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가르시아 남매의 살기를 견디려 해 보았지만, 쉽지 않았다.
마음을 다잡아도 몸이 제멋대로 반응했다.
식은땀이 이마를 타고 흘러내리는 것도 모를 정도로 긴장한 사울은 힘겹게 입을 열었다.
“날 죽이기라도 할 건가?”
“그건 저희가 아닌 전하께 달린 일 같습니다만.”
마리안의 말투가 무례해진 게 신호라도 되는 듯 곁에 있던 베일의 눈빛에 살기가 서렸다.
심상찮은 분위기에 카스텔은 물론 아이나와 아르멜이 사울 앞을 가로막고 섰다.
“잠깐.”
모두를 제지한 사울이 마리안에게 말했다.
“너희들은 날 죽일 수 없을 것이다. 지금 이 자리에서는 말이지.”
“왜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그것은 너희들의 파멸을 뜻하니까.”
“우리가요?”
“가멜다 왕국의 자작이 다르센 왕국의 왕자인 날 죽이면 휴전 조약도 끝이다. 두 나라는 다시 전쟁에 휘말리겠지. 두 나라 모두 아직은 전쟁을 원치 않는다. 그런 상황에서 너희들이 나를 벤다면 가멜다 왕국에서 원치 않는 전쟁의 시발점이 된 너희들의 존재를 용납할 것이라 생각하나?”
사울의 말에 마리안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전하께서는 우리 조국이 저와 제 동생을 칠 것이라고 생각하시하나요?”
“못 할 이유는 없지. 듣자하니 그대들 조국의 귀족 절반이 그대들을 없애고 싶어 한다던데.”
노골적인 사울의 말에 베일이 눈살을 찌푸렸다.
금방이라도 한마디 할 기세였지만, 마리안이 손을 들어 제지했다.
“저희에 대해서 잘 아시는 군요.”
“당연하지. 그대들은 내 조국의 가장 큰 적이며, 동시에 이 율렌 섬의 최강자이니까.”
당당하게 나가면서 동시에 상대를 비하하지 않고 높여 준다.
이것이 사울의 ‘가르시아 남매 길들이기’ 방법이었다.
가르시아 남매에 대한 정보를 분석한 결과, 이 방법이 가장 효과적이라는 결론 하에 행동에 나섰다.
다행히 이 전략은 맞아떨어진 듯했다.
마리안도, 베일도 살기를 거두었다.
“과연 들은 대로군요, 전하.”
“나에 대해 무엇을 들었지?”
“최근 다르센 왕국은 물론, 우리 왕국에서도 주목하기 시작한 왕족. 어디로 튈지 모르는 만만치 않은 사람.”
“내가 그대들을 잘 알 듯, 그대들도 나에 대해 조사를 한 모양이군.”
“후훗.”
마리안은 베일을 돌아보며 말했다.
“이왕 여기까지 왔으니 회담은 하고 가자.”
베일도 고개를 끄덕였다.
결정을 내린 마리안은 자신의 무장인 활을 내려놓았고, 고개를 끄덕인 베일은 무장을 풀지 않았다.
드디어 모두들 회의장에 앉았다.
다행히 미리 배정된 자리에 별다른 불만은 없는 듯했다.
가르시아 남매는 호위병은 물론 수행원조차 데려오지 않았다.
모든 이야기를 자신들 둘이서 진행할 생각인 모양이었다.
사울은 혀를 내둘렀다.
‘정말 무도한 자들이군.’
가르시아 남매의 무도한 행동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자리에 앉은 베일은 자신의 검 두 자루를 치켜들어 그대로 바닥에 꽂았다.
두 자루의 검이 검집째로 단단한 돌바닥을 뚫고 수직으로 꽂혔다.
“무슨 짓입니까?”
콜리타의 질문에 베일은 씩 웃으며 답했다.
“실례합니다. 검을 찬 채로 앉기는 불편하고, 따로 놓아 둘 곳도 없어서요.”
“…….”
산전수전 다 겪은 콜리타도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콜리타는 그동안 쌓아 온 인생 경험이 헛된 게 아니라는 듯, 곧바로 정신을 차렸다.
“…그럼 회담을 시작하겠습니다. 본인은 어디까지나 율렌 섬의 평화를 위해 이 자리의 중재자를 맡았습니다. 회담에는 직접적으로 개입하지 않을 것이니 양측 모두 그 사실을 이해해 주시고 아무쪼록 이 자리를 평화롭게 끝내 주십시오. 그리고 율렌 섬의 평화에 도움이 되는 결과를 만들어 주시길 바랍니다.”
점잖은 콜리타의 말에 사울이 먼저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마리안도, 베일도 대답했다.
“네.”
조금 소동이 있었지만, 일단 첫 단계는 무사히 끝났다.
