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화
그 사람이 누구인지는 굳이 물어볼 필요도 없다.
모르는 척해 봤자 넘어갈 루시아가 아니다.
“저는 항상 제 가족들은 진심으로 대한다고 생각했는데요.”
“가면을 쓴 진심이겠지. 그게 아니면 나나 아바마마, 다른 사람들을 가족으로 보고 있지 않거나.”
“……!”
무언가를 찔린 기분에 사울도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말이 심하시군요.”
“…….”
“누님의 일이 그것이지요. 세상 모든 것에 의심하는 것. 하지만 전 누님에게 과한 의심을 받을 일을 한 적은 없어요. 그것만은 알아줘요.”
사울의 말은 사실이었다.
나라를 위해 큰 공을 세우면 세웠지, 해를 끼친 적은 거의 없다.
실패를 한 적은 있지만, 어디까지나 실수였을 뿐이다.
그러자 루시아가 한발 물러섰다.
“말이 지나쳤다면 미안해. 하지만 내 충고는 기억하도록 해. 항상 나랏일을 우선시할 것. 그리고 전쟁에서는 이겨야 하지만, 전쟁광이 되지는 말 것.”
“…그건 명심하지요.”
“그럼 다시 이야기로 돌아갈까? 내 동반자가 될 마음은 없는 거지?”
“저와 누님은 따로 행동하는 게 나라에 더 도움이 될 것 같으니까요.”
사울의 대답에 루시아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구나.”
“대신 제가 도울 일이 있으면 얼마든지 도와드릴게요.”
“알았어, 이만 돌아가 쉬도록 해. 공무는 내일부터 하고.”
“네, 누님.”
사울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사울에게 루시아가 다시 한번 말했다.
“기억해. 나는 너도, 조나단도,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그러지요.”
그렇게 집무실을 나선 사울에게 낯익은 얼굴이 다가와 인사했다.
“전하.”
사울을 따라다니는 루시아의 충복.
아르멜이었다.
사울은 그런 아르멜을 떠보았다.
“네 덕분에 누님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 들었어. 누님은 나에 대해 속속들이 알고 있더군.”
아르멜은 사울의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제 임무를 수행했을 뿐입니다.”
“그래? 아이러니한 일이야. 누군가를 믿고 가까이할수록 나에 대한 정보가 빠져나간다는 게.”
“전하께서 절 원하시지 않는다면 언제든지 물러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럴 순 없지. 앞으로도 계속 내 밑에서 고생할 각오를 해.”
“기꺼이 감수하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아르멜은 자신의 진짜 주군인 루시아를 만나러 갔다.
사울은 루시아와 아르멜이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지 궁금했지만, 엿들을 수는 없었다.
이곳은 루시아의 요새.
허튼짓이나 허락받지 않은 일을 할 수는 없었다.
* * *
루시아를 만난 아르멜은 보고할 것들을 모두 보고했다.
아직 알리지 않은 사울과 조나단에 대한 정보, 그리고 그 외에 독자적으로 수집한 정보들이었다.
모든 보고를 들은 루시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당분간 네 임무는 유지하도록 하지. 앞으로도 계속 수고해 줘.”
“네, 전하.”
“사울과 조나단 쪽의 일은 당분간 그쪽에 맡길 생각이야. 네 의견은?”
“두 분이라면 큰 문제는 없을 겁니다. 사울 전하라면 웬만한 사태가 벌어져도 대응하실 수 있을 테고, 조나단 전하도 아직까지는 제 몫을 감당하실 수 있을 것으로 보였습니다. 단지…….”
“단지?”
“역시 그 매버릭이라는 자가 조금 마음에 걸립니다.”
아이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대해서 조사해 보았어. 첩자이거나 배신자일 가능성은 거의 없고, 능력은 흠잡을 데 없지. 솔직히 조나단 밑에 있는 게 아까울 정도야.”
신랄한 루시아의 말에 아르멜도 동의했다.
“유능한 자라도, 그리고 첩자도 아니고 왕국이나 자기 주인을 배신하지 않더라도 얼마든지 나라에 해를 끼칠 수 있으니까요.”
“생각 같아서는 그를 불러들여 심문이라도 해 보고 싶지만… 이유 없이 그렇게 할 수는 없지. 내가 널 통해서 조나단에게 충고를 해 볼까?”
“조나단 전하께서 충고를 들으실 것 같진 않습니다. 솔직히 조나단 전하의 부하 중 매버릭만큼 유능한 사람은 없는 것도 사실이고요.”
“내가 함부로 나서면 역효과인가.”
