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콜리타와 면담을 마친 사울은 그때껏 입고 있던 견습 신관복을 벗었다.
고귀한 신분을 내세워 남을 제압하는 건 좋아하지 않았지만, 오고스 같은 자를 상대하려면 그것이 가장 빠른 방법일 듯 했다.
사울은 왕자의 복장으로 갈아입었다.
수수한 평상복이지만, 어디까지나 왕자의 기준으로 그렇다.
지금 이 대신전에서 사울보다 고급 옷을 걸친 사람은 아무도 없다.
대신관보다도 높은 옷을 걸치니 그것만으로도 위압적인 분위기가 흘러나왔다.
역시 옷이 날개라고 할까.
옷을 갈아입고 얼마 지나지 않아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전하. 오고스라는 자가 알현을 청합니다.”
“들어오라고 해.”
문이 열리고, 오고스가 들어왔다.
사울에 대해 언질을 들었는지 예전의 건방진 태도는 온데간데없었다.
하지만 예의 바를지언정 비굴하지는 않았다.
몸가짐이 조심스러워졌지만 벌벌 떨지는 않았고, 얼굴 표정도 겁먹은 것 같지는 않았다.
들어 온 오고스가 허리를 숙였다.
“다시 뵙습니다. 전하.”
사울 역시 예의를 갖추기로 했다.
오고스 본인에 대한 예의라기보다는, 그의 뒤에 있는 세네카를 향한 예의였지만 말이다.
“반가워요.”
“모르고 저지른 무례에 대해서는 사죄하겠소.”
“받아들이지요. 당신 말대로 아무것도 모르고 한 일이니 책임을 묻지 않겠어요.”
“고맙소.”
오고스의 말투는 일국의 왕자를 대하는 것 치고는 꽤 무례했다.
적국의 귀족도 사울에게 이런 말투를 쓰지는 않았는데 말이다.
전례가 없는 일은 아니었다.
중립 지대의 이종족은 다르센 왕국 국민도 가멜다 왕국 국민도 아니다.
그 이유로 양국의 왕족이나 귀족을 제대로 인정하지 않는 자들도 적지 않았다.
오고스 역시 그런 부류라면 지금의 무례가 납득이 갔다.
무례함을 지적하려면 지적할 수도 있다.
이곳이 다르센 왕국 영토였다면 당연히 그러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곳은 이종족들의 입김이 강한 대신전이 아닌가.
사울은 대범하게 넘어가기로 했다.
사울이 생각하는 사이 오고스는 오고스 대로 조심스레 눈을 움직였다.
의자에 앉은 사울과 그 뒤에 시립한 카스텔과 아르멜.
두 명의 이름과 정체에 대해서는 듣지 못했지만, 누가 봐도 만만치 않은 인물이었다.
오고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무슨 일로 나를 부른 거요?”
“긴장할 것 없어요. 나쁜 의도로 부른 게 아니니.”
“…….”
“당신은 카멜 섬에서 왔지요? 세네카 대족장이 직접 보냈다고요.”
“그렇소.”
“그럼 대족장을 만난 적이 있겠군요.”
“물론이오.”
“대족장은 어떤 인물인가요?”
사울의 질문에 오고스의 표정이 변했다.
존경, 아니 존경을 넘어선 경외.
예전 무뚝뚝하던 오고스에게서는 상상도 못 할 표정이었다.
“무슨 말이 필요하겠소. 그분은 이 시대가 낳은 최고의 영웅이자 성자요.”
“그렇군요.”
오고스의 표정과 눈빛에는 손톱만큼의 가식이나 과장된 기색도 없었다.
대족장 세네카를 세상 누구보다 존경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나도 대족장에 대해서는 많이 들었어요. 노예 해방의 영웅이라고.”
“그렇소. 나는 노예 시대 이후에 태어났지만, 어릴 적 장로들에게 이야기를 들은 적 있소. 인간 놈들이 우릴 노예로 부렸을 때는 그야말로 지옥이었다고. 그리고 그 썩을 인간 놈들을 물리치고 지옥을 무너뜨린 게 바로 대족장님이라고…….”
오고스는 신나게 말하다 무언가 깨달은 듯 당황하며 말을 멈췄다.
눈앞의 사울 역시 ‘썩을 인간 놈’이자, 그 중에서 지위가 높은 존재임을 뒤늦게 깨달은 것이었다.
다행히 사울은 화를 내지 않았다.
“괜찮아요. 우리 인간의 부끄러운 과거이니.”
과거 인간이 이종족을 노예로 부린 건 부끄러운 과거이며, 크나큰 과오다.
이에 대해서는 어떤 식자도 이견을 제시하지 않았다.
