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복면으로 얼굴을 가린 남자와 여자.
얼굴을 철저히 싸맸기에 얼굴은 물론 머리카락 한 가닥 드러나지 않았다.
하지만 베일도 마리안도 상대의 정체를 알아보았다.
킬리안이 고개를 숙였다.
“반갑습니다.”
킬리안과 함께 온 칼립소가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베일은 그런 둘을 번갈아 보다 피식 웃었다.
“어쩌면 너희들이 올지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정말 왔군.”
마리안도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렇게 함부로 돌아다녀도 되는 건가? 우리 왕국도 다르센 왕국도 너희들에게 건 현상금이 많을 텐데.”
킬리안도, 칼립소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베일이 한마디 보탰다.
“악마 토끼풀 사업은 그만두었나?”
“…….”
확실히 킬리안도 마리안도 둘의 정체를 알고 있다.
하지만 킬리안과 칼립소는 당황하지 않았다.
두 사람이 마음만 먹으면 ‘율렌 섬의 공적’으로까지 불리는 둘을 체포하거나 목을 칠 수도 있는데 말이다.
“백작님이 저를 보냈습니다. 저는 백작님의 대리인이지요.”
킬리안의 말에 베일이 피식 웃었다.
“내가 백작을 두려워 할 것이라 생각하나? 여자 쪽은 누군지 모르겠지만 한 패겠지. 지금 이 자리에서 너희의 목을 베면 내 명성이 더 높아질 것 같은데?”
가르시아 남매가 마음만 먹으면 협박을 실천에 옮길 수 있다.
둘 다 무장을 하였고 방심하지도 않았다.
킬리안과 칼립소가 당장 기습을 해도 이길 가능성은 백에 하나도 되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킬리안은 여유를 잃지 않았다.
“백작님이 쓸모가 있지 않으십니까?”
킬리안의 질문에 마리안이 되물었다.
“지금 뭐라고 했나?”
“맥캘런 백작님이 쓸모가 있지 않느냐고 했습니다. 당신들과 백작님은 서로 쓸모가 있으니 서로 손을 잡았고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도 백작님이 쓸모가 있어서 그와 손을 잡았습니다. 말하자면 저와 당신들도 비슷한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것이지요. 저희를 베는 건 백작님과 저희 모두를 잃는 일입니다.”
범죄자 주제에 당당하다 못해 오만하기까지 한 킬리안의 말에 베일도 마리안도 순간 말을 잃었다.
얼마 후 베일의 눈이 번득였다.
마음만 먹으면 그가 찬 검을 빼 들어 겨눌 수도 있었다.
하지만 베일은 검을 빼지 않았다.
대신 웃음을 터뜨렸다.
“솔직하군. 솔직한 녀석은 나쁘지 않아. 앞에서 웃고 뒤에서 칼 꽂을 생각만 하는 귀족 나부랭이 보다는 솔직한 악먀 토끼풀 장사꾼이 낫지. 그렇지, 누나?”
마리안도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거짓말을 하러 온 건 아닌 것 같아. 베일, 이제부터 내가 이야기를 좀 해도 될까?”
“그렇게 해.”
킬리안도 칼립소도 가르시아 남매에 대해 들은 게 있다.
싸울 일이 있으면 베일이 먼저 나선다.
하지만 대화를 할 일이 있으면 마리안이 나선다.
마리안이 나섰다는 건 이제 가르시안 남매가 자신들을 대화 상대로 취급하겠다는 뜻이다.
그렇게 나선 마리안은 킬리안, 칼립소를 슥 훑어본 뒤 말했다.
“너희들이 누구든 무슨 짓을 했든 상관없어. 중요한 건 우리 편이냐 그리고 앞으로 우리 일에 쓸모가 있느냐니까.”
“알고 있습니다. 저 역시 무능한 녀석을 싫어하니까요.”
“자신만만하군. 그 자신감만큼 능력이 있나?”
“그렇습니다. 제가 누구고 무슨 일을 해 왔는지 아신다면 제 능력에 대해서도 잘 아시겠지요.”
“맞는 말이군. 하지만 네 입으로 듣고 싶다. 구체적으로 뭘 할 수 있지?”
“손을 더럽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전문가입니다.”
“좋아, 일단 합격.”
킬리안과 간단히 이야기를 나눈 마리안은 베일에게 몇 마디 귓속말을 했고 베일도 고개를 끄덕이며 의견을 말했다.
간단히 의논을 마친 마리안이 다시 말했다.
“지금 우리가 어디에 무엇을 하러 가는지 알고 있어?”
“물론입니다. 중립 지대에 가는 길이지요. 명목상 임무는 그 지역에서 활동하는 다르센 왕국 세력의 견제 및 가멜다 왕국의 영향력 확장이고요.”
“맞아, 그럼 우리가 가서 해야 할 일은?”
킬리안은 거침없이 대답했다.
“그거야 두 자작 분의 뜻에 달렸지요.”
