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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했더니 무능한 적국 왕자였다-120화 (120/232)

120화

중립 지대에서 어둠의 세력의 근거지일 가능성이 있는 곳은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찾은 곳 중에서 가능성이 높은 곳만 추려도 여러 곳이었다.

하지만 토벌이 쉽지 않았다.

추린 곳 대부분이 위험한 곳, 혹은 정체불명의 곳이었고, 토벌을 위해 동원할 수 있는 병력에도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쓸데없이 많은 병력을 움직이면 찾을 수 있는 어둠의 세력도 못 찾을 테니까.

또 중립 지대에 가르시아 남매가 활동하고 있다는 것도 거슬렸다.

서로 불가침 조약을 맺었으니 당분간은 문제를 일으키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사울이 활동하면서 그들과 부딪치거나, 지나치게 눈에 띄면 문제가 될 수 있다.

결국 사울은 왕자의 자존심을 잠시 접어 두기로 했다.

“당분간 우리 정체를 감추고 활동하는 게 좋겠어요.”

사울의 말을 들은 아이나가 물었다.

“예전처럼 다시 ‘투구 전사’로 활동하자는 말씀이신가요?”

“말하자면 그래요. 지금은 우리들의 명성을 높이는 것보다 가능한 빠르고 은밀하게 어둠의 세력을 잡아서 뭐라도 알아내야 할 때이니까.”

아르멜이 찬성표를 던졌다.

“전하의 말씀이 옳습니다. 미친개를 때려잡기 어렵다면 피하는 게 상책이지요.”

“정체를 숨기고 활동하는 건 익숙하니 큰 문제없을 거야. 문제는 한정된 시간 안에 무언가 의미 있는 결과를 남겨야 하는데…….”

사울은 지도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중립 지대를 그린 지도 곳곳에 표시가 되어 있다.

정확한 것은 알기 어렵지만, 아무튼 수상한 곳들이다.

지도의 표시를 하나하나 살피던 사울은 한 곳을 점찍었다.

“이곳이 어떨까요?”

사울이 점찍은 곳은 카멜 산에서 악마 토끼풀의 거래 장소로 의심하는 곳이었다.

직접적으로 피닉스나 어둠의 세력과 관련이 있다는 증거는 없다.

하지만 율렌 섬 최고의 악마 토끼풀 판매자인 킬리안 비셔스가 어둠의 세력과 관련이 있지 않은가.

이곳에서 악마 토끼풀을 파는 놈들을 잡을 수 있다면, 그를 통해 피닉스나 어둠의 세력에 대한 연결고리도 찾을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었다.

사울의 속내를 읽은 아르멜이 말했다.

“가능성은 있을 것 같습니다. 문제는 악마 토끼풀을 파는 녀석들이 다 그렇듯, 꽤나 거칠 겁니다.”

“그렇겠지. 하지만 우린 킬리안과도 싸워 보았으니까. 그 부하 정도라면 큰 문제없을 거야.”

“전하의 뜻이라면.”

아르멜 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반대하지 않았다.

그렇게 목표가 결정되었다.

* * *

정체를 숨기기로 한 사울은 다시 한번 ‘투구 전사’ 노릇을 하기로 했다.

지난번과 차이가 있다면 사울과 아이나는 물론, 카스텔과 아르멜까지도 얼굴을 감춘다는 점이었다.

사울과 아이나는 얼굴을 완전히 가리는 투구를 쓰고 싸우는 데 익숙했다.

카스텔도 오랫동안 가면을 쓰고 다녔기에 얼굴을 가리는 투구를 쓰고 다니는 데 불편해 하지 않았다.

하지만 투구 전사 경력이 짧은 아르멜은 다소 불편해 했다.

“역시 얼굴을 완전히 가리는 건 불편하군요.”

아르멜이 자기 일로 불만을 내뱉는 건 보기 드문 일이다.

얼굴을 가리는 투구가 많이 불편했는지, 고개를 갸웃거리거나 투구를 연신 매만지며 조금이라도 편해지려 했다.

얼굴이 불편하고 시야나 감각이 다소 저하되는 것.

보통 사람이라면 그렇게 심각한 일은 아니다.

불편함이나 시야, 감각이 저하되는 것보다 머리와 안면을 보호할 수 있다는 이점이 훨씬 크니까.

하지만 마나를 다루는 실력자들에게는 그렇지 못했다.

일정 수준 이상의 실력자들에게는 갑옷이나 투구가 보조적인 수단일 뿐, 큰 의미 없었다.

아르멜 역시 투구로 얼굴을 보호하는 것보다 시야와 감각이 떨어지고, 또 불편한 것에 신경 쓸 수밖에 없었다.

투구 전사 노릇을 보다 많이 오랫동안 한 사울이 선배로서 조언을 해 주었다.

“얼굴을 확실히 가리려면 다소 불편함은 감수해야 해. 다른 방법은 없어. 익숙해지는 것 외에는.”

“그렇습니까.”

투구 속에서 아르멜의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사울은 작게 웃으며 본인도 투구를 썼다.

