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선생님.”
카스텔이 슬며시 모습을 드러냈다.
“이왕 구경을 했으면 감상을 들려주세요.”
질문을 받은 카스텔이 거침없이 대답했다.
“대신전에 처음 왔을 때와 비교하면 조금은 성장하셨습니다.”
“조금만 성장했다는 말이지요?”“네, 짧은 시간 동안 크게 성장하기는 어려운 법이니까요.”
“맞아요. 예전에 선생님이 이런 말을 했지요? 내가 자질이 없는 건 아니지만 한계는 있다고.”“네.”“지금도 그 평가는 변함없나요?”
“아쉽게도 그렇습니다.”
마법은 그 어떤 학문이나 기술보다도 타고난 재능이 중요하게 여겨진다.
어느 정도 재능을 가진 왕자가 최고의 교습과 지원을 받으면 일류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최고 수준의 실력자가 되기는 어렵다.
기적에 가까운 일이 벌어지지 않는다면 말이다.
여러 번 들었지만 들을 때마다 기분이 좋지 않았다.
따지고 보면 아르멜이 지적할 만큼 서두르는 이유도 재능의 한계 때문이다.
자신에게 최고 수준의 마법사가 될 수 있는 재능이 있었다면 서두르는 대신 좀 더 확실히 힘을 키우는 데 집중했을 테니까.
사울은 카스텔을 바라보았다.
평소만큼 아니, 평소보다 안색이 더 나아 보였다.
“대족장의 처방이 잘 듣는 모양이에요.”“임시방편치고는 괜찮았습니다.”
카스텔은 대족장 세네카가 전해 준 처방을 꼼꼼히 분석한 뒤 써 보기로 결정했다.
현지에서 필요한 재료는 현지에서 얻고, 얻기 어려운 재료는 왕국에 도움을 요청했다.
그 과정을 거쳐 만든 약을 먹기 시작한 게 이틀 전이다.
“선생님이 건강을 되찾는다면 예전만큼 강해지는 것도 꿈이 아니겠지요?”“물론입니다. 예전보다 더 강해질 것입니다, 전하를 위해서라도.”“그렇겠지요.”
카스텔은 진심이다.
그래서 사울은 더욱 마음이 복잡했다.
“모처럼 왔으니 대련이나 해 볼까요?”“네, 전하. 조심하겠습니다.”
며칠 안으로 원정을 떠나야 하니 큰 부상이라도 입으면 곤란하다.
사울은 최선을 다해서, 카스텔은 평소보다도 더욱 조심스럽게 대련에 임했다.
그렇게 대련을 한 결과, 사울은 카스텔이 조금은 더 강해진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예전의 힘을 좀 더 되찾았다고 할까.
‘역시 카스텔의 힘은 이게 끝이 아니야.’
약해진 지금의 카스텔도 사울로서는 넘기 힘든 벽이다.
하물며 예전의 힘을 완전히 되찾고, 더 강해진다면?
재능에 한계가 있는 사울로서는 영원히 카스텔을 힘으로 넘어서지 못할 것이다.
그것이 사울을 서두르게 하고 마음 편히 쉬지 못하게 했다.
* * *
며칠 후.
사울 일행이 주도하는 ‘슬랙트 원정대’가 대신전을 떠났다.
“전하, 부디 조심하시고 절대 무리하지 마십시오.”
떠나는 사울과 만난 자리에서 콜리타는 그레이처럼 걱정을 늘어놓았다.
사울은 항상 그렇듯, 미소와 함께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저는 물론 누구도 다치지 않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렇게 원정대는 슬랙트로 출발했다.
대신전을 떠나고 얼마 후 데이빗이 말을 걸어왔다.
“부족하지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전하.”
데이빗은 사울이 함부로 행동하지 못하도록 하는 일종의 짐덩어리 역할이다.
게다가 사울이 어떤 행동을 하든, 콜리타에게 낱낱이 고해바치는 첩자 노릇도 겸하고 있다.
사울로서는 상당히 불편한 존재일 수밖에 없었다.
데이빗 스스로도 자신이 불편한 존재임을 잘 아는 듯, 몸가짐이 조심스러웠다.
사울은 그런 데이빗에게 부드럽게 말했다.
“걱정할 거 없어. 대신관이 아끼는 네가 잘못되면 안 되니까.”
“소, 송구합니다.”
“어리석은 행동만 하지 않는다면 우린 계속 친구가 될 수 있을 거야.”
“네, 넵.”
원정대의 이동은 순조로웠다.
유적으로 향하는 길엔 위험한 것이 없다는 정보가 정확했다.
하지만 평온한 여행은 유적 근처에 도착하면서 끝났다.
“전하, 주의해야겠습니다.”
마나에 누구보다 민감한 카스텔이 조용히 말했다.
사울도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희미하지만 멀리서 마나의 기운 같은 게 느껴졌다.
또 해가 넘어가는 가운데, 멀리 폐허 같은 것이 보였다.
폐허와 원정대의 거리는 아직 멀었다.
