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콜록! 콜록!”
“여기다! 살았어!”
다행히 나타난 건 적이 아니었다.
세 명의 엘프였다.
두 명의 엘프가 한 명의 부상자를 부축한 채로 용케 숲을 빠져나온 것이다.
모데아가 그들에게 달려가 안부를 물었다.
“무사했군!”
“네, 하지만 다른 동료들이…….”
엘프들이 말끝을 흐렸지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알 만했다.
분명 불구덩이 속에서 구하지 못한 희생자가 있는 것이리라.
그 광경을 본 모데아와 엘프들이 숙연해졌다.
사울도, 다른 일행도 마찬가지였다.
카스텔마저도 숙연해질 정도였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사울이 언성을 높였다.
아직 쓰고 있던 투구 속에서 스스로 내뱉은 욕지거리가 메아리쳤다.
아르멜이 다가와 조용히 진언했다.
“전하, 진정하십시오.”
사울도 이성적으로는 잘 알고 있었다.
성질을 부린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하지만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킬리안 비셔스.
그 범죄자 놈에게 이런 꼴을 당할 줄이야.
차라리 싸우다 패했다면 이렇게까지 분하지는 않았을지 모른다.
순수하게 실력으로 겨뤄 졌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
하지만 이건 철저히 적의 계략에 넘어간 꼴이 아닌가.
“…….”
일단 사울은 진정해 보려고 했다.
욕을 퍼붓는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으니까.
계속 타오르는 숲을 바라보고 있으니 조금은 마음이 진정되는 것 같기도 했다.
저 속에서 생존자가 한 명이라도 더 나온다면 좀 더 위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정말 안타깝게도 더 이상의 생존자는 없는 듯 했다.
한참 기다리는 동안 아무도 나오지 않자 모데아가 제안했다.
“전하, 일단 자리를 옮기시지요. 불이 꺼진 뒤 조사를 해 보는 게 좋겠습니다.”
“……알겠어요.”
조금이나마 마음을 가라앉힌 사울은 얌전히 모데아의 말에 따랐다.
* * *
숲은 밤새도록 타올랐다.
사울은 밤새 타오르는 숲을 바라보며 거의 잠을 이루지 못했다.
다음 날 아침.
사울 일행은 다시 숲으로 돌아갔다.
밤새 탈 것이 다 타고, 연기도 많이 빠져 움직이는 데 큰 문제는 없었다.
현장은 실로 처참했다.
어디를 둘러봐도 잿더미와 타다 남은 잔해들뿐이었다.
무기로 보이는 쇳조각, 동물이나 이종족의 뼛조각으로 보이는 것도 있긴 했다.
하지만 워낙 심하게 불타고 파괴되어 제대로 알아볼 수 있는 게 거의 없었다.
“대체 어떻게 이렇게 끔찍한 함정을 만들었지?”
사울의 의문에 카스텔이 대답했다.
“준비를 철저히 한 것 같습니다. 마법에 연금술까지 다 동원한 것이겠지요. 신호 한 번이면 숲 전체를 불구덩이로 만들어 버릴 수 있도록.”
킬리안이 사울의 습격을 예상한 것은 아닐 것이다.
악마 토끼풀 밀수 특성상, 언제고 누구에게 대규모의 공격을 받을 가능성을 염두해 두고 만들었을 것이다.
본거지를 버려야 할 때가 오면 자신들은 확실히 빠져나가고 적은 죽일 수 있도록 숲 전체를 불구덩이로 만들 준비를 미리 해 두고 실천에 옮긴 것이리라.
마법만으로만 만든 불구덩이는 아닐 것이다.
그 정도로 강력한 마법 함정이라면 작동 전 사울이나 카스텔이 느꼈을 테니까.
숲 곳곳에 기름통을 설치해 뒀거나, 연금술로 만든 폭발하는 액체라도 곳곳에 뿌려둔 게 아닐까.
그렇다면 함정을 눈치 못 챈 게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사울이 적의 함정에 빠져 큰 피해를 보았다는 사실은 변치 않았다.
데려온 병력 중 부상자를 합쳐 절반 정도만 살아남았다.
나머지는 불구덩이 속에서 잿더미가 되었으리라.
그 잿더미 속에 킬리안이 있다면 조금이라도 위안이 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사울은 킬리안이 죽지 않았다고 확신했다.
함정을 작동시키기 직전 그의 모습에서 넘치는 여유를 볼 수 있었으니까.
하다못해 위험한 도박을 앞둔 사람 같지도 않았다.
불구덩이 속에서 안전하게 몸을 피할 방법이 분명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수색을 하던 사울 일행의 눈에 무언가가 눈에 띄었다.
타다 남은 건물이었다.