왕실의 체면과 자존심 때문에 다르센 왕국이든 가멜다 왕국이든 이종족을 노예로 부린 것에 대해 공식적으로 사죄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과거 이종족을 노예로 부린 게 잘못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부정하지 않았다.
왕자 신분으로 부끄러운 과거를 비판해도 책잡힐 일은 아니었던 것이다.
사울의 태도에 오고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곤 다시 말했다.
“죄송하오.”
“당신이 얼마나 대족장을 존경하는 지 잘 알았어요. 그래, 대족장은 이번 일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나요?”
“물론 대족장님도 어둠의 세력이 준동하는 것을 걱정하고 계시오. 또 카멜 산에서도 악마 토끼풀을 쓰는 녀석이 있다고 들었고. 그러고 보니 우리 마을에도 그런 얼빠진 엘프 녀석이 하나 있다고 들었는데.”
“제나엘이라는 엘프가 있었지요.”
“제나엘. 맞아. 멍청한 녀석. 보나마나 악마 토끼풀 문제로 카멜 산에서 쫓겨나고도 버릇을 못 고친 것일 거요. 그런 녀석이 한둘이 아니라고 들었으니까.”
“정말 심각한 문제로군요.”
“내 말이 그 말이오. 대족장님께서 이 일을 알면 크게 걱정하실 거요.”
이야기가 어느 정도 무르익자 사울은 오고스에게 본론을 꺼냈다.
“나 역시 이번 일의 심각성을 잘 알고 있고 가능한 빨리 해결하고 싶어요. 그러려면 대족장의 도움이 필요해요.”
“대족장님의 도움을?”
“중립 지대의 이종족들을 조사할 필요가 있는데, 인간인 나로서는 한계가 있으니까요.”
“으음…….”
오고스의 표정을 보아하니 사울이 왕자가 아니었다면 ‘헛소리 집어치우라’고 일갈했을 것이다.
사울의 신분 때문에 하고 싶은 말은 못 하지만,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자 그때껏 입을 다물고 있던 아르멜이 지원에 나섰다.
“오고스 님.”
“당신은 분명 신관이었던…….”
“사실은 신관이 아니라 다르센 왕국의 기사입니다. 여기 왕자 전하를 보좌하고 있지요.”
“그런데?”
“이번 일은 왕국 차원에서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가멜다 왕국에서도 이번 일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고, 그만큼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을 겁니다.”
“가멜다 왕국에서도 이 일을 알고 있다는 말이오?”
“네. 킬리안 비셔스에 대해 알고 계시지요?”
중립 지대에도 킬리안 비셔스의 악명은 퍼져 있었다.
“들어는 보았소만.”
“현재 킬리안 비셔스가 어둠의 세력과 손을 잡고 있다는 것은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율렌 섬의 악마 토끼풀 사업은 사실상 그 자가 독점하고 있지요. 킬리안 비셔스가 어둠의 세력과 대등한 입장에서 손을 잡고 있는지 하수인에 불과한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건 그의 마수가 카멜 산까지 뻗쳤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둠의 세력의 마수 역시 카멜 산에 뻗쳤다고 해석할 수 있겠지요.”
“으음.”
완고한 오고스도 지금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 알아들었다.
하지만 쉽사리 대답을 하지는 못했다.
다르센 왕국과 카멜 산의 관계는 상당히 복잡하다.
적대 관계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아군이라 하기도 어렵다.
생각 없이 저지른 사소한 행동이 양측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모른다.
고민하던 오고스가 말했다.
“나는 아무것도 약속할 수 없소. 그럴 입장도 아니고.”
이런 대답이 나오리라 예상한 사울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어요. 일이 잘못되어도 당신에게 어떤 책임도 묻지 않겠어요. 그러니 조금만 도와주세요.”
“어떤 도움을 원하시오?”
“곧 카멜 산에 친서를 보낼 거예요. 대족장 세네카와 만날 수 없다면 서신으로라도 이번 일을 의논하고 싶어요.”
“그럼 나더러 카멜 산에 전하를 도와 달라는 편지라도 쓰란 말이요?”
“네. 이미 콜리타 대신관의 허락은 받았어요.”
왕자인 사울이 콜리타 대신관까지 언급하며 압박하고 있다.
말투는 부드러울지언정 이미 오고스가 견딜 만한 수준의 압박을 넘어섰다.
‘교활한 꼬맹이 같으니라고.’
오고스는 입 밖에 낼 수 없는 말을 삼켰다.
그리곤 정중히 말했다.
“알겠소. 그렇게 하리다.”
“고마워요.”
그렇게 오고스를 내보낸 사울은 아이나를 불러들였다.
