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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했더니 무능한 적국 왕자였다-70화 (70/232)

70화

사울의 질문에 아이나는 왠지 아련한 눈빛으로 대답했다.

“어렸을 때.”

“어렸을 때?”

“6년 전쟁이 끝나고도 몇 년 동안은 제대로 집에서 살지 못했거든.”

더 이상의 설명은 필요 없었다.

홉킨스 가문은 6년 전쟁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

영지 절반이 가멜다 왕국에 점령당하고, 아이나의 어머니, 곧 영주 부인도 전쟁에 휘말려 사망했다.

6년 전쟁 당시는 물론, 끝난 뒤에도 어린이였을 아이나 역시 고생을 많이 한 모양이었다.

“힘들었겠구나.”

“뭐 괜찮아. 다 지난 일이니까.”

“지난 일이라.”

지난 일을 잊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사울처럼 잊지 않으려 노력하는 사람도 있다.

이왕 잊지 않기로 했다면, 끝까지 갈 뿐이다.

사울은 더 말하지 않고 아르멜의 심부름을 따랐다.

아이나도 따로 할 일이 있었는지 금방 떠나갔다.

대신 혹시 모를 습격에 대비하여 카스텔이 사울을 따라 움직였다.

그것만으로도 신변 안전은 어느 정도 보장이 되는 셈이지만 사울 역시 방심하지 않았다.

이런 마을은 습격당하기 딱 좋은 곳이니까.

사울은 빈 물통을 들고 물이 있는 곳을 찾았다.

마을 안에 강이나 호수 같은 것은 없었다.

하지만 이 정도 규모의 마을이라면 우물 같은 것이라도 있을 터.

사울은 마침 지나가는 주민을 불렀다.

“거기 꼬마야. 물어볼 게 있는데.”

사울의 부름에 마을 꼬마가 몸을 돌렸다.

꼬마는 녹색 피부에 인간과 돼지를 반씩 닮은 오크족이었다.

인간인 사울의 눈에는 지극히 못생겼지만, 오크의 눈으로 보면 잘생긴 소년일 수도 있다.

오크 꼬마에게는 한 가지 눈에 띄는 점이 있었다.

한쪽 눈에 안대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안대 바깥까지 길게 이어진 흉터 자국을 볼 때, 얼굴에 큰 상처를 입어 한 눈을 잃은 모양이었다.

오크 꼬마는 사울을 빤히 바라보다 물었다.

“물어볼 게 뭐예요?”

“물을 좀 썼으면 하는데 우물이 어디 있니?”

오크 꼬마는 말 대신 손가락질을 했다.

손가락이 가리킨 끝에 작은 구조물이 보였다.

무심결에 마법으로 구조물을 확인하려던 사울이었지만, 멈추었다.

신관이라고 마법을 쓰지 말라는 법은 없지만 흔한 일이 아니니까.

지금은 자연스럽게 견습 신관처럼 보일 필요가 있다.

“저기가 우물이니?”

끄덕.

“그렇구나. 알았다.”

그 때 한 주민이 사울과 오크 꼬마에게 다가왔다.

인간 남자였다.

남자는 오크 꼬마에게 다가가 머리를 쥐어박았다.

“무슨 짓이냐? 신관 분들께는 예의를 갖추라고 했잖아!”

오크 꼬마는 대답도 하지 않고 입을 삐죽 내밀었다.

남자는 그런 오크 꼬마를 달랬다.

“착하지? 배운 대로 하렴.”

결국 오크 꼬마가 다시 사울에게 말했다.

“저기 우물이 있어요.”

분위기를 파악한 사울도 미소를 지었다.

“고맙다. 꼬마야.”

오크 꼬마는 쀼루퉁한 얼굴로 가버렸다.

남자가 사울에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별말씀을요, 저는 괜찮습니다.”

이 남자는 아마 피난민 출신일 것이다.

피난민이 사울의 정체를 알 리 없으니, 누구에게나 존대하는 지극히 예의 바른 사람이거나 사울이 견습 신관이라는 이유로 예의를 갖추는 것일 테다.

사울은 후자라 생각했고, 그 생각이 맞았다.

“신관 분들께는 항상 예의를 갖추라고 했는데 저 꼬맹이처럼 뭘 모르는 녀석이 있어서 말입니다.”

“괜찮습니다. 전 한낱 견습 신관인걸요.”

“무슨 말씀을. 모두들 신을 모시는 분들 아닙니까. 그리고 대신전에서 오셨고요. 아무쪼록 편히 지내십시오.”

“감사합니다.”

인사와 함께 사울은 물통을 끌고 가려 했다.

그러자 남자가 다시 나섰다.

“제가 길어드리지요.”

“괜찮습니다.”

“아니, 제가 길어드리겠습니다.”

다시 태어난 뒤 막일이라고는 해 본 적 없던 사울이다.

잘 해낼 자신은 없었기에 사울은 못 이긴 척 남자에게 일을 맡겼다.

“어서 오십시오. 신관님.”

“반갑습니다.”

남자뿐만이 아니라 다른 주민들도 사울을 공손히 대했다.

