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두목.”
제온이 킬리안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말했다.
“무슨 일이지?”
“조직에서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그런가? 알았다. 들어보지.”
제대로 된 의자나 탁자도 없는 아지트라 보고를 하는 쪽도, 받는 쪽도 바닥에 앉아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먼저 다르센 왕국 쪽입니다.”
“그쪽은 엉망진창이겠지.”
“그렇습니다. 홉킨스 가문 영지 쪽은 말할 것도 없고, 왕국 전체의 조직이 큰 타격을 입었습니다. 두목과의 관계를 끊고 독립하려는 놈, 왕국에 빌붙어 목숨을 건지려는 놈, 아직 두목에게 충성하는 자들까지 다투며 곳곳에서 난리가 벌어지고 있다고 합니다.”
“사업은?”
“상황이 상황이라 사실상 멈춘 상태입니다. 몇몇 지역에서만 작은 규모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어느 정도 예상한 소식이라 킬리안의 분노는 크지 않았다.
킬리안은 당분간은 제대로 팔기 어렵게 된 악마 토끼풀을 조금 꺼내 씹으며 물었다.
“가멜다 왕국 쪽 조직은?”
“다르센 왕국 쪽보다는 낫지만 역시 타격을 받았습니다. 공식적으로 두목은 ‘살아 있지만 행방불명’인 상태이니까요. 눈치껏 짐작하거나 언질을 들은 녀석도 몇 있지만, 분위기를 파악하지 못하고 제멋대로 구는 녀석이 몇 있습니다.”
보고를 들은 킬리안은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
“제멋대로 구는 놈들은 당분간 내버려 둬라.”
“딴 마음을 품은 놈들이 모두 본색을 드러낼 때까지 기다리시겠습니까?”
“그렇다. 조금만 더 내가 숨죽이고 있으면 딴 맘을 품은 놈들이 다 고개를 쳐 들 것이다. 이참에 내가 아예 은퇴를 생각하고 있다는 소문도 퍼트려라.”
“은퇴요? 그랬다가는 딴 맘을 먹을 마음이 없던 자까지도 딴 맘을 먹을 수도 있습니다.”
“그 정도 테스트도 통과하지 않는 녀석은 살려 둘 필요가 없지. 내 말대로 해라. 이번 기회에 조직 전체를 한번 정리할 생각이다.”
위기는 기회가 될 수 있다고 했다.
사울 왕자에게 한 방 먹고 숨어 지내는 꼴이 되었지만, 킬리안의 말처럼 지금이야 말로 믿을 수 있는 놈과 그렇지 않은 놈을 구별할 기회다.
제온도 킬리안의 뜻을 반대하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킬리안이 다른 질문을 꺼냈다.
“어둠의 친구들은 요즘 어떻게 지내고 있나?”
“우리가 이곳에 온 이후로도 몇 번 접촉을 해 보았습니다. 일단 우리 사정이 사정이니 서로 조심하자고 이야기를 해 둔 상태입니다.”
“그렇군. 그쪽에서 따로 이야기가 나온 건 없나?”
“지난 몇 년 동안 했던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뭔가 하는 것 같기는 한데 뚜렷하지는 않습니다.”
킬리안은 ‘어둠의 친구들’에 대해 떠올려 보았다.
서로 손을 잡고 있으며, 상호간에 도움을 주고받았으니 친구나 동맹이라 부를 수는 있다.
하지만 정작 그들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었다.
처음 그들과 연줄이 닿아 조직 차원에서 손을 잡게 만든 칼립소 마저도 어둠의 친구들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지 못하는 눈치였다.
빛이 아닌 어둠을 따르는 자들.
빛의 교단에 적발되면 즉각 이단자 취급을 받고 사형장에 끌려나갈 자들.
하얀 까마귀와 손잡고 무언가를 꾸미는 자들.
킬리안마저도 어둠의 친구에 대해 아는 건 이 정도가 전부였다.
그래서 그들과 손을 잡을지언정, 완전히 믿지는 않았다.
“중립 지대 쪽은 어떤가?”
“그 어떤 곳보다 피해가 큽니다. 토벌군에 적발되어 대부분이 죽거나 사로잡혔고, 사로잡힌 녀석들이 토해 낸 정보로 많은 재배지가 박살났습니다.”
“사울 왕자 놈은 왕국 수도로 돌아갔다고 하지 않나?”
“네. 하지만 홉킨스 가문의 영주군이 소규모로 토벌 작전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빌어먹을 영주놈.”
악마 토끼풀은 과도하게 쓰면 마약이 되고, 적절하게 쓰면 가장 효과적인 마취제와 진통제가 된다.
다르센 왕국도 가멜다 왕국도 악마 토끼풀을 완전히 금지하지 못하는 이유였다.
대신 나라의 허락과 감독 없이 악마 토끼풀을 재배하면 이유 불문 사형으로 다스렸다.
때문에 하얀 까마귀의 악마 토끼풀 재배지의 절반 이상은 중립 지대에 위치했다.
