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카스텔은 문서에 적힌 것들을 읽으며 머릿속으로 계산을 해 보았다.
자신의 지식으로 생각해 볼 때 터무니없는 처방은 아니다.
하지만 처방을 준 세네카 역시 확신은 없는 것 같았다.
“이 처방을 따랐다가 제가 잘못될 수도 있습니까?”
카스텔의 질문에 세네카가 눈을 내리깔았다.
“더 나빠지지는 않으리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안전하다고 확실히 말씀드릴 수는 없겠습니다. 그 처방에 따를지, 따르지 않을 지는 당신이 결정하십시오.”
“알겠습니다.”
카스텔은 문서를 품에 넣고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이 처방이 효과가 있다면 은혜는 갚겠습니다.”
“괜찮습니다. 당신 같은 분을 도울 수 있어 기쁩니다.”
카스텔은 나가기 전 한마디를 보탰다.
“제 몸에 대한 건 비밀로 해 주십시오.”
세네카는 작게 웃었다.
카스텔을 진찰하기 전 사울에게 미리 들은 이야기였고, 승낙했으니까.
“물론입니다.”
* * *
사울은 세네카를 만나고 돌아온 카스텔의 이야기를 듣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잘되었군요.”
“솔직히 잘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보기에 이 약은 잘 듣는다 해도 제 몸이 지금보다 더 나빠지지 않게 막아 주는 역할 이상은 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그것만으로도 다행이에요. 선생님이 종종 아플 때마다 많이 걱정했으니까요.”
사울의 말은 거짓이 아니다.
카스텔에 대한 원한은 잊지 않았지만, 지금 죽어 버리거나 재기 불능이 되면 곤란하다.
카스텔에게 검을 들이대는 건 다른 원수들을 모두 제거한 뒤 해도 늦지 않다.
절반의 진심이 담긴 사울의 말에 카스텔은 고개를 숙였다.
“언제나 감사합니다. 전하.”
“언제나 선생님에게는 도움을 받고 있으니까요.”
“도움을 받는 건 저입니다. 언제나 감사합니다.”
카스텔의 진심 어린 감사.
다르센 왕국 통틀어 아바마마를 제외하면 받아 본 사람이 없을 것이다.
아바마마는 카스텔을 구렁텅이에서 건져 낸 은인이다.
카스텔이 그런 아바마마에게 진심으로 감사하고 충성을 바치는 건 당연했다.
그런데 카스텔이 자신에게도 비슷한 태도를 보이는 것 같다.
사울은 카스텔의 이런 태도가 조금 불편했다.
카스텔이 자신을 신뢰하는 건 좋은 일이다.
신뢰한다는 건 의심하지 않는다는 뜻이니까.
카스텔이라는 강자가 의심하지 않기에 자신은 마음껏 복수의 칼을 갈 수 있다.
편리한 일이지만,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다.
양심의 가책 때문일까,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일까.
사울은 자신의 속내가 드러나는 것을 피할 겸 재빨리 말을 돌렸다.
“선생님의 처방을 보니 희귀한 재료가 많더군요.”
“네. 이 재료를 모두 모으려면 왕실의 도움을 받아야 할 것 같습니다.”
달리 말하면 세네카의 처방은 왕실의 도움을 받으면 충분히 모을 수 있는 재료들로 구성되었다.
실재하는지조차 불분명하거나, 왕실의 힘으로도 구하기 어려운 극히 희귀한 재료는 없다.
그렇다면 충분히 구할 수 있다.
카스텔은 왕국의 중요한 인재니 아바마마도 분명 도와주실 것이다.
“그럼 아바마마께 편지를 쓸게요. 선생님의 일이라면 아바마마께서도 허락하실 테니.”
“감사합니다.”
“괜찮아요. 그리고 이제 할 수 있는 건 다 한 것 같으니 계속 날 도와주세요.”
“물론입니다. 전하.”
마침 카스텔이 도와줄 일이 하나 있었다.
“실은 대신전으로 돌아가는 길에 들를 곳이 생겼어요.”
“들를 곳이라고요?”
“조금 전 아이나가 괜찮은 정보를 하나 가져왔어요. 기억하지요? 피닉스를 만들거나 깊이 관여한 것으로 여겨지는 오스펠이라는 드워프.”
“네, 전하.”
“그 오스펠의 흔적을 찾아냈어요. 카멜 산에서 그렇게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회색 공원’이라는 곳에서요. 카멜 산의 추격군에게 쫓길 때 그곳에서 잠시 머무른 모양이에요.”
사울의 말에 카스텔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추격군에게 쫓겼다면 이미 카멜 산에서 조사를 하지 않았겠습니까?”
“제대로 조사를 하지 않았대요. 회색 공원은 꽤 위험한 곳이라더군요.”
