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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했더니 무능한 적국 왕자였다-124화 (124/232)

124화

카멜 산에 돌아온 사울은 조용히 세네카를 찾아갔다.

이번 전투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기 전부터 세네카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조용히 돌아온 사울의 모습에 상황을 짐작했거나, 혹은 미리 보고를 받은 모양이었다.

사울은 그런 세네카에게 자신이 겪었던 일들을 설명했다.

현장에는 세네카의 호위대장인 모데아도 있었고, 다른 엘프 병사들도 있었다.

속이거나 사실을 왜곡하는 건 아무 의미가 없다.

사울은 담담히 자신의 겪은 일들을 정직하게 읊었다.

다 들은 세네카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큰 피해가 나왔다는 말입니까.”

“죄송합니다. 모두 저의 불찰입니다.”

세네카는 잠시 말이 없었다.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한숨을 내쉬는 세네카의 볼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리는 게 보였다.

사울은 적잖이 놀랐다.

물론 좋지 않은 소식이며, 나아가 슬픈 소식이다.

전투에서 패배했을 뿐만 아니라 희생자도 적지 않게 나왔으니까.

그런데 카멜 산의 우두머리가 말단 병사들의 죽음에 눈물을 흘리고 있다.

수천수만의 희생자가 나온 것도 아니고 수십 명의 희생에 눈물을 흘릴 줄이야.

이건 사울도 예상치 못했다.

예상외로 극적인 행동이라 세네카가 자신을 압박하기 위해 연기를 하는 게 아니냐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분명 세네카는 진심으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죽은 동족들을 생각하며 가슴이 찢어져라 슬퍼하고 있었다.

사실상 ‘군주’와 다름없는 위치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저게 대족장 세네카의 진심인가.’

사울은 세네카가 매사에 소극적인 이유를 확실히 깨달았다.

율렌 섬의 모든 이종족이 어른으로 모시는 위치에 있는 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번의 패전과 병사들의 죽음에 눈물까지 흘리며 슬퍼한다.

굉장히 따뜻하지만, 동시에 지나치게 감정적인 면모가 아닌가.

슬픈 일이라 해도 손님 앞에서 눈물까지 보일 정도라니.

저렇게 동족에게 따뜻한 인물이라면 동족의 희생이 확실한 일은 아무것도 못 할 것이다.

희생을 각오해야 하는 일이라도 크게 주저할 것이고.

사울은 그만큼 소중한 세네카의 동족을 여럿 희생시켰다.

절대로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었다.

사울은 다시 한번 사죄했다.

“죄송합니다. 모두 제 책임입니다.”

“......”

시간이 지난 뒤에야 세네카는 눈물을 닦으며 입을 열었다.

“모든 게 킬리안 비셔스의 짓이라고요?”

“네, 대족장.”

“저도 그자에 대해서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두 왕국은 물론 이 중립 지대와 카멜 산에도 독을 뿌리고 있지요. 거기에다 이번에는 수많은 동족을 죽이다니…….”

세네카의 손이 떨리고 눈이 번득였다.

손목 아래로 뼈만 남은 손이 떨리는 광경은 그 자체로도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거기에다 세네카의 눈빛에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살기가 맴돌고 있었다.

이 자리에 킬리안이 있었다면 절대로 살아남지 못했으리라.

하지만 이 자리에 킬리안은 없고, 그에게 당한 사울만이 있다.

“책임을 질 수 있다면 최대한 지겠습니다.”

“책임이라고 하셨습니까.”

“네.”

사울을 바라보던 세네카가 조용히 물었다.

“혹시 죽은 자를 살리는 방법을 알고 계십니까?”

“네? 그야…….”

“불경한 사령술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죽은 동족들을 살아 있던 모습 그대로 육체와 영혼을 불러올 수 있으십니까?”

“…불가능합니다.”

“맞습니다. 전하도, 저도, 세상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한 번 죽은 자는 절대로 돌아오지 않고, 죽은 자에 대한 책임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군가 생명을 잃는 데 책임이 있는 자는 절대로 그 책임을 제대로 짊어질 수 없습니다. 자신의 목숨을 내놓는다 해도 말입니다.”

“…….”

“이번 일이 전하만의 책임은 아닐 것입니다. 가장 큰 책임은 킬리안에게 있을 것이며, 전하와 함께 갔던 호위대장이나 다른 동족들도 책임이 있을 겁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을 허락한 저 역시 전하 못지않게 책임이 있습니다.”

“죄송합니다.”

“제게 죄송해하실 일이 아닙니다. 저 또한 전하와 같은 입장일 뿐이니. 하지만 죽은 자들을 기억하고, 그 가족들을 살펴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그 외에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그런 사울을 바라보던 세네카가 조용히 말했다.