드디어 회담이 시작되었다.
먼저 말을 꺼낸 건 마리안이었다.
“미리 말해 두지만, 저와 동생은 시간 낭비를 하러 온 것이 아니에요. 그리고 전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가뜩이나 적이 많은데 새로운 적을 늘리러 온 것도 아니고요.”
사울이 물었다.
“무슨 뜻이지?”
“우리가 책임질 수 없는 이야기, 받아들일 수 없는 이야기, 말도 안 되는 이야기는 모두 무시할 수밖에 없다는 뜻이에요.”
“…….”
가멜다 왕국이 다르센 왕국의 조공을 받는 나라라 해도 자작이 왕자에게 이렇게 무례한 언동을 취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 정도면 회담을 빙자하여 난동을 부리러 온 게 아닌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사울 역시 가르시아 남매의 의도를 바로 파악하기는 힘들었다.
‘이자들은 무언가를 이루거나 얻어 내려고 온 것인가? 그게 아니라면…….’
마음 내키는 대로 난동을 부리는 게 목적일 수도 있다.
하지만 사울은 그 가설은 폐기했다.
난동을 부리고 싶으면 좀 더 쉽고 빠른 방법도 얼마든지 있다.
이 회담장의 자리에 앉은 것만으로도 저들로서는 나름대로 양보한 행동이라 할 수 있다.
양보를 했다는 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지 않겠는가.
빠르게 생각을 사울이 입을 열었다.
“물론이다. 시간 낭비나 하려고 그대들을 부른 건 아니다. 이 회담에서는 어디까지나 책임질 수 있는 이야기만 할 것이고, 또 의미 있는 결과를 남기고 싶다. 그런 의미로 한 가지 제안하고 싶다.”
“무엇인가요?”
“중립 지대는 생각보다 넓다. 꼭 우리가 부딪칠 필요는 없지. 우리가 머무르는 동안 서로 다투지 않기로 약조를 하는 게 어떤가?”
이것은 사울 입장에서 좀 더 유리한 조건이다.
무력으로는 사울 쪽이 약하고, 가르시아 남매 쪽이 강하니까.
그 사실을 가르시아 남매도 모를 리 없었다.
“거절하지요.”
거절을 당했지만 사울은 나쁘지 않다고 여겼다.
저들의 성품을 볼 때,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 생각했다면 훨씬 격렬하게 반응했을 테니까.
이 정도면 충분히 대화가 통할 상대다.
“제안을 하는 게 우리 쪽이니 다소 양보는 해 줄 수 있다.”
“양보라고요?”
“그렇다.”
“들어 보죠.”
“그대들도 알다시피 이 중립 지대는 다르센 왕국령도, 가멜다 왕국령도 아니다. 내가 이 지역의 영토를 가지고 이래라저래라 할 처지는 못 되지.”
“그래서요?”
“서로 공격하지 않겠다는 평화 조약을 맺고, 그 대신 내 쪽에서 그쪽의 요구를 한 가지 들어주는 게 어떤가?”
사울의 제안에 마리안이 베일 쪽을 돌아보았다.
베일은 말해도 되느냐는 표정을 지었고, 마리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베일이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좋소. 한 가지 조건만 들어준다면 기꺼이 전하의 뜻에 따르리다.”
“무슨 조건이지?”
“검은 흉성을 원하오.”
모두의 시선이 카스텔 쪽에 쏠렸다.
카스텔은 미동도 않는 가운데, 사울이 물었다.
“카스텔이 이 지역에서 나가는 것을 원한다는 뜻인가?”
“그 반대요. 카스텔과 나 단 둘이서 싸우게 해 주시오. 그리고 둘 중 누가 죽더라도 결투 결과에 승복할 것임을 약속하시오.”
사울은 곧바로 대답했다.
“거절한다.”
“어째서?”
“이 회담은 두 나라 모두 이 중립 지대에서 피를 보지 않기 위해서 열었다. 그런데 생사를 건 결투를 한다면 회담의 의미가 없지.”
“그렇소? 그럼 할 수 없지. 회담은 이 자리에서 끝내고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 그쪽에서는 후회하지 않는 것으로.”
베일의 과격한 발언에도 마리안은 전혀 제지하지 않았다.
베일과 생각이 같거나, 이 상황을 방치하여 회담을 유리하게 끌고 나가겠다는 심산이다.
사울은 후자라 보았다.
회담에 아직 희망은 있지만, 쉽게 풀리지는 않을 듯했다.
“자작도 동생과 생각이 같은가?”
사울의 질문에 마리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제 동생이 원한다면 반대하지 않아요.”
“그런가. 명예롭지 않군.”
“뭐라고요?”
“그대들도 알다시피 카스텔은 지난 번 전쟁에서 입은 부상에서 회복하지 못했다. 부상을 입은 자와 결투를 하여 이긴다고 명예로운 승리라 할 수 있을까?”
