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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했더니 무능한 적국 왕자였다-97화 (97/232)

97화

“선생님?”

다시 찾아온 카스텔은 많이 안정된 모습이었다.

발작도 완전히 가라앉았고, 독기 때문에 아픈 기색도 없었다.

지금 모습만 보면 사울보다도 건강해 보였다.

“우리 중 선생님이 제일 멀쩡해 보이는군요.”

사울은 농담으로 가볍게 말문을 텄다.

하지만 카스텔은 농담에 화답하는 대신 허리를 숙였다.

“사죄를 드리러 왔습니다. 전하.”

“사죄라니요?”

“하마터면 전하를 위험에 빠트릴 뻔 했습니다.”

사울도 카스텔이 무슨 말을 하는지, 왜 굳이 찾아온 것인지 알았다.

발작을 일으켜 사울의 도움을 받은 것 때문이다.

감사 인사를 하러 온 게 아니라 사울에게 폐를 끼쳤다는 생각에 사죄를 하러 온 것이다.

“선생님의 실수였다면 사과를 받겠어요. 하지만 이번 일은 실수가 아니었잖아요? 운이 나빴을 뿐.”

“그래도 제 실수입니다.”

“그렇게 위험하지도 않았고, 다치지도 않았어요. 말했듯 운이 조금 나빴을 뿐이지요. 운이 나빴다고 일일이 사죄하고 또 사죄를 받아야 한다면 매일 사죄를 주고받아도 부족할 거예요. 누구 잘못도 아니었으니 넘어가요.”

“…….”

카스텔은 숙인 허리를 펴지 않았다.

대답을 하지 않을 뿐, 여전히 자신이 잘못했다는 생각을 버리지 못한 게 분명했다.

카스텔이 이렇게 고집을 부린 적은 거의 없다.

그냥 사죄를 받아 주어야 할까.

하지만 내키지 않았다.

분명 이번 일은 카스텔의 잘못이 아니다.

그럼에도 카스텔의 사죄를 받는다면, 결국 카스텔이 잘못했다고 인정하는 꼴이 된다.

사울이 죄를 뒤집어씌우는 건 아니다.

카스텔 본인이 먼저 스스로 잘못했다고 주장하고 있으니까.

적당히 알겠다고 넘어갈 수도 있다.

하지만 사울은 그렇게 넘어가고 싶지 않았다.

전생의 원한이든 뭐든, 이번 일은 옳은 방향으로 처리하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카스텔의 고집을 무마해야 한다.

고민하던 사울은 과거 아바마마가 해 준 말을 떠올렸다.

‘카스텔은 아직 어린아이라 할 수 있지.’

‘어린아이라고요?’

‘그래. 혹시나 그녀와 다툴 일이 생긴다면… 어린아이를 달래듯 해 보거라.’

카스텔의 실제 나이는 결코 어리지 않았다.

사울보다 많은 건 물론, 어쩌면 아바마마와 비슷할 수도 있다.

하지만 카스텔에게 어린아이 같은 면모가 있는 건 사실이었다.

그럼 아바마마의 조언이 도움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사울은 자기도 모르게 카스텔의 머리에 손을 올렸다.

여전히 허리를 숙인 카스텔이 움찔하는 게 느껴졌다.

사울은 카스텔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어요. 운이 나빴던 것에 스스로를 탓할 필요는 없어요.”

“…….”

“알았죠? 잘못했다면 모를까, 잘못하지 않은 것에 자책하지는 마세요.”

말을 마친 사울은 조심스레 손을 뗐다.

“자. 그만 고개를 들어요.”

카스텔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자신이 무슨 일을 겪은 지 모르겠다는 듯, 복잡한 표정으로 말이다.

그런 카스텔의 표정에 사울은 쿡 하고 웃었다.

“이제 좀 진정이 되었어요?”

“…….”

“더 할 말은 없지요?”

“…네. 전하.”

“좋아요. 이야기는 끝났어요. 그만 쉬어요.”

“알겠습니다.”

카스텔은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물러났다.

얼굴이 빨갛게 상기된 채 말이다.

카스텔을 끝으로 더 이상 방문객은 없었고, 사울도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침대에 누운 사울은 어린아이 같던 카스텔의 모습을 떠올리며 몇 번이나 웃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전생의 원한이 떠오르지 않았다.

* * *

우연이었다.

자기 전 간단히 이야기나 나누려 사울의 천막을 찾은 아이나는 천막에서 나온 카스텔과 마주쳤다.

카스텔이 사울의 천막을 찾은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공적으로도, 혹은 사적으로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고 자주 봐 왔다.

하지만 오늘은 평소와 달랐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멍하거나 무표정하던 카스텔의 얼굴이 상기되어 있었다.

“카스텔 씨?”

“…….”

카스텔은 아이나의 부름에 대답하지 않고 곧바로 지나쳤다.

악의를 가지고 무시한 게 아니라 대답을 할 만한 겨를이 없는 모습이었다.

단지 그것뿐이었다.

카스텔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동요한 채 사울의 천막에서 나온 것 말이다.

