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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했더니 무능한 적국 왕자였다-111화 (111/232)

111화

그래도 사울은 일없이 시간을 보내지 않았다.

직접 대외 활동을 하는 것 외에도 대신전에 앉아서 할 수 있는 일은 많았다.

“전하, 말씀하신 정보들입니다.”

“알았어.”

사울은 아르멜이 직접 가져온 문서들을 살펴보았다.

다르센 왕국 나아가 가멜다 왕국의 현재 정세가 기록된 문서들이었다.

사울은 특정 분야의 정보만 요구한 게 아니라 확보할 수 있는 모든 정보를 요구했다.

때로는 예기치 못한 분야에서 쓸 만한 정보를 빼낼 수 있는 법이니까.

일단 지금까지 들어온 정보에 따르면 다르센 왕국이나 가멜다 왕국이나 큰 변화는 없었다.

정치적인 상황도 군사적인 상황도 여전했다.

두 나라 모두 6년 전쟁 이후 지속된 불안한 평화를 누리는 판국이었다.

두 나라의 정세를 살핀 사울은 다른 문서에 시선을 돌렸다.

율렌 섬 바깥, 사드온 대륙의 정세에 대해 담긴 문서다.

사드온 대륙은 율렌 섬보다 몇 배는 크고 10여개의 국가가 공존하고 있다.

대륙은 대륙대로 사정이 복잡해 율렌 섬과 교류는 해도 군사적인 대립은 거의 하지 않았다.

율렌 섬과 사드온 대륙은 주로 무역 관계를 맺었다.

섬과 대륙 모두 무역을 통해 물자를 교류하며 누릴 수 있는 이익을 극대화 시키는 데 관심이 있었다.

그렇기에 양쪽 모두 군사적으로는 대립하지 않고, 외교 관계 역시 가끔 친서나 사신을 보내는 정도에 그쳤다.

사드온 대륙의 정세가 기록된 문서들.

그중 한 장의 문서에 사울의 시선이 쏠렸다.

‘에센 상회라.’

율렌 섬에서 에센 상회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에센 상회는 사드온 대륙에 위치한 상회이며, 각종 광물을 거래하는 데 있어서 독보적인 위치를 가진 거대한 상단이다.

율렌 섬은 풍족한 땅이다.

그래서 식량이나 웬만한 자원은 자급자족이 가능했다.

하지만 철을 만드는 데 필요한 철광석이 부족했다.

철광석 광맥이 드물어 몇 곳 밖에 없는 사철 광맥에서만 철광석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마저도 생산량이 부족했기에 율렌 섬에서는 철이 귀했다.

삼백 년 전쟁이 벌어지기 전에는 섬에서 나는 사철과 소규모 무역으로 철 공급량을 충족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전쟁이 발발하고 철 소비량이 늘어나면서 율렌 섬에서 나는 사철만으로는 철 생산량을 감당할 수 없었다.

이에 다르센 왕국도, 가멜다 왕국도 대륙과의 대규모 철 무역에 눈을 돌렸다.

그런 두 나라의 요구에 호응한 곳이 에센 상회였다.

에센 상회는 약 200년 전부터 다르센 왕국과 가멜다 왕국 두 나라 모두에 철광석을 팔아 치우며 큰 이익을 올렸다.

상회는 두 나라의 전쟁에서는 철저히 중립을 지켰고 또 두 나라 모두 공평하게 대우했다.

두 나라 모두에 같은 가격으로 질 좋은 철광석을 팔며 신뢰를 쌓은 것이다.

현재 에센 상회는 두 나라에 철광석을 독점적으로 공급하는 초대형 상단으로 성장했다.

덕분에 에센 상회는 다르센 왕국이나 가멜다 왕국 입장에서는 대륙의 그 어떤 나라보다도 중요한 세력으로 여겨졌다.

두 나라 모두 대륙의 각 나라에 파견하는 사절보다 에센 상회에 파견하는 사절이 더 많을 정도였으니까.

그만큼 중요한 세력의 움직임에 대한 정보에 사울도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당장은 자신의 목적과 큰 상관이 없을지 모른다.

하지만 세상의 움직임은 언젠가 자신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그것이 복수와 관련이 있든 혹은 왕자로서 활동하는 것이든.

‘에센 산맥에서 철광석 광맥 한 곳이 고갈되었다는 이유로 가격을 올리려 하고, 왕국에서는 대책 마련에 나섰다는 건가. 골치 아프겠군.’

장사나 무역에 큰 관심이 없는 사울도 수요와 공급의 법칙에 대해서는 알았다.

어떤 물건이든 수요에 비해 공급이 늘면 가격이 떨어지고 공급이 줄면 가격이 올라간다.

율렌 섬에서 고품질의 철광석은 언제나 수요가 많다.