“복수를 원하십니까.”

“복수라기보다는 정의를 원합니다.”

“킬리안의 목숨을 거두는 일 말입니까.”

“상대는 범죄자이며 어둠의 세력과도 연관이 있는 자입니다. 그런 상대에게 정의를 보여 주려면, 피를 보는 방법밖에는 없지 않습니까.”

“어떤 논리든 전하께서 원하는 건 결국 복수, 혹은 보복입니다. 복수나 보복을 한다고 의미가 있다고 보십니까?”

복수의 의미.

사울에게는 큰 의미가 있는 질문이다.

사울은 굳은 결의를 담은 표정으로 말했다.

“물론 있다고 생각합니다.”

“복수를 한다고 죽은 자들이 살아 돌아오는 게 아니라 해도요?”

“죄를 지은 자를 심판하는 것.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을 겁니다.”

“심판이라…….”

“최소한 저나 족장님은 킬리안을 심판할 권리가 있지요.”

세네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길 바랍니다.”

“말했듯 나는 이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리고 책임을 확실하게 지기 위해서라도 킬리안을 계속 쫓을 것입니다. 그는 대족장님의 동족을 해쳤고, 이 중립 지대에 그 끔찍한 악마 토끼풀을 팔고 있습니다. 그의 목숨을 거두지 않고 지금의 사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 대족장님도 잘 알고 계시겠지요.”

세네카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안타깝지만 부정할 수 없군요.”

“그러니 대족장님, 이번 일은…….”

“조건이 있습니다.”

항상 예의 바른 세네카가 말을 자르며 조건 운운하는 건 흔한 일이 아니다.

사울은 어떤 힘든 일이라도 할 각오를 했다.

“말씀하십시오.”

“이번 일은 제게도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니 제게 사죄하실 건 없습니다. 하지만 이번 일로 가족이나 친구를 잃은 동족에게 사죄하고 그들을 위로해 주십시오. 저 또한 그렇게 할 것이니.”

내심 사울은 감탄했다.

대족장이라 불리는 인물이 이렇게까지 동족에게 마음을 쓸 줄이야.

세네카에게 배울 점도, 배우면 안 될 점도 있다고 생각하는 사울이었지만, 이 마음 씀씀이에는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알겠습니다.”

“이번에 떠난 자들을 위한 장례식이 치러질 겁니다. 참석해 주십시오.”

“물론 참석하겠습니다.”

* * *

킬리안과의 전투에서 사망한 자들을 위한 장례식이 치러졌다.

엘프의 장례식은 흔히 볼 수 있는 게 아니다.

엘프는 인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장수하는 종족이기 때문이다.

하물며 수십 명이 한꺼번에 사망하여 장례식을 치르는 건 전시가 아니고서야 보기 어려운 광경이다.

그 희귀한 장례식에 사울 일행이 참석했다.

장례식을 주재하는 건 세네카 본인이었다.

“자연에서 우리에게 온 영혼들을 다시 자연으로 떠나보냅니다. 우리가 언젠가 자연으로 돌아갈 때 영혼이나마 그들과 재회할 수 있기를.”

추모의 말을 읊은 세네카는 자신의 앞에 놓인 묘목들을 하나하나 축복했다.

지역이나 상황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보통 엘프 장례식은 묘목을 심는 것으로 끝난다.

육체와 영혼 모두 자연으로 돌아간, 죽은 자를 기억하기 위한 의미라던가.

“…….”

숙연한 분위기 속에서 사울도 직접 묘목들에 예를 표했다.

그 광경을 지켜보는 엘프들의 눈빛은 마냥 곱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이 장례식에 참석한 자들 중에는 죽은 자들의 가족도, 친구도 있다.

세네카는 본인의 책임도 크다고 했지만, 이 자리에 참석한 엘프 입장에서는 사울에게 모든 책임이 있다고 생각할 터였다.

사울은 자신을 향한 원망 섞인 눈빛을 피하지 않았다.

혹시나 다소 난폭한 일을 당한다 해도 신변에 위협이 가해지지 않는 한 감수할 생각이었다.

다행이라 해야 할지, 원망 섞인 눈빛을 보내거나 자기들끼리 수군거리는 것 이상의 사태는 벌어지지 않았다.

세네카나 모데아가 사전에 손을 쓴 것일까.

아니면 장례식에 참석한 사울의 진심을 알아 준 것일까.

어느 쪽이든 지금 이 순간만큼은 복잡한 생각을 버리고 죽은 엘프들의 명복을 빌었다.

그렇게 장례식이 끝났다.

그리고 며칠 후.

또 하나의 나쁜 소식이 전해져왔다.

