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당장은 큰 문제가 없었다.
피난민들도, 주변에서도 신경 쓸 만한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수틀리면 문제를 일으킬 가능성이 높다고 여겼던 악마 토끼풀 구매자들도 별문제 없이 걸음을 옮겼다.
전방에서도, 후방에서도 별다른 혼란이나 다툼은 없었다.
‘안에서는 큰 문제가 없을 것 같군. 밖에서도 문제가 안 터진다면 바랄 게 없겠는데.’
생각하며 주변을 살피던 사울의 눈에 한 피난민의 모습이 보였다.
고집스러운 인상의 드워프 남자.
드워프 기준으로도 덥수룩한 수염이 인상적이었다.
사울은 저 드워프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본래부터 에셀 마을에서 살던 피난민 출신의 주민이 아니라 율렌 섬의 거의 모든 이종족들이 믿고 따르는 거물, 대족장 세네카의 부하였던 드워프 오고스다.
카멜 산에서 에셀 마을을 관리하기 위해 보냈다던가.
마을을 떠나기 전에는 오고스와 만나 이야기를 나눌 만한 기회를 찾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다 같이 피난을 떠나는 길이 아닌가.
한 번쯤 접촉해 볼 만하고 여긴 사울은 오고스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사울의 인사에 오고스는 콧방귀를 뀌었다.
“흥. 이제 와서 순진한 척 하기는.”
오고스도 에셀 마을의 거물이라 사울이 평범한 견습 신관이 아니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물론 왕자라는 것까지는 알지 못했고, 대신전에서 파견된 특별한 존재 정도로만 알았다.
사울 역시 그에 맞게 행동하며 말을 이었다.
“카멜 산에서 오셨다지요?”
“그런데?”
“그럼 대족장 세네카 님과도 만나 보신 적 있겠군요.”
“물론이지.”
“괜찮으시다면 세네카 님이 어떤 분인지 이야기해 주실 수 있을까요?”
수다스러운 성격이라면 이 정도로 세네카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을 것이다.
아쉽게도 오고스는 수다스러운 성격이 아니었다.
“네가 대신전 소속이 아니었다면 꺼지라고 했을 거다. 지금은 그런 이야기 할 기분이 아니니 이만 물러가.”
말과 함께 오고스는 고개를 홱 돌렸다.
사울이 대신전 소속 신관이든 뭐든 더 이야기를 하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느껴졌다.
지금 오고스의 입을 열려면 힘을 쓰거나 사울의 진짜 신분을 밝히는 방법 외에는 없어 보였다.
하지만 사울은 아직 자신의 정체를 밝힐 마음도, 무리하게 힘을 쓸 마음도 없었다.
아직 과격해질 필요는 없다.
과격한 수단은 부작용을 만들어 낼 수 있었으니까.
‘이왕 대신전에 가는 길이니 도착한 다음 이야기를 해도 늦지 않겠지.’
서두를 생각은 없지만 어떻게든 오고스와 이야기를 해 볼 생각이었다.
오고스 본인에게 관심이 있다기 보다는 그가 카멜 산과 관련 있다는 게 신경 쓰였다.
분명 오고스는 대족장 세네카와 연줄이 있으며 그 연줄이 아직 끊어지지 않았다고 했다.
대족장 세네카.
언젠가는 한번 만나야 할 인물이었으니까.
“이봐.”
여러 생각을 정리하던 사울은 어느새 다가온 카스텔의 목소리에 조금 늦게 반응했다.
“아, 네. 무슨 일인가요?”
아직까지는 연기를 하는 중이다.
그런 사울의 반응에 카스텔은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잠시 이야기 좀 하지.”
“알겠습니다.”
이런 때 카스텔이 먼저 말을 걸어오는 건 드문 일이다.
심상찮은 예감에 일단 사울은 카스텔이 이끄는 대로 향했다.
“무슨 일이에요?”
사울의 질문에 카스텔이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마을 쪽에서 무언가가 느껴집니다.”
“마을 쪽에서?”
“네. 낯선 마나의 반응이 여럿입니다. 혹시나 해서 그쪽을 계속 살피고 있었는데…….”
이미 마을을 떠나온 지 두어 시간이 지났다.
걸음을 서두르는 길이라 마을과의 거리도 꽤 멀어졌고, 그래서인지 사울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적인가요?”
“그건 알 수 없지만 가능성은 높아 보입니다.”
“골치 아프게 되었는데.”
확실한 건 마나를 가진 존재가 에셀 마을에 나타났다는 것.
꼭 적이 나타났다는 뜻은 아니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적일 가능성이 높았다.
정말 적이 나타난 것이라면…….
“먼저 선생님이 아르멜과 촌장 그리고 신관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이쪽으로 데려와요.”
“알겠습니다.”
