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흑마법이라면… 역시 어둠의 세력들이라는 말인가요?”
“그럴 가능성이 있다는 뜻입니다.”
심각한 분위기 속에 아르멜도 한마디 했다.
“어둠의 세력이나 어둠의 존재. 분명 지금도 어디엔가 존재하고 있겠지만 누구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자들이지요.”
“그리고 하얀 까마귀가 그들과 함께 하고 있다는 의혹이 있지.”
“왕국 정보부에서는 의혹을 넘어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럼 이들이 어둠의 세력이거나 하얀 까마귀와 연관이 있다고 생각해?”
“카스텔 님의 말씀대로 가능성은 있을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지금 여기 죽은 녀석들이 보통 녀석이 아니라는 건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흑마법인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카스텔 님에게도 낯선 마법을 썼고, 거기에다 정체를 들키지 않게 자신들을 포함한 관련자들을 모조리 죽여 버리는 일 처리까지… 지금 우리는 괴물을 상대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괴물.
그렇다.
이런 짓을 하는 놈들이라면 괴물이라 부를 수밖에 없다.
그 괴물의 정체를 조금이나마 밝힐 수 있으리라 기대했는데, 적들이 모조리 죽어 버렸기에 그것도 어렵게 되었다.
“선생님. 주변을 한 번 더 살펴보세요.”
“네.”
카스텔이 넓은 범위를 살펴보는 사이 다른 사람들은 좁은 범위를 샅샅이 뒤졌다.
혹여나 놓친 것이 있을까 주변의 풀 한 포기 놓치지 않고 철저히 살펴보았다.
하지만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증거가 될 만한 건 총 열 구의 시체뿐이었다.
이윽고 카스텔도 돌아와 보고했다.
“별다른 것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렇군요. 그럼 시체를 마을로 옮기죠.”
다시 주변이 분주해졌다.
사울이 데려온 왕국군이 마을에서 수레를 빌려와 시체를 싣고 마을로 돌아갔다.
생각에 잠긴 사울이 걷고 있는데 그때껏 숨어 있던 랄프가 조용히 다가와 물었다.
“저기…….”
“무슨 일이지?”
“이제 전 어떻게 되는 겁니까?”
자기 안전만 생각하던 랄프도 상황이 심상찮게 돌아가는 것을 눈치 챈 것이다.
사울은 한숨과 함께 대답했다.
“이미 말했듯 약속은 지킨다. 하지만 너도 알다시피 일이 좀 꼬였어. 마을에서 추가 조사를 할 텐데 철저히 협조하도록 해. 그래야 네게도 좋을 테니까.”
“아, 알겠습니다. 어쨌든 부디 저도 대신전으로 데리고 가 주십시오.”
“싫어도 그렇게 할 거야.”
대신전에 간다는 건 감옥에 간다는 것과 다를 바 없건만, 랄프는 자신의 대신전 행에 대해 몇 번이나 다짐을 받았다.
멋모르고 이 일에 끼어든 그도 상황이 심상찮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리라.
정체조차 불분명한 저들을 배신한 자신이 살아남으려면 대신전에 들어가는 방법 밖에 없는 것을.
* * *
사울의 우려와 달리 에셀 마을은 평온했다.
숲속 전투에서 난 큰소리 때문에 주민들 모두 잠 못 자고 나와 있는 것만 제외하면 말이다.
“대체 무슨 일이야?”
“숲에서 엄청난 소리가 났는데.”
수군거리는 마을 주민들의 시선이 마을 입구로 들어온 수레로 향했다.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일부러 좁고 드나들기 불편하게 만들어진 마을 출입구를 간신히 통과한 수레 두 대.
수레에 실린 시체들을 본 마을 주민들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아니. 저 시체들은…….”
“왜 신관들이 시체를 운반해 오는 거야?”
마을 주민들이 혼란스러워하는 가운데 연락을 받은 사라가 달려왔다.
“……!”
사라도 두 대의 수레에 실린 시체들을 보고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마을 주민들이나 사라도 이런 일을 처음 겪지는 않은 듯 금방 정신을 차렸다.
“대체 무슨 일입니까?”
사라의 질문에 사울이 대답했다.
마을 주민들의 눈도 있기에 예의를 갖추는 것도 잊지 않았다.
“적들과 싸워 이겼지만 생포하지는 못했습니다. 대부분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그럼 시신들은 어떻게 할 겁니까?”
“우리가 쓰는 집 중 한곳으로 옮기겠습니다.”
“아닙니다. 신전으로 옮기세요.”
신전이라는 말에 사울은 조금 놀랐다.
이 시체들은 어둠과 관련이 있을지 모르고, 사라 역시 그 사실을 모르진 않을 것이다.
어둠과 관련된 시체를 빛의 신전에 가져가는 건 그 자체로 부정한 일이 아닐까.
