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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했더니 무능한 적국 왕자였다-136화 (136/232)

136화

코볼트 족장은 골똘히 생각하다 고개를 저었다.

“우리와 만난 자들은 이름도, 얼굴도 숨기고 있었소. 다만 키 작은 드워프, 숨겼지만 크고 뾰족한 귀가 보이는 엘프는 보았소. 엘프와 키와 덩치가 비슷한 인간도 있었던 것 같고.”

“인간이라고?”

“확실친 않지만 그렇게 보였소.

아무래도 피닉스는 여러 종족의 집합인 모양이다.

그들 중 일부, 어쩌면 전원이 카멜 산 출신임을 고려하면 당연한 일이었다.

인간이 섞여 있다는 것 역시 가멜다 왕국과 연결점이 있거나 중립 지대의 인간을 포섭했다면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일이다.

일단 눈앞의 코볼트 족장이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사울은 준비한 이야기를 꺼냈다.

“너희는 모르겠지만 피닉스라는 자들은 이미 여기저기서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자들이다. 악의 조직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지.”

“동감이오.”

“형님과 나는 피닉스를 잡으려 한다. 그리고 그쪽은 그들에게 잡힌 동족을 구하고 싶어 하지. 서로 신뢰가 쌓인다면 힘을 합칠 수 있지 않겠는가?”

코볼트 족장이 긴 주둥이를 쓰다듬었다.

책에서 코볼트가 긴장할 때 취하는 행동이라고 적힌 것을 본 기억이 났다.

사울은 조나단에게 눈짓을 했다.

다시 주도권을 넘긴다는 신호였다.

조나단은 코볼트 족장이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준 뒤 천천히 말했다.

“분명히 말하지만 먼저 공격한 건 너희들이다. 우리에게 협조하지 않는다면 적으로 여길 수밖에.”

조나단은 코볼트 족장을 압박하는 것을 택했다.

지금으로서는 효과적인 전략이다.

실제로 코볼트 족장은 자신을 압박하는 조나단에게 할 말을 찾지 못하는 눈치였으니까.

한참 뒤에야 코볼트 족장이 입을 열었다.

“무엇을 원하시오?”

“간단하지. 충성을 원한다.”

“당신 개인에게 말이오? 아니면 당신의 왕국에 말이오?”

“둘 다이지.”

“당신 개인이나 당신의 왕국에 충성을 한다는 건 다른 인간 왕국을 적대한다는 뜻이 아니오. 그렇다면 당신이 나와 우리 부족, 나아가 다른 동족들을 지켜 줄 수 있소?”

“물론이다. 충성의 대가는 확실히 보장해 주겠다.”

듣고 있던 사울이 나섰다.

“형님.”

“왜 그러느냐?”

“이 자리에서 너무 많은 이야기를 할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일단은 간단한 사항에 대해서만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사울의 조언에 조나단이 손사래를 쳤다.

“아니다. 자신의 말을 책임질 수 있는 자와 직접 만났으니 제대로 이야기를 해야지.”

“…….”

사울은 슬슬 불안해졌다.

코볼트 족장이 책임질 수 있는 위치에 있듯, 조나단도 마찬가지다.

조나단이 이 자리에서 무언가 약속을 하고 지키지 못한다면 왕국의 위신을 깎이게 된다.

다행히 조나단에게는 매버릭이 있었다.

매버릭이 조나단에게 무어라 귓속말을 했다.

사울은 듣지 못했지만, 조나단의 눈빛이 변하는 건 보았다.

“그건 그런가.”

매버릭의 말을 수긍한 조나단이 말했다.

“충성의 대가는 내가 확실히 보장하겠다. 하지만 큰 대가에는 큰 책임이 따르는 법이며, 대가를 요구하기에 앞서 충성을 증명하는 게 먼저인 법.”

코볼트 족장은 조나단의 말을 알아들었다.

행동이 먼저고, 대가는 나중이라는 것이다.

코볼트 족장이 주둥이를 쓰다듬었다.

꽤나 동요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하지만 주도권은 조나단에게 있었다.

결국 코볼트 족장은 수긍했다.

“당신들에게 충성을 맹세하면 정말 우리의 안전을 책임져 줄 것이오?”

“물론이다. 행동으로 충성을 증명한다면 너희의 안전은 왕자인 내가 책임지겠다.”

“그럼 약속해 주시오. 그리고 약속의 증표를 남겨 주시오.”