아르멜은 마음속으로 매버릭이 운이 좋다고 생각했다.
루시아가 그를 내버려 두는 건, 어디까지나 ‘왕자이자 동생의 부하’이기 때문이다.
왕자가 아닌 어딘가 귀족의 부하였다면 루시아가 벌써 손을 대고도 남았다.
“다른 이야기를 해 보지. 그 피닉스라는 조직에 대해서는 알아보았나?”
“지금까지 알아낸 것은 이미 모두 보고드렸습니다.”
“새로 알아낸 건 없단 말이지. 골치 아프군. 사실 회색 그림자에서도 피닉스에 대한 경계를 점점 높이고 있어. 가뜩이나 이 율렌 섬에서 우리가 경계해야 할 자들이 많은데.”
아르멜은 조심스럽게 의견을 내놓았다.
“가멜다 왕국과 연관되었을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요?”
“그렇게 생각해?”
“이번 요새 공격 사건을 생각하면 가능성이 없진 않을 겁니다.”
“가능성이라… 그렇지.”
생각하던 루시아가 안경을 고쳐 쓰며 고개를 저었다.
“분명 가능성은 있지. 하지만 내기를 한다면 나는 아니라는 쪽에 걸겠어.”
“그렇습니까?”
“그들이 가진 역량과 힘은 상당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어. 그 정도의 조직이 가멜다 왕국과 진지하게 손을 잡았다면… 지금보다 더 적극적으로 움직였을 거야. 그렇다면 지금쯤 그자들에 대해 좀 더 많은 것을 알아낼 수 있었을 테고.”
“과연…….”
“사울도, 조나단도 당분간 그 피닉스 문제에 매달릴 거야. 너도 그들을 돕도록 해.”
“네, 전하.”
보고를 마친 아르멜도 집무실을 나갔다.
홀로 남은 루시아는 다른 문서를 집어 들려다 멈추었다.
피닉스.
생각하면 할수록 수수께끼인 조직.
아직 밝혀진 건 적지만, 갈수록 그들의 동태가 심상치 않았다.
“정말 그들이 가멜다 왕국과 관련이 없다면…….”
* * *
가르시아 남매 중 더 강한 쪽이 동생인 베일이라는 건 누나인 마리안도 부인하지 않았다.
반면에 더 영리한 쪽은 누나인 마리안이라는 것을 베일도 부인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베일은 지혜나 냉철함이 필요한 일이 생기면 마리안에게 맡기고는 했다.
“으아악!”
골방에서 한참 비명 소리가 들려오는가 싶더니 이내 잠잠해졌다.
대충 일이 끝났음을 안 베일은 방 안으로 들어갔다.
골방 안에는 피투성이가 된 채 사슬로 묶인 자들이 있었다.
한 명은 엘프, 또 한 명은 드워프였다.
둘 다 피투성이가 되었고, 상처와 출혈로 생의 마지막 숨을 들이쉬고 있었다.
그리고 마리안은 두 이종족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피 묻은 도구를 정리했다.
“어땠어?”
베일의 질문에 마리안이 고개를 저었다.
“아는 게 별로 없었어. 말단들이 분명해.”
“누나 솜씨가 떨어진 건 아니고?”
“완전히 제정신을 잃고 미친 소리를 할 때까지 몰아넣었어. 정신이 붕괴된 뒤에도 아무 말도 안 하는 걸 보면 정말 몰랐던 거지.”
베일은 고개를 끄덕이며 이제 시체가 된 둘을 다시 돌아보았다.
얼마 전 전투에서 포로로 잡은 두 녀석들.
흔한 이종족 범죄자라면 가르시아 남매 같은 거물이 직접 심문을 하진 않았을 것이다.
베일의 입이 열렸다.
“피닉스라고 했던가?”
“그래.”
“그 피닉스라는 놈들은 대체 뭐 하는 녀석들이래?”
“뜬구름 잡는 소리만 하더군. 이종족의 이상향을 만든다던가.”
“이종족들의 이상향? 카멜 산을 말하는 건가?”
“카멜 산과는 별개의 조직인 것 같아.”
피닉스의 조직원들이 가르시아 남매의 포로가 된 건 우연이었다.
가르시아 남매가 즉흥적으로 뛰어든 전장에 저들이 있었고, 저들의 행동거지가 수상하다 느껴 포로로 잡았다.
죽을 때까지 고문한 대가로 약간의 정보는 얻었지만 말 그대로 약간뿐이었다.
“그 피닉스라는 자들, 요즘 중립 지대 여기저기에서 튀어나오고 있지 않아?”
