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제가 조금 특별한 존재라는 건 알고 있었습니다.”
사울의 말에 세네카도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역시 그러십니까?”
“네. 저의 특별함이 대족장님이 말씀한 ‘영혼의 특별함’이라고 하면 납득이 가는 부분이 많군요. 하지만 제가 특별하다는 건 저만 아는 사실입니다. 지금 문 밖에 있는 사람들은 저와 가장 가까운 자들이지만, 그들도 알지 못하는 일이지요. 제가 지금 대족장님께 할 수 있는 말은 이게 전부입니다.”
받아들이기에 따라서 실망할 수도 있는 이야기지만, 세네카는 실망하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솔직히 저도 전하께 다 하지 못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는 신뢰가 중요한 법이니, 신뢰가 쌓인 뒤 더 자세하게 이야기를 해도 늦지 않겠지요.”
이대로 이야기를 끝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지 모른다.
하지만 사울은 짧은 고민 끝에 질문을 던졌다.
“저와 같은 존재를 본 적이 있습니까?”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군요. 굳이 말씀드리자면, 전하와 비슷하게 보이던 자를 만난 적 있습니다.”
사울과 비슷하게 보였다.
그렇다면 그 자도 역시 사울처럼 전생을 기억하는 존재일까.
“그 자는 누구입니까?”
“그건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중요한 비밀입니까?”
“네. 왕국에 비밀이 있듯 카멜 산에도 비밀이 있지요. 저는 그 비밀을 지킬 의무가 있습니다.”
카멜 산의 비밀.
궁금했지만 아직 사울은 그 비밀을 캐낼 처지가 못 되었다.
함부로 비밀을 캐내려다 지금까지 쌓아 온 공든 탑을 무너뜨릴 수는 없다.
“그럼 제가 어떻게 하기를 바라십니까?”
사울의 질문에 세네카는 고개를 저었다.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피닉스를 함께 상대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 전하를 초대한 겁니다. 그런데 이런 일이 생길 줄이야.”
“저를 위험한 존재라고 생각하는 겁니까?”
“그것도 확답을 할 수 없군요.”
“제가 위험한 존재일 가능성이 있다는 말이군요. 어째서요? 저는 다르센 왕국의 왕자로서 왕국 법은 물론 교단의 법을 어긴 적이 없고, 하다못해 이종족을 탄압한 적도 없습니다.”
“압니다. 하지만 전하가 위험한 존재일 수 있다는 건 도의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전하의 영혼은 특별하고, 제 눈에는 섭리에 어긋난 상태로 보입니다. 가능하면 전하와 이 문제에 대해서 처음부터 끝까지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를 하고 싶지만… 지금은 때가 아닌 듯 합니다.
사울은 세네카를 전적으로 믿을 수 없다.
세네카도 마찬가지인 듯 했다.
결국 신뢰의 문제다.
이대로 세네카와 관계를 끊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수 있다.
저쪽에서 자신을 불안하게 생각한다면 아예 관계를 단절하고 다른 쪽에 집중할 수도 있다.
대신전의 힘을 빌려도 되고, 중립 지대의 다른 세력과 접촉할 수도 있다.
하지만 사울은 세네카와의 관계를 끊고 싶지 않았다.
‘대족장’의 세력을 놓치기 아까워서만은 아니다.
공적인 이유는 물론, 사적인 이유도 강했다.
왜 남들과는 달리 자신은 전생의 기억을 가지고 다시 태어났는가.
이것은 사울 인생 최대의 수수께끼였다.
그리고 세네카는 그 수수께끼의 열쇠를 가지고 있거나, 열쇠를 찾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위험할 수도 있다.
섭리 어쩌고 하는 말은 제대로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세네카가 사울을 위험한 존재로 보고 있다는 건 분명했다.
사울에게 왕자라는 배경이 없었다면, 지금보다 좀 더 난폭하게 행동하지 않았을까.
‘기회가 될 수도 있고, 위기가 될 수도 있겠지. 그렇다면…….’
강해져서 복수한다.
지금까지 사울이 간직해 온 목표.
그 외에는 눈길을 돌리지 않았는데, 처음으로 눈길을 돌릴 만한 게 나타났다.
복수와 관계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
복수만을 생각하며 이 일에는 관심을 끊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하지만 인생 최대의 수수께끼를 풀 수 있을 기회를 놓치는 건 너무나도 아까웠다.
‘어쩌면 내 삶의 수수께끼를 푸는 것을 넘어 새로운 것을 알고, 또 강해지는 계기가 될 지도 몰라.’
결국 사울은 마음을 정했다.
세네카와의 관계를 유지하고, 나아가 친해지기로.
설령 위험해진다 해도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이다.
마음을 정한 사울은 미소 지으며 말했다.
“저와 대족장님은 좀 더 친해져야 할 것 같습니다.”