사울의 신학적인 걱정에 사라가 걱정 말라는 듯 말했다.
“신께서도 하루빨리 어둠의 정체를 밝히고 타파하기를 원하실 겁니다.”
“알겠습니다.”
시체들은 신전에 임시로 안치되었다.
총 열 구의 시체가 신전에 놓인 가운데, 사울은 시체들을 꼼꼼히 살펴보았다.
꼼꼼히 살펴본 결과 정체불명의 각혈이 주요 사망 원인임을 알 수 있었다.
열 구의 시체 모두 각혈한 흔적은 있었지만 죽을 만한 상처를 입은 자는 드물었기 때문이다.
그 각혈의 원인은 알 수 없는 마법일 것이다.
카스텔조차도 알지 못하는 마법.
흑마법일 가능성이 높지만 확신할 수는 없다.
게다가 사울과 검을 맞댄 오크의 그 생명력도 마음에 걸렸다.
비슷한 일을 예전에도 겪은 적 있다.
과거 비정상적인 생명력을 가진 하얀 까마귀 소속 오크와 싸운 적이 있지 않은가.
그때부터 지금까지 줄곧 흑마법 같은 어둠의 힘이 개입된 것이라면…….
여러 가지 떠오르는 게 있었지만 확실한 답은 떠오르지 않았다.
사울은 사라에게 의견을 구했다.
“혹시 무언가 알고 있는 것 있나요?”
이미 상황에 대해 이야기를 들은 사라는 한참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
“흑마법 말씀을 하셨지요. 전 과거 대신전에서 흑마법에 대한 기록을 본 적 있습니다.”
“그래요?”
“네. 그 중 ‘저주’에 대한 기록이 있었습니다. 저주 마법은 타인을 저주하여 불운하게 만드는 건 물론, 힘을 빼앗거나 생명까지 빼앗을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럼 이들이 흑마법, 그것도 저주 마법에 당했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자세한 건 대신전에서 조사를 해 볼 일인 것 같습니다.”
“대신전에서 조사를 하자면…….”
“시신들을 대신전까지 가지고 가는 게 좋겠습니다.”
일이 생각보다 많이 번거로워진 것 같지만, 확실히 지금으로서는 그것이 최선이었다.
보아하니 대신전에는 흑마법에 대한 기록이나 정보가 많은 것 같다.
또한 이런 일에 대해 잘 아는 전문가도 있을 것이다.
대신전의 정보와 전문가를 빌린다면 이 수수께끼도 풀 수 있지 않을까.
“알겠습니다. 그럼 이 시체와 저 랄프라는 녀석은 우리가 데리고 가지요.”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건 또 무슨 말이지요?”
“이 지역에서는 마을이나 부족이 어떤 형태로든 어둠의 영향을 받거나 접촉했다면, 이유 불문 마을 주민 전원이 대신전이나 카멜 산으로 이동하게 되어 있습니다.”
“마을 주민 모두가 대신전으로 피난을 가야 한다는 말인가요?”
“네, 전하.”
사라는 유독 ‘전하’라는 호칭에 힘을 주었다.
상대가 왕자라도 이 방침은 어길 수 없다는 뜻인 게 분명했다.
사실 사울로서는 큰 상관이 없었다.
에셀 마을은 다르센 왕국 영토에 속해 있지 않았다.
에셀 마을을 움직이는 건 대신전과 카멜 산이다.
마을 주민들 모두 움직여야 한다는 게 대신전의 법이라면 따를 뿐이다.
“그것이 대신전의 법이라면 반대하지는 않을 거예요. 하지만 주민들이 그 뜻을 따를까요?”
“따를 것입니다.”
“그렇다면 알겠어요.”
사울이 고개를 끄덕이자 사라가 신전 밖으로 나갔다.
마을 주민들에게 마을을 떠나야 한다는 것을 알리러 나간 게 분명했다.
사울은 아르멜에게 말했다.
“일이 예상외로 흘러가는군.”
“저도 이렇게 흘러가리라고는 예상치 못했습니다.”
“이대로 마을 사람들과 함께 대신전까지 가야 하는 건가?”
“다른 방법이 없지 않습니까. 일이 돌아가는 게 마음에 들지 않으신다면 이 일에서 발을 빼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여기는 다르센 왕국의 법과 질서가 통하는 곳이 아니다.
왕자의 신분은 그 자체로 존중받을 수 있지만, 단지 그것뿐이다.
중립 지대에서는 권력을 행사할 수 없는 왕자 노릇을 하는 데 익숙해질 필요가 있다.
생각을 정리하던 사울은 아이나에게도 질문했다.
“그대는 어떻게 생각해요?”
“아르멜 씨의 말이 맞습니다. 중립 지대에서는 저희 가문은 물론 왕실의 힘도 제대로 미치지 못하니까요.”
“역시 사라의 말에 따르는 수밖에 없다?”
