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아이야. 힘드니?”
“…….”
아이나의 질문을 받은 오크 꼬마가 시선을 돌렸다.
어제 사울에게 퉁명스럽게 대한 바로 그 꼬마였다.
사울은 아이나에게 ‘이 꼬마는 원래 버릇이 없다’고 완곡하게 이야기하려 했다.
하지만 아이나가 오크 꼬마에게 살갑게 대하는 것을 보니 차마 그렇게 말할 수 없었다.
아이나는 오크 꼬마가 들고 있던 짐을 대신 들어 주었다.
힘 센 오크족이라 나이에 비해 무거운 짐을 들었지만, 아이나 역시 단련된 몸이라 별문제 없이 짐을 들 수 있었다.
그러자 오크 꼬마가 말했다.
“돌려줘요.”
“왜? 이 누나가 들면 안 되는 짐이니?”
“신관님에게 도움 받은 것을 알면 혼나요.”
“그렇구나. 하는 수 없네.”
아이나는 짐을 돌려주었다.
그 대신 오크 꼬마에게 무언가를 내밀었다.
“자. 힘들 텐데 이거라도 먹으렴.”
아이나가 내민 건 말린 과일이었다.
왕자인 사울이 보기에는 전혀 대단치 않은 물건이었다.
하지만 오크 꼬마는 기꺼운 표정으로 말린 과일을 받았다.
그리곤 곧바로 입에 쏙 넣으며 표정이 풀어지는 것이었다.
그 후 아이나는 표정이 풀린 오크 꼬마를 천천히 따라가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일은 힘들지 않니?”
“힘들죠.”
“역시 그렇구나. 신전에는 자주 가니?”
“종종 가요. 안 가면 엄마가 밥을 굶기거든요.”
“후훗. 그렇구나.”
자신이 끼어 들 분위기가 아니라는 걸 안 사울은 말없이 아이나 옆에서 걸음을 옮겼다.
아이나는 오크 꼬마와 함께 목적지까지 함께 걸어가 주었다.
말린 과일 몇 개와 함께 걷기.
간단하다면 정말 간단하고, 하찮아 보이기까지 했지만 그것만으로도 둘의 관계가 진전된 느낌이었다.
그렇게 아이나와 오크 꼬마가 목적지에 도착했다.
다른 마을 집처럼 허름한 통나무집이었다.
창문으로 그 광경을 본 것인지 통나무집에서 오크 부부가 뛰쳐나왔다.
오크 부부는 인간보다 크고 장대한 체구를 지니고 있어 위압적이었지만, 행동은 위압적이지 않았다.
“아니, 신관님이 무슨 일로.”
“우리 아들이 잘못이라도 했습니까?”
어쩔 줄 몰라 하는 오크 부부에게 아이나는 웃으며 말했다.
“아니에요. 그저 이 아이와 만나 친해진 것뿐이랍니다. 그렇지?”
오크 꼬마는 사울에게 보여준 버릇없는 태도가 무색할 만큼 친근한 표정으로 말했다.
“네, 누나.”
“후훗.”
그러면서 아이나는 오크 부부에게 말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잠시 집에 들어가도 될까요?”
“실례라니, 무슨 말씀을. 들어오십시오.”
“고마워요. 그리고 말씀 낮추세요. 저나 이 아이나 아직 견습 신관에 불과하니.”
‘이 아이’라 불린 사울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두 견습 신관이 위험하지 않다고 여겼는지 오크 부부는 아이나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알겠습니다. 들어오십시오.”
사울과 아이나는 허름한 집에 들어가 오크 부부와 마주앉았다.
역시 이야기를 이끌어 나가는 건 아이나였다.
“저나 이 친구나 견습 신관이 된 지는 얼마 되지 않았어요. 혹시나 예에 어긋난 일을 저지르더라도 자애롭게 보아주셨으면 감사하겠어요.”
“무슨 말씀을. 신을 모시는 분들이 이런 초라한 집에 찾아 와 준 것만으로도 영광이오.”
확실히 집이 초라하기는 했다.
겉은 초라해도 안은 멀쩡한 집도 있지만, 이 집은 안팎이 모두 초라했다.
지금 사울이 앉은 의자도 삐거덕거렸고, 체구가 큰 오크 부부가 앉은 의자에서도 삐거덕 소리가 났다.
의자가 부서지지 않고 무사한 것부터가 신기할 정도였다.
집 안의 허름한 살림살이나 찬장에 놓인 말라붙은 빵도 하나같이 가난한 삶의 단면을 보여 주고 있었다.
“그래, 신관님들은 무슨 일로 이런 마을까지 오셨습니까?”
“많은 것을 배우기 위해서 왔어요.”
“배움이라고요?”
“네. 신은 저희 같은 인간은 물론 모든 종족과 함께하십니다. 여러분 모두의 삶은 소중하며 그러한 삶 가운데서 많은 것을 배우려 합니다.”
어째 아이나는 인간 상대할 때보다 이종족 상대할 때 더 말이 청산유수로 나오는 것 같았다.
사울은 인간이 아닌 이종족 상대로 저렇게까지 할 자신은 없었는데 말이다.
