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화
“전하.”
굳은 표정으로 사울을 찾아온 아르멜의 말에 사울도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피닉스라고?”
“그렇습니다.”
심문을 받던 코볼트 간부 중 몇 명이 자백했다고 한다.
자신들을 모아 부대를 만들고, 요새 공격에 나선 자들 중 ‘피닉스’ 가 있다는 것을.
피닉스.
킬리안 비셔스가 이끄는 하얀 까마귀, 그리고 중립 지대의 이종족과 깊은 관련이 있는 조직.
정체불명의 어둠의 세력과 연결 고리일 수도 있고, 혹은 어둠의 세력 그 자체일 수도 있다.
그들이 얼마나 되며, 무엇을 추구하는지는 아직 모른다.
하지만 극히 수상하고 또 위험한 자들이라는 건 분명하다.
카멜 산에서도 그들을 쫓을 정도니까.
“피닉스라니, 설마 코볼트 놈들 입에서 그 단어가 나올 줄은 몰랐군.”
“어떡하실 겁니까?”
“이번 일은 형님이랑 협조할 생각이야. 형님께 우리가 아는 걸 좀 알려 드리고 체면도 세워 드렸으면 하는데.”
아르멜은 사울의 말뜻을 알아들었다.
“네, 전하. 바로 조나단 왕자님을 찾아뵙고 말씀 드리시지요.”
“그게 좋겠어.”
* * *
“피닉스라고?”
“네, 형님.”
사울은 피닉스에 대해 아는 대로 설명해 주었다.
사실인지 아닌지 불명확한 부분은 빼고, 분명히 드러난 부분만 이야기했다.
그 이야기만으로도 조나단은 긴장을 감추지 못했다.
“너와 카멜 산 양쪽에서 경계하는 정체불명의 조직이 이 요새를 공격했다?”
“그럴 가능성이 높아 보여요. 무엇보다 피닉스 이야기는 그 코볼트들이 먼저 꺼냈다니까요.”
“그건 그렇군.”
심문을 하다 보면 유도된 답변이 나올 수 있다.
특히 심문이 가혹할수록, 심문자가 유도한 대로 답변이 나오기 쉽다.
하지만 코볼트들은 심문관에게 어떤 정보도 듣지 못한 가운데, 자기들이 먼저 ‘피닉스’를 언급했다.
심문관들이 얻어 낸 정보는 이랬다.
‘피닉스라는 조직이 여러 코볼트 부족의 상층부를 제압하고 그 힘을 바탕으로 대규모 부대를 만들어 공격했다’
‘코볼트를 제압한 조직 ’피닉스‘는 요새를 점령하면 부족의 자유, 그리고 인질로 잡힌 코볼트 부족장 등의 자유를 약속했다’
조나단이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 피닉스란 놈들은 중립 지대에서 활동하는 게 아니었나?”
“맞아요, 형님.”
“그렇다면 대체 왜 그놈들이 이 요새를 공격한 것이지?”
“코볼트 무리는 협박을 당해서 쳐들어왔어요. 그런데 협박한 자들을 잡지 못했으니 지금은 알 수 없지요.”
생각하던 조나단이 매버릭에게 물었다.
“네 생각은 어떤가?”
“무언가 결론을 내리기에는 정보가 너무 부족합니다. 한 가지 확실한 건 그 피닉스라는 자들이 이 요새 공격을 명령했다면 요새의 적, 전하의 적, 나아가 다르센 왕국의 적이라는 것이겠지요.”
“그렇군.”
조나단은 다시 생각에 잠겼다.
이런저런 생각이 많은 가운데 얼른 결론을 내리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러자 매버릭이 제안했다.
“전하, 중립 지대에 대해 잘 아시는 건 사울 왕자님입니다. 사울 왕자님을 중립 지대로 보내 따로 조사를 맡기시는 게 어떻습니까?”
“사울이?”
“네, 전하께서는 이곳에서 놈들을 조사하고, 사울 왕자님은 중립 지대에서 조사한다면 성과가 있을 겁니다.”
그럴듯한 의견이었다.
하지만 사울은 매버릭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기로 했다.
“내 생각은 달라.”
“그렇습니까?”
“그대의 말처럼 나는 중립 지대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고, 피닉스라는 자들과도 몇 번 맞닥뜨려 보았어. 하지만 아직 꼬리를 잡지 못했지. 이왕 이 요새까지 왔으니, 여기에서 형님과 함께 놈들을 쫓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데.”
“으음, 사울 말도 일리가 있군.”
다시 고민하는 조나단에게 사울이 말했다.
“형님, 제가 도와드릴 테니 형님이 직접 놈들의 꼬리를 잡는 게 어떨까요?”
“내가 직접 말이냐?”
