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세 성기사는 길을 잃고 헤매던 중 유적을 발견했고, 절벽에 생긴 길을 지나 유적에 접어들었다고 했다.
성기사들도 낯선 길과 마나의 기운에서 위험을 감지했지만 다른 대안이 없었기에 위험을 감수하고 절벽 길을 건넜고 결국 유적을 발견했다.
즉 이 길을 따라가다 보면 유적이 나온다는 것이다.
유적까지는 먼 거리였음에도 마나의 기운이 느껴졌지만, 절벽 길을 지날 때까지는 별일 없었다.
그렇지만 조만간 무언가 나올지 모른다.
원정대 모두 같은 생각을 하는지 절벽 길을 지나가는 동안 긴장을 늦추는 사람이 없었다.
일단 절벽 길은 무사히 지나쳤다.
여전히 수상한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황량한 벌판에 간간이 풀뿌리나 보일 뿐 동물이나 새 한 마리 눈에 띄지 않았다.
유적이 점점 가까워졌고, 뚜렷해졌다.
이제 굳이 마법을 쓰지 않아도 유적의 모습이 똑똑히 보였다.
황야에 덩그러니 놓인 커다란 건물 몇 채.
오래 전에 버려진 탓에 멀쩡한 건물은 없었다.
그나마 중심부에 위치한 건물은 어느 정도 형체가 남아 있었지만, 나머지는 뼈대도 온전치 못했다.
‘들은 것보다 더 상태가 엉망이군. 하지만…….’
접근할수록 마나의 기운이 짙어졌다.
아마 저 유적 중심부, 비교적 온전한 건물 어딘가에 이 기운의 근원이 있는 듯했다.
그것이 무엇이든 한번 조사해 볼 가치는 충분했다.
위험을 이겨 낼 수 있다면 말이다.
점점 유적이 가까워 오는 가운데 주변을 살피던 카스텔이 사울에게 말했다.
“전하, 제가 앞에 나서겠습니다.”
사울 곁을 지키는 대신 원정대의 선두에 선다.
측방이나 후방에는 위험이 없다는 뜻이다.
“그렇게 해요.”
가능한 희생자는 내지 않아야 한다.
그러려면 적이 나타날 가능성이 높은 전방에 최강자인 카스텔을 세우는 것이 맞다.
그렇게 카스텔이 앞장서고, 사울은 원정대 중간에서 경계 태세를 갖췄다.
일행을 다 합쳐도 서른 명이 되지 않는다.
전투가 벌어지면 싸울 수 있는 사람은 다 싸워야 할 것이다.
한동안은 별일이 없었다.
유적에 접근할수록 마나의 기운이 짙게 느껴졌지만 무언가가 나타나지는 않았다.
마침내 원정대는 유적 코앞에 도달했다.
멀리서 본 대로 유적은 완전히 폐허가 된 돌무더기들 한가운데 그나마 온전한 건물 하나만 남은 형상이었다.
유적 바깥쪽, 문인지 벽인지 모를 폐허에 새겨진 희미한 문자가 보였다.
“저게 그 고대 문자인 모양이군.”
사울은 고대 문자를 읽을 줄 몰랐다.
당연한 일이었다.
근 2천 년 전에 쓰던 문자니까.
지금 고대 문자를 읽을 줄 아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그 극소수의 인물 중 한 명이 대신전에 있었다고 한다.
‘슬랙트’
유적에서 살아남은 성기사가 그려 온 문자를 해석한 결과 나온 단어다.
아마도 이 폐허의 이름으로 보였지만 자세한 것은 알 수 없었다.
“일단 돌아가자! 유적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천막을 친다!”
적이 있다면 유적 안에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유적 입구에 천막을 치는 건 위험하다.
원정대는 일단 유적에서 조금 물러난 뒤 천막을 쳤다.
천막을 치고 점심 식사를 한 뒤 다시 움직이기로 했다.
점심 식사 때는 별일이 없었다.
하지만 식사 후 조사 계획을 의논하던 원정대의 의견이 엇갈렸다.
“절반의 병력은 천막을 지키고 나머지 병력이 유적을 조사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아직 이곳 상황을 제대로 모르는데 함부로 병력을 나누는 건 위험합니다. 차라리 모두 들어갔다가 나오는 게 나을 겁니다.”
천막을 치기 전 한 번이라도 전투가 있었다면 모두들 끝까지 함께 움직이자고 했을 것이다.
가뜩이나 많지 않은 병력을 나누는 건 그 자체로도 위험한 일이니까.
하지만 마나의 기운은 느껴져도 당장 적은 보이지 않았기에 다른 의견이 나왔다.
병력을 나누자는 의견과 함께 움직이자는 의견.
양쪽 모두 일리가 있다.
천막을 지키는 것도 나름대로 중요한 일이다.
모두 유적으로 갔다가 빈집털이라도 당하면 큰일이다.
하지만 사울은 생각이 달랐다.
천막을 지키려면 상당한 전력을 남겨 두어야 할 것이다.
