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사울은 다 읽은 편지를 돌려주며 말했다.
“대신전에서 혹은 교단에서 그들을 부른 것은 아니지요?”
“물론입니다, 전하께서도 가르시아 남매에 대해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사울은 콜리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알았다.
가르시아 남매는 가멜다 왕국의 구국 영웅이지만, 자국에서도 크게 존경받지는 못했다.
자국의 여러 귀족 세력과 부딪쳐 결국 귀족 여럿을 죽였다던가.
가멜다 왕국 귀족의 절반이 가르시아 남매와 철천지원수라는 소문도 있었다.
물론 소문을 다 믿을 수는 없다.
하지만 대신전에나 교단에서 가르시아 남매를 이곳에 부른 장본인이 아니라는 건 알 수 있었다.
대신전이나 교단이 중립 지대에 가르시아 남매를 불러 얻을 이득이 없다.
가르시아 남매가 무언가 평지풍파를 불러일으켜 피해를 겪지 않으면 다행이다.
“대신전에서 가르시아 남매를 거부할 수는 없겠지요?”
“그렇습니다, 이미 전하를 받아들였는데 무슨 명분으로 가르시아 남매를 거부하겠습니까.”
“곤란하군요.”
이건 정말 예상치 못한 사태다.
가르시아 남매.
다르센 왕국의 공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자들.
그들이 자신을 죽이러 온 것 같지는 않다.
휴전 상황에서 왕자를 죽이는 방식으로 선전 포고를 할 생각이 아니라면 말이다.
‘그들이 날 노리는 게 아니라면…….’
사울의 시선이 그리고 다른 모두의 시선이 카스텔 쪽으로 쏠렸다.
가르시아 남매와 카스텔의 관계는 모두가 알고 있다.
가르시아 남매가 카스텔과 싸워 이겼다.
하지만 끝장을 내지는 못했다.
가르시아 남매가 어떤 형태로든 카스텔을 끝장내러 중립 지대에 온다.
왕자를 죽이러 오는 것보다 훨씬 설득력 있는 이야기다.
“…….”
카스텔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사울은 카스텔의 눈빛이 번득이는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그 어느 때보다 동요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이건 정말 큰일입니다.”
운을 뗀 아르멜이 현 상황을 설명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전하께서 이 중립 지대에서 그나마 안전하게 활동할 수 있었던 건 카스텔 님 덕분이었습니다. 대족장 세네카를 제외하면 중립 지대에서 카스텔 님보다 강한 존재가 있다고는 상상하기 어렵고, 따라서 전하의 안전도 보장받았지요. 하지만 가르시아 남매가 온다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아르멜의 말대로다.
정말 가르시아 남매가 온다면 그것만으로도 사울의 안전을 담보하기 어려워진다.
최소한 지금처럼 중립 지대를 마음껏 휘젓고 다니는 건 거의 불가능해질 것이다.
‘골치 아프군.’
사울도 여러 가지 방향으로 생각을 해 보았다.
몇 가지 생각이 떠올랐지만, 어떻게 생각해도 단독으로 움직일 사안은 아니었다.
사울은 자신들끼리 의논을 할 필요를 느꼈다.
“대신관님, 그럼 교단이나 대신전에서 가르시아 남매를 부른 건 아니지만 그들이 이곳에 오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고 생각하면 되겠습니까?”
“저와 신전의 입장은 그러합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이만 실례하지요.”
사울은 일행과 함께 콜리타의 방에서 나갔다.
홀로 남은 콜리타는 한숨을 쉬며 산더미처럼 쌓인 서류 더미로 향했다.
홀로 서류를 살피던 콜리타는 문득 기침을 했다.
일반적인 기침과 재채기가 아니었다.
몇 번이나 기침을 한 끝에 간신히 몸을 수습한 콜리타는 쓴웃음을 지었다.
“이 늙은 몸이 언제까지 버텨 줄지 모르겠군, 하지만 지금은 쉴 수도 없으니…….”
* * *
콜리타의 방에서 나온 사울은 잠시 몸을 추스른 후 곧바로 카스텔, 아이나, 아르멜을 불렀다.
“아르멜.”
“네, 전하.”
“일단 아바마마와 누님께 이 사실을 보고해.”
“알겠습니다, 이왕 수도에 소식을 보내는 김에 전하께서 손에 넣으신 그 보석에 대해 이야기를 할까요?”
“그렇게 해.”
마법 아이템을 만드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그 분야를 잘 다루는 전문 세공사나 마법사 혹은 연금술사가 필요하다.
상황에 따라서는 셋 모두가 필요할 수도 있다.
중립 지대에서 세공사나 마법사를 찾느니 왕국에 도움을 구하는 게 나았다.
왕자가 힘들게 손에 넣은 마법 보석을 아바마마가 빼앗지는 않을 테니까.
