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역시 그들을 미워하는 모양이군.”
“…그들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습니까?”
“네가 준 선물의 보답으로 조금은 알려 주지. 지금 사울 왕자와 검은 흉성은 세 번째 대신전에서 머무르고 있다. 그곳에서 모종의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더군.”
“그렇군요.”
“아는 이야기인가?”
“네.”
“정보가 밝군. 하지만 대신관 콜리타가 그와 손잡고 모종의 일을 꾸미려 한다는 건 몰랐겠지.”
킬리안은 허세를 부리지 않았다.
처음 듣는 이야기를 아는 척 해봐야 망신만 당할 뿐이라는 걸 잘 알았기 때문이다.
“그건 처음 듣는 이야기군요.”
“그럴 수밖에. 너도 도적 무리의 수장으로서 나름대로 정보력이 있는 모양이지만, 왕국의 정보력에 비할 수는 없지.”
“백작님은 어떻게 그 사실들을 알고 계십니까?”
“일 년 전까지만 해도 사울 왕자는 가멜다 왕국에서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존재였다. 하지만 이제 그는 꽤 주목 받는 존재가 되었지. 홉킨스 가문 영지에서 너와 싸워 이겼고, 이제는 중립 지대의 대신전에서 모종의 일을 꾸미고 있으며, 그 곁에는 검은 흉성과 홉킨스 가문 영애까지 붙어 있으니까. 그러고 보니 네가 사울 왕자의 명성을 높여 주는 데 톡톡히 기여했군.”
안소니의 도발 섞인 말에 킬리안의 눈빛이 떨렸다.
하지만 곧 냉정을 되찾았다.
“잘 알고 계시는군요. 그럼 이야기가 빠르겠지요.”
“네가 한 말은 여전히 유효한가?”
“네. 백작님. 계약은 간단합니다. 누구를 시체로 만들거나 영영 사라지게 만들고 싶으면 연락하십시오. 누구든 처리해 드릴 테니.”
“용병이라 함은 대가를 받는다는 말이겠지.”
“그렇습니다.”
“무슨 대가를 원하지?”
“돈입니다.”
“돈? 그거면 충분한가?”
“그렇습니다. 이래저래 꽤 많은 돈이 필요해서요.”
돈을 주고 용병을 고용한다.
전란의 시대에서는 흔한 일이다.
문제는 그 용병이 ‘율렌 섬의 공적’인 킬리안이라는 것이다.
킬리안의 실력은 확실하다.
백작으로서 수많은 가멜다 왕국의 강자를 알고 지내는 안소니의 눈으로 봐도 킬리안은 굉장한 강자에 속했다.
최소한 안소니의 부하들 중에는 킬리안 만한 강자는 없을 것이다.
또 킬리안은 옳은 말을 했다.
지금의 권력과 재산을 손에 넣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에게 원한을 샀고, 그 결과 원한을 품고 자신을 노리는 자들이 많았다.
정치적으로 찍어 누르는 게 아니라 실력 있는 용병이나 암살자를 활용해 영원히 입을 다물게 만들고 싶은 자들 역시 많았다.
어설픈 암살자 따위를 고용했다간 자칫 일이 잘못될 가능성도 있지만, 킬리안이라면 그럴 가능성은 낮다.
스스로 소개한 대로 사람 잡는 일에는 전문가 중의 전문가이니까.
하지만 킬리안을 고용하는 건 위험 부담이 컸다.
만에 하나 이 사실이 밝혀지면 왕국 정계에서 쫓겨나는 것은 물론이고 가문이 박살나며 안소니 본인의 목숨마저 위태롭다.
보통 귀족이었다면 이 제안을 거부했을 것이다.
아니면 당장은 좋은 소리를 하더라도 이후 킬리안을 제거할 방법을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안소니는 다른 관점에서 생각했다.
분명 킬리안은 위험한 놈이다.
하지만 굉장히 능력 있는 용병이 될 수 있고, 지금 내민 손을 붙잡으면 당장은 배신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결단을 내린 안소니가 말했다.
“연락은 어떻게 주고받지?”
그 말을 들은 집사는 놀랐고, 킬리안은 더욱 짙어진 미소로 답했다.
“과연 백작님. 말씀이 잘 통하는 분이시군요.”
“이왕 여기까지 온 것이니까.”
“앞으로 연락이 필요하면 부하를 보내고, 필요하면 찾아뵙겠습니다.”
“율렌 섬 모두가 널 쫓고 있는데 은신처가 필요하지는 않나? 필요하다면 마련해 줄 수도 있다.”
“사양하지요. 백작님이 제가 있는 곳을 모르시는 게 서로에게 좋을 테니까요.”
“그렇군.”
안소니는 집사에게 무어라 귓속말을 했다.
“네? 백작님!”
“잔말 말고 가져와라.”
“…알겠습니다.”
곧 집사는 무언가를 가지고 왔다.
