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아이스!”
아이스, 냉기로 목표를 얼리는 주문.
얼음 창이나 칼날로 적을 꿰뚫는 게 아니라 얼리는 게 효력의 전부라 보통 효율이 낮은 마법으로 통한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사울은 적을 직접 얼리는 대신, 지면을 광범위하게 얼렸다.
잿빛 늑대들이 딛고 있는 그 지면을 말이다.
“키에엑!”
예기치 못하게 빙판 위에 서게 된 잿빛 늑대들은 당황했다.
중심을 잃고 비틀거리는가 하면, 아예 넘어지거나 자빠지는 녀석들도 있었다.
당나귀만한 잿빛 늑대가 비틀거리고 넘어지자 그 위에 있는 자들도 무사할 수 없었다.
빙판 위에서 춤을 추는 잿빛 늑대 위에서 중심을 잡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자.
버티지 못하고 넘어지는 자
넘어지는 늑대에게 깔리는 자.
사울의 마법 한 방에 로 늑대 기병 여럿이 무력화되었다.
그렇게 사울이 활약하는 사이, 카스텔 쪽의 전투도 한창 무르익어 갔다.
우두머리 오크는 함부로 달려들지 않았다.
상대의 정체는 몰라도 대단한 실력자라는 것을 눈치챈 듯 신중하게 움직였다.
오크와 부하 몇이 한 몸처럼 움직이며 카스텔을 무너뜨리려 했다.
먼저 오크 우두머리가 사슬을 휘둘렀다.
날카로운 추가 달린 사슬이 막강한 기세로 카스텔을 노렸다.
카스텔이 손을 휘두르자 검푸른 빛이 날아오는 사슬을 정확히 쳐냈다.
사슬이 힘을 잃은 순간, 카스텔은 오크를 향해 반격하려 했다.
그 순간 오크 부하들이 일제히 카스텔을 공격했다.
마법을 날리는 자도 있고, 석궁을 꺼내 쏘는 자도 있었다.
어느 쪽이든 맨몸으로 맞으면 단숨에 목숨을 빼앗을 만큼 위력적인 공격이었다.
이에 카스텔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 마법을 시전했다.
그렇게 자신을 지킨 뒤, 다시금 오크를 노리려 하면 그보다 앞서 쇠사슬이 날아왔다.
심지어 쇠사슬과 다른 공격이 함께 날아오기도 했다.
이러한 합공은 카스텔도 만만히 볼 수 없었는지 날아오는 연속 공격을 막기에 급급했다.
그 광경을 본 사울은 이를 악물었다.
아직 카스텔의 몸은 정상이 아니다.
6년 전쟁 당시 가르시아 남매에게 당한 후유증이 남아 있다.
아직 카스텔이 큰 위기에 빠지진 않았지만 전투가 길어지면 예기치 못한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아직 내게는 카스텔이 필요해.’
결심한 사울은 우두머리 오크와 부하들을 노리기로 했다.
다행히 다른 일행이 다른 적들은 잘 상대하고 있다.
한 늑대 기병이 사울에게 달려들려 했지만, 아이나에게 막혔다.
지금이라면 과감하게 움직일 수 있다.
큰 마법을 위해 마나를 집중시키자 사울의 마법 검에 달린 보석이 빛났다.
“선생님!”
사울의 외침에 카스텔은 무언가를 깨닫고는 곧바로 준비를 했다.
카스텔이 대비를 한다면 충분하다.
사울은 마법 검을 겨냥하며 큰 소리로 외쳤다.
“파이어 스톰!”
시동어와 함께 거대한 불꽃이 사울 주변에 피어올랐다.
강력한 불꽃을 소환해 폭풍처럼 적을 휩쓸어 버리는 파이어 스톰.
지금 사울이 시전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마법이다.
또한 전생에 카스텔을 상대로 마지막으로 시전한 마법이기도 했다.
카스텔을 공격했던 마법으로 카스텔을 구하려 한다.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지금은 그런 것을 따질 만큼 한가하지 않았다.
강력한 불꽃이 폭풍처럼 적들은 물론, 그 한가운데 있던 카스텔까지 덮쳤다.
“으아악!”
불길 속에서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다행히 남자의 목소리였다.
불길이 사그라들고 그 속에서 살아남은 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마법을 방어한 자들은 살아남았고, 그렇지 못한 자들은 타 죽거나 재기 불능의 부상을 입은 상태였다.
우두머리 오크는 무사히 살아남았지만 부하 절반이 당했다.
“이런……!”
우두머리 오크의 표정에 당혹스러움이 스쳤다.
카스텔은 그런 오크의 빈틈을 놓치지 않았다.
검푸른 빛이 카스텔 주변을 감싸는가 싶더니, 이내 수십 가닥의 촉수가 되어 일제히 적들을 덮쳤다.
빠르고 날카로우며 강력하기까지 한 공격에 적들은 추풍낙엽으로 쓰러졌다.