만에 하나를 대비하여 예전 투구 전사로 활동하던 시절과는 다른 투구를 썼다.

이어 투구를 쓴 아이나와 카스텔도 모습을 드러냈다.

모두 익숙한 사람들이라 얼굴을 감춰도 단박에 알아 볼 수 있었다.

투구로 정체를 감추는 건 사울과 카스텔, 아이나, 아르멜 네 명뿐이었다.

그 외에는 카멜 산의 병력이 함께 원정에 나가기로 했다.

이번에도 모데아가 돕기로 했고, 참여하는 병력 역시 정예들만 뽑았다.

병력 역시 부족하지 않았다.

일이 잘못될 가능성이 거의 없었다.

예기치 못한 사태가 벌어지지 않는 한.

* * *

오랜만에 투구 전사로 복귀한 사울은 자신의 얼굴은 물론, 신분까지 철저히 감추었다.

사울 일행은 물론, 모데아와 카멜 산의 병력도 사울의 방침을 잘 따라 주었다.

그렇게 정체를 숨긴 사울 일행은 목적지로 향했다.

말을 타고 이틀 정도 달린 끝에 목적지인 숲에 도착할 수 있었다.

언뜻 숲이 우거진 것을 제외하면 특별한 것은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 이름 없는 숲.

그러나 이곳은 대신전, 카멜 산, 나아가 다르센 왕국과 가멜다 왕국 영역까지 갈 수 있는 교통의 요충지다.

알려지기로 거주민은 없다지만, 장소가 장소다 보니 누구든 흘러들어 와 둥지를 틀기 쉬운 곳이었다.

카멜 산에서는 이곳에서 악마 토끼풀 거래가 이루어진다고 의심하고 있었다.

나아가 하얀 까마귀가 둥지를 틀고 있을 가능성도 있다고 보았다.

이에 목적지에 도착한 사울은 최대한 신중히 움직이기로 했다.

일단 안전한 곳에 은신처를 만들고 은밀히 병력을 풀어 주변을 살폈다.

오래잖아 좋은 소식이 들려왔다.

“찾았습니다.”

“하얀 까마귀인가요?”

“하얀 까마귀 소속인지는 모르겠지만, 몇몇 인간들이 무언가를 밀수하는 것 같았답니다.”

모데아의 보고에 사울은 고개를 끄덕였다.

“밀수품이 악마 토끼풀이라면 하얀 까마귀이거나, 그와 관련 있을 가능성이 높아요. 악마 토끼풀이 아니라 해도 이런 곳에서 활동하는 밀수꾼일면 무언가 쓸 만한 정보를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높고.”

“그럼 공격할까요?”

“좀 더 신중히 움직여요. 잔챙이만 잡고 두목급을 놓쳐 버리면 될 일도 안 될 테니.”

“알겠습니다.”

좀 더 신중히 조사가 진행되었다.

그 결과, 문제의 밀수품은 악마 토끼풀이었다. 따라서 밀수꾼들 역시 하얀 까마귀일 가능성이 높아졌다.

물론 ‘하얀 까마귀가 악마 토끼풀을 밀수하는 중이오’라고 대놓고 떠들고 다니지는 않았다.

하지만 행동 방식이나 오가는 물건을 볼 때, 역시 악마 토끼풀을 거래하는 놈들일 가능성이 높았다.

‘다르센 왕국에서 쫓겨난 놈들이 중립 지대에서 거래를 하는 건가.’

사용자의 몸과 영혼까지 갉아먹는 악마 토끼풀은 그 자체로 흉악한 물건이다.

설령 어둠의 세력과 직접 관련이 없어도 잡아들일 이유는 충분하다.

대충 상황을 파악한 사울은 명령을 내렸다.

“준비가 끝나는 대로 공격하도록 해요. 가능한 생포하는 게 좋지만, 생포보다는 자신의 목숨을 지키는 일을 우선시해요.”

“알겠습니다.”

사울 일행과 모데아가 이끄는 카멜 산의 병력이 각기 분산하여 움직였다.

목표는 숲 한가운데의 오두막 몇 채.

절반은 악마 토끼풀을 쌓아 둔 창고처럼 쓰고, 나머지는 조직원들의 거주지로 쓰는 것으로 보였다.

“그럼 시작해요.”

사울의 말에 모데아가 작은 피리를 꺼내 불었다.

피리 소리를 들은 병력들이 일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뭐야?”

“무슨 일이지?”

피리 소리를 들은 적들은 당황했다.

저마다 무기를 들고 경계 태세를 갖췄지만, 이미 늦었다.

“쏴라!”

숲 곳곳에 숨어 있던 엘프들이 먼저 나섰다.

엘프들이 날린 화살이 아직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적들을 덮쳤다.

“으악!”

몇몇 적이 화살에 맞아 쓰러졌다.

“젠장! 엘프 놈들인가!”

“어서 두목에게 알려!”

상황을 파악한 적들은 도망치지 않았다.

이 중립 지대에서 엘프와 싸운다는 건 카멜 산과 싸우는 것임을 모를 리 없는데도 쉽사리 물러나지 않았다.