킬리안이 안소니에게 선물로 준 것과 비슷한 크기의 상자였다.
집사에게서 상자를 넘겨받은 제온이 먼저 열어 보았다.
제온은 이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킬리안에게 상자를 넘겼다.
킬리안이 상자를 여니 보석이 가득 든 게 보였다.
상자는 작지만 하나같이 비싼 보석들이라 가치가 결코 낮지 않을 것이다.
“백작님. 이건?”
“네가 내게 선물을 주었으니 나도 선물을 주어야겠지. 선물이자 계약금이라고 생각해라.”
“감사히 받겠습니다.”
이렇게 용병 계약이 성립되었다.
킬리안은 부하들과 인사를 하고 뒤돌아 방을 나가려 했다.
그때 안소니가 말했다.
“킬리안.”
“네, 백작님.”
“날 실망시키거나 허튼 짓을 할 생각은 꿈에도 꾸지 마라. 내게 돈을 받아 너의 그 잘난 조직을 재건할 생각일 텐데, 그 꿈을 이루고 싶다면 말이지.”
잠시 멈칫한 킬리안은 다시 몸을 돌렸다.
안소니를 만나러 온 뒤 항상 그랬듯, 미소를 머금은 채로 다시 팔을 굽히고 허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물론입니다. 백작님.”
그렇게 킬리안과 두 부하는 안소니 곁을 물러났다.
문이 닫히고 그들이 완전히 사라지자 집사가 안소니에게 물었다.
“백작님. 저, 정말 저 무뢰한들을 용병으로 고용하실 생각입니까?”
“물론이다. 계약금으로 비싼 값을 치른 만큼 많이 부려 먹어야지.”
“그, 그건 그렇지만…….”
집사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고, 안소니도 그 이유를 잘 알았다.
자신에 대해 잘 아는 집사가 보기에도 이번 일은 지나치게 위험하다는 것이다.
백작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킬리안은 누구의 밑으로 들어갈 인물이 아니다. 그럼에도 나를 찾아 왔다는 것은 그만큼 놈도 절박하다는 거지. 날 죽이지 않으면 내가 놈을 잡거나 죽일 수 있음에도.”
“늦지 않았습니다! 저 자가 수도를 빠져나가기 전에 병력을 동원하면…….”
“그럴 것 없다. 지금 보니 오래 쓸 인재는 못 되지만 잠시 이용할 수는 있는 녀석이다. 제정신은 아니지만 생각은 할 줄 알고, 지금은 내 비위를 맞추는 게 자기에게도 이익이 된다는 걸 알고 있는 녀석이다. 쓸 수 있을 만큼 쓴 뒤 제거해도 늦지 않아. 그렇잖아도 거슬리는 녀석들이 많았는데 잘 된 일이지.”
“그런…….”
“네가 걱정하는 게 무엇인지는 알고 있다. 걱정 마라. 놈이 내일 경비대에 붙잡혀도 나와 관련이 있다고는 주장 못하도록 만들 테니까. 또 언젠가는 내 부하를 해코지한 대가를 치르게 해 줘야지.”
안소니의 말에 집사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자신은 맥캘런 백작가의 집사로서 안소니가 자신을 버리지 않는 한 언제까지나 충성을 바칠 것이다.
하지만 안소니의 이런 냉혹하고 과격한 면모에는 적응이 안 될 때가 많았다.
또한 집사는 잘 알았다.
지금껏 안소니가 적으로 삼았던 모두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거나, 비참하게 몰락했다는 것을.
킬리안 비셔스가 아무리 악명 높은 거물이라 해도 안소니 맥캘런 백작은 그 이상의 거물이다.
그런 자신의 주인이 킬리안이 손을 잡았다.
앞으로 일이 어떻게 돌아갈지 집사인 자신으로서는 감히 예상조차 할 수 없었다.
* * *
카멜 산으로 출발한 사울 일행의 여행은 순조로웠다.
하얀 까마귀도, 몬스터도, 정체불명의 적들도 나타나지 않았다.
마차 창밖을 바라보는 사울의 눈에 휘날리는 깃발이 보였다.
복잡한 문양이 그려진 깃발은 언뜻 보면 문자 같기도, 언뜻 보면 일종의 예술 같기도 했다.
정확히 말하면 카멜 산의 상징이다.
여러 이종족들이 쓰는 문자, 혹은 상징을 합쳐 그린 것이라던가.
저 깃발을 휘날리는 건 지금 이동하는 무리가 카멜 산과 함께 하는 자들임을 뜻했다.
사울이 시선을 돌리자 다르센 왕국의 깃발이 휘날리는 게 보였다.
수십 명의 무장 병력과 다르센 왕국과 카멜 산 양쪽의 깃발.
마차에 탄 사울의 정체를 알든 모르던 감히 공격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였다.
“이번 여행은 평화롭군요.”