카스텔은 아르멜이 있는 곳으로 움직였고, 사울은 근처에 있던 아이나를 불렀다.
이야기를 들은 아이나도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적이라고요?”
“가능성이 적지 않은 것 같아요.”
“싸울 준비를 해야겠군요.”
“네. 하지만 상황이 확실해지기 전까지는 함부로 움직여선 안 돼요.”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잘못 생각한 것일 수도 있으니 혼란은…….”
잘못 생각한 것일 수도 있다는 아이나의 말을 부정하듯 외침 소리가 들려왔다.
“저, 저게 뭐야?”
“불이다!”
누군가의 외침에 모두의 시선이 마을 쪽으로 쏠렸다.
마을과 피난민들의 거리가 꽤 멀어졌음에도 희미한 불길과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이 보였다.
저 정도 불길이라면 보통 일이 아니다.
마을에서 집 한두 곳이 불타는 게 아니라 마을 전체가 불길에 휩싸여야 나올 수 있는 불길이었다.
마을 쪽에서 마나를 가진 누군가가 나타났고, 이어 마을 전체가 불타올랐다.
이쯤 되면 확실히 적이 나타났다고 보아도 문제가 없을 것이다.
사울은 다시 아이나에게 말했다.
“일단 혼란을 수습해야겠어요.”
“네, 전하. 피난민들이 질서 있고 빠르게 움직이도록 하겠습니다.”
피난민들이 좋든 싫든 정체도 알 수 없는 놈들 손에 공격당하고, 피해를 입는 것을 지켜 볼 수는 없다.
대신전과 에셀 마을은 걸어서 하루 반나절 정도의 거리다.
말을 타고 달리면 몇 시간 안에 도착할 수도 있겠지만, 왕복 거리를 생각하면 대신전의 지원군을 데려오는 일 같은 건 기대하기 어렵다.
“일단 한두 명만 보내 대신전에 이 사실을 알려야겠어요.”
지원군을 요청한다기 보다는 문제가 터졌다는 사실을 빨리 알린다는 뜻이다.
사울의 말뜻을 알아들은 아이나가 권했다.
“그럼 전하께서 가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울의 안전을 생각하면 사울과 카스텔 둘이 함께 대신전으로 달려가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뒤따르는 적에게 따라잡힐 위험도 적고, 혹시나 적이 앞을 가로막아도 카스텔이 처리할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사울은 그럴 마음이 없었다.
“그대나 다른 사람을 놔두고 도망칠 수는 없어요.”
짧지 않은 시간동안 사울과 함께 해 온 아이나는 사울이 생각을 굳혔음을 알고는 더 권하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조심하십시오.”
“그대도요.”
그러는 사이 카스텔과 아르멜, 마을 촌장과 사라까지 달려왔다.
“이게 무슨 일입니까?”
촌장의 질문에 카스텔이 대답했다.
“자세한 건 모릅니다. 하지만 마나를 다룰 줄 아는 자들이 마을에 나타났고, 불을 지른 것도 그들이 분명합니다.”
“그렇다는 건……!”
“적이 나타났다는 것이지요.”
카스텔의 말에 촌장이 펄쩍 뛰었다.
“적이라니, 설마 다르센 왕국이나 가멜다 왕국에서 우리들을?”
촌장의 의심이 전혀 근거 없지는 않았다.
다르센 왕국과 가멜다 왕국은 조국을 버리고 도망친 피난민들은 ‘배신자’ 취급했다.
소수의 과격파들은 피난민들을 당장이라도 잡아 족치거나 아예 몰살시켜야 한다고 떠들기도 했다.
피난민 입장에서는 어느 날 두 나라 중 한곳이 토벌군을 편성해 피난민들을 잡아가거나 몰살시키려 쳐들어왔다고 생각할 만 했다.
물론 사울은 이러한 생각에 동의하지 않았다.
사울과 카스텔이 있는데 다르센 왕국에서 토벌군 따위를 보낼 리 없다.
물론 사울이 왕자로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이상 그런 사울을 마음에 들지 않은 자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방식으로 왕자를 공격할 만큼 다르센 왕국 정계가 혼란스럽지는 않다.
가멜다 왕국도 마찬가지다.
고작 피난민 마을을 공격하거나 왕자를 공격하기 위해 이런 과격할 수단을 쓸 가능성은 낮을 것이다.
아직은 휴전을 유지하고 싶다는 게 두 나라의 공통적인 생각이니까.
“그들의 짓은 아닐 겁니다.”
“확실하오?”
“그렇습니다.”
사울의 진짜 정체에 알고 있던 사라도 사울 편을 들었다.
“맞아요. 그들의 짓은 아닐 거예요.”
“그럼 누가 우리 마을을 불태웠다는 말이오?”