우두머리 오크는 정신없이 사슬을 휘둘러 자신을 향한 빛의 촉수를 쳐 내고 막아 냈지만, 다른 자들은 그러지 못했다.
잠깐 사이에 카스텔 공격에 참여했던 자들은 우두머리 오크를 제외하고 모조리 쓰러졌다.
“빌어먹을……!”
전투의 저울추가 완전히 기울어졌다.
그 사실을 깨달은 우두머리 오크가 새로운 명령을 내렸다.
“놈들을 무시하고 밀고 들어가라!”
아직 건재한 적들은 일제히 우두머리 오크의 명령에 따랐다.
밀고 들어가라는 건 후방을 가로막은 병력을 뚫고 피난민 쪽으로 향하라는 뜻이었다.
‘아니, 저것들이!’
이대로 뚫리면 큰일이다.
피난민들 중에서도 무장한 자들이 있지만, 막강한 늑대 기병을 상대할 수준은 아니다.
몇 명만 피난민들에게 가도 마을 주민들이 전멸하거나, 그에 버금가는 피해를 입을 수 있다.
피난민들이 마음에 안 드는 것과 그들의 생사는 별개의 문제다.
그들을 지키며 대신전까지 후송하기로 한 이상, 사울 일행에게는 이를 지켜야 할 의무가 있었다.
“적들을 막아라!”
사울의 명령에 왕국군과 교단군도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다소 무리하면서도 피난민에게 돌진하려는 적들을 막기 시작했다.
“죽어라!”
사울에게도 적이 덮쳐왔다.
바로 우두머리 오크였다.
사울이 우두머리라는 것을 알고는 그를 죽여 일발 역전을 노리는 게 분명했다.
우두머리 오크가 탄 잿빛 늑대가 사울을 덮쳤다.
아슬아슬하게 늑대의 공격을 피하니 이번에는 쇠사슬과 추가 덮쳐 왔다.
마법의 힘이 담긴 쇠사슬과 추는 어지간한 갑옷이나 방패는 한 방에 박살 낼 수 있는 강력한 힘이 실려 있었다.
피하기는 늦었다.
사울은 쓸 수 있는 마나를 아낌없이 쏟아 부으며 마법 검을 뻗었다.
뻗은 마법 검을 중심으로 반구형의 방어막이 생성되었고, 그 직후 쇠사슬과 추가 방어막을 때렸다.
쾅!
공성 병기가 성문을 두들긴 듯 어마어마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동시에 사울은 시야가 일그러지는 것을 느꼈다.
지금 받은 공격의 충격 때문인 것은 아니다.
마나를 지나치게 많이 사용한 부작용이었다.
지금 사울이 쓸 수 있는 최강의 마법인 ‘파이어 스톰’을 쓴 직후 강력한 방어막을 친 건 다소 무리였던 모양이다.
다행히 방어막이 뚫리지는 않았다.
1:1 대결이 아닌 이상 이 정도면 충분했다.
“……!”
사울을 공격하던 우두머리 오크가 무언가를 느낀 듯 시선을 돌렸다.
그 직후 우두머리 오크의 등 뒤에서 커다란 빛의 촉수가 그를 관통했다.
“크억!”
한 방에 우두머리 오크와 잿빛 늑대까지 처리한 카스텔은 다른 적들도 처리하기 시작했다.
실력자들이 전략적으로 움직이며 상대해도 쓰러뜨리지 못한 카스텔이다.
전략 없이 마구잡이로 돌진하고, 돌진마저 왕국군과 교단군의 방어에 막힌 적들이 카스텔의 상대가 될 수는 없었다.
치열했던 전투였지만, 한번 저울추가 기울자 순식간에 한쪽으로 쏠렸다..
늑대 기병들은 기동력을 바탕으로 어떻게든 후방 병력을 뚫고 피난민들에게 향하려 했다.
하지만 명령을 내릴 우두머리 오크도 쓰러졌고, 저항도 치열했다.
더 이상 발목이 잡히지 않게 된 카스텔 역시 적극적으로 움직였다.
그녀가 손을 휘두를 때마다 날아간 빛줄기와 촉수가 적들을 관통했다.
결국 단 한 명의 늑대 기병도 피난민들에게 닿지 못하고 모두들 죽거나 쓰러져 바닥에 널브러졌다.
“휴우.”
전투가 끝난 것을 확인한 사울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동시에 몸 곳곳이 아파 오는 것을 느꼈다.
워낙 격렬한 전투였기에 여기저기 부상을 입은 모양이다.
“괜찮으십니까?”
아이나가 달려와 안부를 물었다.
걱정하는 그녀의 표정을 보면 ‘전하’소리가 안 나온 것만으로도 용했다.
“괜찮아요. 그대는?”
“전 괜찮습니다.”
아이나도 마냥 괜찮지는 않았다.
몸 곳곳이 피로 물들어 있었는데, 모두가 적의 피는 아닌 듯 했다.