결투는 명예가 걸린 것.
처음부터 불명예한 결투라면 애초에 성립할 가치도 없다는 게 이 세상의 상식이다.
하지만 베일은 그러한 상식 따윈 안중에도 없는 모양이었다.
“마음대로 생각하시오. 내게 중요한 건 놓친 사냥감을 잡는 일이니.”
“…….”
베일의 살기 어린 눈빛에 카스텔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사울은 알고 있었다.
이 자리에서 자신이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카스텔 역시 수긍할 것임을.
나아가 베일과 결투를 하고 자기 목숨을 내놓을 것임을.
물론 사울은 카스텔을 그렇게 버릴 마음이 없었다.
언젠가 복수하더라도 자신의 손으로 해야 한다.
결심한 사울은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여기 카스텔을 선생님이라고 부른다. 카스텔 선생님.”
“알고 있소. 검은 마녀 카스텔의 제자인 괴짜 왕자 사울이라던가.”
“그렇다면 내가 그쪽의 제안을 절대 받아들이지 않으리라는 것도 잘 알고 있겠군.”
“그럼 회담은 끝이지. 안 그래, 누나?”
발언권을 넘겨받은 마리안이 말했다.
“나도 동생의 뜻에 반대하지 않아요. 동생의 조건을 원치 않고, 회담을 끝내고 싶지도 않다면 전하께서 다른 조건을 말씀하세요.”
이제부터가 진짜다.
지금 어떻게 이야기하느냐에 따라 회담의 성패가 결정될 것이다.
사울은 회담 전부터 준비해 온 것들을 떠올렸다.
가르시아 남매를 상대로 대화를 하려면, 그들이 원하는 미끼를 던져야 한다.
가르시아 남매가 무엇을 좋아하는가.
그들과 싸워 본 카스텔도, 정보에 밝은 아르멜도 입을 모아 말했다.
‘그들은 싸우는 것을 좋아합니다.’
싸움을 좋아하고, 말 그대로 싸움으로만 자신을 증명할 수 있는 자들.
싸울 곳이 사라지면 자신들이 누리는 것은 물론, 존재 이유마저 사라질 자들.
그것이 가르시아 남매에 대한 사울의 결론이었다.
따라서 그들을 대할 방법도 찾아냈다.
먼저 사울은 미끼를 던졌다.
“베일 자작.”
“왜 그러시오?”
“그대가 선생님과 결판을 내고 싶어 한다는 건 알고 있다.”
“그렇소. 그것만 들어주면 나머지는 그쪽의 뜻을 따르겠소.”
“지금은 허락할 수 없다.”
“그 잘난 명예 때문이오?”
“승부가 뻔한 결투를 용납할 수는 없으니까.”
베일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카스텔이 질 것이라는 말인가?”
“그렇다. 안타깝지만.”
사울의 말을 들은 카스텔의 표정이 딱딱해졌다.
하지만 반론하지는 못했다.
엄연한 사실이었니까.
“지금 선생님은 명예로운 결투를 할 상황이 아니다. 아니, 재미있는 사냥감조차도 못 된다. 그대들과의 전투 중 큰 부상을 입었고, 아직 회복하지 못했다. 그대들은 6년 전쟁 당시보다 더 강해졌겠지만, 선생님은 그때보다 더 약하지.”
그러자 베일이 비꼬았다.
“스승을 지키기 위한 전하의 노력이 눈물겹군요.”
“아무튼 지금 선생님은 결투 대상은커녕, 사냥감도 아니다. 굳이 그런 선생님을 짓밟아서 그대들이 얻는 게 무엇이지?”
“검은 흉성을 끝장냈다는 명성.”
“명성이라고? 오명이 아니라?”
“…….”
“지금 선생님은 그대들에게는 다친 사냥감에 불과하다. 굳이 약하고 다친 사냥감을 사냥하고 싶다면 내가 막기는 어렵겠지. 하지만 그대들이 그렇게 행동한다면 나는 그대들의 오명을 율렌 섬 전역에 퍼뜨릴 것이다.”
이런 사울의 말에도 베일은 조금도 기죽지 않았다.
“우릴 상대할 카드로 택한 게 고작 그거요? 오명을 퍼뜨리겠다? 내가 오명 따위를 두려워 할 것 같소?”
“두려워해야 할 거다.”
“어째서?”
“가멜다 왕국 귀족 절반이 그대들을 없애고 싶어 한다지. 그렇다면 내가, 아니 우리 왕국이 나서 그대들을 향한 오명을 퍼뜨리고 그대들을 지금 자리에서 쳐 내려 하면 어떻게 될까? 가멜다 왕국 절반이 우리 뜻에 따라 줄 테고, 그대들 역시 결코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