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카스텔의 손에서 전격이 뻗어 나와 두 마을 주민을 때렸다.
생명에 지장을 주거나 큰 고통을 느끼게 하지는 않으면서 정신만 번쩍 들 게 할 만큼 세밀하게 위력을 조정했다.
덕분에 쓰러진 둘 모두 조금도 다치지 않고 정신을 차렸다.
“뭐, 뭐야!”
“무슨 일이야?”
두 주민의 눈에 사울 일행의 모습이 보였다.
복면이나 투구로 얼굴을 가린 채 싸늘한 표정으로 자신들을 내려다보는 사울 일행의 모습은 그 자체로 두렵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둘 모두 묶여 있고, 납치되어 온 상황이 아닌가.
“왜, 왜 이러시오?”
먼저 인간 주민이 입을 열었다.
사울은 미리 조사해 둔 그의 이름을 불렀다.
“랄프.”
“네, 네?”
“우리가 누구라고 생각하지?”
“그, 그걸 내가 어떻게 아오?”
“왜 우리가 너와 네 손님인 제나엘을 불렀다고 생각하나?”
“……!”
랄프도, 제나엘도 자신들이 어떤 상황에 놓인 것인지 깨달았다.
눈앞의 남자는 자신들의 정체를 알고 무슨 짓을 한 것인지도 알고 있다.
그런 자들이 얼굴까지 숨긴 채 자신들을 납치했다는 건 어떻게 봐도 좋은 징조가 아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사울은 제나엘에게 말했다.
“제나엘.”
“네?”
“악마 토끼풀은 다르센 왕국에서도, 가멜다 왕국에서도, 나아가 대신전과 카멜 산에서도 모두 금지하는 물건이다. 알고 있나?”
“…알고 있소.”
“그렇다면 왜 우리가 너희들을 데려왔는지도 알겠지.”
제나엘이 부들부들 떠는 모습이 보였다.
지금 상황이 정말로 좋지 않다는 것을 확실히 깨달은 모양이었다.
반면에 랄프 쪽은 좀 더 대담했다.
겁먹고 떨거나 자신의 죄를 자백하는 대신 뻔뻔하게 말했다.
“악마 토끼풀이라니?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요? 내가 왜 이렇게 끌려와 이런 말을 들어야 하는 거요?”
그러자 아르멜이 끼어들었다.
아르멜이 바닥에 떨어뜨린 물건을 본 랄프의 눈이 커졌다.
튼튼한 나무 상자에 가득 담긴 말린 식물 조각.
모르는 사람이라면 약초나 차, 불쏘시개 따위라 생각할 수도 있지만, 아는 사람의 눈에는 정체가 훤히 보였다.
건조시킨 악마 토끼풀이었다.
“이건 너희 집에 있던 물건이다.”
“난 이런 것 모르오!”
“너희 집에 이런 상자가 하나도 아니고 몇 개나 있더군. 원한다면 지금이라도 마을 사람들 모두를 대동하고 다시 한번 너희 집을 뒤질 수도 있다.”
“큭.”
자신이 악마 토끼풀 장사꾼이라는 걸 부정할 수 없게 된 랄프가 이를 악물었다.
다시 사울이 말했다.
“에셀 마을은 대신전에서 정한 규율을 따르고 있더군. 대신전에서 악마 토끼풀을 판자는 어떻게 처벌하는지 아나?”
“…….”
세 번째 대신전은 신전 내부와 자신들의 영향력이 미치는 곳에서 사법권을 행사하고 있다.
법 중에는 절도, 폭력, 강도, 살인처럼 어디에서나 벌어지는 일은 물론, 악마 토끼풀에 관련된 처벌 규정도 있었다.
율렌 섬 어딜 가나 악마 토끼풀 문제가 심각한 탓에 대신전에서도 악마 토끼풀 문제를 엄중히 취급했다.
그래서 악마 토끼풀을 파는 자는 이유를 불문하고 중형을 선고받는 게 원칙이었다.