하지만 아이나는 기분이 이상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을까?

사울의 천막에서 무슨 일이 있었기에 다른 사람도 아니고 카스텔이 저렇게 동요할까?

부끄럼 많은 소녀라도 되는 것처럼 말이다.

“…….”

아이나는 사울의 천막과 멀어져 가는 카스텔의 뒷모습을 번갈아 보았다.

사울의 천막에 들어가거나 카스텔을 뒤쫓아 갈 수도 있다.

궁금한 게 있으면 직접 질문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아이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아니, 하지 못했다.

마음대로 움직이자니 발도 입도 떼어지지 않았다.

“…….”

알 수 없는 감정의 동요 속에서 우두커니 서 있던 아이나에게 누군가 말을 걸었다.

“아이나 씨.”

아이나를 부른 건 아르멜이었다.

“잠시 제 천막에서 이야기를 하지 않겠습니까?”

결국 아이나는 사울의 천막 대신, 아르멜의 천막으로 향했다.

아르멜의 천막은 사울의 것보다는 작았지만 크게 불편함 없이 꾸며져 있었다.

정보를 주로 다루는 사람답게 책상에 수북이 쌓인 서류 더미가 눈에 띄었다.

평소라면 저 서류 더미에 관심이 갔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서류에 눈길이 가지 않았다.

심지어 아르멜도 지금은 수북이 쌓인 서류 더미나 그 속에 담긴 정보에는 관심이 없는 모양이었다.

아르멜은 서류 더미를 치워 버린 뒤 아이나와 마주 앉았다.

그리곤 한동안 말없이 아이나를 응시했다.

“…….”

불편한 침묵이 이어졌다.

결국 견디다 못한 아이나가 물었다.

“왜 날 보자고 한 건가요?”

“알고 있지 않습니까?”

짐작은 갔다.

하지만 그 짐작을 입 밖에 내기가 불편했다.

그러자 아르멜이 대신 입 밖에 내 주었다.

“다르센 왕국의 왕자와 홉킨스 가문의 영애가 친구가 되지 말라는 법은 없습니다. 바람직한 일일 수도 있겠지요. 왕실과 홉킨스 가문의 관계가 개선되는 건 왕국의 미래를 위해서도 다행스러운 일이니까요.”

아이나는 아르멜이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모를 만큼 어리석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모르는 척 하고 싶었다.

“그래서요?”

아르멜은 아이나가 어리석거나 할 말을 하지 못한다고 타박하는 대신 자신이 할 말만 했다.

“저는 전하와 아이나 씨가 친구가 되는 것도 위험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전하는 저와 뜻이 달랐고, 또 잘되면 왕실에 보탬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두 분을 말리지 않았습니다.”

“…….”

“전하와 친구. 그 이상은 꿈도 꾸지 마십시오. 홉킨스 가문에 좋지 않은 일이 생길지 모릅니다.”

말 그대로 협박이다.

하지만 무시할 수는 없었다.

결코 근거 없는 말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이나도 조금은 알고 있었다.

다르센 왕국은 가멜다 왕국보다 왕권이 강하다지만, 왕실에서 모든 권력을 잡고 있는 건 아니다.

그런 상황에서 처치 곤란한 입장인 홉킨스 가문과 왕실이 혼인으로 맺어진다?

왕실과 그를 지지하는 귀족들부터 반발할 것이다.

어쩌면 왕실의 약점을 제거한다는 명목으로 아이나 본인이나 홉킨스 가문에 해를 끼칠지 모른다.

아니면 왕실 세력과 반대에 위치한 귀족 가문에서 갑자기 성장할 홉킨스 가문을 눈엣가시로 여기고 해코지하려 들 수도 있다.

그 사실을 잘 알 왕실에서도 사울과 아이나의 혼인 같은 것은 허락할 리 없다.

그리고 아이나의 아버지 던칸도 혼인은 원치 않을 것이다.

가문 입장에서 부담이 클 테니까.

협박이든 뭐든 아르멜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아이나가 수긍하고 받아들이는 게 무난했다.

하지만 아이나는 순간 냉정을 잃었다.

알겠다고 대답하는 대신 다른 말을 꺼냈다.

“그럼 다른 분은 괜찮은가요?”

“뭐라고요?”

“제가 아닌 다른 분은 전하와 가까워져도 상관이 없나요?”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방금 전 카스텔 씨가 전하의 천막에서 나오더군요. 카스텔 씨는 전하와 가까워져도 상관없나요?”

아르멜도 이 질문은 예상치 못한 듯 눈에 띄게 동요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그냥 묻는 거예요. 당신의 말은 잘 알겠어요. 네. 내 가문은 왕실과 맞지 않지요. 이해해요. 하지만 나만 가지고 뭐라 할 것은 아닌 것 같은데요? 가깝기로 따지면 카스텔 씨도 있으니까.”

“…….”

잠시 말을 잇지 못하던 아르멜은 문득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일이 벌어질 것 같아서 처음부터 반대를 한 것인데.”

“무엇을 반대했다고요?”

“전하와 당신이 가까워지는 일 말입니다.”

