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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했더니 무능한 적국 왕자였다-85화 (85/232)

85화

속셈이 뻔히 보였음에도 일단 사울은 모른 척 했다.

콜리타나 대신전이 자신에게 나쁜 일을 할 것 같지는 않았으니까.

아르멜의 생각도 같았다.

‘데이빗을 굳이 전하께 붙이려는 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겁니다.’

‘그렇겠지. 그 이유가 뭔지 모르겠는데, 너는 알겠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대신관이 전하를 해치거나 왕국에 해를 끼치려는 건 아닐 것입니다.’

‘그럼 일단 모르는 척 하지.’

‘그게 좋겠습니다. 무언가 나올지 모르니 데이빗의 뒷조사를 더 해 보겠습니다.’

아직 데이빗에게서 무언가 특별한 건 나오지 않았다.

지금은 경계하면서도 모르는 척 데리고 다니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

이런 사울의 복잡한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데이빗은 천진난만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카멜 산은 처음이에요.”

“나도 마찬가지야. 책에서만 봤지 직접 가보는 건 처음이지.”

한가로이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바깥에서 큰소리가 들려왔다.

“그럼 출발하라!”

이어 말 울음소리와 함께 사울 일행이 탄 마차가 덜커덩거렸다.

목적지는 물론 카멜 산이었다.

* * *

다르센 왕국과 가멜다 왕국은 어떻게 다른가?

지식인들에게 이런 질문을 던진다면 각기 다른 대답이 나올 것이다.

지리학에 정통한 자는 다르센 왕국의 영토가 조금 더 넓지만 산지가 더 많아 쓸모 있는 땅과 인구는 비슷하다는 점을 언급할 것이다.

마법에 정통한 자는 두 나라 간 전쟁이 이어지며 치열하게 마법을 발전시켜 온 덕분에 양국의 마법 수준은 비슷하다고 대답할 것이다.

그리고 정치에 정통한 자는 두 나라의 정치 구조가 다르다는 점을 언급할 것이다.

다르센 왕국은 왕실의 힘이 굉장히 강한 곳이다.

왕국 재상 안젤로 마르테스 공작처럼 왕실과 별개인 정치 세력도 존재하지만 왕실 세력을 견제하기는 벅차다는 평가를 받았다.

반면에 가멜다 왕국은 왕실의 힘이 다소 약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다르센 왕국보다 왕실의 힘이 더 강한 시절도 있었지만, 치열한 권력 암투 끝에 내분이 벌어져 왕실의 세력이 약해진 탓이었다.

이런 왕실의 혼란은 과거 6년 전쟁에서 가멜다 왕국이 다르센 왕국에 밀렸던 이유 중 하나로 꼽히기도 했다.

가르시아 남매 등의 활약으로 6년 전쟁이 백중세로 끝나고, 왕국의 혼란과 내분도 어느 정도 수습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왕실이 절대적인 권력을 휘두르기는 어려웠고, 강한 세력을 가진 귀족들의 정치 다툼이 치열했다.

그럼에도 다르센 왕국과의 경쟁에서 밀리지 않는 건 유능한 귀족들이 많은 덕분일 것이다.

무능한 귀족이 부귀를 누릴 수는 있지만, 권력을 가질 수는 없다.

다르센 왕국이 언제 쳐들어올지 모르는데 무능한 귀족이 권력을 가진다면 나라의 멸망으로 이어질 수 있다.

이에 공감한 왕실과 귀족은 무능한 귀족이 권력을 가지지 못하도록 철저히 움직였고, 지금까지는 잘 지켜지고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안소니 맥캘런 백작은 ‘가멜다 왕국을 이끌어 가는 유능한 귀족’ 중 한 명이었다.

가멜다 왕국에서 이름 높은 맥캘런 가문의 적장자로서 무난히 가문의 수장이 되었고, 능력과 세력, 재력 등 모든 측면에서 유력한 귀족 중 한 명으로 꼽혔다.

정계에서의 활약은 물론, 나라를 위해 자신의 재산을 기부하거나 빈민 구제 사업에도 참여하는 등 평판도 좋았다.

때문에 안소니의 또 다른 면모에 대해서는 모르는 자들이 많았다.

“백작님.”

저택에서 모처럼 쉬고 있던 안소니는 익숙한 목소리에 눈을 돌렸다.

집사가 조금 당혹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게 보였다.

“무슨 일이지?”

“손님이 왔습니다.”

“손님?”

안소니는 손님 때문에 휴식을 방해받았다고 화를 내는 사람이 아니다.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아는 집사가 저렇게 당혹스러워 하는 건 손님이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뜻이다.

“중요한 손님인가?”

“그게… 킬리안 비셔스입니다.”

안소니도 잘 아는 이름이었다.

킬리안 비셔스라면 율렌 섬에서 가장 악명 높은 범죄자가 아닌가.

나아가 모종의 관계도 있었고 말이다.