또한 갱생이 어렵다 여겨지면 더욱 무거운 처벌이 기다리고 있었다.
빛의 교단에서는 갱생의 여지가 없으면 신의 자비로만 구원받을 수 있다고 믿었기에 갱생이 불가능한 자들은 하루빨리 신에게 자비를 구할 수 있도록 사형으로 다스렸다.
랄프 역시 이대로 대신전에 끌려가면 목숨을 부지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았다.
랄프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내, 내게 뭘 원하시오.”
슬슬 이야기를 해 볼 분위기가 된 것을 안 사울도 본론을 꺼냈다.
“너도 제나엘도 꼬리라는 건 알고 있다.”
“꼬리라니…….”
“너희들에게는 다행이지. 갱생의 여지가 있다면 굳이 목숨을 빼앗을 필요는 없을 테니까.” “무슨 소리요?”
“네가 악마 토끼풀을 재배하고 파는 총책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다. 고작해야 말단 정도겠지. 하지만 말단이라고 해도 너와 거래하는 자, 그리고 네 위에 있는 자에 대해 조금은 알고 있을 테고.”
“그, 그건…….”
자신과 거래하는 자, 자신 위에 있는 자를 팔아넘기라는 뜻임을 안 랄프는 주저했다.
그러자 사울은 제나엘에게 시선을 돌렸다.
“제나엘.”
“…….”
“이 마을의 주민이라면 이종족이라도 세 번째 대신전의 규율을 따라야 한다. 지금 네 상황이 어떤지는 너도 잘 알고 있겠지.”
왕국법에서 그렇듯 신전에서도 악마 토끼풀 사용자보다는 판매자에게 더 큰 책임을 물었다.
하지만 사용자 역시 좋은 꼴을 보기는 힘들었다.
최소 몇 년은 감옥에서 보내거나, 혹은 ‘순례’라는 이름의 귀양살이를 해야 할 것이다.
사울은 다시 제나엘에게 물었다.
“네가 알고 있는 사실을 모두 말한다면 네 처분을 가볍게 해 줄 수 있다.”
“정말이오?”
“물론. 빛의 이름으로 맹세한다.”
그러자 듣고 있던 랄프가 발끈했다.
“잠깐! 그러면 나는 어떻게 되는 거요?”
“네 선택에 달렸다. 너희 두 명 중 한 명만 협조한다면 그자의 죄만 경감해 줄 것이고, 둘 다 협조한다면 둘 모두의 죄를 경감해 주겠다.”
“만약 나도 저 귀쟁이 녀석도 입을 다물면?”
“그럼 사이좋게 대신전으로 끌려가 둘 다 엄히 처벌받겠지. 하지만 과연 그럴까? 둘 중 하나가 입을 여는데 다른 쪽이 입을 열지 않는다면 입을 열지 않는 쪽이 크게 불리해질 건 불을 보듯 뻔한데. 이미 제나엘은 입을 열 생각인 것 같고.”
“큭…….”
“잘 생각해라. 선택권은 너희에게 있다. 우리는 너희들의 선택에 따라 대접할 것이다.”
어차피 랄프는 입을 다물면 죽을 가능성이 높고, 제나엘 역시 좋은 꼴을 보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하루빨리 입을 열고 협조하는 게 합리적인 선택일 것이다.
하지만 랄프도, 제나엘도 섣불리 합리적인 선택을 취하지 못했다.
악마 토끼풀을 파는 놈들에게 의리를 지키기 위함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이유는 하나다.
자신들에게 악마 토끼풀을 팔거나 공급한 놈들에 대한 두려움.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는 것이다.
사울은 법 역시 주먹 못지않게 가깝고, 또 무섭다는 사실을 주지시킬 필요를 느꼈다.
“협조하지 않겠다면 너희들을 곧바로 대신전으로 데리고 가겠다.”
“뭐, 뭐라고?”
