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문제는 대신관이 카멜 산과 피닉스에 대한 어떻게 반응할지인데.’
대신관 콜리타가 이 사실을 알면 어떻게 반응할까.
카멜 산과 관계를 끊거나 다시 생각할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중립 지대의 대신전은 인간과 이종족의 화평과 교류를 위해 만들어졌다.
다른 목적도 있을지는 모르나 인간과 이종족의 화평 및 교류가 가장 큰 목적이라는 건 분명하다.
대족장이 어둠을 숭배하거나 카멜 산이 어둠에 집어삼켜지지 않는 한 대신전에서 카멜 산을 적대할 수는 없다.
지금껏 쌓아 올린 ‘인간과 이종족의 화평’이라는 공든 탑이 송두리째 무너지는 결과가 될 테니까.
‘대신전 쪽은 당장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것 같고… 여기서 할 수 있는 일은 모두 해야겠어.’
피닉스를 제거하는 공을 세움으로서 나라에 공헌하며 자신의 입지를 탄탄하게 만들고 세력을 키운다.
여기에 자신의 전생 수수께끼에 대한 열쇠를 찾을 가능성까지 생겼다.
아직은 대족장을 믿기 어렵지만, 피닉스 문제는 서로 친해지기 위한 좋은 방법이 될 수 있다.
“어쨌든 피닉스라는 자들을 처리하도록 하는 데 집중하도록 해요. 그것들만 잡으면 여러 가지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 테니까.”
반대 의견은 없었다.
사울은 아이나에게도 도움을 요청했다.
“시간은 걸리겠지만, 영주에게도 협조 요청을 하고 싶어요.”
“아버님께 말입니까?”
“그래요. 피닉스는 중립 지대에서 주로 활동하는 것 같지만, 다른 지역에도 퍼져 있을 수 있어요. 이종족이 이 문제에 관여했다면 이종족과 가까운 홉킨스 가문 영지도 영향을 받을 수 있으니까요.”
“알겠습니다. 아버님께 협조를 요청해 보겠습니다.”
“고마워요.”
의논이 거의 끝났지만 사울은 유독 카스텔이 조용한 게 신경 쓰였다.
의논을 시작할 때 마법 검사를 한 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줄곧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며 자기만의 세계에 빠진 모습이었다.
“선생님.”
“…….”
“선생님?”
두 번이나 불러도 대답이 없자 곁에 있던 아이나가 카스텔을 쿡 찔렀다.
그제야 카스텔도 자기 세계에서 벗어났다.
“전하.”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대족장에 대해서 생각했습니다.”
“대족장에게 뭔가 신경 쓰이는 게 있던가요?”
“네. 그와 싸우게 된다면 어떻게 할지 생각했습니다.”
세네카와 싸운다?
물론 세네카가 사울을 공격하거나 카멜 산에서 왕국에 선전 포고라도 한다면 싸워야 할 것이다.
하지만 어느 쪽도 가능성은 높지 않다.
세네카 개인적으로도 그런 무모한 일을 할 엘프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개인이 아닌 공적으로 봐도 카멜 산에서 갑자기 다르센 왕국을 적대하거나, 반대로 편을 들 이유는 없다.
카멜 산은 다르센 왕국과 가멜다 왕국의 전쟁에서도 중립을 지켰고, 그것을 200년 동안 유지했으니까.
“세네카가 나를 공격할 일은 없을 거예요.”
“그건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요?”
“저보다 강한 자를 만나는 건 정말 오랜만이니까요.”
“!!!”
카스텔을 제외한 모두가 놀랐다.
카스텔의 입에서 상대가 자신보다 강하다는 말이 나올 줄이야.
“정말 그가 선생님보다 강하다고 생각하나요?”
“싸워 보지도 않고 상대가 나보다 강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건 유쾌한 일이 아니지만 이번에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세네카가 강하고 지혜롭다는 말은 들었지만…….”
“그 자가 적이 아니라는 건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하지만 중립일 뿐, 아군은 아니니 경계해야 합니다.”
“…카멜 산을 적으로 만들면 안 되는 이유가 하나 더 늘었군요.”
사울의 말에 아르멜도 동의했다.
“전하 말씀대로입니다. 현재 우리 왕국과 가멜다 왕국의 세력은 거의 같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카멜 산이 우리 왕국을 적대하고 가멜다 왕국의 편을 든다면… 그 결과는 끔찍할 겁니다. 반대의 경우라면 가멜다 왕국에 끔찍한 일이 되겠지만요.”
“그렇지.”
카멜 산과 다르센 왕국의 동맹.
현재 다르센 왕국이 가장 바라는 일일 것이다.
이루어지기만 한다면 양국의 균형이 뒤집힐 테니까.
