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점점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는 가운데, 정신을 차린 세네카가 말했다.
“이런. 실례합니다. 제가 무례를 범했군요.”
드디어 사울에게 시선을 거둔 세네카는 다른 사람들과도 인사를 주고받았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카스텔 씨.”
“네.”
카스텔은 짧게 대답했다.
사울이 신경 쓸 만큼 무례한 태도였지만, 세네카는 개의치 않고 다른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반갑습니다. 아이나 씨.”
“반갑습니다. 아르멜 씨.”
“반갑습니다. 데이빗 씨.”
세네카는 아이나와 아르멜, 그리고 신분만 따지면 정말 보잘 것 없는 데이빗의 이름까지 직접 불러 주었다.
대족장으로서는 예의를 차릴 만큼 차린 것이었다.
모두에게 인사를 한 세네카가 다시 사울에게 말했다.
“앉으시지요. 전하.”
“네.”
사울은 세네카 맞은편에 마련된 자리에 앉았다.
세네카는 사울보다 키가 조금 더 컸고, 뼈만 남은 오른팔을 제외하면 다시 봐도 아름다웠다.
미의 종족이라 불리는 엘프들이 자신들 중 가장 아름다운 자를 대족장으로 뽑았다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얼굴과 몸 다른 부분이 아름다운 만큼 그와 대비되는 오른팔이 유독 눈에 띄었다.
회색빛의 팔뼈. 손뼈. 손가락뼈.
피도 살도 없지만 세네카 본인의 의지대로 움직일 수 있는 듯 몸짓이나 손짓을 할 때 움직임이 자연스러웠다.
오른팔에서 미미한 마법의 기운이 느껴지는 것을 보아 마법의 힘으로 움직이는 것이리라.
마법으로 움직이는 의수와 비슷한 원리일 것이다.
보면 볼수록 신기하지만 오래 구경거리로 삼을 만한 건 아니다.
사울은 세네카의 오른팔을 향한 시선을 거두었다.
그러자 세네카가 작게 웃으며 말했다.
“모두들 제 팔에 관심이 많으신 모양입니다.”
“…….”
세네카의 오른팔에 관심을 둔 건 사울만이 아닌 모양이었다.
사울은 모두를 대신하여 사과했다.
“저나 제 일행이 무례를 저질렀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괜찮습니다. 저를 처음 본 동족들도 하나같이 이 팔에 눈을 떼지 못했으니까요. 이젠 익숙합니다.”
세네카는 조금도 화가 나지 않은 표정이었다.
그가 말하는 동족. 곧 카멜 산의 모든 이종족마저 자신의 팔을 신기하게 쳐다봐 익숙해진 탓이리라.
덕분에 사울은 본론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이렇게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바마마께서도 대족장의 이런 호의를 기쁘게 받아들이실 겁니다.”
“네. 왕국에 돌아가시면 국왕 폐하께도 잘 말씀드려 주십시오.”
“물론입니다. 우리 왕국은 카멜 산과 평화를 유지하고, 또 관계를 진전해 나가고 싶어 하니까요.”
일단 첫마디는 무난하게 주고받은 것 같다.
자신을 경계하던 엘프들의 눈빛이 조금은 풀어졌으니까.
세네카에게 묻고 싶은 것은 정말 많다.
공적인 용무는 물론, 조금 전 영혼 운운한 것 때문에 사적인 용무까지 생겼다.
사울은 일단 왕자로서 공적인 질문부터 했다.
“그럼 우리를 초대한 이유를 들려주셨으면 합니다.”
세네카도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실은 전하께서 대신전에서 어떤 일을 하셨고, 무엇을 알아내셨는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래서요?”
“전하께서 ‘피닉스’에 대해 알아내셨다고 들었습니다.”
피닉스.
사울을 공격했던 정체불명의 적이 남긴 정체불명의 단어.
이후 대신전에서 엄밀히 조사했지만 추가로 알아낸 것은 없었다.
계셨습니까?
“네. 그런 일이 있었지요. 혹시 피닉스에 대해 알고 계십니까?”
“어느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건 저에게도, 나아가 카멜 산에 거주하는 모두에게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렇기에 아무에게나 함부로 이야기를 할 수 없었지요. 피닉스와 적대하는 분, 그리고 자격이 있는 분 하고만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다.”
“제게 그 자격이 있다는 말씀입니까?”
“네, 전하. 전하께서는 대신전에서 많은 일을 하셨고, 또 스스로 피닉스에 대해 알아내셨으니까요.”
“과분한 말씀입니다. 그보다 족장님은 피닉스에 대해 아신다고요?”
“네.”
말을 멈춘 세네카가 한숨을 내쉬었다.
피닉스가 무엇이든, 쉽사리 꺼내기 힘든 주제인 게 분명했다.
하지만 왕자를 공적으로 불러 놓고 숨길 수는 없었는지, 결국 입을 열었다.
“피닉스는 카멜 산에서 탄생한 자들입니다.”
“…그게 사실입니까?”
“부끄럽지만 그렇습니다.”