말을 타고 두세 시간은 가야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정도로 먼 거리에서 마나의 기운이 느껴지는 건 그만큼 강대한 마법의 힘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 정도 힘이라면 분명 무언가가 나올 거야. 무사히 파헤칠 수만 있다면.’
그것이 어떤 힘이든 상관없다.
어떤 힘이 발견되든 그 특성과 가공 방식에 따라 큰 가치를 가질 수 있다.
마법 유적이 발견되면 작게는 모험가들이, 크게는 국가에서 발굴하려 드는 이유였다.
저 슬랙트라는 유적이 중립 지대에 위치해 있고 잘 알려지지 않았기에 망정이지, 알려졌다면 이미 누군가 싹 털어 가고도 남았을 것이다.
“전하, 해가 넘어가는데 어쩌시겠습니까?”
원정에 참여한 성기사 한 명이 물었다.
아직은 안전한 이곳에서 하룻밤 머무르고 내일 일찍 출발할지, 아니면 밤길을 걸어서라도 오늘 중에 목적지에 도착할지 묻는 것이었다.
“식량과 물은 넉넉하지요?”
“네. 혹시 몰라서 필요한 양의 세 배 이상을 준비했습니다.”
“그러면 오늘은 이곳에서 쉬고, 내일 아침 일찍 떠나도록 해요.”
“알겠습니다, 전하.”
안전을 생각한 사울의 명령이라 반대는 없었다.
곧 야영 준비가 끝나고, 사울은 자신의 천막에서 저녁 식사를 했다.
그리고 식사 자리에 손님을 한 명 초대했다.
초대 손님은 데이빗이었다.
“전하.”“앉아.”
쭈뼛거리며 들어온 데이빗은 조심스레 사울의 맞은편에 앉았다.
“무슨 일로 부르셨습니까?”“일단 좀 먹지. 나도 배고프고, 너도 배가 고플 테니.”“아, 알겠습니다.”
데이빗은 배가 많이 고팠는지 조심스레 탁자에 놓인 빵을 집었다.
그 모습을 본 사울도 작게 웃으며 빵과 말린 고기를 집어 먹었다.
조금 배를 채운 사울이 물었다.
“대신관께서는 나를 못 믿으시지?”
“네? 아, 아니 그게…….”“괜찮아, 당연한 일이야. 왕자가 난데없이 대신전에 찾아온 것만으로도 불편한데 이래저래 신경 쓰이는 일을 하고 있으니. 나야 대신전이나 대신관께 나쁜 일을 할 생각은 없지만 그건 내 생각이니 대신관님은 오해를 할 수 있지.”“…….”
“내가 널 부른 것은 너를 통해 대신관께 진심을 전하고 싶어서야.”
콜리타는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지금의 대화를 곧이곧대로 대신관에게 전해야 할 테니, 당혹스러워할 수밖에 없었다.
사울은 웃으며 말을 이었다.
“무사히 도착하면 대신관께 전해 줘. 나는 교단이나 대신전 그리고 대신관께 어떤 나쁜 감정도 없다고.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좋은 감정을 유지하고 싶다고.”
“…….”“설마 내 말을 빼거나 더해서 대신관께 전달하지는 않겠지?”
“그, 그럴 리가요! 들은 대로 전해 드리겠습니다.”“좋아, 그럼 되었어.”
공적인 대화는 끝났다.
사울의 분위가가 누그러지자 데이빗도 안도한 듯, 조금 표정이 편안해졌다.
확실히 영리한 꼬마지만, 사울의 상대는 못 된다.
사울은 데이빗을 좀 더 구워삶기로 했다.
어쨌든 자신과 대신관 사이를 연결하는 중요한 사람이니까.
사울은 데이빗과 친밀한 어떤 신관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그 아미스라는 신관 말인데.”
아미스.
그 이름을 들은 데이빗의 눈이 반짝거렸다.
“네, 전하.”
“그 신관의 소문은 들어 보았어. 대신전 모두가 ‘아미스 신관님은 좋은 분이십니다’라고 입을 모아 말하더군.”
“사실이니까요.”“그렇게 훌륭한 사람이야?”“네. 말씀드렸듯 제게는 생명의 은인과도 같고, 또 절 교단으로 이끌어 주신 분입니다. 다르센 왕국, 가멜다 왕국, 이종족까지 수많은 자들이 그분의 도움을 받았어요. 특히 전란에 휩쓸려 피해를 본…….”
신나게 주워섬기던 데이빗은 뒤늦게 말을 멈췄다.
눈앞의 사울은 ‘전란에 휩쓸려 피해를 일으킨 나라의 왕자’였으니까.
“괜찮아, 계속 이야기해 봐.”
“아, 네! 그분은 정말 훌륭한 분이세요.”
한참 동안이나 데이빗은 아미스라는 신관의 칭찬을 늘어놓았다.
데이빗의 이야기만 들으면 그야말로 신이 세상을 위해 직접 내려보낸 성녀라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물론 사울은 데이빗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다.
듣자 하니 아미스라는 신관은 아직 30대 정도의 젊은 신관인 듯했다.
훌륭한 젊은 신관이야 얼마든지 있다.