“이미 마을 촌장이나 신관과는 이야기가 끝난 상태다. 즉 너희들의 처분은 우리 뜻에 달려 있지. 시간이 많은 것도 아니니 협조하지 않겠다면 나머지는 신의 자비에 맡기는 수밖에.”
“…….”
“기다리기 지루하군. 그럼 일단 대신전으로…….”
“잠깐!”
다급히 외친 랄프가 주변에 무언가 있는 것처럼 눈치를 보며 목소리를 낮췄다.
“알겠소. 협조하겠소.”
“협조하는 대신 무언가 우리에게 원하는 게 있나?”
“그렇소. 내가 그들을 배신한 것을 알면 난 그놈들에게 죽소.”
“걱정할 것 없다. 너희들이 우리에게 협조하고 일이 잘 마무리되면, 너희들은 대신전으로 가게 될 것이다.”
“뭐요?”
“죽이는 게 아니라 한동안 그곳에서 정화의 나날을 보낼 것이다.”
정화의 나날.
간단히 말하자면 빛의 교단 식 감옥살이다.
평소에는 감금되어 생활하고, 필요하면 강제 노동으로 신전에 봉사하며 몸과 마음을 깨끗이 씻는 나날을 보내는 것이다.
정화의 나날은 상당히 고된 일이었지만, 최소한 사람이 죽지는 않았다.
죄수가 죽든 말든 크게 신경 쓰지 않는 악독한 감옥이나 수용소와는 달리 신전에서는 ‘갱생할 희망이 있는 자는 살아서 죄를 씻겨야 한다’는 개념을 중요히 여겼기 때문이다.
살아서 죄를 씻기 어려울 만큼의 악질은 신의 곁으로 보내야 하지만, 희망이 있다면 가능한 살려서 다스린다는 게 대신전의 법이다.
즉 ‘정화의 나날’로 처벌받으면 자유가 없고 고단할지라도 목숨은 건질 수 있다.
또한 대신전 안이라면 아무리 흉악한 악당이라도 제대로 손을 쓰지 못할 것이다.
나름대로 계산을 마친 랄프가 말했다.
“정말이오? 내가 죽는 게 아니라 정화의 나날을 보낼 수 있는 거요?”
“물론이다. 빛의 이름으로 맹세하지.”
빛의 맹세.
신관이나 성기사에게는 목숨을 건 맹세보다도 더욱 엄중한 맹세다.
빛의 이름으로 한 맹세를 어기는 건 대신전, 나아가 교단에 속한 자가 저지를 수 있는 가장 큰 죄로 취급받았으니까.
사람을 죽인 죄도 상황에 따라 죄를 감경 받을 수 있는 것과 달리 빛의 맹세를 어기는 건 파문 감이자 사형에 처해야 할 죄로 취급되었다.
그래서 신관이나 성기사들은 빛의 맹세를 목숨같이 여겼고 문자 그대로 목숨을 걸고 지켰다.
빛의 맹세를 어기고도 용서받는 건 오직 목숨을 걸고 맹세를 지키려 했으나 실패한 경우뿐이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빛의 교단의 법이다.
왕자인 사울이 빛의 맹세를 어긴다고 교단에서 그를 죽일 수는 없다.
신실한 신자도 아닌 사울에게 빛의 맹세는 상대를 속이기 위한 수단일 뿐, 본인에게는 큰 의미가 없었다.
하지만 사울은 가능한 약속을 지킬 생각이었다.
이런 조무래기들을 꼭 죽일 필요는 없으니 말이다.
이들이 딴맘을 품지 않으면 이쪽에서도 그에 맞은 대접을 해 줄 생각이었다.
“그럼 말해. 누가 네게 악마 토끼풀을 공급하지?”
“그게… 트캇이란 남자인데.”
“트캇?”
누군가의 이름이라기에는 굉장히 낮선 단어다.
최소한 인간 종족이 쓸 법한 이름은 아니다.
“이종족에서 쓰는 이름인가요?”
사울보다 이종족에 대해 잘 아는 아이나도 이런 이름에는 낯설어 했다.
