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중립 지대에는 미개척지가 많았고, 그만큼 흉악한 몬스터도 많았다.
하지만 아무리 험준한 미개척지도, 또 흉악한 몬스터도 가르시아 남매에게는 장난감에 불과했다.
사울과 협의를 맺은 가르시아 남매는 일단 협의를 지켰다.
사울에게서 넘겨받은 정보를 바탕으로 중립 지대를 쓸고 다녔다.
대신전도, 카멜 산도 그런 가르시아 남매를 제지하지 못했다.
미개척지를 조사하고, 흉악한 몬스터를 토벌하여 중립 지대의 모두에게 보탬이 되고 싶다는 명분을 댄 덕분이었다.
물론 가르시아 남매가 내건 명분을 진지하게 믿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가르시아 남매가 당장 명분에서 벗어난 행동은 하지 않았기에 이견을 제기하지도 못 했다.
가르시아 남매에게도 의미 없는 시간은 아니었다.
전투에 굶주린 베일은 마음껏 날뛰며 자신을 다스릴 수 있었고 그 와중에 얻은 건 마리아가 적절히 관리하고 분배했으니까.
덕분에 가르시아 남매가 중립 지대까지 가서 쓸데없는 짓을 한다는 소문이 퍼지는 건 막을 수 있었다.
오늘의 ‘사냥’은 베일 혼자 다녀왔다.
수십 마리는 되는 강력한 몬스터 무리를 처리하는 임무.
보통 군대가 투입되는 일이었지만, 베일이라면 혼자서도 충분했다.
“다녀왔어.”
갑옷을 피로 물들인 베일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베일이 몬스터를 사냥할 때, 마리안은 책상에서 해야 할 일들을 처리했다.
베일이 가장 싫어하는 게 ‘종이에 적힌 시시콜콜한 글을 살펴보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웬만하면 마리안 선에서 모든 것을 처리했다.
하지만 오늘은 마리안에게 의논 상대가 필요했다.
“베일.”
“무슨 일이야?”
“킬리안이 사울 왕자를 불태워 죽일 뻔했어.”
이는 산전수전 다 겪은 베일에게도 놀라운 소식이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들어온 정보에 따르면 사울 왕자와 카멜 산의 병력이 함께 킬리안의 사업 현장을 덮쳤다는 데 미리 대비하고 있던 킬리안이 주변을 불바다로 만들었고… 사울 왕자는 간신히 목숨만 건지고 달아났다고 해.”
“그래?”
잠시 생각하던 베일이 물었다.
“킬리안이 얌전히 지내라는 우리 명령을 무시한 건가?”
“그건 아닌 것 같아. 놈 입장에서는 그냥 사업을 했을 뿐인데 사울 왕자가 방해했다. 그래서 불바다로 만들었다. 뭐 이런 이야기인 것 같아.”
“그럼 어떻게 하지? 놈의 목을 베어야 하나?”
“생각 중이야. 대놓고 우리 명령을 어긴 거라면 목을 베어야겠지만, 재수 없이 적과 마주쳐 한바탕했다고 목을 베는 건 가혹한 처사이니까.”
“그건 그래. 솔직히 나도 그놈이 그렇게 싫은 건 아니야.”
“문제는 이 일 때문에 카멜 산에서 본격적으로 킬리안을 쫓을 것이란 점이야.”
카멜 산이 킬리안을 쫓는다.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 지 베일도 알아들었다.
“대족장이 나설 것이라 생각하는 거야?”
“직접 움직이진 않을 거야. 하지만 명령은 내리겠지. 동족을 그토록 끔찍이 아낀다는 대족장이 수많은 동족들이 불구덩이에서 잿더미가 되었다는 데 가만히 있겠어?”
“그럼 지금 우리가 놈과 만나는 것만으로도 카멜 산에서 싫어하겠군.”
“맞아, 킬리안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모양이야.”
마리안이 편지를 내밀었다.
“이건?”
“킬리안의 부하라는 놈이 가져왔어.”
베일은 편지를 읽어 보았다.
내용은 간단했다.
사울 왕자와 문제가 생겼고, 그 때문에 당분간 독자적으로 활동하겠다는 것이었다.
“영악한 놈.”
“정말 영악한 놈이야. 우리가 놈을 죽이려 한다면 놈은 사전에 눈치채고 귀신같이 숨어 버릴 거야. 미쳤지만 똑똑하고, 자길 챙길 줄 아는 놈이니까.”
“이제 어떡하지?”
“최악의 경우라면 놈이 붙잡힌 상황에서 우리와의 관계를 샅샅이 부는 것이겠지. 하지만 그렇게 되진 않을 거야. 설령 그렇게 된다 해도 놈과 우리의 관계를 증명할 증거가 없으니 얼마든지 부인할 수 있고.”
“맞아. 또 우린 백작과도 한 배를 탔잖아?”
“그래, 킬리안과의 관계 때문에 우리가 수렁에 빠진다면 백작 역시 수렁에 빠지게 되어 있지. 최악의 경우는 일어나지 않을 것 같아.”
