 인력이든 빼 올 데가 없어. 적국을 감시하는 인력이나 예산을 줄일 수도 없고, 섬 밖을 감시하는 쪽도 마찬가지야. 결국 한정된 자원으로 최선의 결과를 낼 필요가 있지.”
왕위 계승권자인 1왕자나 2왕자마저 경계하는 루시아지만, 현실은 어쩔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면서 사울이 작성한 피닉스에 대한 문서를 다 읽은 루시아가 물었다.
“중립 지대의 이종족, 그리고 킬리안 비셔스. 너는 이들에게서 피닉스의 열쇠를 찾을 수 있다고 보는 거지?”
“네, 누님.”
“왕국 통틀어 너만큼 이들과 많이 부딪쳐 본 사람도 많지 않을 거야. 그렇다면 어떻게 이들을 조사해야 할까?”
사울은 이런 질문이 나올 줄 알고 준비한 답변을 꺼냈다.
“이종족은 기본적으로 인간을 경계해요. 이유야 누님도 잘 아시겠지요. 그러니 온건하게 접근할 필요가 있어요. 꼭 이 일이 아니라도 이종족을 적으로 돌려 왕국에 이로울 게 없으니까요.”
“그럼 킬리안은?”
“강경책 말고는 방법이 없어요.”
루시아가 안경을 고쳐 쓰며 물었다.
“사실 왕국 정보부에서는 킬리안에 대한 온건책이 논의된 적이 있어. 알고 있어?”
“킬리안에 대한 온건책이라고요?”
“그래, 어찌 되었든 능력 하나는 대단한 녀석이니까. 거기에다 놈의 세력권은 두 왕국과 중립 지대에까지 미쳐 있지. 네 덕분에 예전보다 세력은 줄어들었다 해도 여전히 무시할 수 없는 존재야. 나중에 버릴 땐 버리더라도, 지금은 손을 잡고 가멜다 왕국과의 전쟁에서 유용하게 쓰자는 이야기가 나왔어.”
사울도 이런 지저분한 이야기에 문외한은 아니다.
특히 전장에서는 필요하다면 더러운 짓을 하거나, 더러운 상대와 손을 잡아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상대가 킬리안이라면 이야기는 달랐다.
“저는 반대예요.”
“어째서?”
“킬리안이 어둠과 관련 있다는 사실을 잊은 건 아니지요?”
“확실히 그건 큰 문제지. 냉정히 말해 국익에 굉장한 도움이 된다면 놈이 저지른 살인, 강도, 마약 거래 정도는 눈감아 줄 수 있으니까. 물론, 이단 혐의는 눈감아 주기 어려우나 왕국의 역량을 총동원하면 그 문제도 어떻게 덮을 수 있을지 몰라. 이래도 킬리안을 끌어들이면 안 된다고 생각해?
“네.”
“이유는?”
루시아의 날카로운 눈빛에서 사울은 그녀가 자신을 시험하고 있음을 알았다.
루시아도 사울이 사적인 원한 때문에 이런 말을 하는 건 아님을 알 것이다.
지금 필요한 건 공적의 이유이며, 사울은 이 또한 준비해 두었다.
“놈은 제정신이 아니니까요.”
“그게 전부야?”
“다른 이유도 많지만, 미쳤다는 게 가장 큰 이유예요. 우리가 선의를 가지고 놈을 대한다고 놈도 선의로 보답할까요? 장담하건대 놈은 원한 관계인 제 목을 잘라서 선물로 줘도 그렇지 않을 거예요. 제 욕심이나 광기를 채우기 위해서 무슨 짓이든 하겠지요. 게다가 놈 자신도 악마 토끼풀 중독자라던데 약에 취한 미친놈을 믿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어요.”
루시아가 피식 웃었다.
“내 생각과 비슷하네.”
“그래요?”
“나도 네가 한 말처럼 다른 정보부 간부들을 입 다물게 했거든. 너의 머리 운운하는 부분만 빼고 말이지. 역시 우린 무언가 통하는 부분이 있는 것 같아.”
사울도 비슷하게 생각하던 참이었다.
조나단을 상대할 때보다 루시아를 상대하는 게 훨씬 편했다.
말도 잘 통하고, 자신이 나서 이런저런 걱정을 할 필요도 없다.