한쪽 어깨에 베인 자국이 선명했으니까.
일단 사울은 상황을 수습할 것을 명령하려 했다.
바로 그때였다.
“으아아악!”
처절한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시선을 돌리니 우두머리 오크가 피를 흘리며 비명을 내지르고, 그를 싸늘히 내려다보는 카스텔의 모습이 보였다.
“말해라.”
“모, 모른다. 으악!”
“말해라.”
나지막한 목소리로 심문하는 카스텔의 손끝에서 흘러나오는 검푸른 빛이 우두머리 오크의 몸에 흘러들어 가는 광경이 보였다.
아마 참을 수 없는 고통이 가해지고 있으리라.
결국 우두머리 오크는 견디지 못했다.
“피, 피닉스! 피닉스다!”
“그 피닉스가 네 배후인가?”
“그렇다!”
“하얀 까마귀도 연관이 있는가?”
“그, 그렇다! 하얀 까마귀도…으아악!”
고통 속에서 자백하던 우두머리 오크가 피를 뿜었다.
동시에 아직 숨이 붙어 있던 몇몇 적들이 약속이나 한 듯 동시에 피를 뿜었다.
이미 몇 번 보아온 광경에 결과를 예측한 사울이었지만, 일단 명령을 내렸다.
“적들 중 살아 있는 자가 있는 지 확인해 봐.”
오래잖아 예상대로의 답변이 돌아왔다.
“모두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런가.”
사울은 혀를 내둘렀다.
처음 있는 일이 아니라 어느 정도는 예상을 했다.
하지만 막상 예상했던 참혹한 광경이 눈앞에 펼쳐지니 눈살을 찌푸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번에도 원하는 만큼 정보를 얻지 못했고, 또 적들은 알 수 없는 마법에 의해 몰살되었다.
이런 짓을 하는 놈은 개인이든 조직이든,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을 만큼 잔혹하고 또 치밀할 것이다.
“시체들을 조사하고, 실을 수 있을 만큼 싣고 가. 무언가 알아낼 수 있을지 모르니.”
“네.”
그런 사울에게 카스텔에 다가와 보고했다.
“들으신 대로 하얀 까마귀, 그리고 피닉스라는 이름이 나왔습니다.”
“그렇지요.”
카스텔은 이런 일이 벌어질 줄 알고 우두머리 오크를 고문했다.
어차피 곧 죽을 놈이고, 죽음을 막기 어렵다면 죽기 전에 고문을 해서라도 최대한 많은 정보를 뽑아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잔혹한 짓이지만, 그렇다고 카스텔을 탓할 마음은 없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았다면 이번에도 아무 정보를 얻지 못했을 테니까.
“분명 하얀 까마귀와 관련이 있다고 했지요.”
“네. 놈들이 킬리안의 부하는 아닌 것 같지만, 무언가 관련이 있는 놈들 같습니다.”
“내 생각도 그래요. 문제는 피닉스인데…….”
피닉스.
주기마다 스스로 몸을 불태워 죽음을 맞이한 뒤, 그 재 속에서 다시금 태어나며 영원한 삶을 누린다는 불사조.
하지만 피닉스는 전설 속의 존재다.
극소수 실존하는 드래곤과는 달리 피닉스는 명실상부한 전설 속의 존재다.
지난 수백 년간 피닉스가 실존한다고 주장하는 지식인이 아무도 없다는 게 이를 증명했다.
“피닉스라면 누군가의 이름이나 혹은 조직의 이름이겠지요?”
“그런 것으로 보입니다.”
“이들이 어둠과 관련이 있다면, 그 어둠의 세력 조직 이름이 피닉스이거나 관련이 있을 테고요.”
사울이 아는 지식 속에는 ‘피닉스’라 불리는 개인이나 조직은 없었다.
그렇기에 더욱 신경이 쓰였지만, 지금은 더 알아낼 방법이 없었다.
상황을 수습하는 게 먼저였다.
“괜찮으냐?”
마침 피난민 선두에 있던 아르멜이 달려와 물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남들 앞에서 연기하는 것을 잊지 않은 그의 치밀함에 사울은 웃음으로 답했다.
“네. 괜찮아요.”
“다행이다. 혹여나 큰일이 생기지 않았을까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쉽게도 적들을 생포하지는 못했어요. 정보는 조금 얻었지만.”
“그렇군. 일단 수습하고 이야기를 하자꾸나.”
* * *
피난민들은 전투 중에도 전투 후에도 계속 움직였다.
다행히 적들의 습격은 한 번에 그쳤고, 적들 대신 대신전 측에서 마중을 나왔다.
“에셀 마을 분들입니까?”
“그렇소!”
“안심하십시오. 우린 대신전 소속 교단군입니다.”
일단의 병력이 피난민들을 맞이했다.
그 중에는 사울이 먼저 보낸 자들도 있었다.
피난민과 교단군은 서로의 신분을 확인한 뒤 모두들 한 무리가 되어 대신전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