“네, 형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피닉스라는 놈들은 왕국의 적입니다. 독립 세력인지, 가멜다 왕국이나 다른 불온한 자들이 배후에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왕국을 적대하고 있다는 건 분명합니다. 아마 루시아 누님도, 어쩌면 아버님도 그자들에 대해 알고 계실 겁니다. 그러니 형님이 나서 놈들을 잡는다면 크게 의미 있는 일일 겁니다.”
“그런가?”
귀가 솔깃해진 조나단이 매버릭에게 다시 물었다.
“내 동생은 이렇게 말하는데, 네 생각은 어떤가?”
“사울 전하의 말씀도 일리는 있습니다. 저는 사울 전하께서 따로 중립 지대에서 움직이시는 게 더 효율적일 것이라 생각합니다만.”
마침내 조나단이 결정을 내렸다.
“좋다, 사울. 잠시 더 나를 도와주려무나.”
“물론입니다, 형님.”
이번에는 진심으로 조나단을 도울 생각이다.
빚도 만들어 두고, 형제간의 사이도 더 좋아진다면 그야말로 일석이조이니까.
매버릭도 자신의 말에 크게 반대하지는 않았다.
순간적으로 사울에게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낼 뿐.
* * *
사울은 조나단과 함께 포로로 붙잡힌 코볼트들을 만났다.
코볼트 포로들은 크게 가혹한 처분을 당하지는 않았다.
고문 같은 것을 할 필요도 없이 정보를 술술 불었다고 했으니까.
덕분에 감옥에 갇혀 있다는 것만 제외하면 대접이 나쁘지는 않았다.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주는 건 물론 다친 곳도 치료해 주었다.
“보아하니 아주 대접을 잘 받았은 것 같군.”
조나단은 코볼트 포로를 비꼰 뒤 대동한 통역관에게 말했다.
“내가 누구인지 저놈들에게 알려 줘라.”
“네, 전하.”
통역관을 통해 조나단의 신분을 안 코볼트 포로들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다르센 왕국의 왕자’가 얼마나 높은 신분인지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저놈들에게 피닉스에 대해 물어봐라.”
코볼트 포로들은 심문관에게 했던 말과 비슷하게 말했다.
“자기들의 부족을 공격하여 제압한 놈들이 인질로 붙잡은 족장과 부족 전체의 자유를 대가로 요새를 점령하라 시켰답니다.”
“그 이야기는 이미 들었다. 그 피닉스라는 놈들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물어봐라.”
“네, 전하. …얼굴을 가리고 있어서 무슨 종족인지는 모른답니다.”
“놈들에 대해 아는 게 없단 말이냐?”
“여러 명이고 남녀가 섞여 있었답니다.”
“그걸 말이라고 하나? 이 미개한 코볼트 녀석들이…….”
조나단의 표정이 험악해지자 따라온 매버릭이 말렸다.
“전하, 저놈들 모두 코볼트 부족에서 제법 지위가 높은 자들입니다. 포로로 쓸 가치가 있을 겁니다.”
“알고 있다. 그래서 저렇게 잘 먹여 주고 재워 주는 것 아니냐.”
보고 있던 사울이 나섰다.
“선생님께 한번 맡겨 볼까요?”
“카스텔에게?”
조나단의 눈빛을 받은 카스텔이 말했다.
“허락하신다면 제가 확인해 보겠습니다.”
“포로를 죽이진 않겠지?”
“물론입니다.”
“그럼 해 봐라.”
카스텔은 이전에 몇 번 했던 것처럼 코볼트 포로들의 정신을 건드렸다.
압도적인 카스텔의 마력 앞에 코볼트 포로들은 속절없이 제압당해 자신들이 아는 모든 것을 토해 냈다.
하지만 통역관을 통해 확인해 본 결과, 정보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정말 아는 게 없나보군.”
조나단은 철창 너머의 코볼트 포로들을 노려보며 말했다.
“생각 같아서는 저놈들 부족을 모조리 쓸어버리고 싶지만… 그건 곤란하겠지?”
“네, 전하. 요새를 공격받아 명분은 있지만, 지나치게 움직이면 중립 지대나 가멜다 왕국 쪽에서 우릴 크게 경계할 겁니다. 거기에다 이쪽에서 적극적인 공세를 펼치기에는 요새의 전력도 부족합니다.”
조나단은 속을 끓이면서도 매버릭의 조언을 받아들였다.
사울이 보기에 정확한 조언이었다.
하지만 참는 것만으로 해결될 일은 아니다.
코볼트 부족을 공격할 수도 없고, 가만히 있을 수도 없다면 방법은 하나뿐 아닌가.
“형님, 코볼트 부족과 협상을 해 보는 게 어떨까요?”
“협상?”
“네, 우리가 지위가 있는 코볼트를 많이 사로잡았으니 다급한 건 저쪽일 겁니다. 분명 무언가 제안을 해 올 것이고, 그것을 지켜보면 정보를 더 얻을 수 있지 않을까요?”
“그건 그렇다만, 그러려면 코볼트를 만나야 하지 않겠느냐.”