“…그쪽이 대체 무슨 자격으로.”

“그렇습니다. 나는 전하를 보좌하는 기사일 뿐, 전하나 당신께 명령을 할 권한은 없지요. 제가 하는 것은 명령이 아니라 충고입니다.”

“충고…….”

“그렇습니다. 전하의 앞길은 물론 당신의 앞길도 막히는 것은 보고 싶지는 않습니다. 제 말을 새겨들으십시오.”

아르멜이 냉정을 되찾은 것처럼 아이나도 어느 정도 냉정을 되찾았다.

“…알겠어요.”

“그럼 됐습니다. 앞으로 이런 이야기를 할 일이 없었으면 합니다.”

아이나는 인사도 없이 천막을 나갔다.

뒤도 돌아보지 않은 아이나의 귀에 아르멜의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천막을 나선 아이나도 한숨을 내쉬었다.

아르멜이 악의가 있어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아니다.

아니, 좋은 뜻에서 한 말이다.

아이나를 쳐낼 생각이었다면 굳이 이런 말을 꺼내지도 않았을 테니까.

‘저는 전하와 아이나 씨가 친구가 되는 것도 위험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전하는 저와 뜻이 달랐고, 또 잘되면 왕실에 보탬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두 분을 말리지 않았습니다.’

‘전하와 친구. 그 이상은 꿈도 꾸지 마십시오. 홉킨스 가문에 좋지 않은 일이 생길지 모릅니다.’

아르멜의 협박, 아니 충고를 떠올린 아이나는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나도 잘 알아. 하지만…….”

자신의 천막으로 돌아가는 아이나의 표정은 어느 때보다 쓸쓸했다.

* * *

다음 날.

모데아를 비롯한 카멜 산의 병력은 대신전에서 멀지 않은 곳까지 사울을 호위해 주었다.

길을 빙빙 돈 탓에 회색 공원에서 아침 일찍 출발하여 하루를 꼬박 달렸음에도 다음 날 저녁이 되어서야 대신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전하. 여기서부터는 안전할 것입니다. 저희들은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알았어요. 대족장님에게도 안부를 전해 주세요.”

“네. 전하. 그리고 골렘에 대한 것들은…….”

“알고 있어요. 가능한 비밀로 하고 무언가 알아내면 그대들과 정보를 교환할 것을 약속하지요.”

“감사합니다. 전하. 그럼.”

다시 한번 약속을 확인하는 것을 끝으로 모데아와 휘하 병력은 카멜 산으로 돌아갔다.

창밖을 잠시 살피던 사울은 마차 안으로 눈길을 돌렸다.

카스텔의 모습은 평소와 비슷했지만, 아이나와 아르멜 쪽이 이상했다.

크게 싸운 건 아닌 것 같은데 이상하게 서로 어색한 모습이었다.

이유를 묻고 싶었지만, 캐물었다 역효과가 날까 봐 묻지도 못했다.

그렇게 사울 일행은 대신전에 도착했다.

지위가 있는 신관 몇이 대신전 밖에서 사울을 맞이했다.

“어서 오십시오. 전하.”

“반가워요.”

간단히 인사를 나누는 사이 아이나가 먼저 사울에게 말했다.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자기 전 한 번 부를지 모르니 조금 피곤해도 대기해 줘요.”

“네, 전하.”

아이나는 고개를 꾸벅 숙이곤 처소로 물러났다.

표정이나 눈빛에서 무언가 어색함이 느껴졌지만, 사울은 굳이 캐묻지 않기로 했다.

아르멜 역시 어색한 분위기였지만, 자신의 일은 잊지 않았다.

휘하 기사에게 보고를 받은 뒤 사울에게 알려 왔다.

“대신전을 비운 사이 회색 그림자에서 정보가 좀 들어 온 모양입니다.”

“그래? 그 정보들은 내 방에 가져다주고 저녁 식사 후에 한 번 들러. 직접 검토한 뒤 의논 하고 싶으니까.”

“알겠습니다. 전하.”

“그리고 아이나도 함께 데리고 오고.”

“…알겠습니까.”

순간 말을 끄는 아르멜의 모습에 사울은 확신했다.

아르멜과 아이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고, 그것이 이 어색한 분위기의 이유라고 말이다.

하지만 그 ‘무슨 일’의 이유가 자신이라는 것은 눈치채지 못했다.

‘저 둘. 아무래도 이상해. 하지만 물어보기도 어렵군.’

당사자에게는 물어볼 수 없다.

그렇다면 물어볼 사람이 카스텔 하나뿐이다.

하지만 카스텔에게 제대로 된 대답을 들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또 카스텔은 카스텔 대로 일이 있었다.

대신전에 도착하기 무섭게 세네카에게 받은 처방을 철저히 분석해 보겠다며 자기 방에 틀어박혔다.

지난 번 전투로 발작 문제를 더욱 신경 쓰게 된 게 분명했다.

결국 사울은 아이나와 아르멜의 ‘개인적인 문제’에는 잠시 신경을 끊기로 했다.

개인적인 문제에 참견한 것보다 중요한 일이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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