사울 왕자가 나타나기 전에는 중립 지대에서 재배하여 생산한 물건을 율렌 섬 전역에 퍼뜨리는 구조로 사업이 잘 돌아갔다.
그런데 사울 왕자가 조직 자체에 큰 타격을 입힌 것은 물론, 재배지까지 절반 이상 망쳐 놓았다.
사울을 처리하지 않으면 앞으로의 사업에 두고두고 문제가 생길 게 분명했다.
“사울 왕자…….”
사울의 이름을 중얼거리는 킬리안의 눈이 번득였다.
감당하기 어려운 살기에 곁에 있던 제온마저 눈을 돌릴 정도였다.
그 때 은신처 밖에서 기척이 들려왔다.
“두목. 부두목이 돌아왔습니다.”
하얀 까마귀에서 부두목이라 불리는 건 제온과 칼립소 두 명뿐이다.
“들어오라 해라.”
“네.”
돌아온 건 역시 칼립소였다.
고생을 많이 한 듯 꽤나 더러워진 차림이었지만, 피 냄새가 나진 않았다.
누굴 죽이거나 손봐 주고 오는 길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두목. 다녀왔어요.”
“알아봤나?”
“네. 조직을 총 동원해서 사울 왕자에 대한 소식을 알아봤는데, 두 가지 쓸 만한 정보가 있었어요.”
“말해 봐라.”
“하나는 카스텔 이야기에요. 가르시아 남매가 그녀에게 흥미를 가진 모양이더군요.”
킬리안도, 제온도 가르시아 남매에 대해서는 잘 알았다.
그 정도의 거물이 움직인다는 건 분명 놀라운 소식이었지만, 어느 정도 예상된 소식이기도 했다.
“그럴 줄 알았지. 괴물은 괴물로 상대해야 하니까.”
제온의 말에 칼립소가 물었다.
“가멜다 왕국에서 카스텔이라는 괴물을 가르시아 남매라는 괴물로 상대하려 한다는 뜻이야?”
“결국은 그렇게 되겠지. 카스텔과 당당히 맞설 수 있는 실력자는 율렌 섬을 다 뒤져도 몇 되지 않을 테니까. 두 나라의 전쟁이 재개되면 카스텔은 다시 전장에 나설 테고, 가르시아 남매도 마찬가지일 거다.”
듣고 있던 킬리안이 말했다.
“슬슬 전쟁을 다시 한 번 일으키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겠지.”
“전쟁을… 일으킨다고요?”
“그래.”
고작해야 도적 두목인 킬리안이 두 나라의 전쟁을 일으킬 수 있다는 말인가?
터무니없는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제온이나 칼립소의 생각은 달랐다.
킬리안이라면 가능할지 모른다.
“두목, 진심이십니까?”
제온의 질문에 킬리안은 미소로 답했다.
“물론.”
“우리가 양국 간에 전쟁을 일으킬 수 있을까요? 그리고 전쟁이 다시 일어나면 우리가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물론이지. 하얀 까마귀는 6년 전쟁의 잿더미에서 태어났다. 큰 상처를 입었지만, 다시금 잿더미가 만들어 진다면 그 속에서 부활할 수 있겠지.”
“…….”
“우리의 힘만으로는 쉽지 않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어둠의 친구들이 있지 않나. 그 친구들 역시 우리만큼, 어쩌면 우리 이상으로 전쟁을 바랄 거다. 세상이 혼란할수록 어둠을 꽃피우기 좋을 테니까. 그게 우리와 그 친구들이 닮은 점이고, 지금까지 손을 잡은 이유지.”
단 한 번도 ‘어둠의 친구들’과 이런 이야기를 나눈 적은 없다.
하지만 제온도, 칼립소도 킬리안의 말이 옳다고 생각했다.
서로 통하는 부분이 있어야 우정을 만들고 이어 나갈 수 있는 법.
양쪽의 이런 면모야 말로 지금까지의, 그리고 앞으로의 우정의 비결일지 모른다.
물론 수틀리면 서로의 등에 칼을 박으려 하겠지만.
“칼립소. 쓸 만한 정보가 두 가지가 있다고 했지?”
“네, 두목. 또 하나는 현재 사울 왕자의 행방이에요.”
“놈은 왕국 수도로 돌아갔다고 들었는데, 그곳을 떠났다던가?”
“맞아요. 대신전에 있는 우리 쪽 조직원이 알려왔어요. 사울 왕자가 나타났다고.”
“대신전?”
“세 번째 대신전 말이에요.”
킬리안도 세 번째 대신전에 대해서 잘 알았다.
율렌 섬에 세 번째로 만들어 진 중립 지대에 위치한 대신전.
이종족들의 성지라 불리는 ‘카멜 산’과 더불어 중립 지대에서 가장 중요한 곳이며, 하얀 까마귀에서도 신경을 쓰고 있는 곳이다.
조직원 몇 명을 대신전에 박아 둘 정도로 말이다.
“놈이 일행을 데리고 왔다던가?”