“그가 직접 나를 찾아왔다고?”

“네. 꼭 백작님을 뵙고 싶다고 합니다.”

“재미있군. 좋아. 데려와라.”

안소니의 말에 집사가 조심스레 물었다.

“경비병을 부를까요?”

“그럴 필요 없다. 최대한 은밀히 데려오도록.”

“…알겠습니다.”

집사는 안소니의 말을 충실히 따랐다.

곧 세 명이 안소니의 방에 들어왔다.

킬리안 비셔스, 제온, 칼립소.

하얀 까마귀의 서열 1위부터 3위가 한자리에 모였다.

셋 모두를 잡는다면 왕국 수도의 화려한 대저택을 구입할 수 있을 정도로 많은 현상금이 나올 것이다.

하지만 안소니는 킬리안을 잡을 마음이 없었다.

킬리안이 먼저 안소니에게 인사를 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백작님.”

팔을 굽히며 인사를 하는 킬리안의 모습에 안소니 곁에 있던 집사가 먼저 놀랐다.

예의범절에 있어서는 전문가인 자신이 보기에도 흠잡을 데 없는 인사였다.

상대가 귀족이라면 놀랄 일이 아니다.

그렇지만 상대는 율렌 섬에서 가장 악명 높은 범죄자가 아닌가.

놀란 집사와는 달리 안소니는 흡족하게 웃었다.

“만나서 반갑군. 명망 높은 그대를 한번은 내 눈으로 보고 싶었지. 하얀 까마귀의 우두머리, 율렌 섬 최고의 범죄자, 악마 토끼풀의 지배자, 요즘에는 이단자 혐의까지 쓰고 있는 킬리안 비셔스.”

안소니의 짓궂은 말에도 킬리안은 예의를 지키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그리고 백작님의 은혜를 입은 몸이기도 하지요.”

말에 뼈가 있었지만 안소니는 개의치 않았다.

“무슨 일로 연락도 없이 날 찾아왔나? 소라드 지방에 머무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안소니 백작 저택은 가멜다 왕국 수도 카토리아에 있었다.

가멜다 왕국 변방인 소라드 지방과 카토리아는 거리도 멀거니와 왕국 수도답게 킬리안 같은 범죄자가 마음대로 오갈 수 있을 만큼 경비가 허술하지도 않았다.

사실 킬리안이 카토리아에 발을 들이고, 나아가 왕국의 실권자 중 한 명인 안소니의 저택에 발을 들였다는 것만으로도 수도 전체가 뒤집어질 일이었다.

예정된 만남도 아니었고 말이다.

킬리안은 자신의 처지를 아는지 모르는지 미소를 머금은 채 말했다.

“소라드 지방에서 백작님의 부하에게 신세를 많이 졌습니다.”

“들었다. 녀석의 정적 몇을 처리해 주었다고.”

“네. 하지만 백작님의 부하는 저에 대해 제대로 모르더군요. 동업자와 노예의 뜻을 헷갈리는 것 같았습니다.”

실로 무례한 말이었다.

소라드 지방에 있는 안소니의 부하 역시 작위를 가진 귀족이다.

반면에 킬리안은 범죄자 나부랭이가 아닌가.

무슨 이유에서인지 율렌 섬에서 사라진 지 100년이 넘은 ‘비셔스’라는 성을 자칭하고 있지만, 분명 그는 귀족이 아니다.

평민만도 못한 범죄자일 뿐.

안소니의 부하가 킬리안을 문자 그대로 ‘노예’ 취급한다고 해도 큰 문제는 없다.

노예 제도는 폐지된 지 오래지만 귀족이 평민이나 범죄자를 노예처럼 취급하는 건 율렌 섬에서 드문 일도 아니니까.

하지만 킬리안은 그러한 상식을 따를 마음이 없는 모양이었다.

안소니는 킬리안이 말하는 자신의 부하에 대해 떠올렸다.

무능한 녀석은 아니지만, 다소 경솔한 녀석이다.

다른 적임자가 없어서 소라드 지방에 박아 두었지만, 언젠가 경솔함 때문에 문제를 일으킬 것이라 생각했다.

생각을 마친 안소니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내 부하를 죽였나?”

안소니의 질문에 킬리안이 킥 하고 웃었다.

“그럴 리가요. 저는 백작님의 부하를 죽인 뒤 백작님을 찾아올 만큼 상식이 없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럼 내 부하에게 아무런 짓도 저지르지 않았나?”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는 제게 무례하게 대했고, 그 대가를 치르게 해 주었습니다.”

“…무슨 짓을 했지?”

킬리안은 대답 대신 턱짓을 했다.

그러자 칼립소가 품에서 무언가를 내밀었다.

작은 나무 상자였다.

상자를 본 안소니가 턱짓을 했고, 이에 집사가 상자를 건네받아 열어 보았다.

상자를 슬쩍 열어 본 집사의 눈이 커졌다.