하지만 아직 젊은 여신관이 신이 내려보낸 성녀로 불릴 만큼 훌륭한 인물인지는 의심스러웠다.
그만큼 대단한 인물이라면 일찍이 이름을 들어 보았을 법한데, 대신전에 오기 전 ‘아미스’란 이름은 들어 본 적도 없었다.
‘이 녀석은 정말 아미스라는 신관을 존경하는 모양이군. 기회가 된다면 한번 만나 보고 싶지만.’
아미스라는 신관은 지금 율렌 섬을 떠나 사드온 대륙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있다고 했다.
사드온 대륙.
다르센 왕국과 가멜다 왕국이 위치한 율렌 섬 보다 몇 배는 큰 거대한 대륙.
10여 개의 국가가 때로는 싸우고, 때로는 손을 잡으면서 공존하고 있는 곳.
율렌 섬과 사드온 대륙의 관계는 꽤 복잡했다.
율렌 섬에서 배를 타고 며칠만 가면 사드온 대륙에 도착할 수 있다.
가까운 만큼 무역은 물론 군사 활동도 어렵지 않게 할 수 있는 거리다.
과거에는 율렌 섬에서 사드온 대륙을 침공하거나 반대로 사드온 대륙이 율렌 섬을 침공하기도 했다.
하지만 율렌 섬이 삼백 년 전쟁에 휩싸이고 사드온 대륙도 십여 개의 국가가 각축전을 벌이면서 양쪽 모두 상대 지역을 침공할 생각은 버렸다.
그래서 지금은 각각 독립적인 지역으로서 교류와 무역 등을 하는 관계였다.
빛의 교단은 율렌 섬에서도 사드온 대륙에서도 유일하게 인정받는 종교로서 영향력이 컸다.
과거에 비해 정치적인 영향력은 크게 줄었지만, 어느 나라도 빛의 교단을 무시하지는 못했다.
당장 중립 지대에 대신전이 들어선 것도 두 나라 모두 교단의 영향력을 무시 못 한 탓이었으니까.
‘사드온 대륙이라. 언젠가는 가 보고 싶은 곳이야.’
전생의 사울은 율렌 섬을 벗어난 적이 없었다.
전시 상황이라 하루하루 생존하기에도 벅찼기 때문이다.
하지만 휴전 상태인 지금이라면 섬을 벗어나 대륙에 갈 수 있을지 모른다.
할 일이 산더미 같이 쌓여 있기에 당장은 어렵겠지만.
“그러니까 아미스 신관님은…….”
데이빗은 사울이 딴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도 모른 듯 아미스 신관 찬양을 계속했다.
결국 사울의 인내심이 바닥났다.
“알았어.”
사울의 한마디에 데이빗도 정신을 차렸다.
“죄, 죄송합니다, 전하.”
“괜찮아, 덕분에 그 아미스라는 신관이 정말 훌륭한 사람이라는 건 알았으니까. 그러니까 그 신관이 당장 율렌 섬에 돌아오거나 하진 않는다는 말이지?”“네, 전하. 공부를 마치면 돌아오겠다고 하셨어요. 하지만 몇 년은 걸리겠지요. 큰일이 없는 한.”
“그렇군. 알았어, 이만 돌아가서 쉬어.”“네, 전하.”
* * *
다음 날.
새벽같이 일어난 원정대는 빠른 아침을 챙겨 먹고 곧바로 출발했다.
가능한 빨리 도착하여 유적 안에 거처를 세우고 날이 밝을 때 조금이라도 조사할 계획이었다.
유적이 가까워지면서 마나를 다루는 자들은 심상찮은 기운을 느꼈다.
상당히 짙은 마나의 기운이었다.
‘이 정도면 무언가가 있을 거야.’
생각보다 강한 마나의 기운에 사울은 아르멜에게 명령했다.
“이동 속도는 유지한다. 하지만 모두들 주의하라고 해.”
“네, 전하.”
사울의 명령에 따라 곳곳에서 독려의 외침이 터져 나왔다.
“걸음을 늦추지는 마라. 하지만 조심해라!”
“조금이라도 이상한 게 느껴지면 즉각 보고하라!”
사울은 점점 가까워지는 유적은 물론, 주변을 살피는 데도 소홀하지 않았다.
사실 유적을 제외하면 특별히 눈에 띄는 건 없었다.
메마른 황무지와 깎아지른 절벽.
절벽 사이에 난 길을 통해 모두들 유적으로 향하고 있다.
군사적으로 생각하면 매복하기 딱 좋은 장소다.
절벽 위에서 매복하고 있던 적군이 돌을 던지고 바위만 굴려도 아래에서 지나가는 부대는 큰 타격을 입을 테니까.
그럴 만한 머리가 있는 적이 없는 게 다행이었다.
‘정말 조용하군. 아직까지는.’
사람이나 이종족은커녕 야수나 몬스터 같은 것도 눈에 띄지 않았다.
주변을 둘러봐도 풀 한 포기, 물 한 방울 찾기 힘드니 당연한 일이다.
사울은 처음 슬랙트를 발견한 세 성기사의 이야기를 떠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