‘아이나와 함께 오기를 잘 했군.’
사울은 속으로 생각하며 조심스레 주변을 관찰하고, 또 아이나와 오크 부부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아이나는 제법 능숙하게 이야기를 이끌어 나갔다.
적절한 때를 노려 작은 선물을 내놓기까지 했다.
조금 전 오크 꼬마에게 준 것과 같은 선물이었다.
“드시겠어요?”
“이건… 분홍 사과 아닙니까?”
분홍 사과.
조금 전 오크 꼬마에게 먹인 과일이자 지금 내놓은 과일의 정체였다.
사울을 비롯한 인간들은 잘 먹지 않는 과일이다.
하지만 사울은 과거 책에서 읽은 구절을 떠올렸다.
‘분홍 사과 - 인간은 잘 먹지 않지만 대부분의 오크는 좋아하는 과일이다.’
사울은 분홍 사과든 뭐든 ‘인간이 잘 먹지 않는 과일’로 오크와 거리를 좁힐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런데 아이나는 그런 생각을 하고, 행동에 옮겼다.
꼬마는 몰라도 어른에게도 이런 선물이 잘 통할 줄이야…….
“이런 걸 다.”
“괜찮겠습니까?”
“부담 없이 드세요.”
“감사합니다. 저도 가족들도 분홍 사과를 좋아하지만 이 주변에서는 잘 나지 않아서 말이지요. 가끔 오는 행상인이 가져오지만 가격이 비싸서 사 먹기도 어렵고… 아무튼 잘 먹겠습니다.”
오크 남편과 부인 모두 말린 분홍 사과를 맛있게 먹었다.
그 광경을 본 사울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저런 모습은 배울 필요가 있겠지.’
이종족과 가까이 지내는 홉킨스 가문의 영애다운 모습이랄까.
사울은 이야기를 아이나에게 맡기기로 했다.
그리곤 조금이라도 많은 정보를 얻기 위해 촉각을 곤두세웠다.
아이나도 그런 사울에게 호응하듯 본론을 꺼냈다.
“혹시 마을에서 신앙의 문제 같은 것은 없나요?”
“신앙의 문제라고요?”
“네. 저나 이 아이나 아직 미숙하고 많이 배워야 하지요. 그만큼 혹시나 신앙의 문제나 혹은 마을 사람들이 어려워하는 일이 있다면 알고 싶어요. 그리고 도와드리고 싶고요.”
“으음…….”
오크 부부 모두 쉽사리 입을 열지 않았다.
할 말은 있지만 하기 어려워하는 태도였다.
답답한 가운데 사울이 아이나에게 속삭였다.
“서두를 필요는 없겠어요.”
“그렇지요? 제 생각도 같아요.”
짧게 의논을 끝낸 아이나가 오크들에게 말했다.
“제가 주제넘은 이야기를 한 것 같네요. 죄송해요.”
“아, 아닙니다. 주제넘다니요. 신관님이 관심을 가져 주신 것만으로도 고마운 일이지요. 하지만 그게…….”
망설이던 오크 남편이 말했다.
“저도 잘은 모릅니다. 그런데 요즘 마을에 이상한 짓을 하는 녀석들이 있다더군요.”
“이상한 짓이라고요?”
“네. 뭐라더라… 무슨 악마풀이라던가. 그걸 먹는 녀석들이 있다던데.”
듣고 있던 사울은 조금 놀랐다.
율렌 섬에 자생하는 식물 중 이름에 ‘악마풀’이 들어가는 건 악마 토끼풀밖에 없다.
아이나도 사울과 비슷한 생각을 한 모양이었다.
“악마풀이라고요?”
“그렇습니다. 그걸 먹으면 뭔가 이상해진다던가. 저도 말만 들었습니다.”
오크 부부가 정말 모르는 일이든, 알면서도 숨기는 것이든 이 정도만으로도 들을 만큼 들은 것 같다.
사울은 물론 아이나도 분위기를 눈치채고 화제를 돌렸다.
괜스레 꼬치꼬치 캐물으면 수상한 녀석들로 보일 수 있으니까.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이후 아이나는 몇 마디를 더 나눈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쪼록 이 집, 나아가 이 마을에 신의 은총이 있기를 바랍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신관님.”
그렇게 사울과 아이나는 오크의 집을 나섰다.
집 밖에 나가니 멀지않은 곳에 조용히 서 있는 카스텔의 모습이 보였다.
혹여나 불미스러운 사태가 벌어졌다면 번개처럼 달려왔겠지.
일단 사울과 아이나는 자신들이 묵고 있던 집으로 돌아갔다.
확실히 누군가의 눈이 없는 곳에서만 제대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때마침 아르멜도 집 근처에 있었기에 자연스레 주요 일행 모두가 모일 수 있었다.
“아이나 덕을 많이 봤어요.”
사울의 말에 아이나는 작게 고개를 숙이곤 자신이 들은 이야기를 모두에게 했다.
다 들은 아르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확실히 악마풀이라면 악마 토끼풀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와 비슷한 이름의 식물은 없으니까요. 이런 폐쇄된 마을에서 이유 없는 소문이 날리는 없으니, 누군가 악마 토끼풀과 관련이 있다고 봐야겠지요.”