“그럼 나는 신경 끄고 하던 대로 계속 움직이면 되는 건가?”
베일의 질문에 마리안은 얼른 대답하지 않았다.
“누나?”
“생각 중이야.”
“무슨 생각?”
“대신전에서는 대신관이 죽었고, 사울 왕자는 킬리안을 잘못 건드렸다 타 죽을 뻔했어. 이에 분노한 대족장 세네카는 킬리안을 추격할 테고…….”
“그래서?”
“거물들도 많은데, 크고 작은 일들이 계속 생기고 있어.”
베일도 여기까지 말했는데 못 알아들을 만큼 둔하지는 않았다.
거물도 많고 크고 작은 일이 계속 생기고 있다.
이는 율렌 섬 모두의 관심이 이 중립 지대로 집중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럼 어떻게 하지?”
“일단은 하던 대로 계속 움직이자. 하지만 조만간 무언가 변화가 일어날 거야. 그 점을 기억해 둬.”
“그러지.”
* * *
대신관 콜리타의 장례식이 끝나고도 며칠이 지났다.
사울과 카멜 산의 사절은 장례식의 모든 과정에 참석했다.
또한 다르센 왕국과 가멜다 왕국에서 따로 조의 사절이 찾아왔다.
그렇게 장례식이 끝난 가운데, 대신전에 자그마한 변화가 있었다.
신관 데이빗이 대신전을 잠시 떠나기로 한 것이다.
“제가 아미스 신관님께 직접 소식을 전하기로 했어요.”
“그렇군. 조심해서 다녀와.”
“네, 전하도 조심하세요.”
잠시 사울과 함께했던 데이빗은 대신전을, 나아가 율렌 섬을 잠시 떠났다.
아미스 신관이 대신전에 돌아올 때 함께 돌아올 것이라던가.
짦아도 몇 달은 걸릴 것이다.
그렇게 데이빗과 헤어진 사울은 며칠 동안 뒤숭숭한 분위기 속에서 시간을 보냈다.
바로 카멜 산에 돌아갈지 아니면, 당분간 대신전에 머물러야 할지 선택을 하기 어려웠다.
그 대답은 뜻밖의 상대에게서 나왔다.
콜리타의 장례식이 끝나고 열흘 뒤의 일이었다.
“왕녀 전하께서 편지를 보내셨습니다.”
아르멜이 봉인된 편지를 전달했다.
다르센 왕실에 왕녀가 몇 명 있었지만, 지금 사울에게 편지를 보낼 왕녀는 한 명뿐이다.
1왕녀 루시아 다리우스.
왕국 정보부에서 실력만으로 높은 지위에 올라간, 명실상부한 왕국 정보계의 거성이 된 누님.
사울은 봉인된 편지를 뜯어 읽었다.
짧은 편지였지만, 꽤 놀라운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네 형 조나단이 중립 지대 인근의 왕국령과 국경 쪽의 일을 맡기로 했다. 조나단은 중립 지대가 아닌 왕국령에서 머무르겠지만, 네가 머무르고 있는 중립 지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을 것이다. 앞으로 형제가 힘을 합쳐 왕국을 위해 일하도록 해라.’
조나단 다리우스.
다르센 왕국의 4왕자이자 사울의 형이며, 사울처럼 후궁 소생의 왕자였다.
어릴 땐 관계가 썩 나쁘지 않았지만 이후 서로 바빠지며 자연스럽게 사이도 조금 어색해졌다.
그런 조나단이 이곳에 온다는 건 놀랄 만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또 사울에게 신경 쓰이는 내용이 있었다.
‘네가 겪은 일에 대해서 들었다. 한 번 실패는 누구나 겪는 일이지만, 두 번의 실패를 반복하는 일은 없도록 해라. 왕실을 노리는 자들은 나라 밖에만 있는 게 아니라 안에도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라.’
사울은 누님의 충고에 쓴웃음을 지었다.
“전하, 무슨 내용입니까?”
아르멜의 질문에 사울은 대답 대신 말했다.
“선생님과 아이나를 불러. 모두 함께 의논을 해야 될 것 같아. 아, 그레이도.”
“그레이 씨도 말입니까?”
“왕실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아서.”
“알겠습니다.”
곧 사울의 방에 늘 모이는 멤버들, 그리고 그레이까지 모였다.
모처럼 의논 자리에 초청받은 그레이는 기쁨보다는 불안한 표정이 역력했다.
“전하, 무슨 일로 저까지 부르셨습니까?”
그레이의 질문에 사울은 입을 열었다.
“모두들 알겠지만, 누님에게서 편지가 왔어요. 다른 이야기는 특별한 게 없었는데. 한 가지가 마음에 걸려서요. 곧 조나단 다리우스 왕자, 내 형님이 인근 지역으로 파견된다고 해요.”