“그 위험한 곳을 전하께서 직접 조사하시려고요?”
“드래곤을 잡으려면 드래곤 둥지로 가야지요. 물론 내 목숨을 걸 생각은 없어요. 하지만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 이번에도 선생님의 도움이 필요해요.”
카스텔은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전하.”
* * *
예정대로 사울 일행은 카멜 산에서 일주일간 머물렀다.
사울이 언급하였듯 인간에게 경계심이 많은 이종족과 두루 친해지기는 너무나도 짧은 시간이었다.
하지만 일주일의 시간이 헛되이 지나가지는 않았다.
먼저 사울과 카스텔은 세네카와 여러 번 만남을 가졌고, 꽤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물론 일주일 만난 것으로 진심 어린 친교를 맺은 것은 아니었다.
외교적으로 조금 가까워진 사이가 된 정도라고 할까.
그것만으로도 적지 않은 성과라 할 수 있었고, 실제로 ‘카스텔의 처방전’처럼 눈에 띄는 성과도 거두었다.
그리고 카멜 산을 떠나기 하루 전, 사울은 세네카에게 제안했다.
“오스펠이 회색 공원이라는 곳에 머물렀다고 하더군요. 저와 대족장님이 힘을 합쳐 이곳을 조사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회색 공원 말씀이십니까.”
“네. 조사 계획은 있었지만, 행동에 옮기지는 못했다고 들었습니다.”
세네카는 밝지 않은 표정으로 말했다.
“저도 회색 공원에 오스펠과 그의 무리가 잠시 머물렀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만… 회색 공원은 꽤 위험한 곳이지요.”
세네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인지는 뻔했다.
위험한 곳을 조사하다 보면 동족이 희생당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저와 선생님이 직접 나선다면 희생을 막거나 최대한 줄일 수 있을 겁니다.”
사울의 말에도 세네카의 표정은 밝아지지 않았다.
“괜찮으시겠습니까? 회색 공원은 정말 위험한 곳입니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소수 정예로 병력을 편성하여 조사하고, 최대한 안전하게 움직일 생각입니다. 저 역시 대족장님과 마찬가지로 부하의 목숨을 희생시키고 싶지는 않으니까요.”
“…….”
세네카도 결국 사울의 말에 수긍했다.
“알겠습니다.”
세네카는 마침 방 안에 있던 모데아에게 말했다.
“그대가 전하와 함께 회색 공원에 다녀오세요.”
놀란 모데아가 물었다.
“대족장님. 저는 대족장님을 호위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래요. 하지만 당신만큼 믿을 만한 실력자가 없어요.”
“제가 자리를 비우면 대족장님의 안위는…….”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나 스스로 안위에 좀 더 신경을 쓸 테니.”
세네카가 방심하지만 않는다면 누구도 그를 위협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왕국에서 대규모의 병력을 보내 전쟁을 벌인다면 모를까, 소수의 자객 따위에 당할 세네카가 아니다.
세네카의 말투는 부드러워도 뜻은 굳었음을 안 모데아는 결국 수긍했다.
“알겠습니다. 대족장님. 부디 몸조심하십시오.”
“걱정 말아요. 그리고 전하께서는 회색 공원의 일이 마치면 바로 대신전으로 돌아가실 것 같으니, 그대가 전하를 대신전까지 호위하고 돌아오세요.”
“네. 대족장님.”
명령을 내린 세네카는 사울을 돌아보며 말했다.
“앞으로도 전하, 그리고 다르센 왕국과는 평화로운 관계가 이어지기를 바랍니다.”
“물론입니다. 대족장님.”
* * *
사울 일행은 일주일의 일정을 마치고 카멜 산을 떠났다.
목적지는 대신전이 아닌 회색 공원이었다.
“회색 공원은 꽤 위험한 곳인 것 같습니다.”
아르멜의 보고에 사울이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위험한 곳인데다 오스펠이 추가로 무슨 짓을 했을 가능성도 있지.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할 거야”
“그곳에 가면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가능한 철저히 조사를 하며 얻을 수 있는 모든 것을 얻어 내고 싶지만… 큰 위험을 감수하기는 어렵지.”
아르멜은 마침 마차 창밖에 비쳐 보이는 모데아를 힐끗 바라보았다.
허리에는 도끼를, 등에는 큰 석궁을 찬 모데아는 언뜻 보기에도 강인한 전사로 느껴졌다.
그리고 그와 함께 온 병력도 하나같이 정예들이었다.
하지만 위험한 곳에서 작전을 펼치다 보면 모데아가 다치거나 죽을 수도 있고 혹 다른 병력이 비슷한 일을 당할 수 있다.
