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
대충 공적인 이야기가 끝났나 싶었는데, 세네카는 아직 할 말이 남은 모양이다.
그런 세네카의 모습에 세네카 주변의 이종족도 의아해했다.
대족장의 이런 모습은 이종족에게도 낯선 것일까.
“전하.”
“네. 말씀하십시오.”
“지금까지 말씀드린 이야기는 확정된 것이라고 생각해도 되겠지요.”
“그렇습니다.”
“그럼 이제 다른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전하와 단 둘이서. 말입니다.”
“……!”
사울은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첫 대면에서 나왔던 ‘영혼’ 이야기를 하려는 것임을.
짧은 시간동안 수많은 생각이 사울의 머릿속을 뛰어다녔다.
여러 ‘공적인 문제’들보다도 지금 이 순간이 더 긴장되었다.
대족장 세네카는 수백 년을 살아온 엘프이며 이종족의 수장이다.
그만큼 보통 인간은 상상도 못할 많은 지식을 알고 있을 것이다.
또한 율렌 섬 최고의 실력자 중 한 명이기도 하다.
카스텔이나 가르시아 자매보다 강할 지는 붙어 봐야 알 일이지만, 지식이라는 측면에서는 그들보다 뛰어나면 뛰어나지 부족하진 않을 것이다.
율렌 섬에서 가장 지혜롭고 많은 지식을 가진 자 중 하나.
그런 세네카가 사울과의 첫 만남에서 영혼 이야기를 꺼냈고, 이제 단 둘이서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한다.
‘이건 기회일지 몰라.’
돌이켜 보면 사울의 존재는 수수께끼 그 자체였다.
다르센 왕국의 하급 귀족이었던 자신이 사망 후 적국의 왕자로 다시 태어나지 않았는가.
그것도 전생의 기억까지 간직한 채 말이다.
사울이 전생의 기억을 떠올리게 된 계기는 사고로 인한 것이었다.
사고를 당해 머리를 다쳤고, 그 충격으로 전생의 기억을 떠올렸다.
하지만 이것은 일반적인 일이 아니었다.
수많은 책을 뒤져도, 사울과 같은 일을 겪은 사람이 있다는 기록은 없었으니까.
출처 불명의 이야기나 정신병자의 헛소리를 제외하면 말이다.
그렇기에 사울은 ‘자신이 왜 전생의 기억을 가진 채 환생하였느냐’에 대해 오랫동안 생각하지 않았다.
세상이 시작된 이래 누구도 겪은 적 없는 우연이거나, 평생 매달려도 풀기 어려운 수수께끼라 생각했다.
그런 수수께끼를 푸는 데 매달리는 것 보다는 전생의 원한을 풀고 지금의 삶을 사는 게 더 중요했다.
어쩌면 눈앞의 세네카는 사울 인생의 가장 큰 수수께끼의 답을 알고 있을지 모른다.
이번이 아니면 두 번 다시 기회가 없을지 모른다.
결국 사울은 세네카의 뜻에 응했다.
“알겠습니다. 대족장.”
의논 하나 없이 세네카의 뜻을 받아들인 사울의 말에 사울 일행은 당황했다.
“전하. 대족장과 단 둘이 밀담을 나누는 건 위험할 수 있습니다.”
아르멜의 귓속말에 사울은 자신의 일행을 돌아보았다.
하나같이 걱정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세네카 쪽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세네카의 호위대장인 모데아를 비롯한 그의 측근들도 세네카에게 속삭였다.
무슨 소리를 하는 지 들을 수는 없었지만 내용은 뻔했다.
인간 왕자와 단 둘이 밀담을 나누는 건 좋지 않을 수 있다는 내용 아니겠는가.
하지만 사울은 마음을 굳혔다.
“대족장이 내게 할 이야기가 있는 모양이고 나도 그래. 걱정 마.”
세네카도 마찬가지였다.
“괜찮습니다. 전하와 꼭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울과 세네카 모두 생각이 같았기에 측근들도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결국 사울과 세네카를 제외한 모두들 방에서 나가게 되었다.
“저나 전하의 명령 없이 누구도 이곳에 들어와서는 안 됩니다.”
세네카의 명령을 끝으로 문이 닫혔다.
그렇게 둘만 남긴 채 밖에 머무르게 된 사울 일행과 세네카의 측근들 모두 예상치 못한 사태에 혼란스러워했다.
당혹스러워 하던 호위대장 모데아가 아르멜에게 물었다.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아르멜도 할 말이 없었다.
자신도 사전에 언질 한마디 받지 못했으니까.
“대족장님이 사전에 이 일에 대해서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습니까?”
아르멜의 반문에 모데아는 고개를 저었다.