건물의 형체는 기둥 하나 남지 않고 잿더미가 되었지만, 그래도 무언가 건축물이 세워진 곳이라는 건 알아볼 수 있었다.
아마 하얀 까마귀 일당이 은신처로 쓰던 곳이리라.
“조심해서 수색해요.”
“네, 전하.”
오래잖아 심상치 않은 무언가가 발견되었다.
“전하, 이걸 보십시오.”
“이건…….”
한 병사가 사람 한두 명이 충분히 들어가고도 남을 구멍을 발견했다.
단순히 몸을 숨기기 위한 은신처가 아니었다.
지하로 연결된 땅굴이었다.
“놈이 이곳으로 빠져나간 게 분명해.”
모데아가 물었다.
“한 번 조사해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조사해 보는 게 맞다.
하지만 무작정 조사하기에는 정보가 너무 없었다.
땅굴 어딘가에, 혹은 땅굴 끝에 또 다른 함정이 있을 수도 있었으니까.
불구덩이에서 빠져 나오는 길이 아니었다면 다소 위험을 감수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또 다른 위험을 각오하기에는 입은 피해가 너무 컸다.
어떻게 해야 한다는 말인가.
고심하던 사울에게 카스텔이 말했다.
“저 혼자 다녀오겠습니다.”
“위험하지 않을까요?”
“저 혼자라면 문제없이 다녀올 수 있습니다.”
”그럼 부탁해요.“
카스텔 혼자 보내는 게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미 희생자가 많이 나온 상황에서 희생자를 더 늘릴 수는 없다.
게다가 함정이 더 있다거나 심지어 땅굴이 무너진다고 해도 카스텔이라면 문제없이 살아 나올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카스텔 혼자 땅굴로 향했고, 다른 일행은 주변을 계속 수색했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타다 남은 잔해와 잿더미뿐이었지만 수확이 전혀 없지는 않았다.
“전하, 이것을 보십시오.”
타다 남은 잔해에서 발견된 비교적 온전한 상자 하나.
기적적으로 온전히 남은 상자를 열자 말린 풀들이 가득 담긴 게 보였다.
“악마 토끼풀이군.”
아무래도 이곳은 일종의 거점인 모양이었다.
킬리안이 이곳을 거점으로 삼아 악마 토끼풀을 보관하고 필요하면 팔아 치우기도 한 것이리라.
그렇게 생각하면 이번 희생이 아무 의미 없지는 않았다.
킬리안이 이곳에 있었다는 것을 알았고, 또 거점 하나를 잿더미로 만들었으니까.
이 정도의 희생을 치를 가치가 있는 일이냐고 한다면 고개를 내저을 수밖에 없지만.
수색은 계속 이어졌다.
수색할수록 이곳이 킬리안의 사업 거점이라는 것을 증명해 주는 증거들이 나왔다.
그동안 카스텔도 무사히 다녀왔다.
“전하.”
“어떻던가요?”
“놈들이 이 땅굴을 통해 빠져나간 모양입니다. 숲 바깥까지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정말 대단한 놈이에요. 자기 영역을 모조리 불태우고, 그 와중에 자기는 안전하게 빠져나갈 곳까지 만들다니.”
“땅굴 출구 위치는 알고 있습니다. 육로를 통해 가 보시지요.”
“앞장서요.”
사울은 카스텔의 안내를 받으며 땅굴 출구로 향했다.
숲 바깥에서 살펴봐도 멀쩡한 곳이 거의 없었다.
저 잿더미 속에 얼마나 많은 아군의 시신이 묻혀 있을까.
생각만 해도 분하고 가슴이 아팠다.
“…….”
누구도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킬리안은 도망갔지만, 누가 봐도 킬리안에게 뼈아프게 패했다.
침묵하며 움직이던 중 무언가가 보였다.
사람 키 정도로 쌓인 흙무더기였다.
“저곳인가요?”
“네.”
헷갈리지 않도록 카스텔이 표시를 해 둔 모양이다.
모두들 주변을 경계하면서도 걸음을 늦추지 않고 땅굴 출구로 향했다.
땅굴 출구는 대단할 건 없었다.
지하로 내려가는 입구와 나무로 만들어진 문이 고작이었으니까.
“땅굴 안에 함정 같은 건 없던가요?”
“거기까지는 만들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제가 쫓기 전 먼저 지나간 자들의 흔적도 찾았습니다.”
“그럼 놈들은 이미 멀리 도망쳤겠지요?”
“네. 전하.”
킬리안이 미처 땅굴을 이용하지 못하고 불길에 휩싸여 타 죽었을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다.
그런 일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어제의 화재는 대단했으니까.
하지만 사울은 그런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보았다.
아니, 0이라고 단정했다.
자기가 만든 함정에 자기가 빠져 죽을 만큼 어리석은 놈이라면 진작 잡히거나 다른 악당 손에 죽었을 테니까.
