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했더니 무능한 적국 왕자였다-100화 (100/232)

100화

마리안은 킬리안에게 물었다.

“거기 이름도, 얼굴도 알 수 없는 사람. 네 이름을 듣고 싶어.”

복면으로 얼굴을 감춘 킬리안이 그런 마리안을 바라보았다.

율렌 섬 최고의 활잡이로 꼽히는 자.

동생과 함께 패망의 위기에 몰렸던 가멜다 왕국을 구원한 자.

그래서인지 마리안의 얼굴은 웃고 있었지만, 결코 얕볼 수 없는 기운이 묻어났다.

“나도 궁금하군. 얼굴을 보이라고는 하지 않겠다. 대신 이름은 알려 줄 수 있겠지?”

베일도 누나와 똑같은 소리를 했다.

마리안이 최고의 궁수라면, 베일은 최고의 검사로 꼽힌다.

게다가 카스텔과의 결투 끝에 직접 그녀를 쓰러뜨린 강자이다.

그런 두 사람을 무시할 수 없었는지, 킬리안은 곧바로 대답했다.

“에드입니다.”

킬리안의 말에 마리안의 미소가 짙어졌다.

“에드? 그것이 네 이름이야?”

“그렇습니다.”

“좋아, 그 옆의 다크 엘프. 네 이름은?”

“사라입니다.”

미리 가명을 준비한 듯 두 사람의 대답은 자연스러웠다.

안소니도 모르고 들었다면 둘의 이름이 정말 에드와 사라라고 믿었을 것이다.

“그렇다는 말이지.”

베일은 고개를 돌렸다.

킬리안과 칼립소의 거짓말을 믿는 것인지 아닌지는 안소니로서도 알 수 없었다.

“좋은 부하를 두셨군요, 백작님.”

“그렇소, 실력 하나는 뛰어난 녀석들이지.”

다시 마리안이 말했다.

“백작님의 부하 이야기는 이 정도로 하지요. 저 친구들도 백작님도 불편하신 것 같으니.”

“…….”

“이제 두 번째 부탁을 말씀드릴 차례군요. 백작님, 우릴 도와주세요.”

“도와 달라고? 무엇을?”

“백작님도 알고 계시겠지요. 요즘 다르센 왕국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음을.”

물론 안소니도 잘 알고 있었다.

또 베일과 마리안이 구체적으로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것인지도 알아챘다.

“검은 흉성 말이오?”

“네, 카스텔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고 들었어요. 사실인가요?”

“사실이오. 다르센 왕국의 사울 왕자와 함께 행동하는 모양이오. 최근에는 중립 지대에서 움직이는 모양이고.”

“사울 왕자라… 크게 유명한 자는 아니지요?”

“다르센 왕국의 5왕자요. 1년 전까지만 해도 크게 알려지지 않았지만 최근 꽤 주목받고 있지. 마법 실력도 상당하고 여러 공적을 올리기도 했소. 무엇보다 검은 흉성을 부하로 두고 있으니 말이오.”

“그렇군요, 사울 왕자라… 그렇다면 저와 제 동생이 카스텔을 죽이는 데 그 왕자가 방해가 되겠군요.”

마리안의 말은 안소니의 예상 범위 내였다.

가르시아 남매가 카스텔을 끝장내고 싶어 한다는 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으니까.

카스텔은 분명 가르시아 남매에게 패했다.

세간에 알려진 이야기와 속사정이 조금 다르기는 하지만, 승패가 명확히 갈렸다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하지만 카스텔을 이겼음에도 죽이지 못한 건 실수였다.

베일이나 마리안이 카스텔의 숨통을 끊었다면 둘의 명성은 지금보다 더 높았을 것이다.

몇몇 호사가들이 ‘베일이 비겁한 수단으로 카스텔을 이겼다’고 떠드는 일도 없었을 테고.

‘6년 전쟁 때 못다 한 일을 마저 하려는 것인가.’

안소니는 왜 이들이 자신을 찾아왔는지, 무엇을 부탁하려는 지 짐작했다.

“둘 다 중립 지대로 파견을 나가고 싶은 거요?”

“맞아요, 백작님.”

안소니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아직 전쟁을 다시 시작할 때는 아니오.”

“저희가 카스텔과 그녀를 비호하는 왕자를 죽일 것이라 생각하시나요?”

“지금 그대들의 말을 들어 보면 그렇게 해석할 수밖에 없지 않겠소?”

“후훗, 저도, 제 동생도 생각을 할 줄 알아요. 몇몇 귀족들은 우리가 피에 굶주렸다거나 미쳤다고 생각하겠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아요. 생각을 하고 자제를 할 줄 알죠. 백작님은 그 점을 알고 계시지요?”

안소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소.”

“그렇다면 우리를 도와주세요.”

“어떻게 말이오?”