이런 상황에서 철광석 생산량이 줄어 가격을 올리면 다르센 왕국과 가멜다 왕국은 이 일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아마도 치열한 눈치 싸움이 벌어질 것이다.

결국은 어느 정도는 가격을 올려 줄 수밖에 없을 테고.

‘보통 이런 일이 벌어지면 협상을 위해 상회의 거물이 직접 율렌 섬에 찾아왔다지. 이번에도 그럴 수 있겠군.’

사울은 정보를 머릿속에 집어넣었다.

자신과 관련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기억해 둘 만한 정보다.

그 외에는 특별한 소식이 없었다.

머잖아 가르시아 남매가 중립 지대에 찾아온다는 것을 제외하면 중립 지대도 나아가 율렌 섬도 당장은 평화로웠다.

휴전 조약 속에 전쟁 준비를 멈추지 않는 것을 ‘평화’라 부를 수 있다면 말이다.

역시 지금 가장 큰 문제는 곧 중립 지대에 찾아 올 가르시아 남매다.

생각을 정리한 사울은 카스텔, 아이나, 아르멜을 불렀다.

“아르멜, 아직 왕실에서는 따로 연락이 온 게 없지?”

“네, 전하. 아마 지금쯤 왕실에 소식이 당도하지 않았을까요?”

“그럴 거야. 무언가 답변이 오기까지는 시간이 걸릴 테고.”

이럴 때 가장 안전한 방법은 쥐 죽은 듯 가만히 있는 것이다.

아바마마나 누님 등이 무언가 명령을 내릴 때까지 말이다.

하지만 가만히 있는 게 좋은 방법은 아닐 것이다.

지금 이 대신전의, 나아가 중립 지대 다르센 왕국 세력의 책임자는 사울이다.

현장 책임자가 윗선의 명령만을 기다리며 가만히 있는 건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면 현명한 방법이 아니라는 게 사울의 생각이었다.

“머잖아 가르시아 남매가 중립 지대에 도착했다는 소식이 전해질 거예요. 그럼 우리가 취할 수 있는 방법은 일단 두 가지지요. 무언가 반응을 보이는 것 또 하나는 일단 모른 척 가만히 있는 것.”

사울의 말에 아르멜이 상황을 좀 더 자세히 설명했다.

“둘 다 일장일단이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형태로든 반응을 보인다면 가르시아 남매도 그에 따라 반응을 할 겁니다. 좋든 나쁘든 그 결과는 빠르게 드러나겠지요. 우리가 가만히 있다면 당분간은 시간을 벌 수 있을 겁니다. 설마 가르시아 남매가 대신전을 공격하지는 않을 테니까요. 하지만 전하께서 가르시아 남매가 두려워 가만히 있다는 말을 들을 수도 있습니다.”

“내 생각도 같아. 그럼 내가 어떻게 해야 할까?”

아이나가 말했다.

“무언가 반응을 보이는 게 좋지 않을까요?”

아이나의 패기 있는 의견에 사울이 흥미로운 표정으로 물었다.

“왜 그렇게 생각해요?”

“우리 존재가 숨겨져 있다면 모를까 애당초 저쪽에서도 우리에 대해 잘 알고 있습니다. 또 중립 지대의 모두가 전하께서 여기 계신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요. 전하께서 가만히 계시면 가르시아 남매를 두려워한다는 오명이 퍼질지 모릅니다.”

꽤 날카로운 지적이다.

왕자인 사울을 향한 오명이 퍼지면 생각보다 큰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

“일리 있는 생각이에요. 아르멜, 네 생각은 어때?”

사울은 아이나와 사이가 좋지 않은 아르멜이 다른 관점에서 의견을 낼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저는 찬성입니다.”

“그래?”

“아이나 씨 말에 틀린 부분은 없습니다. 지금은 말입니다.”

말에 뼈가 있지만, 어쨌든 아이나 의견에 동의한다는 것이다.

사울도 처음부터 아이나와 생각이 비슷했다.

가르시아 남매를 없애거나 이쪽에서 싸움을 걸 수는 없다.

그렇지만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으면 겁쟁이 취급을 받을 수도 있다.

왕자로서 겁쟁이라는 오명을 쓰면 이후 어떤 악재로 돌아올지 모른다.

어떻게든 가르시아 남매와 부딪쳐서 의미 있는 결과를…….

“저는 반대입니다.”

반대 의견을 낸 건 카스텔이었다.

카스텔의 말에 아이나도, 아르멜도 뜻밖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카스텔 님, 정말 반대하시는 겁니까?”

아르멜의 질문에 카스텔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혹시 가르시아 남매와 부딪치지 않고 전하께서 오명을 쓰지 않을 방법이 있는 겁니까?”

“없어요.”

“그런데 어째서…….”