“네.”
이종족에 대해서는 사울이나 아르멜보다 잘 아는 아이나도 지금 상황에서는 뾰족한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사울도 결론을 내렸다.
“하는 수 없군. 모두들 대신전으로 돌아갈 준비를 해요.”
“네, 전하.”
* * *
살던 마을을 버리고 모든 주민이 피난을 간다.
모든 주민의 피난은 쉬운 일이 아니다.
당장 적이 쳐들어와 칼날이 목전에 닿았다면 모를까, 그저 ‘어둠의 세력이 나타난 것 같다’는 정황만으로 움직이는 건 더욱 어렵다.
반대자가 속출하고 마을이 혼란에 빠져도 이상할 게 없었다.
하지만 마을 주민 누구도 피난을 떠나야 한다는 사라의 말에 반대하지 않았다.
통보를 받고 불과 몇 시간 만에 모든 주민이 피난 준비를 마쳤다.
“모든 준비가 끝났습니다.”
“벌써요?”
놀란 사울에게 사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그렇군요.”
솔직히 사울은 에셀 마을 주민들을 전란을 피해 도망친 비겁자들의 모임이라고 생각했다.
피난민을 잡아죽이거나 처벌해야 한다고는 생각지 않았지만, 비겁자라는 생각 자체는 바뀌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보니 피난민들은 그 나름대로 어려움이 많은 것 같았다.
전란을 피해 마음 편히 살아가는 자들은 아닌 것이다.
지금껏 마음 편히 살아왔다면 이런 상황에서 이처럼 신속하게 움직일 리 없었으니까.
“그럼 출발하지요.”
“네, 전하.”
사울 일행과 모든 주민들이 마을을 버리고 떠났다.
마을 주민 중 스스로 걷지 못할 만큼 몸이 약한 자는 몇 되지 않았다.
몇 되지 않는 연약한 주민들은 말이나 수레에 태워 옮길 수 있었다.
진짜 문제는 시체들이었다.
아직 정체가 불분명한 적들의 정체를 캘 증거가 될지 모를 시체들을 버리고 갈 수는 없다.
그래서 열구의 시체는 마차에 싣고 가기로 했다.
이에 사울은 함께 온 신관들에게 말했다.
“우리가 타고 온 마차에 시체들을 실어야겠어요.”
마을에 올 때 마차에 타고 온 건 아르멜을 제외하면 대부분 진짜 대신관 소속 신관들이었다.
마차를 타고 온 신관들이 졸지에 걸어가게 되었다.
물론 상황이 상황이라 어떤 신관도 사울의 말에 반발하지 못했다.
“알겠습니다.”
마차에 시체가 실리는 모습을 본 사울은 여러모로 쉽지 않은 피난길이 될 것 같다고 생각했다.
랄프나 그에게서 악마 토끼풀을 구매한 손님들은 뒤가 구리니 피난 도중 도망치거나 허튼 짓을 할 수 있어 철저히 감시해야 한다.
그리고 이동 중 적의 공격을 받을 수도 있다.
지금 마을 주민들이 피난 가는 것도 최악의 경우 마을이 공격받을 위험이 있기 때문 아닌가.
나름대로 대비하며 움직이고 있지만 철통같이 대비하며 움직일 만큼 여유롭지는 않았다.
대비할 시간이 부족한 만큼 큰일이 생기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그렇게 피난 준비가 끝났다.
“그럼, 출발한다!”
마을 촌장의 외침과 함께 사울 일행은 물론, 마을 주민 모두가 대신전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 * *
예기치 못한 피난길에 나선 마을 주민들의 표정은 썩 밝지 않았다.
삶의 터전을 버리고 떠나는 길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삶의 터전을 떠나는 사람들 치고는 조용했고, 덤덤하기까지 했다.
그 광경을 본 사울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미 이런 일을 겪어 본 적 있으니 저렇겠지.’
사울은 카스텔, 아이나와 함께 피난민들의 후방에서 움직였다.
피난민들 전방에는 아르멜과 몇몇 병사들이 섰다.
후방에서 피난민들을 지켜 주는 건 물론, 피난민 앞에서 경계하는 역할도 꼭 필요했다.
주변을 경계하는 건 물론, 피난민 사이에서 수상한 움직임이 생길 수도 있었고, 그럴 때 즉각 대응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동시에 마을 주민 중 수상한 녀석들에 대한 감시도 필요했다.
특히 랄프와 그에게서 악마 토끼풀을 산 주민들은 주 감시 대상이었다.
이에 랄프와 악마 토끼풀 구매자들은 두 패로 나뉘어 움직이도록 했다.
랄프와 몇몇 구매자는 전방에, 나머지는 후방에서 움직이도록 했다.
한 덩이로 뭉쳐 두었다 쓸데없는 짓을 꾸밀 수 있었기에 이를 방지하기 위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