“킬리안…….”
중립 지대까지 와서 다시 그놈과 만나다니.
거기에 이런 꼴까지 당하다니.
갈 길이 먼 상황에서 불의의 일격을 당한 사울은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 쉽지 않았다.
“일단 주변을 수색해요. 놈이 무슨 짓을 했을지 모르니 신중하게 움직이고.”
간신히 마음을 다스리고 명령을 내린 사울은 카스텔이 쌓아 둔 흙무더기에 몸을 기댔다.
옷이 지저분해진다거나, 왕자로서 옳지 않은 태도라는 말을 들을지 모르는 일이지만 지금은 그런 것을 따질 겨를이 없었다.
당장 지친 몸과 마음을 기댈 것이 필요했다.
눈을 감고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하던 사울의 귀에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하, 괜찮으십니까?”
아이나의 목소리에 사울은 눈을 뜨지 않은 채 대답했다.
“말만이라도 괜찮다고 하고 싶어요. 하지만 지금은 그럴 여유조차 없네요.”
“…죄송합니다.”
“그대는 아무것도 잘못한 게 없어요. 모두 다 내 책임이에요.”
무언가 이야기하려던 아이나는 입을 다물었다.
어설픈 위로가 통할 상황이 아니고 생각했다.
얼마 후, 조금 마음을 가라앉힌 사울도 몸을 가다듬었다.
신세 한탄이나 하면서 시간을 낭비하느니 킬리안의 자취라도 쫓는 게 더 마음 편했다.
모두들 킬리안의 자취를 찾는 가운데, 한 엘프가 무언가를 발견했다.
“대장님! 찾았습니다!”
사울은 엘프가 외친 쪽으로 달려가 보았다.
희미하게 발자국 같은 흔적이 남아 있는 게 보였다.
건조하지만 바람이 꽤 부는 벌판에서 이 정도 흔적을 찾아낸 게 용했다.
곧 사울 일행은 발견된 흔적을 따라가 보았다.
때로는 흔적이 끊어져 다시 찾아야 했고, 때로는 일부러 거짓으로 만든 듯한 흔적도 나왔다.
다행히 살아남은 병력 중 추적에 능한 자들이 여럿 있었다.
인간보다 훨씬 날카로운 눈과 귀를 가진 엘프와 추적에 일가견이 있는 카스텔이 힘을 합친 결과 사울 일행은 킬리안의 진짜 흔적, 그리고 그가 향한 곳을 대략 알 수 있었다.
“이쪽인가.”
“네, 한 무리가 이쪽으로 똑바로 도망친 것 같습니다.”
“이쪽은 분명…….”
모데아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말을 주저했다.
아르멜이 사울을 대신하여 물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여기서부터는 추적이 어렵습니다. 몬스터도 있고, 또 너무 깊이 들어가면 가멜다 왕국을 자극할지 모릅니다.”
그 말을 들은 사울이 직접 물었다.
“가멜다 왕국이라고요?”
“네, 이쪽으로 깊이 들어가면 가멜다 왕국의 영역이 나올 겁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들의 영향력 아래 있는 마을이지요.”
사울도 중립 지대에 가멜다 왕국의 손길이 닿는 영역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다르센 왕국도 마찬가지였으니까.
중립 지대를 점령하거나 지배하는 게 아니라 일종의 외교 공간으로 삼기 위해 만들어 둔 영역이다.
카멜 산에서도 두 나라와의 외교 창구가 필요했기에, 각각 자그마한 영역을 만든 것은 눈감아 주었다.
단, 정식 외교관은 아니라 외교 특권 같은 건 일절 없었다.
아무튼 이곳은 가멜다 왕국의 영역과 멀지 않은 곳이다.
그런 곳에 킬리안이 나타났고, 사라진 곳도 그쪽이다.
‘설마… 킬리안과 가멜다 왕국이 손을 잡은 것인가.’
물증도, 하다못해 심증마저 빈약한 의심이다.
하지만 그 의심이 사실이고, 그 때문에 놈들이 가멜다 왕국 쪽으로 도망쳤다면?
거기에 다르센 왕국만큼이나 악마 토끼풀 문제로 골머리를 앓는 가멜다 왕국에서 ‘악마 토끼풀의 왕’인 킬리안과 손을 잡는다?
어둠의 세력과도 관련이 있다는 게 사실상 확실한 그를?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언제 전쟁이 터질지 모를 판에 가멜다 왕국이 킬리안과 관계가 있고, 그 사실이 드러나기라도 한다면 명분 싸움에서 지고 들어가는 셈이다.
사울이 가멜다 왕국의 왕이었다면 절대로 하지 않을 바보짓이다.
‘하지만 가멜다 왕국은 왕실보다 유력 귀족들이 더욱 강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