“우리 남매는 적이 많아서 이유 없이 중립 지대로 가겠다고 하면 여기저기서 잡음이 나올 거예요. 백작님이 도와주시면 그 잡음을 막을 수 있겠지요.”

“내가 그대들을 도와야 하는 이유는?”

“그렇게 하면 저희와 백작님은 한배를 타게 될 테니까요. 백작님이 저희를 도와주시면, 저희도 백작님을 도울 거예요.”

“으음.”

“저희를 도와주신다면, 백작님이 율렌 섬 최고의 악마 토끼풀 장사꾼을 부하로 두었다는 건 철저히 비밀로 해 드리지요.”

“……!”

역시 눈치를 챈 것인가.

어느 정도 짐작했던 안소니는 크게 놀라지 않았다.

지금 곧이곧대로 실토하거나 당황하는 건 하수나 하는 짓이다.

“무슨 이야기인지 모르겠소만.”

안소니가 오리발을 내밀자 마리안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말했다.

“그렇습니까? 뭐 그렇다고 해 두지요. 그보다 중립 지대 일 말인데. 저와 제 동생이 중립 지대에 파견될 이유는 충분해요. 이래저래 만만치 않은 곳이고, 강한 힘으로 억누르면 우리 왕국에 좀 더 유리하게 흘러갈 가능성이 있으니까.”

“그건 맞는 말이오. 하지만 그런 이유만으로는 굳이 그대들을 파견할 이유가 없을 것 같은데.”

“저희가 파견될 이유는 충분해요. 지금 이 나라에서 검은 흉성을 확실히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저와 제 동생뿐이니까.”

마리안의 말은 사실이었다.

개인의 무력으로 따지면 가멜다 왕국을 통틀어 가르시아 남매를 능가할 사람이 없다.

또 카스텔이 가르시아 남매에게 패했다지만, 여전히 만만치 않은 강자다.

6년 전쟁 당시의 부상으로 전보다 약해졌다는 정보가 있긴 했지만, 그것이 카스텔을 무시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적국 왕자와 검은 흉성이 중립 지대에서 활동하고 있으니, 그들을 견제하기 위해 가르시아 남매를 파견한다.

그것만으로도 명분은 어느 정도 갖춰졌다.

명분이 어느 정도 있다면 안소니의 능력으로 충분히 반발이나 부작용을 억누를 수 있었다.

그렇다면 가르시아 남매가 미쳐 날뛰다 적국 왕자를 살해하지 않는 한, 큰 문제가 생길 일은 없을 것이다.

오히려 중립 지대에서 활동하는 사울 왕자와 카스텔에 대한 유효한 견제가 될 수 있겠지.

‘저 근본 없고 무례한 자들에게 끌려다니는 건 마음에 들지 않지만… 지금은 손을 잡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언제든 빈틈을 보일 때 제거하면 되니까.’

생각을 정리한 안소니가 말했다.

“그대들을 중립 지대로 보내 주면 그대들은 날 위해 무엇을 해 줄 수 있겠소?”

베일이 대답했다.

“필요할 때 백작님 편을 들어드리겠습니다.”

베일의 말에 안소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감사합니다, 백작님.”

할 말을 마친 가르시아 남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사람은 간단한 인사와 함께 자리를 떴고, 집사가 그들을 배웅했다.

그렇게 가르시아 남매가 떠나자 킬리안이 입을 열었다.

“대단하군요.”

안소니가 그런 킬리안에게 물었다.

“저들의 강함을 느꼈나?”

“물론입니다, 가르시아 남매. 명성은 익히 들었지만 직접 보니 더 대단한 자들이군요.”

“저들은 네가 이곳에 온 것을 알고 있었다.”

“제가 저들을 불러들인 게 아닙니다.”

“물론 그렇겠지. 하지만 저들은 네 정체를 알아챘고, 또 내게 그걸 빌미로 협박까지 했다.”

복면 속의 킬리안의 눈동자가 번득였다.

“저들을 제거해 드릴까요?”

“뭐라고?”

“저들이 백작님의 적이라면 제거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네가 저들을 제거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

“물론입니다.”

“어떻게?”

“아무리 실력자라도 약점은 있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소수의 인원이 중립 지대 같은 곳에 머무른다면 그 약점이 드러날 가능성도 높지요. 시간과 비용만 충분하다면 제거하거나 재기 불능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킬리안의 말에 안소니의 눈동자가 번득였다.

가르시아 남매를 친구로 생각한다면 결코 나올 수 없는 눈빛이었다.

“그렇군, 그럼 저들과 함께 중립 지대에 가 보겠나?”

“더 죽일 녀석은 없습니까?”

“가르시아 남매를 중립 지대로 보내려면 시간이 필요할 테니까. 그동안 네가 맡은 일을 모두 처리하고 그들을 따라 중립 지대로 향하면 될 거다.”

“그렇다면… 기꺼이 도와드리지요.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킬리안의 말에 안소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 원한을 풀어도 좋다.”