“맹약서 같은 것을 작성하라는 말이냐?”

“그렇소. 우리가 간직할 수 있도록 증표로 남겨 주시오.”

확실히 눈앞의 족장은 코볼트 치고는 치밀했다.

입으로만 한 약속은 상황에 따라서 무시할 수도 있다.

하지만 맹약서든 계약서든 ‘물증’이 뚜렷하게 남은 약속은 무르기 어렵다.

그 당사자가 왕자처럼 세간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을 수 없는 신분이라면 더더욱.

‘확실히 코볼트 치고는 정말 영리한 녀석이군.’

사울은 그러면서 조나단의 대답을 기다렸다.

조나단은 잠시 생각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무엇을 원하는가?”

“우리 부족이 당신 왕국에 협조할 테니, 당신 왕국도 우리 부족의 안전을 위해 힘써 주시오.”

“내가 어떻게 도와주기를 원하는가?”

“우리 부족과 나를 따르는 다른 부족이 당신 왕국 영토의 좀 더 안전한 곳에서 보호받으며 살 수 있도록 해 주시오.”

코볼트 부족들을 조종하고 있는 피닉스가 독자적으로 움직이고 있는지, 혹은 가멜다 왕국이 배후에 있는지는 아직 알 수 없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몇몇 부족이 그들을 배신한다면, 그들 또한 보복할 가능성이 높다.

현재 코볼트 부족들이 있는 곳은 국경 지대나 중립 지대다.

어느 쪽이든 다르센 왕국의 보호를 받는 데는 한계가 있다.

그렇기에 좀 더 안전한 다르센 왕국 영토 깊숙한 곳에 새로이 둥지를 틀고 싶다는 말을 했을 것이다.

‘쉽지는 않은 일이야.’

사울은 조나단이 이 제안을 덥석 받아들이려 하면 즉각 말릴 생각이었다.

인간이 이종족을 노예로 부리던 시절은 오래전에 끝났지만, 여전히 이종족은 대부분의 인간 세상에서 차별받고 있었다.

홉킨스 가문 영지처럼 예외도 있지만, 흔한 사례가 아니기에 ‘예외’라고 불리는 것이다.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만 이런 자리에서 바로 결정을 내릴 일은 아니었다.

“전하…….”

매버릭이 다시 조나단에게 제안했다.

조나단은 고개를 끄덕이곤 말했다.

“좋다. 먼저 너희들이 우리를 위해 어디까지 할 수 있을지 알려 준다면 나 또한 네가 말한 것에 대해서 알아보겠다. 그리고 다시 만나 약조를 하고 증표를 남기겠다. 불만은 없겠지?”

“시간은 얼마나 걸리겠소?”

“한 달 정도?”

“한 달이라… 알겠소. 그 정도라면 어떻게 버텨 볼 수 있겠지. 하지만 우릴 감시하는 피닉스는 만만한 자들이 아니오. 그들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서라도 병사를 움직일 생각이오.”

“어떻게 말이냐?”

“요새를 직접 공격하지는 않겠소. 대신 요새를 공격할 것처럼 주변을 휘젓고 다니는 척만 하겠소. 혹시나 병사들이 명령을 어긴다면 내가 직접 처형할 것이니, 당신도 그들을 건드리지 말아 주시오.”

돌아가는 상황을 보고 있던 사울은 조나단에게 조언했다.

“형님, 저들에게 책임을 지우세요. 만일 약조를 하고 증표를 주기 전 저들의 실수로 일이 잘못되면 우리에게는 아무런 책임이 없다고.”

조나단도 이 말만은 수긍했고, 코볼트 족장에게 말했다.

“약조를 한다면, 그에 대해서는 확실히 왕족의 이름을 걸고 책임지겠다. 하지만 약조를 하기 전에 벌어지는 일은 내 책임이 아니다. 내 말뜻, 알아듣겠나?”

“…약조를 하기 전 피닉스에게 들킨다면 우릴 모른 척하겠다는 말이오?”

“들키지 않으면 되는 일 아닌가.”

코볼트 족장에게는 가혹한 조건일 수 있다.

하지만 조나단, 또 사울에게는 어쩔 수 없었다.

조나단이 섣불리 제안을 받는 바람에 가뜩이나 부담이 늘었으니 이 정도 안전장치는 필요했다.

코볼트 족장은 조나단과 사울, 매버릭까지 돌아본 뒤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좋아.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이야기하는 것으로 하지. 따로 할 말은 없나?”