어린 아이들은 소 닭 보듯 지나가기도 했지만 어른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사울에게 예를 갖추었다.

종족을 불문하고 알 걸 아는 자들은 에셀 마을과 대신전의 관계도 잘 알기에 견습 신관에 불과한 사울에게도 깍듯이 대하는 것이다.

고작 견습 신관에게 이 정도 대우를 해 주는 곳은 에셀 마을밖에 없지 않을까.

에셀 마을 사람들이 유독 예의 바르거나 신앙심이 깊어서 이런 대우를 해 주는 것은 아닐 것이다.

‘대신전이 없으면 유지되기 어려운 마을이라 신관에게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거겠지.’

사울은 에셀 마을이 처량한 곳이라고 생각했다.

전쟁이 두려워서 조국을 버리고 떠난 피난민들이 이종족들과 함께 세운 마을이라 하지 않는가.

하지만 난세에서 자그마한 마을 하나의 힘만으로는 살아남을 수는 없다.

살아남기 위해 대신전의 힘을 빌렸고, 그 때문에 견습 신관에게도 눈치를 보는 것이 아니겠는가.

사울은 이들을 동정하지 않았다.

다르센 왕국과 가멜다 왕국의 전쟁은 분명 참혹했지만 그렇다고 조국을 버리고 도망치는 건 비겁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거나 그를 이유로 피난민들을 박해할 생각은 없었다.

사람 생각은 다 다른 법이고, 또 이들은 자신에게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았다.

이용할 만큼 이용하고 그 외에는 건드리지 않을 생각이었다.

“자, 다 되었습니다.”

“고마워요.”

물통에 물을 가득 채운 남자가 말했다.

“이건 어디로 가져가면 될까요?”

“괜찮습니다. 이젠 제가…….”

“무슨 말씀을. 끝까지 도와드리는 게 도리지요.”

“감사합니다. 그럼 저기 마차까지 부탁드립니다.”

왕자의 몸으로 도움을 받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지금처럼 도움을 받았다고 감사를 표하는 건 새로운 기분이었다.

주민의 도움으로 사울은 땀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커다란 물통에 물을 채워 마차에 실을 수 있었다.

그리곤 마차 주변에서 마을을 둘러보고 있자니 아르멜이 다가왔다.

“잠시 들어가자.”

“네.”

아르멜과 사울이 마차 안에 들어가고, 문이 닫히기 무섭게 아르멜의 말투가 바뀌었다.

“무례를 사죄드립니다. 전하.”

“뭘. 어차피 남들 앞에서는 연기하고 있는 신분에 맞게 행동하기로 했으니까. 그보다 뭐라도 알아낸 게 있어?”

“마을 촌장을 비롯한 유력자 몇과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습니다. 일단 그들은 어둠의 세력이나 하얀 까마귀와 무관하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촌장이나 유력자는 어떤 자들이지?”

“촌장은 과거 피난민들의 우두머리로서, 이 마을을 처음 세울 때부터 우두머리였다고 합니다. 유력자는 다른 종족의 우두머리와 신관 사라, 그리고 대족장 세력에 속한 자 등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대족장 세네카?”

“네, 전하.”

대족장 세네카.

율렌 섬에 거주하는 엘프들의 우두머리이자 그 외 모든 이종족의 우두머리라 해도 과언이 아닌 거물.

율렌 섬 모든 이종족이 그의 영향력 아래 있기에 왕국의 귀족들이나 심지어 국왕도 그를 무시하지 못했다.

“대족장 세네카는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고 있지?”

“그렇습니다.”

“실제로는 어떤 자야?”

“왕국 정보부에서는 이종족을 감시하고 있으며, 세네카 역시 주 감시 대상입니다.”

“그래서?”

“왕국 정보부는 그를 들리는 평판 이상의 인물이라고 그를 평가하고 있습니다.”

사울은 세네카에 대한 평판을 떠올려 보았다.

그는 백 년 넘게 엘프는 물론 다른 이종족의 우두머리로 군림해 왔다.

과거 이종족이 인간들의 노예이던 시절에는 독립 전쟁을 이끄는 투사로 싸웠고, 이종족이 노예에서 해방된 뒤에는 그들을 다스리고 제어하는 정치적 우두머리로서 활동해 왔다.

지금은 다르센 왕국도 가멜다 왕국도 이종족을 노예로 부린 과거를 부끄러워했고, 세네카가 과거 독립 전쟁에서 왕국을 상대로 싸웠다고 그를 적대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적국을 물리치기 위한 히든카드로써 그를 고용하거나 손 잡기를 원했다.

하지만 세네카는 백 년 넘게 이러한 입장을 유지했다.

‘저와 제가 이끄는 종족들은 인간의 전쟁에 개입하지 않을 것입니다. 부디 전쟁이 하루빨리 마무리되어 양국 사이에 평화가 되돌아오기를 바랍니다.’

세네카와 그가 이끄는 이종족들이 중립을 고수한 지도 백 년이 넘었다.