반대로 카멜 산이 가멜다 왕국과 동맹을 맺는다면 끔찍한 사태일 테고.
“세네카가 정말 강한 존재라는 건 알겠어요. 강하다고 꼭 위험한 건 아니지만… 신경은 써야겠지요. 아무튼 머무는 동안 각자 할 일을 확실히 정하도록 해요.”
물론 카멜 산에 도착하기 전부터 사울 일행은 할 일을 어느 정도 정해 두었다.
다만 세네카를 만난 다음 최종 결정 내리기로 했기에 확정된 것이 없었다.
“나는 세네카와 자주 만날 생각이에요. 친해질 필요가 있으니까.”
먼저 사울이 말했고, 이어 아르멜이 말했다.
“피닉스에 대한 정보를 모으고 정리해 보겠습니다.”
아이나도 말했다.
“이곳 주민들이 조금이라도 우리를 친밀하게 느낄 수 있도록 친교에 힘쓰겠습니다.”
어린 데이빗마저도 할 일이 있었다.
“이곳에 교단 분이 계세요. 만나 보겠습니다.”
마지막까지 입을 열지 않은 건 카스텔이었다.
“선생님은요?”
“…제 일을 하겠습니다.”
카스텔은 사울의 호위 겸 각종 정보 수집을 돕기로 미리 이야기가 된 상태였다.
하지만 지금 카스텔의 모습을 보니 그저 할 말이 없어서 입을 다물고 있는 게 아니었다.
카스텔과 함께한 시간이 누구보다 많은 사울이라 카스텔이 무슨 생각을 하는 지 예측할 수 있었다.
“계속 대족장 생각을 하는 거예요?”
“…네.”
“그렇게 대족장이 신경 쓰이면 따로 만나 보는 게 어때요?”
카스텔은 골똘히 생각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허락해 주시는 겁니까?”
질문을 받은 사울은 조금 당황했다.
농담 삼아 한 말인데 카스텔은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니 세네카도 카스텔에게 관심이 있는 듯 했다.
카스텔이라는 인간에 대한 관심이라기보다는 검은 마녀 혹은 검은 흉성이라 불리는 강자에 대한 관심이겠지만 말이다.
“왜 대족장과 만나려는 거죠?”
“대족장이라면 제 몸을 고칠 방법을 알 수도 있을 테니까요.”
“아.”
사울은 카스텔의 말을 수긍했다.
지금 카스텔의 몸은 완전하지 않다.
6년 전쟁 당시 가르시아 자매에게 크게 당했고, 지금까지 후유증이 남아 있다.
때문에 전성기에 비해 힘도 줄어들었고, 종종 발작까지 겪고 있다.
이제는 카스텔도 후유증에 익숙해져 줄어든 힘에 적응했고, 발작도 어느 정도 제어하고 있다.
하지만 완벽하지는 못했다.
가끔 발작 직전까지 가거나, 가벼운 발작이 일어나기도 했다.
그렇기에 카스텔은 자신의 몸을 고칠 방법을 찾고 연구했다.
하지만 아직 찾지 못했다.
다르센 왕국에서 소문난 의사나 마법사, 연금술사도 카스텔의 몸을 원래대로 고칠 방법을 찾지 못했다.
사울은 아바마마와 카스텔을 진찰한 의사의 대화를 직접 들은 적이 있었다.
‘죄송합니다. 폐하. 제 실력으로는 그분을 고칠 수 없습니다.’
‘정말 안 되겠는가? 그대는 이 나라에서도 손꼽히는 의사이며 마법이나 연금술도 잘 알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그분은 특별합니다. 죄송한 말씀이지만 그분의 몸은 보통 환자와 너무나도 달라서…….’
‘알았다. 물러가라.’
왕국에서 손꼽히는 의술을 가진 명의도, 마법사나 연금술사도 카스텔의 몸을 고치지 못했다.
하지만 세네카라면 다를 수 있다.
수백 년을 살아온 엘프의 지식 어딘가에는 카스텔의 특별한 몸을 고칠 방법이 있을지 모른다.
자신이 세네카에게 전생의 수수께끼를 풀 희망을 걸 듯, 카스텔은 몸을 고칠 희망을 걸고 있는 것이다.
“그럼 내가 한번 세네카를 만나 선생님 이야기를 해 볼게요.”
* * *
사울 일행은 카멜 산에서 일주일간 머무르기로 했다.
일주일간 정보를 공유하며 검증된 정보에 따라 함께 피닉스를 쫓는다는 계획이었다.
이후 며칠간 사울 일행은 맡은 임무에 따라 움직였다.
피닉스에 대한 정보를 교환하고, 다르센 왕국과 카멜 산이 조금이라도 더 친해질 수 있도록 노력했다.
피닉스의 정보를 교환하는 건 순조로웠다.