“제가 아는 어떤 종족도 이런 이름을 쓰지는 않았습니다.”
아르멜이 말했다.
“가명이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그런 것 같군. 그게 아니면 부모가 괴상한 자들이던가.”
사울이 다시 랄프에게 물었다.
“트캇이라는 자에 대해 뭘 알지?”
“그러니까… 가끔 와서 내게 악마 토끼풀을 주고, 나는 그에게 돈을 주오. 그게 전부요.”
“혼자 움직이나?”
“그렇진 않소. 하지만 나랑 이야기를 하는 건 트캇이라는 놈뿐이오.”
“호위병과 함께 다니는 모양이군. 놈에 대해 더 아는 건 없나?”
“내가 아는 건 그것뿐이오.”
“그럼 넌 어째서 알지도 못하는 자와 손잡고 악마 토끼풀을 팔게 된 거지?”
랄프가 볼멘소리를 냈다.
“젠장. 돈 좀 벌고 새로운 신분을 마련해 보려고 한 거요. 됐소?”
“새로운 신분?”
“그렇소. 그쪽에서 자기들 말만 잘 들으면 돈도 많이 주고 다르센 왕국이든 가멜다 왕국이든 다시금 국적을 회복시켜 준다고 했소.”
사울은 납득했다.
확실히 매력적인 조건이다.
에셀 마을에서 머무르면 전란은 피할 수 있겠지만, 가난한 삶에서 벗어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고 다르센 왕국이나 가멜다 왕국에 돌아가기도 어려웠다.
두 왕국 모두 나라를 떠난 피난민들은 왕국민의 의무를 저버린 비겁자들로 취급했다.
그렇기에 돌아가 봐도 좋은 대접을 받기는 어려울 것이다.
최악의 경우에는 왕국민의 의무를 저버렸다는 이유로 사형을 당할 수도 있다.
그런 상황에서 누군가 이 가난한 마을을 벗어나 멀쩡히 왕국으로 돌아가게 해 주고, 또 잘 살게 해 주겠다는 제안을 했다면?
마음이 혹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악마 토끼풀을 판매한 죄가 사라지는 건 아니지만.
“유혹에 빠져 잘못된 자들의 손을 잡았군.”
“흥.”
랄프는 무언가 할 말이 많은 표정이었지만,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상대가 칼자루를 쥐고 있어 함부로 행동할 수 없었던 것이다.
사울은 지금껏 말이 없던 제나엘에게 물었다.
“너는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없는가?”
“…….”
“아는 것을 모두 말해라. 네가 아는 게 있으면 모두 털어놓아야 우리 일이 성공할 가능성이 높아지고, 그래야 너희들에게 한 약속을 지킬 수 있다.”
제나엘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가 무슨 할 말이 있겠소.”
“아무것도 모르는 건가?”
“난 그저 유혹에 넘어가 잘못된 선택을 했을 뿐이오.”
“그건 알고 있다. 그리고 잘못된 선택을 되돌릴 기회가 생겼지. 그러니 최선을 다해 우릴 도와야 하지 않을까?”
“…….”
제나엘은 눈을 돌렸다.
무언가 숨기는 게 있는 태도였다.
그때껏 보고 있던 카스텔이 속삭였다.
“조용히 손을 써 볼까요?”
카스텔의 마법이라면 어지간한 상대의 입을 열게 할 수 있다.
다만 과도하게 힘을 쓰면 몸과 마음에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을 수 있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
“저 자를 다치지 않게 하면서 입을 열게 할 수 있겠어요?”
“가능할 것 같습니다.”
“그럼 그렇게 해요. 다칠 것 같으면 즉시 멈추도록 하고요.”
상대가 선을 넘었다면, 이쪽에서도 선을 넘는 게 합리적일 수 있다.
하지만 제나엘은 아무래도 선을 넘은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그렇다면 이쪽에서도 최소한 지킬 건 지켜야 한다.
최소한 사울은 그렇게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