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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했더니 무능한 적국 왕자였다-98화 (98/232)

98화

그렇게 방에 돌아온 사울에게 기다렸다는 듯 그레이가 잔소리를 퍼부었다.

“전하! 정말 걱정이 많았습니다!”

“걱정이라니?”

“이번 전투에서 또 위험한 일을 하셨다고요?”

“그렇게 위험한 일은 하지 않았는데?”

“독기가 가득한 지대에서 강철의 괴물과 싸우다 큰일 날 뻔 하셨다고……!”

한동안 그레이의 잔소리가 이어질 것을 직감한 사울은 짐짓 기침을 했다.

“그레이. 그 독기 때문에 몸이 좀 안 좋은 것 같아. 의사도 며칠은 안정을 취하라고 했어.”

사울이 건강을 명분으로 내세우자 그레이도 잔소리를 멈출 수밖에 없었다.

“정말… 아무쪼록 몸조심하십시오. 전하!”

“오늘은 쉬고 이야기는 내일 들을 게.”

“알겠습니다. 명심하십시오. 쉬시는 겁니다!”

다짐을 받은 그레이가 물러가고, 사울은 침대에 몸을 기대며 문서를 펼쳤다.

그레이의 충고를 무시할 생각은 없었다.

침대에 누워 쉬면서 정보 검토를 좀 할 뿐.

대신전을 비운 시간은 열흘 정도.

그 사이 왕국 정보부, 회색 그림자에서 편지를 보내왔다.

나라 안팎의 각종 정보들을 담은 문서들이다.

사울은 누운 채 문서를 하나하나 읽어 나갔다.

나중에 다시 한번 꼼꼼히 검토해 볼 필요가 있겠지만, 당장은 크게 눈에 띄는 부분이 없었다.

다르센 왕국 안 사정도 그렇고, 주변 지역 사정도 그렇고, 가멜다 왕국 사정도…….

“음?”

문득 사울의 눈빛이 달라졌다.

가멜다 왕국 쪽 정보에서 하나의 이름이 눈길을 끌었다.

가멜다 왕국을 이끌어가는 유능한 귀족 중 하나로 꼽히는 자.

안소니 맥캘런 백작이었다.

안소니 맥캘런의 이름을 본 사울의 눈이 번득였다.

‘안소니 맥캘런 백작이라면 분명…….’

익숙한 이름이다.

전생 때 여러 번 들어 본 적 있었으니까.

전생 때는 안소니 맥캘런 ‘백작’이 아니라 한 단계 낮은 ‘자작’이었다.

당시 자작이었던 안소니는 6년 전쟁 때 많은 공을 세웠고, 이후 더욱 세력을 키워 한 단계 위인 백작 작위를 차지했다고 들었다.

그것뿐이라면 사울이 관심을 둘 이유가 없다.

당장 사울의 앞길을 막을 인물도 아니니까.

하지만 그는 사울이 주시하는 대상 중 하나였다.

사울 전생의 원수일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었다.

물론 전생의 사울, 즉 롤랜드를 죽인 건 카스텔이다.

하지만 롤랜드가 죽은 뒤 그의 가문을 돌보아 주어야 할 자들이 있었다.

‘위험한 곳에 파견되었군. 롤랜드.’

‘제게 만에 하나의 일이 생기면, 제 가족을 부탁합니다.’

‘물론이야. 자네 어머니와 여동생은 꼭 돌봐 주겠네.’

사실 롤랜드의 죽음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적의 전략에 말려들어 예기치 못하게 악전고투를 벌이던 중 카스텔이라는 괴물에게 목숨을 잃은 것이니까.

카스텔을 제외한 다른 자들에게 책임을 물을 일은 아니었다.

문제는 이후 롤랜드의 가문이 완전히 풍비박산 났다는 것이다.

롤랜드의 후견인들은 약속대로 가문을 돌보아 주기는커녕, 의도적으로 가문을 박살 내고, 모든 것을 약탈해 갔다.

가문의 마지막 기둥이던 롤랜드가 사라진 틈을 타 그가 생전 세운 공을 가로채는 건 물론, 가문에 남아 있던 마지막 명예와 재산까지 빼앗아 갔다.

그 충격으로 롤랜드의 어머니와 여동생 모두 죽었다.

그 비극에 책임이 있는 자라면, 반드시 책임을 묻겠다는 게 사울의 목표다.

그리고 안소니 맥캘런 백작은 그 비극에 누구보다 책임이 클 수 있는 인물이었다.

롤랜드와 안소니가 만난 적은 없다.

몰락 귀족인 롤랜드는 당시에도 상당한 세력을 갖고 있던 안소니 맥캘런 자작과 직접 만나고 친분을 쌓을 위치가 아니었으니까.

다만 안소니의 세력에 속한 자나 그의 부하 몇과 교류를 나눈 적이 있었다.

사울이 알아본 바에 따르면 롤랜드가 사망한 뒤, 롤랜드 가문의 영지와 유산을 둘러싼 난장판이 벌어졌다.

가족들은 뒷전에 밀려난 가운데, 탐욕스러운 자들이 달려들었다.