이종족 대하는 데 능숙한 아이나는 사울과 따로 움직이며 정보를 수집해 온 참이었다.
“다녀왔습니다. 전하.”
“수고했어요. 새로 얻은 정보가 있나요?”
“특별한 것은 없었습니다. 카멜 산에서도 최근 악마 토끼풀 문제나 어둠의 세력 관련 이야기가 나와 불안해하는 자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이야기 정도입니다.”
방금 전 오고스에게 들은 이야기와 거의 같다.
다른 출처에서 비슷한 이야기가 나왔다는 건 그만큼 그 정보를 믿을 수 있다는 뜻이다.
다시 한번 사울은 카멜 산을 주시할 필요를 느꼈다.
자신은 악마 토끼풀 문제만 해결하려 온 게 아니라 중립 지대의 대신전과 이종족들 관계를 조율하고, 가능한 다르센 왕국에 유리한 방향으로 이끌 목적으로 왔다.
그를 위해서는 카멜 산과의 관계를 좋게 할 필요가 있었다.
“여기서 카멜 산에 가 본 사람은 없지요?”
사울의 말에 카스텔, 아이나, 아르멜 모두 고개를 저었다.
사울도 마찬가지였다.
현생 전생 통틀어 카멜 산은커녕 근처에도 가보지 못했다.
“아르멜. 카멜 산에 대해 얼마나 알지?”
“전하께서 알고 계신 만큼만 알고 있습니다. 저도 이번 일을 맡기 전까지 그쪽 일을 맡은 경험은 없습니다.”
“그렇군.”
카멜 산.
대족장 세네카가 머무르는 곳이자 종족들의 성지.
책에서는 카멜 산을 이렇게 묘사했다.
산맥에 속한 게 아니라 넓은 광야 위에 홀로 완만하게 솟아오른 큰 산.
본래는 황폐한 산이었지만, 엘프들이 백 년 넘게 자신들의 보금자리로 가꾼 덕분에 이제는 정령의 은총을 듬뿍 받아 숲이 우거진 산이 되었다.
완만한 산 위에는 천 명이 넘는 엘프와 소수의 이종족이 살고 있으며, 산 지하에는 드워프들이 땅굴을 파고 지하 도시를 만들어 다른 이종족과 함께 살고 있다.
산 위와 지하 도시에 사는 이종족의 숫자를 합치면 수천 명은 될 것이며, 산 주변에 형성된 마을까지 합치면 도합 1만 명이 넘는 이종족이 살고 있다.
카멜 산과 그 주변은 율렌 섬에서 가장 큰 이종족 거주 지역이며, 명실상부한 이종족 세력의 중심지다.
사울 일행이 아는 카멜 산에 대한 정보도 책에 기록된 지식을 크게 넘어서지 못했다.
하지만 각각 조금씩 더 아는 게 있었다.
먼저 아르멜이 말했다.
“카멜 산으로 넘어간 중범죄자들이 몇 있으며, 그들은 현재 카멜 산의 주민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합니다.”
아이나도 말했다.
“인간이 카멜 산에 들어가려면 허락을 받아야 합니다. 아버님께서 왕실의 허락을 받고 보낸 사절도 카멜 산 주변에서 머무르다 돌아온 적이 있습니다.”
카스텔도 말했다.
“예전에 가멜다 왕국과 카멜 산 사이에 무력 충돌이 일어날 뻔한 적이 있습니다.”
아르멜과 아이나의 말은 그렇다 쳐도, 카스텔의 이야기는 사울도 처음 듣는 말이었다.
“가멜다 왕국이? 언제 그런 일이 있었지요?”
“6년 전쟁 때의 일입니다. 가르시아 남매가 카멜 산 영역을 통과해 아군을 기습하려다 그쪽과 부딪쳐 충돌 직전까지 갔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요?”
“전투가 벌어지기 직전 가르시아 남매 쪽에서 스스로 물러났다고 들었습니다.”
가르시아 남매.
카스텔을 이긴 적 있는 가멜다 왕국의 최강자.
그런 실력자들이, 심지어 전쟁 도중이었음에도 카멜 산을 함부로 대하지 못한 것이다.
새삼 카멜 산의 영향력이 실감되었다.
“일단 카멜 산에 친서를 보내고 답장이 오기를 기다려 보죠.”
사울의 말에 아르멜이 조심스레 물었다.
“카멜 산에서 좋은 답변을 줄지 의문입니다.”
“크게 기대는 하지 않아. 처음부터 좋은 답변을 주지는 않겠지. 몇 번 두드려 보면서 다른 방법도 생각해 보는 거야.”
“알겠습니다.”
하지만 일은 사울의 예상과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