“이런 예정은 없었소. 피닉스에 대한 이야기가 결정되면 곧바로 만찬을 할 계획이었단 말이오.”
누구도 예상치 못한 사울과 세네카의 밀담.
당혹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문득 카스텔이 말했다.
“조금이라도 문제가 벌어지면 내가 나설 겁니다.”
“…….”
모데아도, 다른 이종족도 카스텔이 누구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이 자리에서 카스텔이 난동을 부리기라도 하면 엄청난 피해를 볼 수밖에 없다는 것도 잘 알았다.
“아무 일 없어야 할 텐데.”
아이나가 닫힌 문 쪽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이 자리의 모두의 심정과 같았다.
* * *
사울은 마른침을 삼켰다.
전투를 할 때 빼고는 이렇게 긴장을 해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대체 세네카는 무엇을 알고 있을까.
어떻게 해야 아는 것을 불게 만들 수 있을까.
일단 사울은 모르는 척 물었다.
“이제 우리 둘만 남았군요. 대족장님.”
“…….”
세네카는 대답 대신 사울을 바라보았다.
이제 볼 사람도 없다는 듯 사울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무언가 분석하려 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마침내 분석을 끝낸 듯 세네카가 입을 열었다.
“전하.”
“말씀하세요.”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저에게도 이 일은 정말 특별해서 말입니다.”
일단 사울은 모르는 척 맞장구를 쳤다.
“저나 제 일행이 무언가 무례를 범하기라도 했나요? 그렇다면 기탄없이 말씀해 주십시오. 실수를 바로잡고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할 터이니.”
“그런 게 아닙니다. 제가 묻고 싶은 건 전하의 영혼입니다.”
“…….”
사울은 평정을 가장하려 노력했다.
이런 연기라면 익숙했지만,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도 본심을 숨기기가 어려웠다.
위엄 넘치는 아바마마 앞에서도, 냉철함으로는 아바마마보다도 위인 누님 앞에서도 줄곧 연기를 잘해 왔던 사울이다.
그들은 사울이 무엇을 숨기고 있는지 상상도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눈앞의 세네카는 어떨까.
대체 사울에 대해 무엇을 얼마나 알고 있는가.
잠시 침묵이 흘렀다.
무거운 침묵을 깬 건 역시 세네카였다.
“이 세상에는 섭리가 있습니다. 전하.”
“섭리라면… 빛과 어둠의 섭리를 말하는 것인가요?”
“그것도 물론 세상의 근원이 되는 섭리입니다. 창조의 빛, 멸망의 어둠… 전하 같은 인간이나 저 같은 엘프, 다른 동족들이 빛을 숭상하고 어둠을 배척하는 이유이지요. 하지만 이 세상의 근원을 이루는 또 다른 섭리가 존재합니다.”
“그게 무엇이지요?”
“육체와 영혼, 즉 생명과 죽음의 섭리 말입니다. 모두에게 생명은 하나뿐이고, 육체와 영혼은 연결되어 있지요. 그리고 육체가 죽으면 영혼은 육체를 떠납니다. 육체를 완전히 떠난 영혼이 어떻게 되는지는 오직 신만이 아실 테지요.”
“그런데요?”
“분명한 것은 육체를 떠난 영혼은 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육체 또한 버려진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죽음이라고 부르고, 죽음 뒤에 무엇이 있는지는 누구도 명확히 알지 못하지요.”
아무래도 영혼 운운한 게 우연은 아닌 모양이다.
다른 사람도 아닌 사울 앞에서 아무것도 모르고 이런 소리를 늘어놓을 수는 없을 테니까.
하지만 사울은 자신의 정체를 밝힐 수는 없었다.
눈앞의 세네카의 말대로라면 자신은 ‘섭리를 어긴 존재’가 아니겠는가.
일단 사울은 시치미를 뗐다.
“제가 배움이 짧아서인지 대족장의 말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정말 그러십니까?”
“네.”
“다시 묻겠습니다. 정말 그러십니까?”
“!!!”
세네카의 표정이 굳었다.
동시에 분위기가 바뀌었다.
사울은 확실히 깨달았다.
세네카가 마음만 먹으면 이 자리에서 자신을 없애 버릴 수 있다는 것을.
문 밖에 있는 누구도, 심지어 카스텔도 그것을 막기 어렵다는 것을.
마나의 흐름이 느껴지는 게 아니다.
세네카가 사울을 공격하려 마법을 준비했다면, 바깥에 있는 카스텔이 벌써 눈치채고 달려왔을 것이다.
정체불명의 위압감이라고 할까.
마나처럼 직접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 존재하고 느낄 수 있는 기운과는 또 다른 기운.
