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전하. 저기!”
“찾은 것 같군.”
아르멜이 가리키는 쪽에 낯선 풍경이 보였다.
이제 익숙해진 벌판과 회색 나무가 아닌, 인공적으로 조성된 풍경이 보였다.
언뜻 보기에는 작은 마을처럼 보이기도 했다.
동시에 낯선 소리도 들려왔다.
“이게 무슨 소리지?”
“쇳소리 같은데.”
큰 귀만큼 청력이 예민한 엘프들이 먼저 수군거렸다.
현장에 접근할수록 다른 종족도 이상한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사울 귀에도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쇠가 부딪치는 듯한 꽝꽝거리는 소리는 물론, 쿵쿵거리는 땅울림까지 느껴졌다.
“대체 이게 무슨 소리지?”
사울의 중얼거림에 대답한 건 카스텔이었다.
“금속으로 된 무언가가 부딪치고, 거대한 무언가가 있는 것 같습니다.”“그 무언가의 정체는요?”
“모르겠습니다.”
“…….”
소리의 정체를 모르는 건 다른 일행들도 마찬가지였다.
“대체 뭐가 있기에 이런 소리가 난다는 말인가.”
정체를 알 수 없는 만큼 나쁜 예감이 든 모두들 무기를 빼 들고 주변을 경계했다.
그리고 나쁜 예감은 맞아떨어졌다.
끼이익-
목적지로 삼은 마을 같은 곳에서 기분 나쁜 쇳소리가 울려 퍼졌다.
동시에 무언가 튀어나왔다.
먼저 튀어나온 건 들짐승이었다.
독 때문인지 하나같이 이상하게 생긴 들짐승들은 사울 일행은 안중에도 없는 듯 그대로 지나쳤다.
사울 일행과 싸우기 위해 튀어나온 건 아닌 게 분명했다.
그리고 ‘진짜’가 나타났다.
쿵쿵하는 땅울림과 함께 나타난 것은…….
“골렘?”
골렘.
마법으로 움직이는 인형.
확실히 눈앞에 나타난 존재는 골렘처럼 생겼다.
머리와 몸통, 두 개의 팔다리가 붙은 모습은 사람과 흡사하다.
하지만 사람과 다른 점도 많았다.
먼저 눈에 띄는 건 피와 살이 아닌 금속으로 이루어진 몸이었다.
철, 구리, 청동 등 여러 금속이 뒤섞여 만들어진 듯 여러 가지 금속광택이 얼룩덜룩 뒤섞인 괴상한 모양이었다.
크기도 굉장했다.
팔다리도, 몸도 굵은데다 키는 5미터도 넘어 보였다.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게 분명한 거대한 금속 인형이 움직이고 있었다.
움직일 때마다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고, 발 디딜 때마다 쿵쿵 소리를 내면서도 용케 움직였다.
그것도 한 마리도 아니고 두 마리였다.
“저 괴물 때문에 짐승들이 도망친 것이었군.”
주기적으로 움직이는 것인지, 사울 일행의 접근을 감지하고 움직이기 시작한 것인지 지금은 알 수 없다.
하지만 가만히 있던 골렘이 무슨 이유에서든 갑자기 움직이기 시작했고, 그 움직임에 놀란 짐승들이 도망친 것이리라.
두 골렘은 사울 일행 쪽으로 몸을 돌렸다.
얼굴에 이목구비는 없었지만, 사울 일행을 ‘감지’한 건 틀림없어 보였다.
이윽고 골렘 한 마리가 허리를 숙였다.
인사라도 하는 자세로 허리를 숙인 골렘의 등에 무언가 실린 게 보였다.
“석궁? 아니, 저건…….”
거대한 석궁.
아니, 석궁이라기보다는 공성용으로 쓰이는 거대한 활, ‘발리스타’다.
골렘은 그 자체로 희귀한 존재다.