아르멜이 대답했다.
“지금 마을 주민들이 피난을 가게 된 건 결국 악마 토끼풀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와 관련 있는 자들일 가능성이 높겠지요.”
“그,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하오?”
사울은 지금껏 생각한 것들을 말했다.
“일단 질서 있게 움직여야 해요. 마을 주민들을 질서 있게 움직여 주세요. 혹시나 전투에 휘말릴지 모르니 주민 중에서도 싸울 수 있는 자들은 싸울 준비를 하고요.”
“그 다음에는?”
“병력을 둘로 나누어 전방에서는 소수의 병력이 주민들을 관리하고 나머지는 모두 후방으로 보내 적들의 공격을 방어하는 것이 좋겠어요.”
사울의 말에 아르멜도, 카스텔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좋겠습니다. 마을을 불태운 놈들과 싸우지 않고 끝나면 다행이지만, 아마 놈들은 피난민을 공격해 올 겁니다.”
아르멜의 말에 카스텔도 의견을 보탰다.
“마을 안에 첩자가 있을 지도 모르니 마을 주민들 역시 철저히 살펴야 합니다.”
카스텔의 말에 촌장이 눈을 크게 떴다.
“첩자라니? 그건 또 무슨 말이오?”
“마을에 악마 토끼풀을 판 자도 있고, 산 자도 있습니다. 이번 일에 관련된 첩자가 없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요?”
“그, 그건…….”
“첩자가 있다면 마을 주민들 중에 있을 겁니다. 우리들이 이 마을에 방문한 건 예정된 일이 아니었으니까. 당신 역시 첩자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카스텔의 말에 촌장이 벌컥 화를 냈다.
“말이 심하군! 나더러 우리 마을을 불태운 놈들과 한패라니!”
“가능성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도……!”
카스텔의 눈빛이 변했다.
‘검은 마녀’ 혹은 ‘검은 흉성’으로 불리던 시절처럼 무시무시한 가면을 쓰지는 않았지만, 적의 시체로 산을 쌓아온 카스텔의 강렬한 눈빛은 일개 마을 촌장이 감당할 게 못 되었다.
“이, 이보시오.”
“오해받기 싫다면 오해받을 짓을 하지 마십시오.”
보고 있던 사울이 끼어들었다.
“그만해요. 촌장님도 상황이 상황이니 우리에게 협조해 주세요. 촌장님이 무고하다는 것을 믿어요. 그러니 촌장님도 그 믿음이 깨지지 않도록 해 주세요.”
주도권이 완전히 넘어갔음을 깨달은 촌장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아, 알겠소.”
“좋아요. 그럼.”
곧 사울의 계획대로 착착 움직이기 시작했다.
일단 왕국군 두 명을 뽑아 대신전 쪽으로 보냈다.
거리가 있다 보니 시간에 맞게 지원군을 데려올 가능성은 낮았지만, 빨리 상황을 알리는 게 중요했다.
그리곤 전력 대부분을 적의 공격이 집중될 후방에 배치시켰다.
왕국군, 교단군, 그리고 사울 일행이었다.
전방에는 피난민들의 질서 유지 및 감시를 위한 소수의 인원만을 남겼다.
사울은 아르멜도 전방으로 보냈다.
“저도 싸울 수 있습니다.”
“물론 그렇지. 하지만 만에 하나라는 게 있으니까. 마을 주민들 중에 쓸데없는 일을 하는 자가 나올 지도 몰라. 랄프 같은 놈은 더욱 그렇고. 그러니 너는 전방에 있는 게 좋겠어.”
억지를 쓰는 게 아니다.
적이 쳐들어온다면 검을 휘두르며 방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주민들을 지키고 관리하는 것도 중요했다.
그런 관리자의 역할에 있어 아르멜 만큼의 적임자가 없었다.
사울의 말뜻을 알아들은 아르멜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그렇게 아르멜이 떠나고, 곧 카스텔이 말했다.
“그들이 오고 있습니다.”
“역시 적이겠지요?”
“아마도 그럴 겁니다.”
“그럼 우리도 싸울 준비를 해요.”
이번 싸움은 지난번과는 다르다.
정체를 숨기기 위해 갑옷이 아닌 신관복을 차려 입었다.
만에 하나를 대비하기 위해 신관복 아래 가벼운 갑옷을 받쳐 입기는 했지만 평소보다 주의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카스텔이 있으니까.’
이런 상황에서 누구보다 믿음직스러운 카스텔이 최후방에 섰다.
적이 공격해 온다면 가장 먼저 공격을 받게 될 자리다.
지금 이 상황을 해결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적들에게 카스텔의 정체를 밝히는 것이다.
자살하고 싶은 놈이 아니라면 카스텔의 정체를 아는 순간 꼬리를 말고 도망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