“전하, 급한 소식입니다.”

아르멜이 내민 전갈을 받은 사울이 눈살을 찌푸렸다.

“대신관이 위독하시다고.”

“전하, 아무래도…….”

“알았어.”

대신관 콜리타가 위독하다는 전갈에 사울은 지체 없이 세네카를 찾았다.

“대신관님이 위독하시다고요?”

“그렇습니다. 안타깝지만 이미 대신전에서도 마음의 준비를 한 모양입니다.”

“저런… 그럼 전하께서도 대신전에 가실 겁니까?”

“당연히 가 봐야지요. 너무 늦지 않아야 할 텐데.”

사울의 말에 세네카도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참석하고 싶지만 자리를 비우기 어렵군요.”

“괜찮습니다. 제가 대신 대족장의 뜻을 전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저희 쪽에서도 위문 사절을 보내겠습니다.”

“네. 오늘 중으로 출발해야 할 것 같으니, 서둘러 주십시오.”

사울 일행은 세네카가 파견한 위문 사절과 함께 카멜 산을 떠났다.

* * *

서두른다고 서둘렀지만, 세네카가 보낸 위문 사절은 결국 조문 사절이 되었다.

“…….”

대신전에 도착한 사울은 이야기를 듣지 않고도 한 발 늦었음을 직감했다.

눈에 보이는 모두가 수심 어린 표정을 지은 가운데, 눈물을 흘리는 자도 적지 않았다.

결정적으로 신전 곳곳에 검은 깃발이 내걸린 게 보였다.

전통적으로 검은 깃발은 ‘죽음’을 상징한다.

빛을 숭상하는 신전에서 검은 깃발을 내거는 건 딱 한 가지 경우뿐이다.

신전의 누군가 사망하여 장례를 치를 때.

“이런… 늦었나.”

안타깝게 중얼거리는 사울에게 왕국 병사가 달려와 보고했다.

“전하, 몇 시간 전 대신관님이 돌아가셨습니다.”

“서둘렀는데 그렇게 되었군.”

“네. 어제부터 의식이 없으셨습니다.”

“그럼 장례식은?”

“곧 의식을 시작한다고 합니다.”

“알았다. 신전에서 허락하는 한 모든 절차에 참여할 테니 그렇게 전하도록. 그리고 나와 함께 카멜 산에서 사절이 왔다는 것도 알리고.”

“네, 전하.”

곧 사울 일행, 그리고 중병에 걸린 대신관의 위문 사절로 왔다 조문 사절이 된 카멜 산의 일행들도 장례식에 참석했다.

사울은 관에 누운 콜리타의 모습을 직접 볼 수 있었다.

두 손을 모으며 눈을 감은 콜리타의 모습은 평온했지만, 많이 늙고 지쳐 보았다.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보다도 몇 년은 더 늙은 듯 깊게 주름 잡힌 얼굴은 그가 숨을 거둘 때 얼마나 많은 짐을 짊어지다 떠난 것인지 보여 주었다.

‘이렇게 한 명의 거물이 떠났군.’

나름대로 친밀한 상대가 떠난 것이라 마음이 아팠다.

또 한편으로는 걱정도 되었다.

이래저래 복잡한 지금의 상황에서 대신관의 죽음이 무슨 영향을 미칠까.

지금으로서는 짐작조차 어려웠다.

그렇게 대신관 콜리타의 장례식이 치러졌다.

대신전의 모두가 참석한 터라 규모는 컸지만, 동시에 검소했다.

콜리타가 입은 수의도, 관도 평범한 것이었고 묻힌 곳도 그러했다.

그렇게 콜리타의 관은 대신전의 납골당에 안치되었다.

장례식을 마친 사울은 대신전 신관들과 만나 위로의 말을 주고받았다.

그중에는 한때 사울을 따라다니던 데이빗도 있었다.

데비잇은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사울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전하.”

“당연히 와야 할 자리에 온 것뿐이야. 너도 슬프겠지만 기운을 차리도록 해.”

“그래야지요.”

사울은 데이빗에게 물었다.

“아미스라는 신관에게도 연락이 갔다지?”

“네, 아미스 신관님도 아셔야지요. 빨리 돌아오실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기운 내.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있으면 도울 테니.”

“정말 감사합니다, 전하.”

장례식 과정을 마친 사울은 자신의 방으로 돌아와 한숨을 내쉬었다.

“이래저래 복잡하게 되었군.”

본래는 다시 한번 킬리안을 쫓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콜리타까지 죽은 지금, 함부로 경거망동 할 수 없게 되었다.

대신관의 죽음으로 중립 지대의 정세가 어떻게 바뀔지 모르는 상황에서 일단 사울은 기다리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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