인형에 마법을 걸어 정교하게 움직이게 하는 건 쉬운 마법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저렇게 거대한 골렘도 흔치 않았고, 등에 무기를 장착한 건 더더욱 흔치 않았다.
골렘을 전쟁 무기로 쓰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차라리 적에게 직접 마법을 쓰는 게 더 효율적이라는 이유로 거의 쓰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특별한 존재의 등에 실린 발리스타의 시위가 저절로 당겨졌다.
그리곤 요란한 시위 소리와 함께 무언가를 날렸다.
카스텔이 재빨리 마법 방어막을 만들었다.
다행히 늦지 않아 날아온 물건을 쳐내는 데 성공했다.
날아온 것은 쇳조각이었다.
골렘이 발리스타로 쇳조각을 날린 것이다.
아무래도 이 쇳조각은 골렘 몸의 일부로 보였다.
자신의 살을 깎아 적에게 공격한 셈이다.
제대로 만든 화살이 아닌 쇳조각을 제대로 날리는 건 쉽지 않을 것인데, 골렘이 날린 쇳조각은 놀랄 만큼 정확도와 위력을 가지고 사울 일행을 덮쳤다.
동시에 또 다른 골렘도 움직였다.
이 골렘은 등에 발리스타를 싣지 않았다.
대신 양쪽 팔에 거대한 칼날이 달려 있었다.
집채만 한 황소라도 두 토막을 낼 수 있을 만큼 거대한 칼날을 휘두르는 골렘의 위용에 병사들은 경악했다.
“저, 저게 뭐야!”
“빌어먹을!”
몇몇은 싸우기도 전에 겁을 먹은 기색이 역력했다.
정예병을 뽑아 왔지만, 도적이나 평범한 몬스터가 아닌 골렘의 위용은 아무리 정예라도 버티기 어려운 것이었다.
이럴 때는 실력자가 앞서야 한다.
최고의 실력자인 카스텔이 움직였다.
촉수처럼 뻗어 나온 수십 가닥의 검푸른 마나 덩어리가 골렘의 몸을 때렸다.
그 순간 카스텔이 중얼거렸다.
“제법이군.”
놀랍게도 골렘은 상처 하나 입지 않고 멀쩡했다.
그 강한 카스텔의 공격을 받았음에도 말이다.
그러는 사이 발리스타를 짊어지고 있던 골렘이 다시 움직였다.
카스텔이 강적이라는 것을 깨달은 듯 그녀를 목표로 삼고 쇳조각을 날렸다.
카스텔은 다시 한번 방어막으로 공격을 막아 냈다.
그러자 칼날 골렘도 카스텔 쪽으로 움직였다.
두 골렘 모두 자신을 노린다는 사실을 안 카스텔은 재빨리 움직였다.
겁먹은 병사들이 가득한 부대에서 멀리 떨어진 것이다.
두 골렘 모두 병사들은 안중에도 없는 듯, 카스텔을 뒤쫓았다.
보고 있던 사울도 카스텔의 의도를 파악했다.
“정면에서 상대하는 건 선생님의 몫이다! 모두들 도와라!”
“알겠습니다!”
사울의 명령에 왕국은 물론 카멜 산의 병력도 나섰다.
전투의 방향은 정해졌다.
카스텔이 두 골렘의 주의를 끌고, 나머지 사람들이 힘을 합쳐 골렘을 처리한다.
골렘은 다른 자들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카스텔을 집중해서 노렸다.
그 때문에 카스텔 역시 쉽사리 반격하지 못했다.
원거리에서 막강한 공격을 날리는 발리스타 골렘.
동시에 수시로 달려들어 칼날을 휘두르는 골렘까지.
두 골렘은 오랫동안 훈련 받은 병사처럼 효율적인 합공으로 카스텔을 노렸다.
간간이 카스텔이 반격을 하긴 했지만 몸이 쇳덩어리 그 자체인지라 큰 피해를 주진 못했다.