“우리 마음대로 하라는 뜻인가?”
“지나치게 선을 넘거나 아군을 공격하지만 않으면 명분은 얼마든지 만들 수 있을 테니까요. 그렇다면 선을 넘지 않는 범위에서 두 분이 원하는 일을 마음껏 하고, 문제가 생기면 뒷수습을 하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그러자 듣고 있던 베일이 웃음을 터뜨렸다.
“똑똑한 친구인데.”
자리에서 일어난 베일이 킬리안에게 다가왔다.
“마음에 든다. 아무래도 우리는 말이 잘 통할 것 같군.”
“제 생각도 같습니다.”
“한 가지만 묻지. 혹시 백작이 너희들더러 날 죽이라고 했나?”
노골적인 질문과 함께 베일의 눈에 살기가 감돌았다.
대답을 잘못하면 칼이 날아올 것이다.
아무리 킬리안이라도 이 자리에서 베일의 칼을 받는다면 살아남기 어렵다.
하지만 킬리안의 가면 속 눈빛은 조금도 바뀌지 않았다.
눈매가 바뀌며 여유롭게 눈웃음을 치는 게 베일의 눈에도 똑똑히 보였다.
“그럴 리가요, 백작님도 바보는 아닙니다. 당신들을 제거할 생각이라면 함정에 빠트리고 또 군대를 준비하겠지요. 그런 일이 실제로 벌어진다면 자작님은 물론 저와 제 부하도 제거 대상이 되겠지요.”
“말인즉 백작이 우리를 제거하려 드는 날에는 친구가 될 수도 있단 말인가?”
“그렇습니다.”
대답을 들은 베일은 살기를 거두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나는 이 녀석이 마음에 들어.”
“동감이야.”
다시 마리안이 대화의 끈을 잡았다.
“우리와의 동행을 허락하지.”
“감사합니다.”
“혹시 우리가 너희들에게 시키면 곤란한 일 같은 건 있나?”
“몇 가지 있습니다. 일단 전 사울 왕자를 직접 건드리지 말라는 엄명을 받았습니다. 두 분도 마찬가지겠지요.”
“그래, 그 외에는?”
“그 외에는 무엇이든 크게 상관없습니다. 일할 때 외에는 저희들을 간섭하지 마시고, 저희들이나 저희 사업을 방해하지만 않으신다면.”
다소 무례한 말투였지만 마리안은 개의치 않았다.
“그 정도는 들어줄 수 있다.”
“감사합니다.”
“그럼 나도 몇 가지 충고를 해야겠군.”
“무엇입니까?”
“먼저 너희들의 얼굴 말이다. 복면은 오랫동안 얼굴을 감추기 좋은 물건이 아니다. 너희들의 얼굴이 드러나고 다른 누군가의 눈에 띈다면 너희나 우리나 좋을 건 없겠지.”
“말씀대로입니다.”
“검은 흉성 흉내라도 내 보는 게 어떤가?”
마리안의 말에 복면 속 킬리안의 얼굴 속에 미소가 스쳤다.
“가면이라도 쓰라는 말씀이십니까?”
“그래, 검은 흉성이 처음 전장에 모습을 드러낸 이래 몇 년 동안이나 그녀의 얼굴은 수수께끼였지. 우리에게 패해 가면이 깨지기 전 까지는.”
“지금은 맨얼굴로 다니더군요.”
“더 이상 살벌한 가면을 쓰면서 얼굴을 감출 필요가 없다는 것이겠지. 분명한 건 카스텔의 가면이 강제로 벗겨지기 전까지는 누구도 그녀가 그렇게 재미없게 생긴 녀석인 줄 몰랐다는 것.”
“재미없게 생겼다고요? 그 정도면 예쁜 축에 들어갈 것입니다만.”
“검은 흉성이라면 좀 더 괴물처럼 생긴 게 재미있었겠지.”
“후훗, 그건 그렇습니다.”
“어쨌든 우리와 함께하려면 얼굴을 완벽하게 숨겨야 한다. 우리 눈앞에서 혹은 다른 사람 앞에서 너희들의 얼굴이 드러나는 순간 너희는 죽는다.”
단순한 협박이 아니다.
구국 영웅이라지만 율렌 섬의 공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킬리안 비셔스를 부하로 두는 건 지극히 위험한 일이다.
그의 정체가 드러나는 순간 가르시아 남매는 즉각 킬리안을 죽여 입을 막으려 할 것이다.
하지만 킬리안은 이번에도 웃었다.
“걱정 마시길. 그 정도 앞가림은 충분히 할 수 있습니다.”
“아무튼 얼굴은 확실히 숨겨라. 그리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충고하지.”
“말씀하십시오.”
“우릴 실망시킨다면 너희는 쫓겨나게 될 거다. 그리고 어떤 형태로든 우리에게 해를 끼치려 하면 너희는 죽는다. 너희는 물론 하얀 까마귀라는 조직에 소속된 모두를 한 놈도 남김없이 없애 버리겠다.”