“그렇소. 귀한 몸으로 여기까지 나와 주어서 감사하오. 조나단 왕자 그리고… 사울 왕자.”

사울은 자신을 바라보는 코볼트 족장의 눈빛에서 경계심을 느꼈다.

바보가 아니라면 자신에게 불리한 조언을 조나단에게 했다는 걸 모르지 않을 테니 당연한 일이었다.

사울은 모르는 척 웃으며 말했다.

“별말을. 나도 감사를 표한다, 족장.”

그렇게 코볼트 족장과 조나단의 회담은 큰 문제 없이 끝났다.

* * *

회담을 마치고 요새로 돌아오기까지 별다른 일은 없었다.

조나단은 회담에 대해 홀로 생각하기도 하고, 매버릭과 이야기를 주고받기도 했으며 사울과도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전반적으로 조나단은 회담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 코볼트 녀석 말을 다 믿을 수는 없지만, 당장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제 생각도 같아요, 형님.”

“그렇다면 이대로 진행해도 큰 문제는 없을 것 같구나. 어차피 급한 건 저들이고, 유리한 패를 쥔 건 우리니.”

“네, 하지만 그 코볼트 족장은 교활한 자 같았어요.”

“나도 그렇게 보았다. 그렇지만 방심하지 않고 철저히 대응하면 되겠지.”

이야기를 주고받다 보니 어느새 요새에 도착했다.

일단의 기사들이 조나단을 마중 나왔다.

“어서 오십시오, 전하!”

“그래, 요새에는 별일 없었나?”

“아무 문제 없습니다.”

“수고했다. 사울, 너도 피곤하겠지. 이만 들어가 쉬어라.”

“네, 형님.”

조금 피곤하기는 했지만, 사울은 곧바로 휴식을 취하지 않았다.

그 대신 부하들을 자신의 방에 불러 모았다.

카스텔, 아이나, 아르멜, 그레이까지.

속마음을 터놓을 분위기가 되자 사울은 푸념부터 했다.

“이번 일은 정말 조마조마했어.”

모인 사람들 중 유일하게 현장에 참여하지 못한 그레이가 물었다.

“전하, 무슨 일이 있으셨습니까?”

“형님 말이야. 코볼트 족장과 이야기를 하면서 큰일 저지르시는 것 아닌지 조마조마했어.”

사울에게 회담장에서의 일을 전해 들은 그레이가 눈살을 찌푸렸다.

“걱정은 했지만 조나단 왕자님이 그렇게까지…….”

“형님이 내 말을 어느 정도 들어주었기에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정말 골치 아팠을 거야. 정말 참모나 조언자 노릇도 쉬운 일이 아니군.”

사울의 말에 아르멜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정말 그렇습니다, 전하.”

“…내게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거야?”

“아닙니다, 전하.”

아르멜은 농담을 할 생각이 없어 보였고, 그건 사울도 마찬가지였다.

“아무튼 판이 커졌어. 코볼트 쪽에 일이 생기거나 그들이 딴 맘을 먹지 않는다면 결국 그 족장 쪽과 형님이 손을 잡는 방향으로 진행될 것 같아. 아이나의 생각은 어때요?”

아이나는 이종족 전문가인 홉킨스 가문의 영애답게 코볼트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대체로 코볼트들은 기회주의적이지만, 큰 위험을 감수하려 들지는 않는 성향입니다.”

“그래요, 대부분의 종족은 그렇겠지요. 하지만 그 코볼트 족장은 개중 영리한 녀석으로 보였어요.”

“네. 하지만 제가 보기에는 영리할지언정, 기본적인 코볼트의 성향과 크게 다른 것 같지는 않습니다. 기회주의적이고 교활해도 일국의 왕자에게 접근하여 이용한 뒤 배신할 정도의 음모를 꾸미고 실천할 것 같지는 않습니다.”

사울도 비슷하게 생각했다.

코볼트를 전적으로 믿어서는 안 되겠지만, 당장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도 않았으니까.

“아르멜.”

“네, 전하.”

“이번 일도 누님에게 알릴 거지?”

“물론입니다. 답변 또한 빨리 받을 수 있을 겁니다.”

“답변을 빨리 받는다? 어째서?”

“왕녀 전하는 현재 오아국을 순행 중이십니다. 듣기로 이 요새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한동안 머무르실 예정이랍니다.”

루시아 누님이 왕국 수도를 떠나 순행을 나왔다?

사울로서도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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