“골렘이라면 중심이 되는 핵이 있을 거다! 그 핵을 노린다!”
사울의 명령은 정론이었다.
인간에게 심장이 있듯, 골렘에게는 핵이 있다.
문제는 그 핵의 위치가 골렘마다 다르다는 것이다.
골렘 몸 어디엔가 있겠지만, 몸 중심이 아니라 머리, 심지어 발바닥에 있을 수도 있다.
골렘 제조자가 알려 주지 않는다면 상처를 입히며 찾을 수밖에 없다.
두 골렘의 공격을 받고 있는 카스텔은 아직 여유로웠다.
적을 쓰러뜨리지는 못할망정, 합공을 당해 쓰러질 것 같지는 않다.
지금은 흔치 않은 적의 패턴에 익숙하지 않을 뿐, 시간이 지나면 혼자서 해법을 찾아 적을 쓰러뜨릴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급박한 전장에서 한 가지 전략만을 고집하는 건 좋은 생각이 아니다.
만에 하나라는 게 있는 법이니까.
카스텔이 가장 큰 전력이라는 건 분명하지만 다른 전력도 잘 활용할 필요가 있다.
‘역시 선생님이 시간을 끄는 사이 강한 공격을 퍼부어 정리하는 게 낫겠어.’
결정을 내린 사울이 직접 마법을 시전했다.
“에어 블레이드!”
바람의 칼날으로 적을 베는 에어 블레이드.
기본 마법에 속하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서 특히 유용하다.
마법을 쓰기에 따라 바람의 힘을 응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울이 만들어 낸 에어 블레이드는 바람의 ‘칼날’과는 달랐다.
칼날보다는 ‘송곳’에 가까웠다.
가느다란 바람의 송곳에 힘을 응집시킨 사울은 골렘을 공격했다.
바람의 송곳은 카스텔을 공격하려던 발리스타 골렘의 몸에 적중했다.
“……!”
카스텔의 마법을 맞고도 끄덕없던 골렘의 몸에 구멍이 뚫렸다.
관통력만으로 따지면 사울의 에어 블레이드가 카스텔의 마법을 능가한 것이다.
아쉽게도 핵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계속 구멍을 뚫다 보면 골렘의 핵을 찾아내거나, 아예 골렘의 핵을 뚫어 버릴 수 있을지 모른다.
‘좋아. 이렇게 카스텔이 계속 버텨 주고 나와 다른 자들이 골렘을 헤집어 놓는다면…….’
바로 그때.
사울의 전략이 뿌리째 흔들리기 시작했다.
“윽……!”
큰 문제없이 두 골렘을 상대하던 카스텔이 갑자기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 모습을 본 사울은 무슨 일인지 바로 파악했다.
‘설마 발작이?’
그야말로 불운이었다.
최근에는 카스텔 스스로 발작을 제어하는 방법도 익혔고, 세네카에게서 증상을 완화시킬 처방까지 받은 참이다.
그런데 하필 지금 같은 긴박한 상황에서 발작이라니.
사울은 곁에 있던 아르멜과 아이나에게 외쳤다.
“선생님을 도와요!”
“알겠습니다!”
투구 전사 활동 때 카스텔의 발작을 본 적 있는 아이나가 서둘러 움직였다.
아르멜도 뒤이어 움직이고, 사울도 재빨리 주변을 살피고는 카스텔 구조에 나섰다.
다행히 새로운 적이 나타날 낌새는 없어 보였다.
하지만 두 골렘은 여전히 위협적이었다.
두 골렘 모두 난적이던 카스텔이 비틀거리는 것을 눈치챈 듯 공격에 더욱 집중하는 모양새였다.
다행히 카스텔은 아직 스스로를 지킬 힘이 남아 있었다.
심한 발작은 아닌 듯 무기력하게 쓰러지는 대신 남은 힘과 정신력을 끌어모아 스스로를 지키는 데 전념했다.