사울도 피닉스에 대해 아는 건 많지 않았다.
악마 토끼풀을 파는 자들과 관련이 있다.
킬리안 비셔스와 관련이 있을 수 있다.
어둠의 세력과도 관련이 있는 것 같다.
정체불명의 마법을 쓰고 있다.
하나같이 단편적이고 부정확한 정보지만, 그것만으로도 피닉스라는 존재의 위험성은 이미 충분히 알려진 셈이다.
그런 위험한 조직이 카멜 산과 관련이 있다니.
더군다나 이런 사실을 자신에게 말한 것은 자신들의 치부를 다르센 왕국에 알려준 것과 다를 바 없다.
“그 이야기를 제게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말씀드렸듯 전하께서는 스스로 피닉스에 대해 조금이나마 알아내셨고, 또 그들을 명백히 적대하고 있으니까요. 전하께서는 피닉스와 싸우려 하시고, 그렇다면 이야기를 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럼 저와 대족장님, 나아가 카멜 산의 목적이 같다고 생각해도 되는 겁니까?”
“물론입니다.”
그러면서 세네카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리에서 일어난 세네카가 손짓을 하자 나무로 되어 있던 벽 한쪽이 열리며 바깥 풍경을 비추었다.
“잠시 저와 함께 밖을 보지 않으시겠습니까? 일행 분들과 함께.”
“그러지요.”
사울은 자리에서 일어나 세네카가 이끄는 대로 밖을 내다보았다.
눈부시게 밝은 날이었다.
시선을 올리면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이, 시선을 내리면 카멜 산과 주변 풍경이 훤히 보였다.
이 주변에서 가장 크고 높은 산.
그 정상에 솟은 어마어마하게 높은 나무 꼭대기.
그곳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그 자체로 장관이었다.
사울은 이글 아이 마법을 시전해 더욱 자세히 살폈다.
황폐한 땅 사이 홀로 솟은 녹음이 우거진 거대한 산
그런 거대한 산 곳곳에서 살고 있는 엘프들과 산 아래에서 드나드는 드워프들.
이글 아이 마법을 사용하여 본 카멜 산의 풍경이었다.
“산 위에는 엘프, 산 아래에는 드워프. 듣던 대로군요.”
사울의 말에 세네카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본래 엘프와 드워프는 사이가 좋지 않았지요. 하지만 기나긴 전쟁이 모든 것을 바꾸었습니다.”
“전쟁이라 하시면… 노예 해방 전쟁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노예 해방 전쟁.
율렌 섬의 이종족이 노예로 살아가던 시절, 자유를 되찾기 위해 인간을 상대로 벌인 전쟁이다.
다르센 왕국과 가멜다 왕국처럼 삼백 년간 전쟁을 벌이지는 않았지만 거의 백 년 가까이 이어진 긴 전쟁이다.
노예 해방 전쟁이 끝난 건 지금으로부터 이백여 년 전.
지금의 사울은 물론, 전생의 사울이 태어나기도 전이다.
사울은 노예 해방 전쟁, 그리고 이종족이 노예로 살았던 시절은 겪지 못했다.
책으로 보거나 이야기로 들은 게 전부다.
지금은 다르센 왕국과 가멜다 왕국 모두 이종족을 노예로 부린 것을 ‘부끄러운 과오’로 취급했고, 숨기는 경향이 강했다.
왕자인 사울마저도 이종족을 노예로 부리던 시절에 대한 기록을 접하는 건 쉽지 않았고, 그가 아는 정보는 단편적이었으니까.
“노예 해방 전쟁에 대해서 많은 것은 알지 못합니다. 듣기로 끔찍한 전쟁이었다지요.”
“그렇습니다. 전하. 전쟁도 끔찍했고, 노예의 삶도 끔찍했지요.”
그러면서 세네카는 뼈만 남은 오른손으로 산 아래를 가리켰다.
“하지만 우리는 그 끔찍한 시기를 극복했습니다. 그 증거가 이 산, 그리고 저기 산 아래에 있지요.”
세네카가 가리킨 곳을 내려다보니 터널 같은 게 보였다.
자세히 보니 터널에 누군가 드나드는 것 같기도 했다.
저기가 말로만 듣던 ‘드워프 지하도시’로 내려가는 출입구인 모양이었다.
“훌륭한 일을 하셨군요.”
사울의 말은 반은 아부였지만, 반은 진심이었다.
노예로 살아가던 이종족이 자유를 쟁취하고 나아가 근사한 보금자리까지 만들었다.
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카멜 산의 이종족은 자신들의 평화를 깨기 싫다며 다르센 왕국과 가멜다 왕국의 전쟁에서 절대 중립을 지켰다.
이 때문에 두 나라 모두 카멜 산과 미묘한 관계를 유지했다.
적은 아니지만 아군도 아닌 곳.
그렇다고 무시할 수도 없어 신경 쓰이는 곳.
이번에 사울이 중립 지대에 파견된 것도 이종족, 정확히 말하자면 카멜 산과의 관계 개선 때문이 아니었던가.