롤랜드 사후 가문에 처음 손을 뻗친 건 안소니의 부하였다.

그러나 롤랜드 가문을 집어삼킨 안소니의 부하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백작에게 버림받아 변방으로 추방당했다.

그렇게 주인이 없어진 롤랜드 가문의 영지와 유산은 결국 백작이 된 안소니의 소유가 되었다.

이 사실을 안 사울은 안소니가 자신의 가문을 끝장냈거나, 혹은 약속을 지키지 않고 가문의 멸망을 방관했다고 추측했다.

문제의 부하가 안소니의 의향대로 롤랜드 가문을 집어삼켰다면 그는 가문을 직접 멸망시킨 원수다.

반대로 부하가 허락 없이 롤랜드 가문을 집어삼켰다면, 안소니는 가문의 멸망을 방관한 자가 된다.

어느 쪽이든 용서할 수 없다.

하지만 안소니가 롤랜드의 가문을 끝장냈거나 방관했다는 확실한 증거가 없었다.

명확한 증거도 없이 아무에게나 원수라 낙인을 찍을 수는 없는 일이다.

‘안소니 맥캘런 백작… 분명 전쟁 후 꾸준히 자신의 세력을 키우고 있다고 했지. 지금은 가멜다 왕국의 누구도 함부로 하기 힘든 거물이고.’

지금 들어온 정보도 안소니 맥캘런 백작의 세력이 커지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다르센 왕국에서도 안소니는 경계 대상이었다.

가멜다 왕국의 거물로서 다르센 왕국과의 전쟁에서도 적잖은 공을 세운 바 있기 때문이다.

또한 혜성처럼 등장해 6년 전쟁을 끝낸 ‘가르시아 남매’도 백작과 꽤 친분이 있다고 했다.

‘지금이라도 당장 백작을 찾아가 물어보고 싶군. 그럴 수는 없겠지만.’

사울은 문서에서 눈을 돌렸다.

지금은 복수심을 되새기는 것으로 족하다.

당면한 문제들이 여럿 있다.

그것들부터 해결하는 게 먼저다.

사울은 다른 문서도 검토해 보았다.

안소니 맥캘런 백작에 대한 내용을 제외하면 크게 눈에 띄는 내용이 없었다.

최소한 본인과는 큰 상관이 없는 내용들뿐이었다.

검토를 마친 사울은 문서를 내려놓고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

모처럼 전생 일을 떠올린 탓일까.

몸은 피곤해도 좀처럼 잠이 오지는 않았다.

* * *

돌아온 데이빗은 옷을 갈아입고 곧장 대신관 콜리타를 찾았다.

“다녀왔습니다. 대신관님.”

“고생 많았다. 많은 일이 있었다고 들었다.”

“네.”

데이빗은 자신이 사울을 따라다니며 겪은 일, 보고 들은 일들을 남김없이 콜리타에게 고했다.

다 들은 콜리타가 고개를 끄덕였다.

“대족장이 사울 왕자를 좋게 본 모양이로구나.”

“저도 그렇게 느꼈습니다. 그것이 대족장의 진심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네가 그렇게 느꼈다면 진심일 게다. 대족장은 누구보다 솔직한 사람이니.”

데이빗은 그런 콜리타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말씀드렸듯 사울 전하는 저를 경계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건 어쩔 수 없지.”

“전하께서 절 경계하시는데 제가 계속 전하를 따라다닐 필요가 있을까요?”

“괜찮다. 너도 알다시피 나나 대신전, 나아가 교단에서도 왕국을 적대할 마음은 없다. 다르센 왕국이든, 가멜다 왕국이든 말이다. 지금 대신전과 이 중립 지대에 보다 관심을 가진 건 다르센 왕국이니 언제든 대화를 할 준비를 해야지.”

데이빗은 새삼 자신의 임무가 막중함을 깨달았다.

사울 왕자와 친분을 쌓고, 나아가 다르센 왕국과의 대화 창구 역할을 하거나 다리를 놓는 역할을 요구받고 있다.

쉽지 않은 임무지만, 이미 각오는 한 바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계속 전하 곁에 붙어 있겠습니다.”

“그래. 사울 왕자는 영민한 사람이니 너나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지 짐작하고 있을 게다. 우리가 적이 아니라는 것도 알 테니 널 해코지하지는 않을 게다.”

“만에 하나 실수가 없도록 더욱 조심하겠습니다.”

“음. 그리고 네게 편지가 왔더구나.”

콜리타가 꺼낸 편지를 본 데이빗의 표정에 화색이 돌았다.

“아미스 신관님이 보내셨군요?”

“그래. 한번 읽어 보려무나.”

데이빗은 그 자리에서 편지를 뜯어 읽어 보았다.

편지를 다 읽은 데이빗이 고개를 끄덕였다.

“신학 공부는 잘되어 가는 모양이군요.”

“내게 보낸 편지에도 그렇게 적혀 있더구나. 몇 년 정도 있어야 돌아온다지?”

“아쉽지만 그렇답니다.”