오직 세네카와 눈을 마주치고 있는 사울만이 명확히 느낄 수 있으리라.
….제게 무슨 대답을 바라는 겁니까?”
“진실입니다.”
“전 지금 진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대족장님의 말씀을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 말입니다.”
어설픈 거짓말로 속일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실제로 사울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세네카의 두루뭉술한 말은 제대로 이해가 가지 않았으니까.
이해할 수 있는 건 세네카는 영혼 이야기를 하고 있고, 그 이야기가 사울이 전생의 기억을 가진 것과 맞닿아 있다는 것뿐이다.
그런 사울을 바라보던 세네카가 말했다.
“저는 지금까지 많은 일을 겪었고, 또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그 중에는 삶과 죽음에 대한 것들이 많았습니다. 그 중에는 영혼에 관한 것이 있었지요.”
“영혼이라고요?”
“네. 방금 전 섭리 이야기를 하지 않았습니까. 죽은 자의 영혼은 육체를 떠나 누구도 알지 못하는 운명 속으로 사라진다. 간단히 말해 이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진다는 것이지요.”
사울은 자신의 지식 안에서 반문해 보았다.
“하지만 유령 같은 존재도 있지 않습니까?”
“네. 유령은 분명 죽은 자의 영혼에게서 파생된 존재이지요. 하지만 유령은 완전한 영혼이 아닙니다. 죽은 자가 남긴 파편 같은 것이지요. 또한 유령 역시 섭리에 어긋난 존재이며 이유 불문 배제되어야 할 대상임은 전하께서도 잘 아실 겁니다.”
“그건 알고 있습니다.”
죽은 자를 살리는 마법, 강령술과 그에 관련된 모든 행위는 금기 중의 금기다.
또한 유령을 이용해 실험을 하거나, 하다못해 유령과 깊은 관계를 가지는 것도 금지되었다.
빛의 교단에서 그렇게 가르쳤고, 율렌 섬의 두 왕국은 물론 율렌 섬 바깥의 대륙에서도 이런 교단의 가르침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비슷한 이유로 유령 역시 ‘발견 즉시 퇴치’가 율렌 섬, 나아가 바깥의 대륙에서도 적용되는 규칙이었다.
확실히 유령 같은 존재는 세상의 섭리에 어긋난 것이라 할 수 있다.
사울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세네카는 자신을 유령 같은 존재로 보는 것인가.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 화가 났다.
자신의 존재가 섭리에 어긋나든 말든 알 바 아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전생의 기억을 가진 채 다시 태어났고, 전생과 현생을 아우르며 원하는 것을 이루리라 다짐했다.
세네카가 자신이 섭리에 어긋난 존재라고 낙인찍는다는 건, 자신의 삶을 뿌리부터 부정하는 것 아닌가.
섭리니 뭐니 알아듣기 어려운 논리로 말이다.
결심한 사울이 말했다.
“그럼 대족장님은 제가 어둠과 한패거나, 유령처럼 섭리를 파괴하는 자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그렇다고 생각했다면 이미 전하께 손을 썼을 겁니다.”
“그럼 제게 왜 이러시는 겁니까?”
세네카는 비로소 본론을 꺼냈다.
“제가 전하에게서 무엇을 보았는지 말씀드리지요. 저는 누군가를 볼 때는 항상 영혼을 같이 봅니다.”
“영혼을 본다고요?”
“네, 물론 상대의 영혼을 거울처럼 훤히 비춰볼 수 있는 건 아닙니다. 대부분의 영혼은 주인의 성향과 상관없이 모두 똑같이 보입니다. 진심으로 빛을 숭상하고 선행을 베푸는 순결한 신관의 영혼도, 수백 명을 죽인 악독한 살인마도 제 눈에는 크게 다르게 보이지 않습니다. 섭리를 벗어난 자만이 다르게 보이지요. 어둠을 따르거나 영향을 받은 자들, 혹은 그 외의 이유로 섭리에서 벗어난 자들 말입니다. 과거의 일 때문에 저는 처음 보는 상대와 마주할 때 꼭 영혼을 함께 살펴봅니다.”
“설마 저와 어둠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아닙니다. 다만 빛과 어둠의 문제가 아닌, 섭리의 어긋남 같은 것이 느껴집니다.”
듣자 하니 세네카도 사울에 대해 확실히 무언가를 아는 건 아닌 듯 했다.
혹은 아는 것을 숨기고 있거나.
사울은 고민 끝에 자신의 비밀 일부를 말하기로 결심했다.
세네카는 분명 무언가 알고 있다.
이야기를 진전시키려면 이쪽에서도 정보를 내놓을 필요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