“이번 원정에 협조해 준 대신전에 무슨 보상을 해 줄 지는 조만간 결정하기로 하고… 문제는 가르시아 남매야.”
다시 아르멜이 말했다.
“대신전의 우리 쪽 정보원과 만나 보았습니다.”
“역시 확실한 정보인가?”
“틀림없습니다. 어제 가멜다 왕국 쪽에서 정보가 들어왔답니다. 곧 가르시아 남매가 중립 지대로 파견된다고.”
“그럼 갑자기 가르시아 남매가 역병이라도 걸리지 않는 한 중립 지대에 오겠군.”
사울의 시선이 카스텔을 향했다.
“우리 중 가르시아 남매와 만나 본 건 선생님뿐이지요. 어떻게 생각해요?”
카스텔이 천천히 대답했다.
“그들은 저를 노리고 움직이는 것 같습니다.”
“내가 아닌 선생님을 노린다?”
“네.”
가르시아 남매가 자신을 노리고 있다.
망상이 아니라 일리 있는 생각이다.
가르시아 남매는 카스텔을 이겨서 지금의 명성을 쌓았다.
하지만 카스텔을 끝장내지는 못했다.
과거, 아니 지금이라도 카스텔을 끝장낸다면 가르시아 남매의 명성은 더욱 높아질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그들이 움직일 이유는 충분했다.
하지만 사울은 다른 쪽으로 생각해 보았다.
정말 가르시아 남매가 카스텔을 노리는 것이라면, 말 그대로 끝장을 내러 오는 것일까?
사실 지금 상황에서는 그들이 카스텔을 끝장내기 어렵다.
그도 그럴 것이…….
“전하.”
아이나가 말했다.
“그들이 정말 카스텔 씨를 노린다면 왜 지금일까요?”
“나를 눈엣가시로 여기고 있으니까요.”
“그렇겠지요, 하지만 지금 우리 왕국과 가멜다 왕국은 휴전 중이에요. 아무리 중립 지대라 해도 가르시아 남매가 카스텔 씨를 공격하는 건 자칫 휴전을 깨는 일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 더군다나 전하도 계신데.”
아이나의 생각은 사울의 생각과 같았다.
아르멜도 비슷한 의견을 냈다.
“아이나 씨의 말 대로입니다. 우리가 명분을 제공하지 않는 한 가르시아 남매가 카스텔 님이나 전하를 공격하는 건 가멜다 왕국의 위신에 해를 끼칠 수 있습니다. 휴전 조약은 아직 건재하니까요.”
사울은 이 의견에도 동의했다.
“두 사람의 말에도 일리가 있어요, 선생님.”
하지만 카스텔은 자기 생각을 바꾸지 않았다.
“가르시아 남매는 명분 따위에 얽힐 자들이 아닙니다.”
“…….”
“그들이 정말 이곳에 온다면 어떤 형태로든 절 노릴 겁니다. 그럼 전하도 위험합니다.”
“그럼 내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아르멜이 대신 말했다.
“방법은 세 가지겠지요. 가르시아 남매와 어떻게든 힘으로 결판을 내거나, 협상을 하거나, 전하와 카스텔 님이 물러나거나.”
카스텔이 고개를 끄덕였다.
세 가지 방법.
어느 쪽이든 택하기 쉽지 않았다.
결판을 낸다는 건 싸우거나, 그에 준하는 방법으로 움직인다는 뜻이다.
힘 싸움으로 가르시아 남매를 이길 수 있을까?
기적이 있지 않는 한 불가능할 것이다.
협상도 쉬운 일이 아니다.
협상을 하려면 이쪽에서 무언가 제시할 카드가 있어야 한다.
가르시아 남매 정도의 인물들이 맨입으로 협상을 받아들일 리 없었으니까.
만약 왕자의 몸으로 적국의 영웅과 협상을 하여 잘못된 결과를 만들면 지금껏 쌓아 올린 모든 게 무너질 수 있다.
물러가는 건 가장 안전한 방법이다.
하지만 물러간다면 그동안 중립 지대에서 쌓아 온 것들을 상당수 포기해야 한다.
‘어느 쪽이든 쉽지 않군.’
가장 쉽고 빠르며 또 안전한 건 이대로 물러가는 것이다.
지금껏 중립 지대에 투자한 시간이 물거품이 되고 도망쳤다는 오명을 뒤집어쓰겠지만 최악의 사태는 피할 수 있을 것이다.
“조금 생각이 필요할 것 같아.”
사울의 말에 모두들 동의했다.
모두를 대표해 아이나가 말했다.
“저희들도 방법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렇게 해요.”
* * *
중립 지대의 대신전에 다르센 왕국의 사울 왕자와 카스텔이 머무르고 있다.
그것만으로도 가멜다 왕국 입장에서는 신경이 쓰이는 일이었다.
사울 왕자는 최근 상당한 능력과 성과를 보이며 주목받고 있다.