“허억. 이건…….”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상자를 재빨리 닫은 집사가 말을 더듬거렸다.

“배, 백작님. 이건…….”

“상자의 물건이 지금 내게 해를 끼칠 만한 것인가?”

“그런 건 아닙니다만, 그러니까, 이게…….”

“그런 게 아니라면 당장 가지고 와.”

단호한 안소니의 말에 집사는 별수 없이 상자를 내밀었다.

상자를 열어 본 안소니의 눈이 커졌다.

“이건……!”

상자에 담긴 건 이빨이었다.

아마도 사람의 이빨로 보이는 것이 스무 개 이상 담겨 있었다.

빠진 지 얼마 안 된 듯 깨끗한 상태의 이빨 하나하나가 뿌리까지 온전히 남은 채 상자에 담긴 모습은 산전수전 겪은 안소니도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이것이 부하의 이빨이라면?

스무 개도 넘는 이빨이 뿌리 째 온전히 빠졌다면?

부하가 무슨 끔찍한 꼴을 당했을지 짐작도 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안소니는 오래잖아 정신을 차렸다.

“이건 내 부하의 것인가?”

“그렇습니다.”

“이건 나에 대한 선전포고라고 받아들이면 되나?”

냉철한 안소니의 눈빛을 마주하는 킬리안의 미소가 짙어졌다.

“그럴 리가요. 굳이 백작님께 선전포고를 할 생각이었다면 이빨이 아니라 목을 잘라 왔을 겁니다. 이건 단지 선물일 뿐입니다. 서로 간에 오해를 풀기 위한 선물 말이지요.”

“내 부하에게 몹쓸 짓을 해 놓고 무슨 오해를 풀자는 말이지?”

“백작님의 부하는 저를 노예로 생각했습니다. 자신의 힘이 없으면 제가 살아남지도 못하리라 생각한 것이지요. 그는 틀렸고, 그 대가를 치렀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백작님에게 선전포고할 생각이었다면 이빨을 빼는 게 아니라 사지를 자르거나 목을 베었을 겁니다.”

“하고 싶은 말을 해 봐라.”

“백작님의 부하는 상대하고 싶지 않습니다. 백작님이 직접 저를 고용하십시오. 노예가 아니라 용병으로서.”

킬리안을 바라보던 안소니는 조용히 부하의 이빨이 담긴 상자를 닫았다.

“내가 내 부하를 해코지한 자를 용병으로 쓸 것이라 생각하나?”

“물론입니다. 저 같은 사람이 필요하시지 않습니까?”

“어째서?”

“백작님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습니다. 안소니 맥캘런 백작. 세상 사람들은 당신을 존경할 만한 귀족이라 부르지만 실제로는 6년 전쟁의 여파로 피해를 보거나 몰락한 귀족이나 유력자들의 세력과 재산을 닥치는 대로 빼앗아 지금의 재산과 권력을 이룬 분이시지요.”

킬리안의 말에 안소니에 앞서 곁에 있던 집사가 발끈했다.

“이 무슨 무례한!”

안소니는 손을 들어 집사를 제지하고는 말했다.

“그래서?”

“백작님을 비난하는 건 아닙니다. 제가 죽인 사람이 백작님이 죽인 사람보다 많으면 많았지 적지는 않을 테니까요. 솔직히 배울 점도 많다고 생각합니다. 똑같이 사람을 많이 해쳤는데 저는 지명 수배자고 백작님은 존경받는 귀족이 아니십니까.”

“.....”

“백작님은 지금의 자리에 앉기까지 많은 적을 만들었을 테고, 아직 제거해야 할 적들도 많이 남았겠지요. 존경받는 백작의 몸으로 함부로 손을 더럽히기는 어려울 터. 그러니 저 같은 사람이 필요하시겠지요. 다시 말하지만 저와 제 부하들은 사람 잡는 일 만큼은 누구보다 잘 할 자신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적을 제거해 주겠다?”

“그렇습니다.”

킬리안의 말에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안소니가 문득 크게 웃었다.

“정말 재미있는 소리를 하는군.”

“그렇습니까?”

“네가 날 휘두를 수 있다고 생각하나? 나 역시 너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다. 킬리안 비셔스.”

킬리안의 미소 띈 얼굴에 호기심이 서렸다.

“저에 대해서 말입니까?”

“그래. 하얀 까마귀의 수장이니 악마 토끼풀이니 하는 세간에 잘 알려진 것들은 제쳐 두기로 하지. 네가 어둠의 세력과 손잡고 있다는 혐의에 대해서도 관심 없다. 그보다 네가 궁금해 할 만한 정보가 있지.”

“정보라고요?”

“그래. 사울 왕자와 검은 흉성 말이다.”

사울 왕자.

검은 흉성, 카스텔.

그 단어를 들은 킬리안의 눈이 번득이는 것을 안소니는 놓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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