세네카도 사울과 생각이 크게 다르지 않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동감입니다. 전하. 저도 전하와 좀 더 깊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전하의 영혼, 그리고 다르센 왕국과의 관계, 나아가 율렌 섬의 평화까지.”
“그런 날이 오면 좋겠군요. 그러려면 작은 일부터 함께 해 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네. 전하. 일단 피닉스에 대한 부분을 좀 더 의논하도록 하시지요. 지금 밖에서 걱정스럽게 서 있을 분들과 말입니다.”
세네카의 농담에 사울도 피식 웃었다.
문밖 상황은 어떻게 되었을지 보지 않아도 뻔했다.
예기치 못한 상황에 자신의 부하들은 물론 세네카의 측근들도 당황하고 있을 것이다.
세네카의 부하들 역시 이 일은 예상치 못한 것처럼 보였으니까.
아마도 문밖의 분위기는 꽤 어색할 것이다.
지금 이야기는 둘만의 비밀이다.
사울과 세네카는 부하들을 속여야 할 때 무슨 이야기를 할지 의논을 했다.
의논이 끝나고, 세네카가 말했다.
“이만 쉬시지요. 전하.”
“감사합니다.”
세네카가 손가락을 퉁기자 청아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러자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열렸고, 사울 일행이 먼저 방에 들어왔다.
특히 카스텔은 예의도 차릴 생각이 없는 지 유독 서두르는 기색이었다.
“괜찮아요. 선생님.”
사울의 말을 들은 뒤에야 카스텔은 진정하고 사울 뒤에 섰다.
세네카는 그런 카스텔에게도 눈길을 주었다.
“카스텔 씨.”
“…….”
“당신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당신과도 이야기를 나누고 싶군요.”
카스텔이 즉시 대답했다.
“네. 기회가 된다면.”
무례한 말일 수 있지만, 사울은 카스텔 기준으로는 예의를 차린 답변임을 알아들었다.
정말 카스텔이 무례한 태도를 취하려 했다면 무시하거나 존대를 하지도 않았을 테니까.
다행히 세네카도 카스텔의 태도를 크게 탓하지는 않았다.
“모두들 쉬시지요. 손님들을 숙소에 안내해 드리세요.”
“네, 대족장님.”
이렇게 사울과 세네카의 첫날 회담은 무사히 끝났다.
* * *
카멜 산에 거주하는 주민들은 두 종류의 집을 짓고 사는 것 같았다.
커다란 나무 위에 오두막을 엮어 만들거나, 아예 큰 나무속 공간에 위치한 집.
혹은 산 곳곳에 흙을 빚고 쌓아 만든 집.
사울 일행의 숙소는 후자였다.
완만한 산등성이에 마련된 여러 개의 흙집이 사울 일행에게 배정된 숙소였다.
사울은 그 중 가장 크고 깨끗한 흙집에 들어갔다.
다르센 왕국이나 가멜다 왕국에서는 흙집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왕국에서는 집을 지을 여력이 없으면 천막이나 노숙 생활을 하고, 집을 지을 여력이 있으면 나무를 베거나 돌이나 벽돌로 집을 짓는다.
카멜 산처럼 흙을 빚고 쌓아 집을 만드는 풍습은 거의 없었다.
흙집이 낯설지만 크게 어색하지는 않았다.
흙으로 빚어 만들었지만 놀랄 만큼 잘 여닫히는 출입문도 신기했고, 내부도 크게 나쁘지는 않았다.
대신전의 사울 방보다도 검소했지만, 투정할 정도는 아니다.
아늑한 분위기 속에서 휴식을 취하고 싶었지만 아직 할 일이 남았다.
사울은 뒤따라 들어온 일행을 자리에 앉혔다.
카스텔도, 아이나도, 아르멜도, 데이빗도 저마다 할 말이 있는 눈치였다.
“괜찮으십니까?”
먼저 카스텔이 물었다.
“네, 괜찮아요.”
“별다른 마법의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혹시 모르니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카스텔은 사울에게 손을 뻗으며 눈을 감았다.
주변 마나가 요동치는 게 똑똑히 느껴졌다.
몇 초 후, 카스텔이 손을 거두었다.
“전하께 마법을 걸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대족장이 그런 경우 없는 짓을 할 리가 없으니까요.”
“방심은 금물입니다.”
“네. 알고 있어요.”
이어 아이나가 말했다.
“대족장과 무슨 문제가 있었습니까?”
“별문제는 없었어요.”
“정말 다행입니다.”
“그대도 대족장을 만나는 건 이번이 처음이지요?”
“네. 대족장이 보낸 사절을 본 적은 있지만, 직접 만난 건 처음입니다. 저희 가문 통틀어 대족장을 직접 만난 건 제가 처음일 겁니다.”
“좋은 경험이었겠군요.”
아르멜이 좀 더 중요한 이야기를 꺼냈다.
“대족장과 무슨 이야기를 나누셨습니까?”
사실대로 말할 수는 없다.