그러다 유적 안에서, 그리고 천막도 공격을 받는다면 각개 격파 당하거나 한쪽이 전멸할 가능성이 있다.
“전력을 나누었다 한쪽이나 양쪽이 전멸 당하는 것보다는 함께 움직이는 게 나을 것 같다.”
의견이 팽팽한 가운데 사울이 한쪽 편을 드니 저울추가 급격히 기울어졌다.
그러자 사울을 따라온 성기사 한 명이 말했다.
“전하, 혹시 천막이 공격이라도 당한다면…….”
“알고 있어요. 하지만 지금은 각개 격파가 더 위험해요.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여 원정대 모두가 며칠 분량의 식량을 휴대하도록 해요. 물은 급하면 마법으로 만들 수 있으니 조금만 휴대하도록 하고.”
“알겠습니다.”
사울의 결론에 방침이 정해졌다.
곧 원정대는 전원 천막을 비우고 다시 유적으로 향했다.
말들은 천막이 있는 곳에 묶어 두었고 모두들 식량이 든 가방을 짊어지고 걸음을 옮겼다.
사울도 식량이 든 가방을 직접 메고 걸었다.
“전하께서 직접 짐을 질 필요는 없습니다만.”
“괜찮아.”
왕자가 직접 짐을 짊어짐으로서 휘하 병력에게 모범을 보일 수 있다.
또 만에 하나 홀로 떨어졌을 때 최소한의 식량도 확보할 수 있다.
이런 이유로 사울은 직접 묵직한 가방을 짊어진 채 유적으로 들어갔다.
“굉장히 오래 된 유적인 것 같은데.”
“천 년도 넘었지?”
“천 년이 뭐야, 고대의 유적이라면 2천 년은 되었을 거야.”
원정대의 모두들 호기심을 감추지 못했다.
지금보다도 더욱 찬란했다는 마법 문명의 시대.
2천 년 전 고대의 유적은 그 자체만으로도 호기심을 가지기 충분했다.
게다가 마나의 기운이 진하게 흐르고 있는 유적이라면 아직 살아 있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어마어마한 가치가 있는 보물이나 아티팩트가 있을 가능성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위험한 무언가가 있을 가능성도 있다.
원정대는 호기심 반, 경계 반으로 주변을 살폈다.
“…….”
긴장감 속에 사울은 여기까지 따라온 데이빗을 바라보았다.
데이빗도 무기를 들었다.
사람 키만 한 지팡이, 쿼터 스태프였다.
무기 중에서도 가장 다루기 쉽고 잘 쓰면 스스로 지키기에 충분한 물건이다.
하지만 데이빗의 자세를 보니 잘 쓰는 것 같지는 않았다.
적을 제대로 공격하기는커녕 적의 공격을 한 번만 막아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다.
‘이 녀석이 죽거나 다치면 지금껏 쌓아 온 대신관과의 관계도 무너지겠지.’
생각해 보면 참으로 냉혹한 계략이다.
사울이 데이빗을 희생시킬 수 없음을 알고, 그를 이용해 사울의 행동을 제한하는 조치를 취한 것 아닌가.
만에 하나 사울이 데이빗의 희생을 각오하거나 조장한다면 이 소년 신관은 살아남기 어려울 것이다.
그만큼 사울을 믿는다는 것일까 아니면 선을 넘지 않으려는 사울의 성향을 이용하려는 것일까.
대신관 콜리타의 영악함에 사울은 혀를 내둘렀다.
한참 이동하던 중 사울이 한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유적의 마나는 저곳에서 흐르는 것 같군.”
사울이 지목한 곳은 그나마 건물의 형태가 온전한 유적 중심이었다.
곁에 있던 아이나가 동의했다.
“그렇습니다. 무언가가 있으면 분명 저 건물 안일 겁니다.”
“이왕 여기까지 왔으니 한번 들어가 보아야겠지요. 일단 주변을 수색한 뒤 이상이 없으면…….”
사울의 말문을 막은 것은 어느새 다가온 카스텔이었다.
“전하. 전투 준비를.”
“적인가요?”
“그럴 가능성이 높습니다.”
카스텔의 조언을 들은 사울은 즉각 명령했다.
“모두들, 경계하라!”
사울의 명령에 원정대 전원이 무기를 들었다.
과연 어떤 적이 나타날까.
이런 황폐한 곳에 원주민이나 거대한 몬스터는 살기 어렵다.
사울은 이곳에 대한 정보를 떠올렸다.
‘분명 그 성기사들이 목격한 몬스터는 마법 몬스터라고 했어.’
‘마법 몬스터’는 몬스터의 종류 중 하나다.
동물이나 식물처럼 살아 있는데 강하고 흉포한 것들은 생물 몬스터.
어떤 이유에서든 죽은 자들이 되살아나 움직이는 건 언데드 몬스터.
그리고 마법 몬스터는 삶과 죽음과는 별개로 마법의 힘으로 움직이는 몬스터다.
골렘, 정령, 혹은 마법으로 움직이는 인형 같은 것들 말이다.
“적이다!”
누군가의 외침 소리에 모두들 시선이 한곳에 쏠렸다.