“네. 검은 마녀, 홉킨스 가문 아가씨가 함께 있었답니다. 또 놈 곁에 착 달라붙어 있다는 그 기사도요.”
하얀 까마귀에서는 사울은 물론 카스텔, 아이나, 아르멜에 대해서도 파악하고 있었다.
그 네 명이야 말로 하얀 까마귀 토벌군의 주축이며, 큰 타격을 입힌 장본인들이었으니까.
“그렇군. 대신전에 놈들이…….”
잠시 생각하던 킬리안이 말했다.
“놈이 이유 없이 대신전에 갔을 리는 없다. 놈의 일행이 함께하고 있다면 더더욱 그렇지.”
“놈이 무슨 생각일까요?”
“그건 모르겠지만 놈이 어떻게 움직일지는 짐작이 간다. 어린 주제에 나대는 걸 좋아하는 놈이니 분명 대신전 안이 아닌 밖에서 움직일 거다.”
킬리안의 말에 칼립소가 살기 어린 표정으로 물었다.
“놈이 밖에 나오길 기다려 목을 딸까요?”
“멍청한 소리.”
“네?”
“놈도 내가 살아 있는 것을 알 테지. 그런데 자기 목을 순순히 바칠 리 없다. 어쩌면 우리가 찾아오길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 나를 잡아 죽여야 끝난다는 것을 놈도 알고 있을 테니까.”
“두목. 그럼 놈을 죽이는 걸 포기하실 건가요?”
“때를 기다린다는 말이다.”
킬리안의 눈빛이 다시 한 번 번득였다.
스스로도 주체하기 어려워하는 킬리안의 살기와 광기에 익숙한 칼립소, 제온도 이번에는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킬리안은 결코 사울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를 죽이려 할 것이다.
그것도 그냥 죽이는 게 아닌, 상상도 못할 만큼 고통스럽게 죽이려 할 것이다.
킬리안 본인이 먼저 죽지 않는 한, 결코 멈추지도 않을 것이다.
‘사울이라고 했나? 애송이 녀석. 넌 정말 상대를 잘못 건드린 거야.’
칼립소와 제온이 같은 생각을 하는 사이, 킬리안이 말했다.
“사울 왕자를 쫓아라. 놈이 어디에 가서 무엇을 하는 지 철저히 감시해라. 다만 건드리지는 마라. 놈의 가죽은 내가 벗길 테니까.”
이미 사울 왕자는 킬리안에게 있어 대화가 가능한 사람이 아니었다.
죽이고 가죽을 벗겨야 할 사냥감에 불과했다.
그 사냥감이 고귀한 존재이며 건드리기조차 어렵다는 건 킬리안에게 아무런 상관없었다.
* * *
에셀 마을에서 머무른 지도 어언 일주일이 지났다.
이제 사울도 견습 신관 노릇이 몸에 익었다.
견습 신관의 일과는 절반 이상이 각종 잡일들로 채워졌다.
사울의 정체를 아는 대신전 쪽 신관들은 여전히 사울을 견습 신관 취급하는 것을, 정확히 말하자면 그에게 잡일을 시키는 것을 불편해했다.
하지만 편하게 사울을 견습 신관 취급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봐!”
아르멜의 외침에 사울은 즉각 달려가 고개를 숙였다.
“네, 신관님.”
“숲에 가서 땔감을 주워 와.”
“알겠습니다.”
아르멜의 심부름에 사울은 지체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사울 곁에 두 견습 신관이 따라붙었다.
“우리도 함께 다녀오겠습니다.”
아이나의 말에 아르멜이 허락했다.
“좋아. 함께 다녀와라.”
“그그,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아이나와 달리 어설픈 모습으로 말까지 더듬는 데이빗.
그런 데이빗을 이 연극에 끌어들인 장본인은 다름 아닌 사울이었다.
사울은 자신이 진짜 견습 신관처럼 보이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다.
연기라면 나름대로 자신 있지만, 자기도 모르는 허점은 있을 테니까.
그렇게 고민하던 중 아르멜이 ‘수많은 거짓 속에 진실을 하나 섞으면 구별이 어렵다’ 조언했다.
힌트를 얻은 사울은 곧바로 데이빗을 호출했다.
‘이제부터 날 형이라고 불러.’
‘혀, 형이라고요? 전하.’
‘전하가 아니야. 이 마을에서 나는 너보다 몇 살 많은 견습 신관일 뿐이야. 마을 사람들 앞에서는 날 형이라고 부르는 거야.’
‘저, 전하.’
‘형이라니까.’
‘…형.’
며칠에 걸쳐 연습한 덕분에 데이빗도 사울의 새로운 호칭에 익숙해졌다.
“형. 그러니까… 오늘은 어디로 갈 거야?”
쭈뼛거리며 질문하는 데이빗의 모습을 본 사울은 속으로 데이빗의 연기 점수를 매겼다.
‘이 정도면 70점 쯤 되겠군.’
이런 일을 해 본 적 없을 견습 신관 치고는 나쁘지 않은 연기력이다.
숫기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쭈뼛거리거나 말을 더듬는 게 이상하게 보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