“…….”

“사울 왕자와 카스텔 말이다. 너는 그들에게 원한이 있었지. 너희들 정도의 실력자라면 가르시아 남매에게도 충분히 쓸모가 있을 게다. 그들과 함께 사울 왕자와 카스텔을 상대하는 게 어떤가?”

속내를 읽힌 킬리안이 되물었다.

“진심이십니까?”

“물론이다. 가르시아 남매의 제거는 서두를 필요가 없다. 쓸모가 없어진 뒤 제거해도 늦지 않아. 이 기회에 사울 왕자와 카스텔을 견제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사울 왕자를 죽이지만 않으면 그 외에는 무슨 짓을 해도 내가 막아 주겠다. 내가 시키는 일만 잘 처리한다면.”

“과연.”

“어떤가, 중립 지대로 가겠나?”

“물론입니다, 백작님.”

대답과 함께 킬리안과 칼립소도 백작의 저택을 나갔다.

떠날 사람이 다 떠나고, 집사가 조심스레 물었다.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자네는 항상 내 걱정만 하는군.”

“기분이 상하셨다면 죄송합니다. 하지만 이건 너무 위험하지 않습니까. 가르시아 남매에 킬리안까지… 하나같이 무도한 자들인데 그들을 붙여 놓으신다는 건…….”

“원래 통제하기 어려운 야수는 한 우리에 몰아넣는 법이다. 죽을 놈은 죽고, 살 놈은 살아남도록.”

안소니의 말에 집사는 고개를 숙였다.

“백작님의 말씀은 알겠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딴 맘을 먹고 함께 백작님을 공격하기라도 하면…….”

“걱정할 것 없다. 가르시아 남매과 킬리안이 함께 있으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머잖아 저희들끼리 문제를 일으킬 테니까.”

“그러다 백작님께 불똥이 튄다면 어쩌시겠습니까?”

“그 전에 손을 써야지. 그들의 모든 것을 빼앗고 자멸시킬 것이야.”

“…….”

집사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확실히 안소니라면 할 수 있을지 모른다.

가르시아 남매와 킬리안 같은 괴물들을 이용한 뒤 모조리 제거하고, 최후의 승자가 될 수도 있다.

그것이 안소니가 지금까지 살아남은 생존법이었으니까.

하지만 만에 하나 잘못된다면?

집사는 안소니가 너무 위험한 도박판에 뛰어드는 게 아닌지 걱정스러웠다.

그렇지만 안소니가 결심을 굳힌 이상, 뒤집을 방법은 없었다.

그저 항상 그랬듯, 이번 계략도 성공하기를 바랄 뿐이었다.

* * *

대신전에 돌아온 사울은 며칠간 휴식을 취했다.

특별한 사정이 없으면 매일 훈련을 강요하던 카스텔도 지난 며칠간은 훈련을 요구하지 않았다.

회색 공원에서 쌓인 독기가 몸에서 빠져나가기 전 무리하면 후유증이 생길 수 있다는 의사의 진단 덕분이었다.

하지만 오래 한가로운 시간을 보낼 만큼 상황이 여유롭지는 않았다.

대신전에서 돌아온 지 사흘 후.

사울은 다시 움직였다.

사울은 먼저 회색 공원에서 가져온 잔해들에 관심을 가졌다.

드워프 오스펠이 남긴 것으로 보이는 골렘과 무기 잔해들.

그것들을 조사하는 게 우선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전하.”

사울의 방문을 받은 신관과 마법사 몇 명이 고개를 숙였다.

지난 사흘 동안 양측이 힘을 합쳐 가져온 골렘과 무기 잔해들을 조사한 참이었다.

사울은 탁자에 놓인 잔해들을 살펴보았다.

해부라도 당한 듯 잔해와 무기들은 작은 조각으로 분해된 상태였다.

그만큼 철저한 조사가 이루어졌으리라.

“무언가 나왔나요?”

사울의 질문에 신관이 먼저 대답했다.

“네, 전하. 골렘의 잔해들을 샅샅이 살펴본 결과, 어둠의 흔적일 가능성이 있는 무언가를 찾았습니다.”

“확실치는 않다는 말이군요.”

“네, 만들어진 지 오래되어 아직 단언할 수는 없습니다.”

“그럼 좀 더 조사를 해 봐야겠군요.”

“말씀대로입니다.”

수상하지만 확증은 없다.

사울은 왕국 마법사들에게도 질문했다.

“무언가 쓸 만한 게 나왔나?”

“네, 전하.”

마법사 한 명이 접시에 담긴 자그마한 조각을 내밀었다.

“골렘의 핵이로군.”

“그렇습니다. 조사 결과 핵이 상당히 정교하게 만들어진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웬만큼 뛰어난 마법사가 아니라면 이 정도의 골렘을 만들 수 없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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