폐허 구석에서 모습을 드러낸 몬스터는…….
“역시 마법 몬스터인가.”
나타난 건 거미 아니, 거미처럼 생긴 무언가였다.
사람만 하거나 사람보다 큰 식인 거미가 아니다.
하다못해 생물이거나 언데드도 아니었다.
생긴 건 거미지만 어떤 종의 거미와도 달랐다.
완벽한 구체에 가까운 둥그스름한 몸.
가느다란 막대기 여러 개를 꽂아 만든 듯한 여덟 개의 다리.
낫 두 개를 붙여 놓은 듯한 입과 창처럼 날카로운 발끝.
그리고 푸르스름하게 빛나는 금석처럼 매끈한 피부.
거미라기보다는 금속으로 간단하게 만든 거미 인형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그런 거미 수십 마리가 떼를 지어 모습을 드러냈다.
대부분이 사람 못지않게 컸고 심지어 사람보다 훨씬 큰 놈도 있었다.
“전하, 저게 무엇입니까?”
놀란 아이나가 물었다.
“마법 몬스터 같아요. 책에서는 본 적 없는 종류이지만.”
“그렇다면 싸우는 수밖에 없겠군요.”
“맞아요.”
원정대는 진형을 만들어 거미 떼와 대치했다.
거미 떼는 당장 원정대를 덮치진 않았다.
먼저 덮치지 않는다면 굳이 싸울 필요는 없을 것이다.
소란을 피우면 어디에 숨어 있는 몬스터가 또 나타날지 모르니까.
잠시 대치가 이어지는 가운데,마침내 거미 떼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물러서는 게 아니라, 똑바로 이쪽으로 다가왔다.
싸움을 피할 수 없음을 안 사울이 명령했다.
“공격하라!”
사울의 명령에 원정대의 전방과 후방이 동시에 움직였다.
전방에서는 선두에 있던 카스텔이 움직였다.
카스텔이 소환한 수십 가닥의 검푸른 빛의 촉수가 모습을 드러냈다.
하나하나가 막강한 위력을 가진 촉수가 춤을 추며 거미 떼를 덮쳤다.
동시에 후방에 대기하고 있던 마법사 몇 명도 일제히 움직였다.
마법사들은 각각 준비하고 있던 마법을 거미 떼에게 쏟아부었다.
사울도 솜씨를 발휘했다.
보석이 빛나는 마법 검을 치켜들며, 시동어를 외었다.
“파이어 월!”
달려오는 거미 떼의 전방에 불의 장벽이 피어올랐다.
사람 키보다 높은 불의 장벽은 앞뒤 가리지 않고 달려오는 모든 거미들을 집어 삼켰다.
카스텔의 마법도, 다른 마법사들의 마법도 거미들을 공격했다.
불이 이글거리는 소리와 땅이 파이는 소리, 그 외 이것저것 부딪치는 소리가 어우러졌다.
“긴장을 늦추지 마라!”
“튀어나오는 놈들이 있을지 모른다!”
사울 휘하의 정예 병력과 신전의 성기사들은 원정대 전방에서 전투를 기다렸다.
중군의 사울이나 후방의 마법사들이 다치지 않게 근접해 온 적들과 맞서 싸우는 게 그들의 임무였다.
“온다!”
마법 세례를 뚫은 적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절반 정도는 박살이 났지만, 나머지는 멀쩡하든 다치든 개의치 않고 똑바로 달려왔다.
사람만 한 거미 떼가 웬만한 사람보다 빠른 속도로 달려오는 광경은 그 자체만으로도 위압적이었다.
“……!”
몬스터와 마주해 본 경험이 없는 몇몇이 동요했다.
그 사실을 깨달은 사울이 언성을 높였다.
“정신 차려라! 검은 마녀가 있고 내가 있는 한 저들은 우리의 상대가 못 된다!”
사울은 카스텔이 조금 불쾌해 할 것을 알면서도 굳이 검은 마녀를 언급했다.
가르시아 남매에게 패했지만, 아직 검은 마녀의 명성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또 사람들에게는 ‘카스텔’보다 ‘검은 마녀’ 혹은 ‘검은 흉성’이라는 별칭이 더 익숙하다.
생각대로 ‘검은 마녀’를 외친 효과는 확실했다.
동요하던 자들이 순식간에 정신을 차렸다.
방심하면 목숨을 잃는 살벌한 전장에서 절대적으로 믿을 수 있는 존재의 여부는 그만큼 컸던 것이다.
선두에 선 카스텔은 거미 떼의 위용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거미 떼 모두가 자신을 공격해도 물러서지 않을 기세로 마법을 준비했다.
카스텔이 날린 마법이 거미 떼를 덮쳤다.
강력한 마법 세례에 달려오던 거미 떼의 절반이 무력화되었다.
그럼에도 남은 절반은 진군을 멈추지 않았다.
카스텔은 거미 떼가 먼저 자신을 덮칠 것을 예상하고, 방어 준비를 했다.
하지만 일은 뜻밖의 형태로 흘러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