“가르시아 남매와 직접 싸워 보았으니까요.”

“…….”

“전하, 그들은 위험합니다.”

이 자리에서 가르시아 남매와 직접 싸워 본 건 카스텔 뿐이다.

검은 마녀 카스텔.

가르시아 남매에게 패하기 전까지 6년 전쟁의 최강자로서 명성을 떨친 그녀의 말은 무게가 컸다.

사울도 한층 진지해진 표정이 되었다.

“나도 알아요. 가르시아 남매가 강하고 위험한 존재라는 것을.”

“모두들 가르시아 남매의 위험성을 과소평가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위험한가요?”

“아직 제 몸은 다 낫지 않았고, 만에 하나의 사태가 벌어지면 저로서도 전하를 지켜드릴 수 없습니다.”

“…….”

다른 사람은 카스텔이 신중한 의견을 낸 게 뜻밖이라 생각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사울은 그렇지 않았다.

회의 처음부터 카스텔이라면 이럴 것이라 생각했다.

그렇기에 반박 준비도 했다.

“그들이 우리를 공격하지 못할 상황과 명분을 만들어 가르시아 남매를 만난다고 해도 위험할까요?”

“그들이 상식적인 존재라면 완벽하게 대비할 수 있을 겁니다.”

“그들이 상식적인 존재가 아니다?”

“네. 저는 남매 모두와 싸워 보았습니다. 누나인 마리안은 저보다 한 수 아래이며 상식적인 존재였습니다. 하지만 동생인 베일은 다릅니다.”

사울은 카스텔이 하지 않은 말을 읽었다.

가르시아 남매 중 동생 베일은 카스텔보다 강하며 상식적인 자가 아니다.

확실히 가르시아 남매 중 누나인 마리안보다 베일 쪽의 악명이 더 높았다.

단순히 적국의 구국 영웅이라 악명이 높았던 게 아니다.

들리는 소문을 다 믿는다면 베일은 수십 명의 자국 귀족을 살해한 자다.

심지어 귀족 한 명을 죽이는 데서 그치지 않고 일가족을 몰살시킨 경우도 있다고 들었다.

사울은 그 소문을 다 믿지는 않았다.

소문이라는 건 과장되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근거가 없는 소문이라는 것도 드문 법.

소문은 과장되었을지 모르나 미치광이 소리를 들을 만한 행동은 저질렀을 가능성이 높다.

“…나도 가르시아 남매 특히 베일의 악명은 익히 들었어요.”

“많은 사람들이 그의 악명은 과장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과장이 아니라는 말인가요?”

“그가 미쳤다는 건 분명합니다.”

산전수전 다 겪은 카스텔의 입에서 미쳤다는 말이 나왔다.

비하가 아닌 문자 그대로의 뜻임을 사울은 알아보았다.

“그럼 마리안은?”

“그녀는 미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냉정하고 치밀하지요.”

“미쳤지만 강한 베일, 덜 강하지만 냉정하고 치밀한 마리안… 선생님이 그들과 만나려는 걸 말리는 건 이해할 수 있어요.”

사울의 말에 카스텔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제 말을 듣지 않으실 생각입니까.”

“왕자로서 겁쟁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쓸 수는 없으니까요. 어차피 그들이 온다면 이쪽에서 먼저 움직여야 주도권을 잡을 수 있을 테고.”

“알겠습니다.”

카스텔은 더 말하지 않았다.

자신의 조언이 무시당했다고 화를 내는 건 아니다.

그냥 지금은 할 말이 없을 뿐이다.

사울은 잠시 생각을 정리하고는 말했다.

“가르시아 남매와 싸우면 승산이 없지요. 그렇지만 한 번은 만날 필요가 있어요. 이왕 만나야 한다면 내가 먼저 그들을 부르는 게 좋겠지요.”

아르멜이 물었다.

“이 대신전으로 부를 생각이십니까?”

“그래, 선생님 말씀대로 베일 가르시아가 미친 자라 해도 대신전에서 난동을 부리지는 않겠지. 적국의 거물과 만나는 건데 회담 장소가 안전해야 한다는 건 기본이고. 우리에게도 그쪽에게도 안전한 장소인 이 대신전에서 가르시아 남매와 회담을 하는 게 어떨까?”

“저는 찬성입니다.”

“저 역시 찬성입니다.”

아르멜도, 아이나도 찬성한 가운데 카스텔은 얼른 대답하지 않았다.

표정 없는 얼굴로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모양이었다.

한참 뒤에야 카스텔이 입을 열었다.

“전하의 뜻이 그렇다면.”

카스텔 나름대로 사울의 안위를 지키기 위한 방법을 생각한 것이리라.

아무튼 카스텔까지 반대하지 않자 사울은 결정을 내렸다.

“그럼 저쪽에 우리 뜻을 알리도록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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