마리안의 눈에도 살기가 번득였다.
과장된 말로 협박을 하는 게 아니다.
미래에 벌어질지 모르는 일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런 마리안의 말에 침묵을 지키고 있던 칼립소마저도 움찔했다.
그렇지만 킬리안은 여전히 평온한 채로 말했다.
“알겠습니다, 꼭 기억하지요.”
“그럼 되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묻지. 너희들을 뭐라고 부를까?”
킬리안이 거침없이 대답했다.
“에드라고 부르십시오.”
칼립소도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사라입니다.”
둘의 이름, 아니 가명을 들은 마리안과 베일 모두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들어 본 적 있는 이름이군.”
“이미 가르쳐 드린 적 있으니까요.”
“좋아, 에드, 그리고 사라. 이번 일이 끝날 때까지 친구로 남길 바란다.”
“저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할 말을 마친 ‘에드’와 ‘사라’는 가르시아 남매의 저택에서 나갔다.
둘이 사라진 뒤 마리안이 말했다.
“둘 다 보통 녀석이 아니군. 특히 킬리안 쪽은.”
베일도 동의했다.
“맞아, 어설픈 녀석이라면 이 자리에서 반쯤 죽여 놓은 뒤 쫓아낼 생각이었는데.”
“그 여자는 아마도 킬리안의 부하겠지. 그러고 보니 킬리안의 부하 중 실력 있는 다크 엘프가 있었지. 이름이… 맞아, 칼립소였던가.”
“그 여자가 칼립소라고 생각해?”
“아마도.”
“그것들이 누구든 상관없잖아? 쓸 수 있을 만큼 굴리고 쓸모가 없어지면 버리고 허튼 짓 하면 목을 베면 되지.”
“그렇게 간단히 볼 문제가 아닌 것 같아.”
“어째서?”
“그들은 능력이 있을 거야. 당장은 우리에게 도움이 되겠지. 차라리 놈들이 백작의 충복이라면 예측하기도 대응하기도 쉬울 테니 큰 문제가 아니야. 하지만… 놈들은 백작의 충복이 아니야.”
베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놈들이 마음에 들었지만 확실히 다루기 까다롭겠군. 차라리 중립 지대에서 기회를 봐서 없애 버릴까?”
“그것도 하나의 방법이지. 하지만 명분 없이 그들을 제거하면 우린 백작의 적이 될 거야.”
“누나는 백작과는 적대를 하고 싶지 않은 거야?”
“우리는 백작에게 원한이 없잖아? 백작도 우리에게 직접적인 원한은 없고. 그런데 굳이 백작을 적대할 이유는 없지. 비록 왕실이 우리 편이지만, 왕실은 약해. 가멜다 왕국을 떠날 게 아니라면 우리 편을 좀 더 만들어 두는 게 좋아.”
베일은 마리안의 말을 반박하지 않았다.
대신 의견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투덜거렸다.
“젠장, 골치 아파. 이럴 거면 차라리 전장이 훨씬 낫겠어. 한창 피 터지게 싸울 때는 모두가 우리 눈치를 보았는데, 이젠 우리가 다른 놈들 눈치를 봐야 한다니.”
“어쩔 수 없는 일이지. 하지만 기다리다 보면 때가 올 거야.”
“다시 전쟁이 시작된다면?”
“그래.”
마리안의 말에 베일은 고개를 저었다.
“전쟁이 일어나길 기다릴 필요는 없잖아? 필요하다면 일으켜야지.”
베일의 번득이는 눈빛을 본 마리안이 엄하게 말했다.
“지금은 전쟁을 일으킬 때가 아니야. 우리가 중립 지대에 가도 선을 넘지는 말아야 해.”
“선을 넘지 않는다는 건?”
“간단해 사울 왕자와 대신전, 카멜 산을 직접 건드리지는 마. 절대로. 이미 우린 적이 넘쳐날 만큼 많아. 그것만 지키면 중립 지대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무언가를 찾을 수 있을 거야.”
누나의 엄한 눈길에 베일도 수긍했다.
“이번에는 누나 말을 따르도록 하지.”
그런 베일의 모습을 본 마리안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힘으로는 자신보다도 강하지만, 때로는 통제 불능인 동생.
그를 통제하고 지킬 수 있는 건 오직 자신뿐이었다.
* * *
가르시아 남매가 중립 지대에 온다.
이 소식을 들은 사울은 한동안 대신전에서 얌전히 지내기로 했다.
아직 가르시아 남매가 중립 지대에 도착하지 않았건만, 온다는 소식만 들어도 몸조심을 해야 할 만큼 그들의 존재감은 컸다.
더군다나 가르시아 남매가 중립 지대에 온다는 건 가멜다 왕국에서 중립 지대를 주시하기 시작했음을 뜻했다.
다르센 왕국의 왕자로서, 당분간은 몸조심을 할 필요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