“내게 큰 일이 없다면 3년은 더 공부를 할 생각일 게다. 그 아이가 공부를 다 끝내고 돌아오면 나도 안심하고 신을 뵈러 갈 수 있을 것인데.”

콜리타의 말에 데이빗이 눈살을 찌푸렸다.

“농담이 지나치세요.”

“훗. 그랬느냐. 하지만 나도 이제 나이가 너무 많이 들었다. 언제까지 이 자리를 감당할 수 있을지 모르겠구나.”

왠지 모를 힘없는 미소와 함께 콜리타가 손을 저었다.

“그만 가서 쉬거라.”

“네, 대신관님.”

데이빗은 오늘따라 유독 콜리타의 주름이 깊어 보인다고 생각했다.

평생 중립 지대에서 사역하며 대신전을 일궈 낸 장본인도 세월은 이길 수 없는 것일까.

데이빗은 콜리타가 몇 년이라도 더 건강하기를 바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안소니 맥캘런 백작은 집사의 보고를 받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불러와라.”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날 찾아온 부하가 무서워 내쫓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지.”

“…알겠습니다.”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집사는 안소니의 부하를 부르러 갔다.

집사는 킬리안 비셔스와 칼립소와 함께 돌아왔다.

“다시 뵙습니다. 백작님.”

킬리안과 칼립소가 안소니에게 허리를 숙였다.

다시 봐도 킬리안의 예절은 거의 완벽했다.

고개를 숙이고 허리를 굽혔다는 데 의의를 두어야 할 칼립소와는 차이가 컸다.

저 모습만 보면 상대가 율렌 섬에서 가장 악명 높은 범죄자라는 사실마저 잊힐 정도였다.

“여러 일이 있을 텐데 용케도 날 찾아올 시간이 났군.”

백작의 말에 킬리안은 미소로 대답했다.

“백작님이 맡기신 일은 모두 끝냈습니다.”

“모두? 네게 전달한 목표가 열 명이 넘었는데?”

“네. 모두 끝났습니다. 백작님.”

안소니는 자신이 킬리안을 과소평가하지 않았다고 여겼다.

제정신이 아닌 것 같은 놈이라도 능력과 일 처리 솜씨는 확실하다 생각했고, 그래서 부하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왕국 이곳저곳에 있는 적이나 잠재적 위험 요소들을 처리할 것을 명령했다.

물론 킬리안이라면 성공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명령했다.

하지만 이렇게 빨리 끝내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놀랍군. 정말 목표를 모두 처리했나?”

“아직 여기까지 소식이 닿지 않은 모양이군요. 걱정 마십시오. 며칠 내로 소식이 당도할 겁니다.”

“거짓말은 아닌 것 같군. 알았다.”

안소니의 눈짓에 집사는 작은 상자 하나를 꺼냈다.

상자를 받아 열어 본 칼립소가 고개를 끄덕였다.

상자에는 문서 몇 장, 그리고 귀금속이 가득 담겨 있었다.

“두목. 다 맞아요.”

칼립소의 보고에 킬리안은 미소를 짙게 했다.

“감사합니다. 백작님.”

“이렇게 직접 날 찾아왔다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겠지?”

“네. 역시 백작님의 안목은 남다르시군요.”

“뭘 원하지?”

“실은 여기에 없는 제 부하 제온이 흥미로운 정보를 알려 왔습니다.”

“흥미로운 정보라고?”

“네. 백작님의 부하 몇이 저와 제 조직 주변을 캐고 있다더군요.”

“…….”

이야기를 한 킬리안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안소니와 킬리안의 대화를 바라보던 집사는 주변 공기가 달라진 것을 느꼈다.

백작이 킬리안의 감시를 명령한 건 사실이다.

그리고 킬리안은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 같다.

번득이는 그의 눈빛을 볼 때마다 집사는 심장이 쪼그라드는 기분이었다.

반면에 안소니는 태연했다.

“너는 내 부하가 아닌가?”

“부하라고 할 수 있지요.”

“그렇다면 나의 감시를 받는 건 당연하지 않나?”

“감시라고요?”

“그렇다. 네가 나라면 너 같은 부하를 들인 뒤 감시하지 않겠나?”

안소니의 반론에 킬리안이 피식 웃었다.

“옳은 말씀입니다. 저라도 감시를 하겠지요. 하지만 백작님. 충고 하나 드리지요.”

“충고?”

“저는 적이 아주 많습니다. 조금만 방심하면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칼 맞아 죽거나 왕국군에 사로잡혀 목이 잘리고 창끝에 꽂혀 성문에 내걸리겠지요. 그래서 저는 허락 없이 절 감시하는 자를 살려 두지 않습니다. 그게 누구든 말입니다.”

킬리안의 말뜻을 알아들은 안소니가 눈을 가늘게 떴다.

“내가 보낸 자를 죽였다는 말인가?”

“네. 반 죽여 놓자 백작님이 시켰다고 자백하더군요. 그때 백작님의 부하인 것을 알았습니다. 아, 그리고 두 녀석 모두 치료해도 살 것 같지 않아 그냥 알아서 처리했습니다. 혹시 시체가 필요하시다면 묻은 곳의 위치는 알려드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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