“그래야겠지요.”
“그렇다면 아무래도 내가 직접 놈들을 만나야 할 것인데…….”
사울도 코볼트와 협상을 하려면 조나단이 직접 그들과 만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조나단에게 공을 세우게 하려는 게 지금 사울의 목적이기도 했으니까.
문제는 조나단에게 그럴 만한 능력이 있는가이다.
‘형님에게 능력이 있다면 다행이지만 없다면 내가 도와줄 수밖에.’
사울은 조나단의 능력을 시험할 겸 질문을 던져 보았다.
“형님, 코볼트와 만나야 한다면, 어떻게 만나실 겁니까?”
“그야… 우리가 전투에서 이겼고 포로도 데리고 있으니 놈들을 불러야지. 놈들의 신변을 보장해 주는 대신 협상을 하러 오라고.”
이는 사울과 생각이 같았다.
사울은 속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게 좋겠습니다.”
“좋아, 그럼 포로 한 놈에게 우리 뜻을 전해서 놈들에게 돌려보내지.”
심문 과정에서 코볼트의 신분은 대략 파악되었다.
곧 포로 중 가장 지위가 낮은 녀석이 감옥에서 나왔다.
“우리의 힘은 익히 알았을 것이다. 내가 마음만 먹으면 너희들의 부족까지 싹 쓸어버리는 건 일도 아니다. 하지만 전쟁보다는 평화를 원하기에 포로들도 죽이지 않았고, 널 돌려보내 주는 것이다. 돌아가서 우리 뜻을 전해라. 그리고 어떤 답변이든 우리에게 보내라. 만일 답변 없이 시간을 끈다면 잡힌 포로들의 안위는 보장할 수 없다.”
통역관을 통해 조나단의 말을 전해 들은 포로가 겁먹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코볼트 포로는 요새를 나섰다.
“저 멍청한 코볼트 녀석이 우리 말을 제대로 전할지 모르겠군.”
성문 위에서 떠난 코볼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조나단이 중얼거렸다.
코볼트는 언어는 있어도 문자는 없다.
그 때문에 조나단의 뜻도 편지가 아닌 말로 전달할 수밖에 없었다.
저 포로 녀석이 제대로 조나단의 뜻을 전달할 것인가.
혹시 전달에 실수가 있으면 일이 꼬일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른 방법이 없었다.
아직 코볼트 부족에 대해 아는 것은 너무 적다.
그런 코볼트 부족에 아군을 함부로 보낼 수는 없었다.
* * *
며칠 후.
코볼트 사절이 요새에 찾아왔다.
“요새의 우두머리를 뵙고 싶소!”
놀랍게도 이번에 찾아온 코볼트 사절은 어눌하게나마 인간의 언어로 말을 걸었다.
코볼트 사절은 곧바로 조나단, 그리고 사울이 있는 요새 접견실로 안내되었다.
“…….”
접견실의 가장 윗자리에 조나단이, 그리고 그 아랫자리에 사울이 앉았다.
조나단의 충복인 매버릭은 물론 카스텔을 비롯한 사울의 부하들도 함께 자리했다.
그리고 코볼트 사절이 모습을 드러냈다.
코볼트치고 꽤 잘 차려입은 사절은 먼저 조나단에게 고개를 숙였다.
왕국의 기준으로 보면 예의를 차리는 게 미흡했지만, 조나단은 대범하게 넘어갔다.
“네가 코볼트의 사절인가?”
“그렇소.”
“지금 네 앞에 있는 게 누군지 아는가?”
“이 요새의 우두머리가 아니시오?”
“그렇다. 하지만 내가 누구인지 정확히는 모르는 모양이군. 나는 다르센 왕국의 4왕자, 조나단 다리우스다. 그리고 여긴 내 동생인 사울 다리우스지.”
개를 닮은 얼굴을 한 코볼트 사절의 두 눈이 놀라움으로 물들었다.
“당신들이… 인간 왕국의 왕자라는 말이오?”
“그렇다. 너희들은 단순히 왕국의 요새를 공격한 게 아니라, 나 조나단이 지키고 있는 요새를 공격한 것이다. 그게 무엇을 뜻하는지는 잘 알겠지.”
코볼트 사절은 길쭉한 주둥이를 만지작거렸다.
꽤나 동요한 게 분명했다.
그 모습을 본 조나단이 밀어붙였다.
“포로들에게서 대충 이야기는 들었다. 너희들의 행동은 괘씸하지만, 그럴 만한 사정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어떤가? 피닉스라는 정체불명의 놈들을 믿는 것보다는 위대한 다르센 왕국을 믿는 것이?”
“그건 제가 대답할 수 없는 문제요.”
“그럼 너는 무슨 이야기를 하러 왔나?”
“포로들이 살아 있는지 알고 싶소. 그리고 저희 족장님께서 이 요새의 우두머리를 만나고 싶어 하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