현재 세네카가 이끄는 이종족들은 왕실이나 빛의 교단, 혹은 홉킨스 가문 같은 유력자들과 약간의 교류를 나누는 것을 제외하면 자신들의 세력을 유지하며 살았다.

그것은 사울 전생에도, 현생에도 다를 게 없었다.

“대족장 세네카에 속한 유력자라는 건 누구야?”

“드워프 대장장이입니다. 이 마을의 유일한 대장장이이자 세네카의 부하이기도 하더군요.”

“드워프 대장장이라면 실력 하나는 확실하겠군.”

“말씀대로입니다.”

이종족은 종족별 특징이 뚜렷하다.

먼저 엘프는 아름다운 외모를 가졌다. 그리고 가벼운 몸놀림과 자연과 친한 특성 덕분에 활을 잘 쏘는 마법사나 자연과 친한 마법사가 많았다.

다음으로 드워프는 땅딸막한 체구와 남성 드워프는 수염이 많다는 특징이 있었고 손재주가 뛰어나 장인들이 많았다.

마지막으로 오크는 돼지를 닮은 외모에 덩치가 크고 힘이 강해 뛰어난 전사를 많이 배출하였다.

이러한 평가가 인간 기준에서 본 편견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대부분의 이종족이 이러한 특징을 지닌 건 사실이었다.

“가능하면 그 드워프 대장장이와 한 번 만나 보고 싶은데.”

“전하의 정체를 밝히실 겁니까?”

“아니. 아직은 그 드워프도 믿기 어렵고, 세네카도 완전히 믿기는 어려우니.”

“그럼 만남을 미루시는 게 좋겠습니다.”

남의 눈에 띄지 않기 위해 견습 신관을 가장한 사울이다.

정체가 드러나면 이번 일은 수포로 돌아간다.

납득한 사울은 생각을 바꿨다.

“그럼 나는 지금 이 몸으로 할 수 있는 것을 찾아보지. 조사는 ‘정식 신관’님이 맡아 줘.”

“네, 전하.”

이야기를 마치고 두 사람은 마차 밖으로 나갔다.

마차 밖으로 나오기 무섭게 아르멜의 말투가 달라졌다.

“알겠느냐? 다음부터 조심해라. 명색이 신을 모시는 몸으로서 언제나 몸가짐을 바르게 해야 하는 법이다!”

마차 안에서 혼내기라도 한 말투에 사울은 즉각 반응했다.

“네, 신관님.”

* * *

마을에 하나뿐인 신전 근처에 쓰지 않는 집 몇 채가 있었다.

주로 교단이나 대족장 세네카 쪽에서 찾아온 손님들을 위해 만든 곳이었다.

이 가난한 마을에서 따로 중요한 손님들을 위한 집을 만들 만큼 교단이나 세네카 쪽 세력을 향한 의존도가 높은 것이다.

덕분에 사울 일행 전원이 노숙이나 남의 집에 신세를 지지 않고 잘 수 있었다.

보통 상황에서는 사울에게 최대한의 편의를 봐주는 게 당연했지만, 이번에는 사울 쪽에서 거부했다.

“마을 사람들이 보고 이상하게 생각할지 모르니 여럿이 모여 자는 것으로 하지요.”

사울과 아르멜, 그리고 몇몇 남자들이 한 집에서, 여자들은 따로 다른 집에서 자게 되었다.

“혹시나 전하께서 공격이라도 받는다면 어떡합니까?”

한 신관의 질문에 카스텔이 대답했다.

“내가 따로 머무르며 집 밖에서 전하를 지키겠습니다.”

다르센 왕국 사람들은 물론 대신전에서 온 사람들도 카스텔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모두들 그 정도면 왕자 신변 대책으로 충분하다고 납득했다.

“나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신변에 신경 쓰도록 해요. 우리가 조사하는 어둠의 세력이나 하얀 까마귀가 우리의 정체나 목적을 알면 우릴 베어서라도 멈추려 할 테니까요.”

사울의 말에 모두들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들이 위험할 수 있다는 것 정도는 이해를 하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숙소까지 정한 사울 일행은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마을에서 높은 자들을 상대하는 건 정식 신관을 가장한 아르멜이 맡았다.

사울과 아이나는 견습 신관을 가장한 채 마을을 다니며 정보를 모았다.

이젠 아이나도 견습 신관 노릇에 익숙해진 듯 행동이 꽤 자연스러웠다.

마을 사람들과 접촉하며 정보를 모으는 건 무작정 적과 싸우는 것과는 또 달랐다.

윽박지르거나 심문을 하는 게 아니라 먼저 마을 사람들과 친해져야 했다.

사울에게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전생 때도 어린 나이에 군에 입대해 전장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고, 다시 태어난 뒤에는 왕자의 몸으로 왕궁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이런 가난한 마을 사람들에게 다가가고 어울리는 건 여러모로 익숙하지 않았다.

다행히 아이나는 사울보다 이런 일에 익숙했다.

신분을 숨기고 있었기에 ‘이종족과 친한 홉킨스 가문’을 내세우지는 못했음에도 상당한 친화력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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