세네카의 태도를 볼 때 모데아 본인은 물론, 함께 데려온 병력이 죽거나 다친다면 꽤 불쾌해 할 것이다.
성과는 내는 게 좋겠지만, 희생은 최대한 피해야 한다는 게 세네카의 생각이었으니까.
사울도 비슷한 생각이었다.
피닉스에 대한 정보를 얻으면 좋겠지만, 그것이 자신이나 일행의 목숨과 바꿀 만큼 가치가 있지는 않다.
정보도 중요하지만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안위가 더 중요했다.
“최대한 신중히 움직이는 게 좋겠어. 소수 정예로 움직이고, 위험하다 싶으면 미련 없이 철수할 수 있도록 준비를 해.”
“네, 전하.”
사울 일행은 대부분 자기 몸 정도는 지킬 실력이 있었다.
불안한 것은 딱 한 명뿐이다.
사울은 마차 밖에서 말을 타고 따라오던 데이빗을 불러 물었다.
“회색 공원에 대해 알고 있어?”
“이름은 들어 보았습니다. 몬스터가 출몰하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위험도 있는 곳이라고요.”
“너도 알다시피 우리는 그곳에 들렀다 갈 거야. 나와 다른 일행은 직접 조사를 하러 들어갈 테지만, 너는 밖에서 대기하도록 해.”
그러자 데이빗이 반발했다.
“하지만 전하. 저도 그곳을 직접 가보고 싶습니다.”
“어째서?”
“그건… 교단을 위해서라도 회색 공원이 어떤 곳인지 직접 보고 싶습니다.”
데이빗이 정직하게 말한 것은 아닐 것이다.
회색 공원이 궁금하기 보다는 사울 일행을 따라다니며 정보를 모으고 싶은 것일 테니까.
거짓말을 했다고 탓할 마음은 없다.
조사 대상 앞에서 정직한 첩자보다 무능한 게 어디 있겠는가.
다만 사울은 이번에는 물러설 마음이 없었다.
“데이빗. 이건 명령이야.”
“…….”
“이번 일은 위험하고, 또 희생자가 나오는 걸 원치 않아. 자기 몸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을 데려갈 수는 없어.”
“저도 무술과 마법을 조금은 배웠습니다.”
“그래? 그럼 선생님은 아니라도 나나 아이나, 아르멜과 대련을 해서 이기거나 몇 분이라도 버틸 자신이 있나?”
“그, 그건.”
데이빗은 말을 잇지 못했다.
‘그렇다’고 대답하면 즉각 대련을 하라는 명령이 떨어질 게 뻔했으니까.
사울이 볼 때 데이빗의 실력은 결코 대단하지 않았다.
무술이나 마법을 배웠다는 이야기도 처음 들었다.
만약 배웠다 하더라도 나이와 체격, 느껴지는 기운으로 볼 때 결코 대단한 실력자라고는 할 수 없었다.
결국 데이빗은 고개를 푹 숙였다.
“알겠습니다. 전하.”
“널 위한 일이야. 때로는 임무보다 목숨이 더 소중하다는 걸 기억하도록 해.”
“…….”
사울의 의미심장한 말에 무언가를 깨달았는지 데이빗은 더 말하지 않고 물러갔다.
얼마 후, 사울 일행은 회색 공원 근방에 도착했다.
“저기가 회색 공원입니다!”
외침 소리에 사울은 마차 창밖을 내다보았다.
나무 한 그루 찾아보기 어려운 황량한 평원 끝자락에 풍경이 바뀌는 게 보였다.
보이지 않는 경계라도 있는 듯 경계 밖은 풀 한 포기 찾아보기 어려운 황량한 평원이, 경계 안에는 여러 그루의 나무가 질서 있게 간격을 두고 자라는 광경이 보였다.
“말 그대로 공원이군요.”
아이나의 감상에 사울도 동의했다.
“그래요.”
저 독특한 풍경이야 말로 회색 공원이라는 명칭이 붙은 이유다.
수백 년 간 버려진 땅임에도 마치 누군가 인공적으로 조성한 듯한 풍경.
우연이라느니, 고대 마법이 원인이라느니 몇 가지 학설이 있지만 정설은 없다던가.
‘회색 공원’이 버려진 땅이 된 이유 또한 넓은 지역에 줄지어 늘어서 있는 회색빛 나무 때문이었다.
저 이름 모를 회색 나무는 계속해서 독기를 뿜어내기에 독에 익숙해진 몇몇 동식물을 제외하면 살아 있는 어떤 것도 오래 머무를 수 없었다.
나무를 모조리 베어 내고 개발을 하려면 못 할 것도 없지만, 그럴 가치는 없는 땅이었다.
그렇게 회색 공원이라는 별칭과 함께 오랫동안 버려진 땅에 오스펠이 흔적을 남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