당장 편한 것만 생각하면 조나단 곁에 있는 것보다는 루시아 곁에 있는 게 훨씬 낫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루시아 곁에 있다간 자칫 그녀의 ‘충복’으로 떨어질 수도 있다.
사울은 아직 국왕이 될 마음은 없지만, 누군가의 충복이 될 마음도 없었다.
그것이 루시아와 거리를 두려는 가장 큰 이유였다.
“맞아요. 누님과는 무언가 잘 통하는 것 같아요. 전 당분간 조나단 형님과 같이 있을 텐데, 형님과도 누님만큼 잘 통하면 좋겠어요.”
루시아는 은근한 자신의 부름을 사울이 다시 거부했음을 깨달았다.
“그런가. 네 뜻이 그렇다면 더 말하지 않겠어. 하지만 생각이 바뀌면 얼마든지 이야기해라. 네가 반역자가 되지 않는 한 널 받아 줄 자리는 있을 테니까.”
“고마워요, 누님.”
루시아는 사울에게 받은 문서를 마저 살핀 뒤 그것들을 한쪽에 밀어 넣었다.
“네가 아무리 유능해도 한 번에 여러 가지 일을 하긴 어렵겠지.”
“그렇죠. 제 몸은 하나니까.”
“역시 넌 이 피닉스 일에 가장 관심이 많지?”
“그래요. 무엇보다 피닉스가 가멜다 왕국과 관련이 있을 가능성도 있으니까요.”
“그래?”
루시아는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아르멜도 너와 비슷한 이야기를 한 적 있어.”
“피닉스와 가멜다 왕국의 연관성 말인가요?”
“그래. 그는 연관이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았고, 나는 반대쪽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았지.”
“그럼 누님과 저는 생각이 다르군요.”
루시아의 의미심장한 미소가 짙어졌다.
“그럼 내기를 해 보지 않을래?”
“내기?”
“그래. 이긴 쪽이 상대가 들어줄 수 있는 소원을 하나 들어주는 것.”
사울이 기억하기로 루시아가 자신과 내기를 걸어 온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만큼 인정받았다는 것일까.
동시에 내기에도 흥미가 생겼다.
루시아와 자신의 생각이 다르다면, 둘 중 어느 쪽이 옳은지 꼭 확인해 보고 싶었다.
루시아 같은 거물과의 내기에서 이긴다면 그만큼 자신의 존재감도 돋보이지 않겠는가.
이 모든 게 루시아가 던진 미끼일지 모른다.
하지만 사울은 미끼를 마냥 거부하지 않았다.
“좀 더 자세한 설명을 부탁드려요.”
“조건은 피닉스와 가멜다 왕국의 ‘유력자’에 대한 관련성을 찾는 것. 어때?”
“유력자라면?”
“백작 이상의 귀족과 피닉스의 연관성을 찾을 수 있느냐, 찾지 못하느냐.”
“…….”
사울은 전생의 출생국인 가멜다 왕국의 사회 구조에 대해 잘 알았다.
왕실보다 귀족이 강한 나라 특성상 지위가 높은 귀족이라면 그만큼 세력이 강하다.
다르센 왕국은 백작이나, 그 이상의 작위를 가진 귀족이라도 권력은 없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가멜다 왕국에서는 백작이나 그 이상의 귀족이라면 하나같이 무시 못 할 실권을 가지고 있었다.
백작 이상의 귀족, 말 그대로 ‘유력자’와 피닉스의 연관성을 찾을 수 있느냐, 찾지 못하느냐.
정말 연관이 있다 해도 찾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어떻게 생각해도 내게 불리한 내기지만…….’
이왕 하는 내기라면 이기고 싶다.
하지만 내기에 지는 한이 있더라도 피닉스를 제대로 조사할 기회를 잡는다면 그것만으로도 가치는 충분하지 않은가.
생각을 정한 사울이 말했다.
“그 내기, 관심이 있어요. 하지만 적국의 백작이나 그 이상의 지위를 가진 자들과 피닉스의 연결 고리를 찾아내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에요.”
“맞아. 내기는 공정해야 하지. 내 명예를 걸고 할 수 있는 최선의 지원을 약속하겠어. 또한 네 일에 충실해도, 조나단과의 사이가 나빠지지 않도록 손을 써 주지.”
이 정도 미끼라면 물 만하다.
“그 내기, 받아들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