적들은 정신없이 도망치는 대신 오두막에 들어가거나, 엄폐물에 몸을 숨겼다.

그 광경을 본 사울은 위화감을 느꼈다.

‘도망치는 게 아니라 시간을 끄는 건가.’

기습당한 적들이 생각보다 침착한 게 문제가 아니다.

행동 방식이 수상했다.

시간을 끈다는 건 무언가 믿는 구석이 있어야 가능하다.

믿는 구석도 없이 숨어서 시간을 끄는 건 하책 중의 하책이다.

차라리 운이 좋기를 고대하며 흩어져 달아나는 게 살아날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생각보다 침착하게 행동하는 적들이 후퇴하는 대신 시간을 끈다?

믿는 구석이 없다면 불가능했다.

그 믿는 구석이란…….

“전하. 누군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카스텔이 사울에게 알려 왔다.

정예로 구성된 병력 중 카스텔만 알아차릴 정도라면 적은 자신의 기세를 자유자재로 다룰 줄 아는 강자일 것이다.

“선생님. 경계 신호를.”

사울의 명령에 카스텔은 지체 없이 손짓을 했다.

그녀의 손끝에서 뻗어 나온 빛 덩어리가 하늘을 갈랐다.

아군에게 보내는 경고 메시지였다.

순식간에 주변에 긴장감이 흐르는 가운데, 사울도 느꼈다.

강자가 다가오는 기운을.

‘두 명인가.’

이쪽에는 카스텔도 있고 정예 병력도 적지 않다.

마나 좀 다루는 두 명의 적이 나타난다고 걱정할 것은 없다.

하지만 사울은 이상하게 신경이 쓰였다.

이상하게도 지금 느껴지는 기운이 낯설지 않았다.

카스텔처럼 매일 마주한 건 아니지만, 어디선가 마주해 본 적 있는 느낌이었다.

“내가 가 봐야겠어요.”

사울은 일행과 함께 기운이 느껴지는 곳으로 다가갔다.

“으아악!”

심상찮은 기운이 점점 가까워지는 가운데,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현장에 도착한 사울의 눈에 시체 몇 구가 들어왔다.

피투성이가 된 채 처참히 흩어진 시체는 보기만 해도 끔찍했다.

모두들 엘프, 즉 아군 시체들이었다.

시체 한가운데 두 명이 서 있었다.

사울과 다른 일행처럼 투구로 얼굴을 빈틈없이 가린 자들.

얼굴은 가렸지만 몸을 보건대 한 명은 남자고, 또 한 명은 여자인 게 분명했다.

“…….”

눈으로는 상대의 정체를 짐작할 수 없었다.

상대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양쪽 모두 얼굴을 완벽하게 가렸으니까.

하지만 사울은 상대의 정체를 알아 차렸다.

어디서 느낀 적 있는 기운.

어딘지 모르게 눈에 익은 체형.

결정적으로 남자의 무기가 눈에 띄었다.

언뜻 보면 아무런 무기도 가지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남자가 낀 장갑 끝에 가느다란 빛이 흐르는 게 보였다.

튼튼하고 칼날처럼 날카로운 실이다.

율렌 섬을 다 뒤져도 찾아보기 힘들 만큼 독특한 무기를 든 실력자.

저 남자는 아마도…….

‘킬리안 비셔스.’

사울은 눈앞의 저 남자가 킬리안이라고 확신했다.

“…….”

침묵 속에서 킬리안으로 보이는 남자의 투구 속에서 눈빛이 번득였다.

그 순간 사울은 깨달았다.

자신이 상대를 알아보았듯, 상대 역시 자신을 알아보았음을.

“큭… 크하하하하!”

투구 속 남자가 갑자기 크게 웃었다.

투구 속에서 울리는 섬뜩한 웃음소리도 사울이 기억하고 있는 킬리안의 목소리와 같았다.

“저자는 역시…….”

아이나도 상대의 정체를 눈치채고는 말했다.

“킬리안이 틀림없어요. 옆의 여자는 우리가 잡았다 놓친 그 다크엘프 같아요.”

사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카스텔이 움직였다.

상대가 킬리안이라면 더 볼 것도 없다는 듯, 곧장 킬리안을 노렸다.

카스텔 주변에 거대한 마나 덩어리가 형성되었다.

이윽고 마나 덩어리는 날카로운 촉수의 형상을 띄었다.

무엇이든 꿰뚫어 버릴 듯한 날카로운 마나 촉수가 킬리안을 덮쳤다.

킬리안도 만만치 않았다.

덮쳐오는 마나 촉수를 피하면서 동시에 실을 날렸다.

여러 가닥의 실이 춤을 추며 카스텔을 덮쳤다.

물론 카스텔을 베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마나 촉수 한 가닥이 실을 덮치며 킬리안의 공격을 막아 냈으니까.

사울도 본격적으로 전투태세를 갖추었다.

예상치 못한 우연한 만남이지만, 동시에 놓칠 수 없는 기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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