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화
“누님이? 대체 무엇 때문에?”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초대한 것이 아니라서 말입니다.”
“이 요새로 오신데?”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멀지 않은 곳에 머무르며 이 요새와 주변 지역들의 정보를 모으고, 분석하고, 왕도로 보내시겠지요.”
루시아가 이 지역에 온다.
이유는 짐작이 갔다.
이 지역이 지켜 볼만한 가치가 있다는 뜻이다.
“곤란한데. 기껏 형님을 도와주려 했는데 누님이 이 일에 개입한다면 헛수고가 될지도 몰라.”
루시아의 정보력은 사울로서도 따라갈 수 없었고, 그 외에도 무서운 능력을 가지고 있기에 경계할 수밖에 없었다.
현재 왕위를 다투고 있는 실베스터나 카리스도 루시아의 냉철함과 영민함은 경계했다.
루시아가 왕위에 관심이 없는 것 같은 행보를 보이고 있기에 망정이지, 아니면 왕위 계승권 다툼은 3파전으로 전개되었을 것이다.
그런 루시아가 이번 일에 개입한다면 확실히 일은 좀 더 쉽게 풀릴 수 있다.
하지만 조나단의 존재감, 나아가 사울의 존재감까지 희미해질지 모른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왕녀 전하께서는 전하의 공도, 또 조나단 왕자님의 공도 빼앗으실 마음은 없을 겁니다.
“과연 그럴까?”
“제 말을 믿으십시오. 왕녀 전하께서는 동생분들의 공을 시기하거나 빼앗으실 분이 아닙니다.”
아르멜이 루시아를 변호하는 모습에 사울은 새삼 그의 진짜 주군이 누구인지 실감했다.
“나나 형님이 왕국이나 누님 본인에게 해를 끼치는 일을 할 게 아니라면 걱정하지 말라는 뜻인가?”
“그렇습니다, 전하.”
사울이 물었다.
“좋아, 그럼 누님의 존재는 형님께 언제 알릴 거지?”
“조만간 왕녀 전하께서 따로 연락을 하실 겁니다.”
“그럼 나도, 우리도 누님의 존재는 모른 척해요. 아는 척하는 것보다는 같이 모르는 척해 주는 게 나을 테니.”
“네, 전하.”
* * *
루시아 다리우스.
다르센 왕국의 현 왕녀 제비아 다리우스의 딸이자 2왕자 카리스 다리우스의 동생.
왕실에서 서열도 높고, 능력도 뛰어나기에 원한다면 왕위 계승 다툼에 뛰어들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루시아 왕녀는 왕위 계승권 다툼에 뛰어들지 않았다.
심지어 본인과 아버지도, 어머니도 같은 오라버니인 카리스 편도 들지 않았다.
사울은 루시아가 이렇게 말한 것을 들은 적 있었다.
‘내가 왜 왕위 다툼에 끼어들지 않냐고? 나는 왕국을 다스릴 사람은 아니니까.’
‘그렇다면 카리스 전하를 도와드리시지요. 친오라버니가 아니십니까.’
‘카리스 오라버니가 국왕감이라면, 도와줄 거야. 그렇지 않다면 실베스터 오라버니를 도울 수도 있어.’
사울은 지금까지도 루시아가 이렇게 이야기 한 진의를 알지 못했다.
진심으로 나라를 생각한 것인지 혹은 야심을 숨긴 것인지.
어쨌든 지금 루시아는 왕위 다툼보다는 나랏일에만 관심이 있어 보였다.
그중에서도 정보에 대한 일 말이다.
현재 루시아는 공식적으로 왕국 정보부 회색 그림자의 서열 3위다.
보통 젊은 왕족이 국가 조직의 높은 자리에 앉는 건 능력보다는 신분 덕분인 경우가 많다.
하지만 루시아는 달랐다.
듣기로 조직 안팎에서 루시아의 능력을 문제 삼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야말로 무시무시한 누님.
사울은 조나단의 부탁을 받고 그런 누님을 만나러 갔다.
‘루시아 누님이 페로 요새에 머무르고 있다지?’
‘네, 형님.’
‘누님이 근처까지 왔는데 모른 척할 수는 없지. 하지만 내가 자리를 비울 수도 없는 일 아니냐. 네가 나 대신 잠시 다녀오지 않겠느냐?’
‘네, 형님. 저도 루시아 누님을 뵙고 싶었으니까요.’
그렇게 요새를 떠난 사울 일행은 문제없이 페로 요새에 도착했다.