그러자 사울이 물었다.
“네 쪽은 어때? 이 마을의 유력자들에게서 새로 알아낸 정보가 있어?”
“아쉽게도 없습니다. 에셀 마을에 정말 악마 토끼풀, 나아가 어둠의 세력이나 하얀 까마귀가 있다고 해도 유력자가 아닌 일반 주민들을 상대로 접촉한 게 아닌가 싶을 정도입니다.”
“확실하지는 않다면 가능성의 문제겠지. 신관들은 어때?”
“그 사람들은 어둠의 세력을 찾는 데 주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흔적조차 못 찾았다고 합니다.”
“그렇단 말이지.”
에셀 마을에 정말 아무것도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사울은 조금 전 오크 부부와의 대화가 신경 쓰였다.
외부와 접촉이 많은 큰 마을이나 도시라면 악마 토끼풀과 관련된 헛소문이 나돌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작은 마을에서 근거 없이 악마 토끼풀에 대한 헛소문이 나돌까?
가능성이 없진 않겠지만, 높을 것 같지도 않다.
‘헛걸음을 한 것 같지는 않군.’
이 작은 마을에서 무언가를 찾은 것 같고, 무언가가 일어날 것 같다.
사울은 자신의 감을 믿었다.
* * *
소라드 지방.
가멜다 왕국, 중립 지대, 그리고 다르센 왕국의 국경이 만나는 곳.
양국의 국경이 맞닿아 있는 특징 때문에 소라드 지방은 전쟁만 나면 가장 먼저 전장이 되고는 했다.
과거 6년 전쟁 때도 소라드 지방이/첫 전장이 되었고, 가장 많은 피해를 입었다.
다르센 왕국의 우위로 진행되던 6년 전쟁은 가르시아 남매의 등장으로 비등해졌고 결국 양 국이 동등한 위치에서 휴전하는 것으로 마무리 되었다.
잃어버린 소라드 지방을 수복한 가멜다 왕국은 파괴된 마을과 도시를 어느 정도 재건하며 과거의 비극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소라드 지방 전체에 철통같은 경계 태세를 갖출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계획은 어디까지나 계획일 뿐.
현실은 계획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분명 이론상으로는 소라드 지방 전역에 철통같은 경계 태세를 갖춘 상태다.
덕분에 다르센 왕국의 첩자는 물론 수상한 자들은 눈에 띄는 족족 감옥에 들어갔다.
하지만 아무리 철통같은 경계 태세를 갖추어도 모든 지역을 완벽하게 감시할 수는 없었다.
“으윽.”
한 남자가 신음과 함께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그런 남자를 무심한 눈으로 내려다보는 건 날카로운 인상의 마른 남자.
킬리안 비셔스였다.
‘제거 목표’를 없앤 킬리안은 곁에 있던 제온에게 말했다.
“이자가 틀림없지?”
“네, 두목. 이걸로 계약 완료입니다.”
킬리안은 제온이 말한 계약 내용을 떠올렸다.
‘소라드 지방의 관리 세 명을 암살하면 당분간 안심하고 몸을 숨기도록 해 주겠다’
말하자면 흔한 정치 싸움이었다.
정치 싸움 끝에 한쪽에서 반대파 몇을 없애려 했고, 킬리안이 개입했다.
킬리안에게 암살을 의뢰한 건 예전부터 연줄이 있던 관리였다.
율렌 섬 최악의 범죄자에게 암살을 의뢰할 만큼 부패한 녀석이지만 어느 정도는 믿을 만한 녀석이었다.
신뢰나 의리가 있는 건 아니지만, 서로가 서로의 약점을 쥐고 있어 함부로 배신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걸로 그쪽에서 받은 의뢰는 종료되었다.
목격자나 방해꾼을 모조리 없앴으니 뒤처리만 잘하면 킬리안이나 의뢰인의 정체가 드러날 일 없을 것이다.
할 일을 마친 킬리안과 제온은 은신처로 돌아왔다.
은신처는 버려진 하수도를 개조하여 만들었다.
빈말로도 쾌적하다고는 할 수 없는 환경이었지만, 몸을 숨기기에는 최적의 장소였다.
은신처에 돌아온 킬리안은 마법 램프에 의지해 주변을 둘러보았다.
두목인 본인도 대충 만든 침낭에서 잠을 자고, 부하들은 그나마도 못 갖춘 자들이 많다.
그 외의 환경 역시 감옥보다 크게 나을 게 없을 만큼 초라한 곳이다.
중립 지대에서 요새를 만들고 작은 왕국의 왕처럼 살아온 과거를 떠올리면 처량한 기분마저 들 정도였다.
하지만 킬리안은 과거의 영광에 사로잡혀 처량한 마음으로 허송세월하지 않았다.
그의 눈빛은 과거나 지금이나 여전히 날카로웠다.
아니, 이곳에 숨어 지내면서 더더욱 날카로워졌다.
킬리안의 눈은 자신을 이 꼴로 만든 사울 왕자에 대한 분노로 언제나 이글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