‘검은 흉성’으로 불리는 카스텔의 악명은 더 말이 필요 없다.
그들이 중립 지대의 대신전에 머무르며 활동하는 건 그것만으로도 경계할 일이다.
이에 가멜다 왕국에서는 결단을 내렸다.
검은 흉성을 이긴 가르시아 남매를 중립 지대에 파견하기로.
“이상 폐하의 명령입니다.”
가르시아 남매는 국왕이 서명한 명령서를 읽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폐하의 명을 받들겠습니다.”
국왕의 사절이 떠나고, 가르시아 남매는 응접실에서 둘만의 회의를 시작했다.
넓은 저택에 고용인이 여럿 있었지만 믿을 수 있는 자를 제외하면 누구도 얼씬거리지 못하게 했다.
중요한 이야기도 있고, 찾아올 손님도 있었으니까.
동생인 베일이 먼저 입을 열었다.
“백작이 손을 잘 써 줬군, 고맙다고 해야 하나?”
이번 중립 지대 파견은 전적으로 안소니가 힘을 써 준 덕분에 성사될 수 있었다.
하지만 누나, 마리안은 그런 안소니에게 고마움을 표하지 않았다.
“전혀, 그가 우리를 위해서 힘을 써 주었을 리는 없으니까.”
“역시 그런가?”
“뻔하지. 우리 같은 골칫거리를 의미 없이 변방에 처박아 두기도 어렵다. 수도에 놔두기도 어렵다. 적국이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 숙청하기도 어렵다. 그런 논리로 모두를 설득했을 거야. 제 나름대로의 꿍꿍이를 품은 채로.”
마리안의 말에 베일도 고개를 끄덕였다.
무력으로는 자신보다 한 수 아래지만, 상황을 보는 안목은 자신보다 한 수 위인 누나다.
“그럼 역시 백작이 사람을 보내겠지?”
“아마도. 우리가 내일 떠날 예정이니 오늘 안에 누군가 찾아올 거야.”
“아무리 백작이 우릴 도왔다지만 감시꾼을 붙이는 건 마음에 안 드는데.”
베일의 말에 마리안이 손을 저었다.
“안 돼.”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지 알아?”
“백작이 보낸 자를 반 죽여 놓은 뒤 쫓아낼 생각이지?”
“정답.”
“다시 말하지만 안 돼. 나도 백작은 마음에 안 들어. 우릴 중립 지대에 보내는 것도 분명 나름대로의 의도가 있을 거야. 하지만 지금 백작은 우리의 적이 아니야.”
베일이 코웃음을 쳤다.
“백작이 우리 편이라고? 누나, 지금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그래, 당장 우리에게 칼을 들이대거나 당장 우릴 제거할 음모를 꾸미지 않는 귀족은 흔치 않으니까. 거물 귀족 중에서는 더더욱 그렇고.”
베일은 잠시 생각해 보았다.
안소니 맥캘런 백작을 제외한 왕국의 실권자 중 자신들의 편이거나 하다못해 적은 아니라고 단언할 수 있는 귀족이 있는가.
떠오르는 귀족이 거의 없었다.
그나마 왕실에서 자신들을 좋게 보고 있지만 대부분의 귀족들의 미움을 받고 있는 터라 자신들의 편을 들어 주는 데에도 한계가 있었다.
이 나라는 귀족 세력이 왕실보다 강하니까.
“누나 말뜻은 알겠어. 하지만 백작이라고 우릴 좋아하진 않을 것 같은데.”
“물론이지, 하지만 백작이 우릴 적대한다고 해도 지금은 아니야. 중립 지대에 가서 우리의 힘을 더 키울 때까지는 이용할 수 있어.”
“그렇다면 할 수 없지.”
베일이 말을 알아듣자 마리안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에는 그래도 말이 잘 통했다.
말이 통하지 않는 베일을 설득하는 건 누나로서도 정말 힘든 일인데, 거기까지 가지 않아 다행이다.
중요한 이야기가 마무리되면서 두 사람의 분위기는 화기애애해졌다.
세상에 둘뿐인 가족이자 친구로서 두 사람은 즐겁게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그러다 어느 순간 약속이나 한 듯 말을 멈췄다.
“온 것 같은데.”
“나도 느꼈어.”
상당한 강자의 기운이다.
힘을 숨기고 있기에 가르시아 남매 수준의 실력자가 아니었다면 쉽사리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다.
잠시 후 하녀가 달려와 알렸다.
“자작님, 손님이 오셨습니다.”
눈빛이 날카로워진 베일이 물었다.
“맥캘런 백작이 보냈다던가?”
“네.”
역시 눈빛이 날카로워진 마리안도 물었다.
“몇 명이지?”
“두 명입니다. 한 명은 남자, 한 명은 여자인데 둘 다 얼굴을 가리고 있습니다.”
“데리고 와.”
곧 하녀는 두 손님을 데리고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