페로 요새는 왕국 정보부에서 운영하는 요새 중 한 곳으로서 규모는 작은 편이다.
하지만 인근 지역에 주둔하고 있는 부대도 있기에 왕녀가 머무는 데는 아무 문제 없었다.
“어서 오십시오, 전하.”
“누님은 잘 계신가?”
“네, 준비가 되는 대로 전하를 모셔 오라 하셨습니다.”
사울은 숙소 안내를 받은 뒤 옷을 갈아입고 루시아를 만나러 갔다.
“사울 왕자님께서 오셨습니다.”
“들여보내.”
집무실 문이 열렸다.
루시아는 책상에 앉아 여러 장의 문서를 비교하며 읽고 있었다.
커다란 책상 위에 쌓인 수많은 문서들은 루시아가 얼마나 많은 일을 하고 있는지 똑똑히 보여 주었다.
사울이 오기 전부터 수많은 문서를 검토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안경을 낀 루시아의 눈빛은 조금도 빛을 잃지 않았다.
그 냉철한 눈빛이 사울 쪽으로 옮겨졌다.
“오랜만이에요, 누님.”
“반가워. 거기 앉아.”
사울은 간단히 예를 표하곤 루시아 맞은편에 앉았다.
루시아는 사울이 자리에 앉기 무섭게 책상 한쪽에 빼놓은 문서 몇 장을 넘겨주었다.
“이게 무엇인가요?”
“읽어 봐.”
사울은 문서를 읽어 보았다.
몇 줄 읽기도 전에 사울은 문서의 정체를 알아챘다.
자신의 활동에 대해 상세히 요약한 문서들이었다.
처음 왕국 수도를 떠나 홉킨스 영지로 가고, 이후 중립 지대를 거쳐 제르넬 요새까지.
그동안 사울의 여정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또 사울이 세운 공들과 저지른 실수들도 빠짐없이 정리되어 있었다.
특히나 사울이 저지른 가장 큰 실수인 킬리안에게 당한 패배는 읽기만 해도 화가 날 만큼 세세하게 기록되었다.
내부에 정보원이 없고서야 이렇게까지 생생하고 자세하게 기록할 수 없을 것이었다.
역시 아르멜이 모든 것을 고해바친 것일까.
아니면 또 다른 내부 정보원이 존재하는 것일까.
궁금했지만 지금으로서는 알 도리가 없었다.
“…잘 읽었어요.”
“왕국 정보부, 왕실 역사가 등에게 넘길 자료야. 네게 이의가 없다면 그대로 보낼까 하는데.”
“솔직히 이의를 제기하고 싶은 대목도 있어요. 하지만 거짓된 부분이 없으니 할 말이 없군요.”
“그럼 그대로 보내지. 너무 걱정하지는 마. 정보부에서는 냉철하게 너에 대한 정보를 간직하겠지만, 역사가는 최대한 윤색을 해 줄 테니.”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말에 사울은 쓰게 웃었다
“조나단 형님도 누님께 안부를 전하라 했어요.”
“그래? 네가 보기에 조나단은 어때?”
“열심히 하고 계세요. 나쁘지 않은 결과를 만들어 내고 있고요.”
“그렇다면 다행이야. 지금 너희들이 있는 곳은 의미 없는 노력 같은 것을 용납할 만큼 평화로운 땅이 아니니까.”
루시아는 책상 위에 놓여 있던 서류 몇 장을 내밀었다.
“읽어 봐.”
이번에 받은 서류는 피닉스에 대한 것들이었다.
거의 다 사울이 아는 이야기였고, 특별히 새로운 정보는 없었다.
“피닉스에 대해서는 나와 누님이 아는 게 비슷한 것 같군요.”
“그자들에 대해 새로이 알아낸 건 없어?”
“새로운 걸 알아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어요.”
사울에게서 서류를 도로 넘겨받은 루시아가 작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요즘 섬 전체의 분위기가 심상찮게 돌아가는 건 알고 있지?”
“그렇지요. 중립 지대만 해도 대신전에서는 대신관이 돌아가셨고, 카멜 산도 시끄럽고, 가르시아 남매도 나타났지요. 게다가 피닉스까지.”
“중립 지대 만큼은 아니지만 우리 왕국과 가멜다 왕국 사이도 심상치 않아. 전쟁 여론이 다시 고개를 들고 있어.”
역시나 그럴 때가 되었는가.
6년 전쟁 이후 두 나라가 불안한 평화를 영위한 지 20년 가까운 시간이 지났다.
그동안 두 나라 모두 전력을 많이 회복했다.