하지만 카멜 산과 친해지는 건 쉽지 않았다.
사울과 아이나가 함께 노력했지만 대부분의 주민들이 사울 일행과는 거리를 두었다.
“어서오십시오, 전하.”
“반갑습니다.”
사울과 만난 대부분의 이종족들이 예의는 갖출지언정, 친하게 지내고 싶지는 않다는 태도를 보였다.
아이나와 함께 종족을 가리지 않고 최대한 많은 이종족과 만나 정보도 얻고 친해지겠다는 게 사울의 계획이었지만, 시작부터 난관에 부딪쳤다.
새삼 사울은 카멜 산, 나아가 중립 지대 이종족의 폐쇄적인 면모를 실감했다.
이백 년 전까지 노예 생활을 했던 원한이 남은 것일까.
아니면 율렌 섬 대부분을 차지한 인간을 경계하는 탓일까.
사울 일행을 적대하지는 않았지만, 하나같이 경계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짧은 일주일의 일정을 이종족과 친목만 다지다 끝낼 수는 없는 일이다.
결국 사울은 이 일은 아이나에게 맡기기로 했다.
아이나는 사울의 명령을 받아들이면서도 자신 없는 표정을 지었다.
“알겠습니다. 전하. 하지만…….”
“나도 알아요. 이종족들이 저렇게 폐쇄적인데 일주일 만에 갑자기 친해지기는 어렵겠지요. 결과가 어떻든 실망하지 않을 것이니 최선을 다 해 주세요.”
“네, 전하.”
이종족 교류를 아이나에게 전담한 사울은 피닉스에 대한 조사에 전념했다.
피닉스 조사는 세네카가 특별히 명령을 내린 것도 있어 그나마 수월했다.
카멜 산에서 치부로 여길 만한 정보에도 어느 정도 접근이 가능했다.
“역시 ‘피닉스’는 카멜 산과 관련이 있군.”
“그렇습니다. 과거 몇몇 이종족이 피닉스라는 이름 아래 조직을 만들려다 실패하고 도망쳤다고 합니다.”
“그 도망자들은 찾지 못했고.”
“네. 최선을 다해 찾았는지, 찾는 시늉만 한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후자일 수도 있을 거야.”
세네카는 동족의 안위를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훌륭한 족장이다.
그렇기에 동족을 희생시키거나 피를 보는 행동은 극히 꺼릴 것이다.
심지어 카멜 산의 법에는 ‘카멜 산에 속한 동족은 사형시키지 않는다’는 조항마저 있었다.
카멜 산에 속하지 않은 인간이라면 사형당할 수 있지만 카멜 산에 속한 동족은 아무리 큰 죄를 지어도 평생 감금을 시킬지언정 죽이지는 않았다.
오죽하면 권력을 노리고 반역을 일으킨 자도 살아서 감옥에 있다고 하겠는가.
“반역자도 죽이지 않는 게 카멜 산의 법이야. 어둠에 속한 자도 마찬가지겠지.”
“세네카의 성향이 골치 아픈 문제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 카멜 산 밖이라면 모를까 안에서 이종족과 싸우고 피를 보기라도 한다면… 세네카가 아주 싫어하겠지.”
다행이라 해야 할 지 현재 카멜 산 내부에는 피닉스에 관련된 자들이 없는 것 같았다.
세네카가 그들을 체포하라 명령했고, 관련자들은 체포에 불응하여 도망쳤다고 했다.
“이 드워프가 그 도망친 이종족의 우두머리지?”
“네, 전하.”
사울의 시선 끝에 드워프의 얼굴 그림이 있었다.
카멜 산에서 수배령을 내렸지만 아직 잡지 못한 자.
드워프 오스펠.
오스펠은 머리와 수염이 하얗게 센 늙은 드워프라고 했다.
늙었지만 카멜 산에서도 손꼽히는 장인이었고, 그 손재주로 만든 무기로 추격자들을 제압한 뒤 자신의 일당과 함께 도망쳤다던가.
“카멜 산에서는 이 오스펠이라는 드워프가 피닉스의 핵심이라고 보고 있는 건가?”
“그럴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사실 카멜 산도 피닉스에 대한 정보는 부족한 것 같습니다. 우리보다 조금 더 많이 아는 정도이지요.”
“그럼 이 오스펠이라는 자를 잡는 게 시급하겠군.”
“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무슨 문제?”
“오스펠은 카멜 산에서 도망치기 전까지 상당히 인망이 높은 드워프였다고 합니다. 산 아래의 드워프와 산 위의 엘프 모두에게 존중받는 자였다더군요.”
“그러니 오스펠을 죽여서는 안 된다?”
“네. 만약 우리가 체포하다 오스펠이 죽기라도 하면 우리에게 그 책임을 물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