아부와 진심이 섞인 사울의 말을 들은 세네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아무튼 카멜 산은 저와 다른 동족들에게는 모든 것입니다. 엘프, 드워프, 오크, 고블린……. 우리와 함께 하기를 택한 모든 종족은 동족이며 그들의 안위가 곧 제가 살아가는 이유이지요.”
“그렇군요.”
“그러니 인정할 것을 인정하고, 또 도움을 받아야 할 일은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그런데 피닉스는……?”
“그 이야기를 해야겠지요.”
세네카가 손짓을 하자 열린 곳이 닫히며 본래의 나무 벽으로 돌아왔다.
다시 사울과 세네카가 자리에 앉은 가운데, 세네카가 말했다.
“저 또한 피닉스의 실체에 대해서 확실히는 모릅니다. 다만 카멜 산의 일부 동족이 부정한 자들과 만남을 가져 자신들의 세력을 구축했다는 것은 압니다.”
“그 세력이 피닉스라는 것입니까?”
“관련이 있는 건 확실합니다.”
“대족장님 말씀대로라면, 피닉스는 카멜 산에서 만들어진 조직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겠군요.”
“저도 확실히는 모릅니다. 조사를 해 보았지만 큰 성과는 없었고, 다소 피를 흘리기도 했지요. 뚜렷한 실체를 잡지 못하던 중 전하에 대해 들었지요. 저나 카멜 산의 도움 없이 피닉스와 접촉을 하셨다고.”
“그럼 저와 대족장이 힘을 합쳐 피닉스에 대해 알아내고 처리하자는 이야기입니까?”
“처리라고요?”
처리라는 말을 들은 세네카가 눈살을 찌푸렸다.
사울이 말한 ‘처리’가 ‘제거’ 혹은 ‘박멸’의 완곡한 표현임을 알아들은 게 분명했다.
사울은 실언을 하지 않았다.
피닉스가 이종족이든 뭐든 ‘처리’하지 않고 대화나 타협으로 상대할 적은 아닌 것 같았으니까.
말을 숨기거나 빙빙 돌려 봐야 이야기만 길어진다.
다소 불편해도 확실히 못을 박아야 했다.
“제 말이 불쾌하셨다면 사과하겠습니다. 하지만 피닉스의 실체가 무엇이든, 그와 관련된 자들은 극도로 위험한 존재입니다.”
“그렇지요.”
“살인자, 반역자, 어둠을 따르는 자는 살려 두지 않는 게 인간 세상의 법입니다. 카멜 산의 법도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만?”
“…말씀대로입니다.”
세네카는 듣던 것보다 소극적이고 또 유순한 인물처럼 보였다.
저것이 그의 진짜 모습인지, 혹은 또 다른 모습이 숨겨져 있는지는 알 수 없다.
일단 사울은 세네카가 소극적인 만큼 자신이 조금 더 밀어붙이기로 했다.
“저와 함께 피닉스라는 자들에 대해 알아내고, 또 처리하자는 뜻은 알겠습니다. 하지만 그러려면 단호한 대처가 필요합니다. 카멜 산, 나아가 모든 이종을 아끼는 당신의 뜻은 알겠지만, 선을 넘은 자들을 보호하려 하시면 안 됩니다. 위험하고 선을 넘은 인간이라면 처리되어야 하고, 그건 이종족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울의 말에 세네카는 잠시 생각하다 대답했다.
“그렇겠지요.”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물론 저는 다르센 왕국의 왕자이니 다르센 왕국법을 기준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카멜 산에도 법은 있을 것이니 필요하다면 그 법에 따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온정을 베풀 수 없는 적에게 온정을 베푸는 건 따르기 어렵습니다.”
“온정이라…….”
주저하던 세네카가 말했다.
“전하의 뜻은 알겠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아직도 고민이 많이 됩니다. 피닉스의 정체는 잘 모르지만 카멜 산의 동족 여럿이 참여하고 있는 건 분명하니까요.”
“그렇다면 대체 왜 카멜 산의 이종족들이 피닉스란 정체불명의 조직에 참여한 것일까요?”
“그저 부귀영화나 큰 힘을 추구하기 위함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 점에는 동의합니다.”
부귀영화나 큰 힘을 얻으려면 합법적이고 안전한 방법도 많다.
굳이 어둠의 세력에 연계되어 악마 토끼풀을 유통하거나 흑마법에 손을 댈 필요는 없을 것이다.
피닉스가 개인인지 조직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이상의 목적이 있는 건 분명했다.
아마도 그 목적은 상당히 위험한 것일 테고.
“그럼 피닉스를 찾는 일에 저와 대족장님이 함께 한다고 생각해도 되겠습니까?”
세네카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도 그것을 부탁드리려 전하를 초대한 것입니다.”
“알겠습니다. 다른 이야기는 몰라도 그 부분은 제 선에서 책임지고 진행할 수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사울과 세네카가 힘을 합쳐 피닉스에 대해 조사하고, 쫓는다.
이 합의만으로도 힘들게 카멜 산까지 온 보람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