사울의 말에 아이나가 대답했다.
“네, 전하. 카멜 산에서도 모든 일이 잘 풀렸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야지요.”
사울만큼이나 아이나도 이래저래 신경 쓰이는 게 많은 듯 했다.
이종족과 가까이 지내는 홉킨스 가문이라 그만큼 이종족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카멜 산에 방문하는 걸 조심스러워 했다.
더구나 개인적인 방문도 아니고 대족장 세네카의 초청을 받고 방문하는 길이 아닌가.
사울만큼, 어떤 의미로는 사울 이상으로 긴장한 게 아이나였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아르멜은 여행 전부터 이종족과 카멜산에 대한 정보를 수집해 사울에게 보고하며 바쁜 시간을 보냈다.
심지어 카스텔 마저도 긴장한 모습을 보였다.
사울에게 몇 번이나 이런 말을 했다.
‘상대가 대족장 세네카라면 제가 지켜드리지 못할 수 있습니다.’
‘걱정 말아요. 카멜 산이 왕국에 선전포고하거나 내가 세네카를 공격하는 게 아니라면 그쪽에서 날 공격할 리는 없으니.’
‘만에 하나라는 게 있으니까요.’
지금 사울이 봐도 카스텔은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전장이 아닌데 저런 모습은 처음 보았다.
정치적인 문제보다는 상대의 무력이 강하거나 약하느냐를 중심으로 생각하는 카스텔다운 모습이었다.
데이빗도 긴장한 모습이었다.
저 긴장된 모습은 연기 같은 게 아니라 진심일 것이다.
‘이 녀석은 무엇 때문에 날 따라다니는 걸까.’
무언가 있는 것 같긴 한데 나쁜 의도 같지는 않다.
하지만 속내를 알 수 없다는 것만으로도 마냥 믿기는 힘든 녀석이 되었다.
그래서 사울은 데이빗이 자신의 속내를 알아내지 못하도록 노력했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밖에서 누군가 외쳤다.
“전하, 카멜 산이 보입니다!”
사울은 창밖으로 눈을 돌렸다.
멀리 카멜 산의 모습이 보였다.
책에서 묘사한 대로 카멜 산은 평지에 홀로 솟은 거대한 산이었다.
황량하고 건조한 대지에 산림이 우거지고 녹색이 푸르른 카멜 산이 우뚝 솟은 광경이 보였다.
크게 가파르지는 않고 야트막한 산이지만, 규모 자체는 굉장했다.
산 위에만 천 명이 넘는 엘프가 거주하고, 산 아래에는 드워프가 거주하는 지하 도시가 만들어져 있다고 하던데, 확실히 그만큼 거주할 수 있을 만한 크기였다.
목적지가 가까워지자 마차 속도도 빨라졌다.
카멜 산 근방에 마차가 멈추고, 한 무리의 병사들이 사울을 맞이했다.
“도착했습니다. 전하.”
“음. 수고했어요.”
사울을 카멜 산까지 모셔 온 레덴은 마중 나온 병사들을 소개했다.
“이들은 대족장님 휘하의 직속 부대입니다. 전하를 산 위까지 모시고 갈 것입니다.”
“그대나 그대가 데려온 병력은 함께 가지 않나요?”
“저는 전하를 따를 것이며, 다른 자들은 본래 임무로 복귀할 것입니다.”
“알았어요.”
곧 사울 일행은 새로운 병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산 입구에 도착했다.
코앞에서 산을 올려다보니 새삼 카멜 산의 위용이 느껴졌다.
야트막하고 완만했지만, 산 자체가 크기부터 높이까지 장대했다.
게다가 빽빽이 심어진 나무들은 물론, 나무 곳곳에서 경비를 서는 엘프 병사들의 모습도 보였다.
경비를 서는 엘프 병사들은 모두들 활을 매고 있었고 검이나 창 등 근접 무기도 함께 들고 있었다.
‘활의 종족’이라고도 불리는 엘프다운 모습이랄까.
지금 산 위에 보이는 자들은 대부분 엘프족들이었다.
피부가 하얀 엘프들이 많았지만, 피부색이 어두운 다크 엘프들도 적잖이 섞여 있었다.
피부가 어둡다는 이유만으로 다크 엘프를 어둠의 족속 취급하며 차별한 건 인간 세상에서도 수백 년 전에나 있었던 일이다.
엘프 사이에서는 애당초 그런 차별이 없었다고 했다.
“만나서 반가워요.”
“네. 전하.”
사울은 우선 몇몇의 엘프와 인사를 나눠 보았다.
모두들 판에 박힌 정중한 말투로 대답하며 고개를 숙였다.
사울을 환영하고 예의를 갖추면서도, 경계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대족장의 손님인데 말이다.
‘내가 왕자라서 경계를 하는 건지 아니면 인간이라서 경계를 하는 건지 모르겠군. 아무튼 쓸데없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조심해야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