“그래, 일종의 비밀 결사인데 점점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 같아.”
“비밀 결사라.”
베일이 코웃음을 쳤다.
“카멜 산 놈들은 대체 뭘 하고 있지? 명색이 이종족의 중심이라는 녀석들이 이런 떨거지들 하나 관리 못 하다니.”
“간단한 문제가 아니야.”
“무슨 뜻이야?”
“피닉스가 어둠의 세력과 손을 잡았거나, 혹은 어둠의 세력 그 자체라는 말도 있으니까.”
어둠의 세력.
가르시아 남매에게도 낯선 존재는 아니었다.
확실히 어둠과 관련 있는 녀석도 한 명 알고 있었으니까.
“그러고 보니 한동안 킬리안을 못 봤군.”
마리안이 푸념했다.
“영악한 놈이야. 놈이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내야 처리하든 말든 할 텐데.”
“그 범죄자가 그렇게 위험한 녀석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그래. 중앙 정계의 어떤 거물 귀족보다도 놈이 더 위험할 수도 있어.”
베일은 놀랐다.
마리안은 정치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고, 귀족들의 힘을 과소평가하는 사람도 아니다.
그런 마리안이 일개 범죄자 따위를 중앙 정계의 귀족보다 위험한 존재로 평가하다니.
“왜 그렇게 놈을 고평가하는 거야?”
“놈은 똑똑하고, 또 제정신이 아니니까.”
“그게 전부야?”
“제정신인 녀석은 아무리 강해도 선을 넘으려 하진 않아. 불가피하게 넘으려 해도 고민을 하지. 멍청한 녀석은 종종 선을 넘지만, 멍청하기 때문에 한계가 있어. 하지만 똑똑하고 제정신이 아닌 놈이라면? 예측하는 것조차 어려워.”
베일도 수긍했다.
“그렇군. 나도 처음에는 놈을 이용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이젠 생각이 달라졌어. 마주칠 일이 없으니 놈이 무슨 짓을 하는지 알 수가 없어. 백작과 얼굴 붉힐 것을 각오하고 그냥 죽여 버리는 게 나을 것 같다니까.”
중립 지대에 도착하여 경고한 뒤 킬리안을 보지 못했다.
보지는 못했지만, 아예 연락을 끊지는 않았고, 종종 편지를 보내왔다.
편지 내용에 따르면 킬리안은 여전히 중립 지대를 다니며 자기 ‘사업’을 하는 모양이었다.
또 안소니 맥캘런 백작과도 연락을 주고받는 모양이었다.
가끔 백작이 ‘킬리안의 행동이 거슬려도 함부로 대하지 말라’는 연락을 보내오고는 했으니까.
백작을 킬리안을 이용해 가르시아 남매를 은근히 압박하려는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누나.”
“왜?”
“사울 왕자가 제르넬 요새로 갔다는 이야기는 들었지?”
“물론. 조나단 왕자도, 또 루시아 왕녀도 움직이고 있다던가.”
“그렇다면 우리도 상황이 변하기 전에 무언가 이뤄 낼 필요가 있을 것 같은데.”
베일의 말에 마리안은 자신이 만든 시체를 가리켰다.
“아무래도 저 피닉스라는 조직이 거슬려.”
“그래? 저들이 우리와 만난 건 어디까지나 우연이었잖아?”
“그렇지만 거슬려. 이종족의 이상향이라… 허튼소리 치고는 넘겨듣기가 어려워. 이 율렌 섬은 두 나라가 싸우기도 좁아. 어둠의 세력이니 이종족이니 하는 잡다한 것들이 끼어들게 할 수는 없지.”
베일은 마리안의 말뜻을 알아들었다.
“우리가 원하는 전장을 만들기 위해서라도 놈들을 가만 놔둘 수 없다?”
마리안은 그런 동생에게 웃으며 말했다.
“너도 조금은 똑똑해졌구나.”
“나도 생각이란 건 할 줄 알아.”
“그래야지. 네 말대로 오래잖아 전쟁은 다시 시작될 거다. 우리를 위해서라도 그렇게 되어야 해. 하지만 그 전쟁은 우리가 원치 않는 형태로 시작되고 또 나아가야 해. 방해하는 놈이 있다면 살려 둘 수 없지.”
가르시아 남매는 예전에도, 지금도 여전히 가멜다 왕국의 최강자였다.
하지만 십수 년의 평화가 가르시아 남매의 명성을 점점 퇴색시켰다.
예전의 명성을 되찾고 더 나아가 능가하는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전쟁을 다시 시작하고, 이번에야 말로 다르센 왕국을 멸망시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