두 골렘이 그런 카스텔을 공격했지만, 카스텔의 방어는 쉽게 뚫리지 않았다.
카스텔이 골렘의 집중 공격을 버티며 관심을 끄는 동안 사울 일행은 골렘을 공격하고 있었다.
골렘이 제대로 생각할 줄 알았다면 한 녀석만 카스텔을 공격하고, 다른 녀석은 사울 등을 상대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기껏해야 마법으로 움직이는 인형.
지휘자도 없이 스스로 움직이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계속된 공격에 몸이 금속으로 된 골렘도 상처를 입었다.
다만 가벼운 상처는 금방 재생해 버렸다.
여기저기가 깨지고 부서져도 부서진 금속이 스스로 돌아가 금방 복구되는 것이었다.
‘카스텔을 구하려면 골렘의 핵을 부숴 놈을 완전히 쓰러뜨려야 해.’
생각을 정한 사울은 골렘과 카스텔 주변을 맴돌며 마법을 시전했다.
사울이 손을 뻗고 마법 검을 휘두를 때마다 날아간 마법이 골렘의 몸에 직격했다.
골렘을 쓰러뜨리기엔 역부족이었지만, 하나하나 정확한 공격이었다.
하지만 두 골렘은 쏟아지는 공격에도 불구하고 끈질기게 카스텔을 노렸다.
카스텔 역시 만만치 않았다.
발작 탓에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팔다리를 떨면서도 마법을 유지하며 자신의 몸을 지켰다.
‘좋아. 이대로 가면……!’
발리스타를 쏘는 골렘도 분명 강적이다.
공격력으로 따지면 칼날 골렘보다도 강할 것이다.
하지만 발리스타 골렘의 공격은 둔하다는 결점이 있었다.
발리스타 시위를 당기고, 쇳조각을 날리는 데 시간이 걸려 한 발 한 발 쏠 때마다 틈이 있었다.
사격 자체는 정확한 편이었지만, 계속 칼날이 달린 팔을 휘두르며 공격을 이어가는 칼날 골렘보다는 확실히 둔했다.
문제는 카스텔 주변을 맴돌며 계속 팔을 휘두르는 칼날 골렘이다.
몸으로 저 칼날을 받으면 그대로 두 토막이 날 것이다.
코앞에서 공격을 피하기는 어렵고, 마법으로 막아도 상처를 입을 수 있다.
발리스타 골렘은 몰라도 칼날 골렘은 잠시라도 무력화시킬 필요가 있었다.
사울은 아군 중 카스텔 다음가는 실력자인 모데아에게 말했다.
“잠시라도 칼날 골렘을 쓰러뜨릴 수 있을까요?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해 보겠습니다.”
대답과 함께 모데아가 등에 차고 있던 석궁을 꺼냈다.
거대한 석궁에 화살을 올리자 시위가 저절로 당겨졌다.
그 광경에 사울은 조금 놀랐다.
석궁은 시위를 당긴 상태에서는 보통 활보다 다루기 쉽다.
당겨진 시위를 붙잡을 필요 없이 고정시킨 채로 방아쇠를 당겨 화살을 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위를 당기기가 힘들다는 결점도 있다.
모데아의 석궁은 달랐다.
사울이 잘못 본 게 아니라면 시위가 ‘저절로’ 당겨졌으니까.
아마 시위를 자동으로 당겨 주는 마법 장치 같은 게 부착된 것이리라.
‘저런 무기는 처음 보는데. 저것도 드워프의 기술력인가?’
단순히 조작을 편하게 하는 수준을 넘어 저절로 시위가 당겨지는 석궁.
다르센 왕국에서도, 가멜다 왕국에서도 본 적 없는 무기다.
게다가 편리한 만큼 위력도 상당했다.
석궁에서 발사된 화살은 칼날 골렘의 몸뚱이에 박혔다.
치명상은 아니었지만, 단단한 골렘의 몸에 튕겨나가지 않고 박혔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