잃은 병력도 회복했고, 군량과 기타 자원도 넉넉히 비축했으며 기타 전쟁 준비도 충실히 했다.
아마도 오랜 원한에서 비롯된 전쟁이 다시 시작될지 모른다.
지난 삼백 년 동안 그러했듯 두 나라 모두 지지부진하게 대치할 수도 혹은 두 나라 중 한 나라가 거꾸러지고 다른 나라가 율렌 섬을 통일할지도 모른다.
“삼백 년 전쟁이 다시 시작되는 것이로군요.”
진지한 사울의 표정에 루시아가 가볍게 웃었다.
“마치 삼백 년 전쟁을 겪어 본 적 있는 사람처럼 말을 하네?”
“…….”
실제로 사울은 전쟁을 직접 겪어 보았다.
그것도 삼백 년 전쟁 역사에 남을 만큼 치열했던 ‘6년 전쟁’의 한가운데 있었으니까.
물론 그 사실을 말할 수는 없었다.
“…책에서 많이 보았으니까요.”
“그래?”
사울은 어느새 루시아가 웃지 않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잠시 후 루시아의 입에서 예상치 못한 질문이 흘러나왔다.
“전쟁을 기대하는 거야?”
“뭐라고요?”
“전쟁을 기대하고 있느냐고 물었어.”
예상치 못한 질문에 사울은 순간 평정을 잃었다.
그 순간 자신이 무슨 표정을 지었을까.
스스로도 궁금했지만, 지금은 눈앞의 루시아를 상대하는 게 더 급했다.
“일어날 전쟁이라면, 이겨야 한다는 생각뿐이에요. 왕국을 위해서.”
절반만 진실이다.
전쟁에서 이겨야 한다고는 생각하지만 그 이유는 왕국을 위해서가 아니다.
자신이 살아남고 나아가 전생의 원한을 풀기 위해서다.
그런 사울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루시아가 말했다.
“너도 책과 실제 전장이 다르다는 것은 잘 알고 있겠지?”
“물론이에요.”
“그렇다면 한 가지 충고하지. 너는 분명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어. 하지만 뛰어난 능력을 가진 전쟁광만큼 위험한 건 없는 법. 내가 널 그런 위험 분자로 보는 일이 없도록 해 줘.”
뛰어난 능력을 가진 전쟁광.
사울도 그런 존재는 되고 싶지 않았다.
“충고 고마워요.”
“후훗.”
사울의 진심을 읽은 것인지 루시아의 눈빛이 조금은 따뜻해졌다.
“네가 여기에 올 줄은 알고 있었어. 만에 하나 네가 오지 않으면 내가 직접 제르넬 요새로 갈 생각이었지.”
“저를 만나러요?”
“그래. 지금도 내 눈과 귀, 그리고 손발이 되어 줄 사람은 있어. 하지만 동반자가 되어 줄 사람은 아직 찾지 못했지. 너라면 가능할 것 같은데.”
루시아의 동반자.
나쁜 제안은 아니다.
왕위 다툼이나 정치 싸움에 끼어드는 것보다는 루시아와 함께 일하는 게 사울의 적성에도 더 맞을 듯했다.
또 루시아는 자신이 인정하는 사람을 마구잡이로 대하는 부류도 아니다.
동반자가 제 몫을 해 준다면 그만큼 대접을 해 줄 것이다.
나쁘다기보다는 좋은 제안이다.
어쩌면 혼자 움직이거나 조나단 곁에 있는 것보다 루시아 곁에 있는 게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사울은 이렇게 말했다.
“미안해요, 누님.”
“나와 일하기 싫은 거야?”
“그럴 리가요. 누님과 일하는 건 영광이지요. 하지만 아직은 저 스스로 무언가를 해 보고 싶어요.”
“지금 넌 조나단과 같이 있잖아?”
“그렇지요. 제가 원해서 형님을 도와드리는 것이고, 그 일이 끝나면 떠날 거예요. 누님이 그 정도를 원한다면 이번 일을 마치고 누님을 도와드리지요.”
사울의 말에 루시아는 다시 웃었다.
하지만 얼굴로는 웃으면서도, 안경 아래의 눈빛은 다시 날카로워졌다.
“사울.”
“네, 누님.”
“자랑은 아니지만 나는 누군가의 진의를 파악하는 데 능숙하다고 생각해.”
“맞아요.”
“내가 접해 본 사람 중 속을 전혀 알 수 없는 사람은 딱 한 명뿐이야. 말 그대로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전혀 알 수 없는 사람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