사울은 이런 질문을 받을 때를 대비해 세네카와 의논한 이야기를 꺼냈다.
“오해가 있었던 것 같아. 대족장은 내가 어둠의 세력과 접촉한 것 때문에 내 영혼이 오염된 게 아닌지 의심하더군.”
“오염이라고요?”
“그래.”
영혼이 어둠에 오염된다.
근거 없는 이야기는 아니다.
어둠의 힘에 오래 접한 자는 영혼이 오염된다는 속설이 있었다.
어둠의 힘에 접하는 일이 드문 탓에 정말 어둠의 힘이 영혼 자체를 오염시키는가에 대한 부분은 논란이 있었지만 말이다.
“그럼 대족장은 어둠의 힘이 전하의 영혼을…….”
“더럽혔다고 생각하는 거냐고?”
“…네.”
“그렇지는 않아. 독약을 오래 접하면 서서히 독에 중독된다고 하잖아? 그와 비슷한 원리이니 조심하는 조언을 들었어.”
이 말은 부하들을 납득시키기 위한 거짓말이었다.
세네카와도 말을 맞췄기에 속이는 데 큰 문제는 없었다.
마법에는 능통하지 않지만 눈치 빠른 아르멜도, 마법에 능통한 카스텔도 당장은 의심하는 기색이 없었다.
그러자 데이빗이 말했다.
“영혼이 어둠에 오염될 수 있느냐에 대한 건 신전에서도 의견이 분분한데… 정말 그게 가능한 일이었군요.”
“대족장은 그것이 가능한 일이라고 보았어.”
이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실제로 세네카는 부하들을 속일 각본을 짜는 사울에게 이런 말을 했다.
‘어둠을 자주 접하는 영혼은 오염될 수 있습니다. 독을 자주 접하면, 몸에 독이 점점 쌓이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럼 대족장이 그런 일을 걱정했다고 부하들에게 이야기 해 두지요.’
‘네. 저도 말조심하겠습니다.’
혹시나 아르멜이 세네카에게 정보를 캐내려 해도 의미 있는 건 얻지 못할 것이다.
사울의 전생은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비밀이다.
아바마마는 물론, 낳아 준 어머니가 살아 계셨어도 이야기 하지 못했을 것이다.
사울은 가능한 이 비밀을 평생 숨길 생각이었다.
어차피 전생에 좋은 기억을 가졌던 사람들과는 다시 만날 수 없을 테니까.
전생의 기억을 복수를 위해 쓸 것이니 많은 사람이 알아봐야 좋을 게 없다.
모두들 사울의 해명에 납득한 듯 보였다.
나중에 의문을 품더라도 세네카가 잘 막아 준다면 일이 커지지는 않을 것이다.
사울은 자신의 영혼 이야기가 더 나오지 않게끔 화제를 돌렸다.
“대족장은 아는 것도 많고, 이래저래 걱정도 많은 자였어. 특히 어둠의 세력에 대해서 걱정을 많이 하더군. 피닉스 문제도 그렇고.”
아르멜도 나름대로 생각을 밝혔다.
“대족장이 자신이 아는 것을 다 말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그가 말한 내용은 거짓이 아닌 것 같더군요.”
“그렇겠지. 자신들의 치부를 숨기는 건 모를까, 없던 치부를 일부러 만들 일은 없을 테니.”
피닉스라는 정체불명의 존재는 카멜 산에서 탄생했거나, 혹은 탄생에 카멜 산이 관여되어 있을 것이다.
이 사실이 알려진다면 두 왕국은 물론 빛의 교단에서도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두 왕국과 교단에서 잡음이 일 것을 각오하고 자신들의 치부를 밝힌 것이다.
카멜 산도 쉽지 않은 상황에 처한 셈이다.
“데이빗.”
“네, 전하.”
“대족장을 만나기 전에는 이런 이야기를 들어 본 적 없지?”
“그렇습니다. 솔직히 저도 많이 놀랐습니다. 또 대신관님도 많이 놀라실 것 같아요.”
“대신관에게 모두 보고를 할 생각인가?”
“네, 그것이 제 임무니까요.”
민감한 정보는 가능한 통제하고 싶다는 게 사울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데이빗의 존재가 있으니 대신전에 정보가 흘러들어 가는 건 피하기 어렵다.
데이빗을 통제하는 것도 쉽지는 않았다.
적이 아니니 제거할 수는 없다.
카스텔에게 이야기를 해 적당히 기억을 지우거나 조작할 수도 있지만, 그 또한 위험 부담이 컸다.
만에 하나 발각되기라도 하면 그동안 대신전과 쌓은 관계가 무너질 테니까.
어차피 데이빗은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 따라온 것일 테다.
무리해서 통제하는 것보다는 지금의 관계를 적절히 활용하는 게 낫다.
사울에게 유리한 형태로 정보가 흘러가도록 손을 쓸 수도 있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