사울의 말에 모두들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정보에 밝은 아르멜도, 왕실 사정에 정통한 그레이도 예상치 못한 표정이었다.
“조나단 왕자님이 말입니까?”
“그래. 그레이, 솔직히 나는 요즘 형님 소식을 별로 못 들었어. 혹시 따로 이야기를 들은 게 있어?”
“으음. 솔직히 저도 많이 들은 건 없습니다. 분명 왕국 기사단에서 자신의 부대를 이끌고 계시지 않습니까? 하얀 매 기사단 말입니다.”
“그래. 누님의 편지에 특별한 말이 없는 것을 보니 여전히 하얀 매 기사단을 이끌고 계실 거야. 아마 이번에 파견되는 것도 하얀 매 기사단장의 자격으로 기사단과 함께 오는 것이겠지.”
하얀 매 기사단은 수백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유서 깊은 기사단이다.
역사가 깊고 왕실 인사가 단장을 맡는다는 점에서 가벼이 볼 수는 없지만, 왕국 최고의 명문 기사단은 아니었다.
명성이나 실력으로 따지면 중간 정도의 위치랄까.
하지만 왕자가 자신의 기사단을 이끌고 이쪽으로 온다는 건 가벼운 일이 아니다.
다르센 왕국 차원에서 중립 지대 쪽에 세력을 뻗치려는 행동으로 볼 수 있었으니까.
이를 알게 된 대신전과 카멜 산, 그리고 가멜다 왕국은 어떻게 나올 것인가.
“누님의 편지에 따르면 형님은 중립 지대보다는 인근 국경 지대나 왕국령 관리 일을 할 것 같아.”
“그렇습니까. 하지만 중립 지대에서도, 가멜다 왕국에서도 다르게 생각할 겁니다. 왕자가 자신의 기사단과 함께 찾아오는 것 아닙니까. 무언가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고 의심을 하겠지요.”
아르멜의 지적에 사울도 동의했다.
“당연하지. 나라도 가멜다 왕국의 왕자가 기사단을 이끌고 인근 지역에 주둔하면 경계할 거야. 그건 대신전과 카멜 산 그리고 가멜다 왕국도 마찬가지겠지. 내가 이곳에 머무르는 것만으로도 신경이 쓰일 텐데 또 다른 왕자가 기사단까지 이끌고 근방에 주둔한다? 쉽게 생각할 일이 아니야.”
듣고 있던 아이나가 물었다.
“대체 무슨 이유로 조나단 왕자님이 오시는 건가요?”
“자세한 이유는 모르겠어요. 누님은 이번에 내가 당한 일을 알고 있는 눈치지만, 그 일 때문에 형님이 움직였을 것 같지는 않아요. 형님이 직접 움직였다는 건 아바마마께서 허락하셨다는 뜻이니 무언가 이유가 있겠지만…….”
사울이 기억하기로 조나단은 그렇게 똑똑한 사람이 아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어리석어 보여도 실제로는 영민한 사람도 있지만, 조나단은 그렇지 않았다.
멍청하거나 어리석다는 건 아니다.
굳이 말하자면 머리를 쓰는 것보다 몸을 쓰는 것을 좀 더 선호하는 사람이랄까.
머리를 덜 쓴다는 건 그만큼 잔머리를 굴리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래서 사울은 조나단과 사이가 어색한 지금까지도 그를 싫어하지 않았다.
조나단 쪽에서도 자신을 싫어하지 않는 눈치였고 말이다.
하지만 조나단이 자신이 이끄는 기사단과 함께 이 지역에 파견 나온다는 건 이야기가 다르다.
왜 하필 사울이 기반을 다지고 있던 중립 지대 근처로 온다는 말인가.
조나단이 사울을 대신하여 오는 건 아니다.
루시아 누님의 편지에도 조나단의 임무는 중립 지대가 아닌 국경 및 그 주변을 관리하는 것이라 적혀 있었다.
사울이 중립 지대에서 활동하고, 조나단은 왕국 영토 안에서 국경과 그 주변을 관리한다고 가정하면 역할이 겹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겹칠 수도 있다는 게 문제다.
“조나단 왕자님도 전하와 비슷한 목적을 갖고 오시는 게 아니겠습니까?”
아르멜의 말에 사울이 되물었다.
“나와 비슷한 목적이라고?”
“네. 경험을 쌓는 것 말입니다.”
“그럴 수도 있지. 하지만 경험을 쌓으려면 다른 곳도 많잖아. 굳이 이곳에 형님이 직접 온다는 건 그 이상의 이유가 있다는 뜻이야.”
“그 이상의 이유라 하심은…….”
“최악의 경우가 아니길 바랄 뿐이야.”
이번 실패가 누님, 나아가 아바마마의 귀에 들어가서 그들이 사울에 대한 신뢰를 잃었다는 것이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경우다.
그렇다면 조나단의 파견은 사울을 대체한다는 의미고, 지금껏 사울이 중립 지대에서 한 모든 일 역시 백지가 되었다는 것을 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