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했더니 무능한 적국 왕자였다-63화 (63/232)

63화

“오랜만이군. 카스텔.”

“네, 전하.”

카스텔은 뒤늦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카스텔이 아닌 다른 평민이 왕자, 왕비, 공작 앞에서 이런 태도를 보였다면 난리가 났을 것이다.

그렇지만 세 거물 중 누구도 카스텔을 탓하지 않았다.

원래 이런 사람인 것을 알거니와, 카스텔의 배후에 국왕이 있다는 걸 잘 알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카스텔이나 아이나가 혹여나 실수를 할까 사울은 자리를 피하기로 했다.

“형님.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그래, 즐기다 가라.”

사울은 두 사람을 데리고 거물들의 곁을 빠져나왔다.

거물들의 시선에서 벗어난 아이나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휴. 감사합니다. 전하.”

“별말씀을. 많이 긴장했나 봐요.”

“네. 이런 자리에 참석한 것도 처음이라…….”

“너무 긴장할 것 없어요. 선생님처럼 할 수는 없겠지만 마음을 편히 먹어요.”

“카스텔 씨처럼…….”

아이나는 말끝을 흐렸다.

카스텔처럼 행동한다는 건 가문의 망신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차마 입 밖에 낼 수 없었다.

사울은 웃으면서도 두 여성을 잘 살펴보아야겠다고 다짐했다.

이런 자리가 낯선 사람들이니, 익숙한 자신이 책임져야 했다.

다행히 두 사람 모두 눈에 띄는 존재 취급 받으며 사람들의 시선을 받을지언정, 문제를 일으키진 않았다.

“검은 마녀가 왔군. 그런데 옆의 저 소녀는 누구지?”

“홉킨스 가문의 영애래.”

“홉킨스 가문? 춤이라도 한 번 출까 했더니…….”

아이나와 카스텔에게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은 적지 않았지만, 댄스 신청을 하는 남자는 없었다.

아이나가 왕실과 복잡한 관계인 홉킨스 가문의 영애라는 게 문제였다.

카스텔은 애초에 춤과는 아무런 인연이 없는 사람이었고.

덕분에 두 사람은 많은 관심을 받으면서도 흔한 댄스 신청 한 번 받지 못했다.

하지만 사울은 달랐다.

“전하. 저와 한 곡 추시겠습니까?”

보통 이런 자리에서 춤은 남자가 신청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사울은 두 사람을 챙기는 것만으로도 바빴기에 여자 쪽에서 먼저 춤을 요청해 온 것이다.

춤을 신청해 온 귀족 영애들은 하나같이 가문이나 지위가 어중간한 사람들이다.

최근 사울이 두각을 나타내면서 연줄을 만들어 보려고 접근한 게 분명했다.

‘후훗.’

사울은 속으로 쓴웃음을 지으면서도 여자들이 속물이라고 비판하지는 않았다.

이것도 다 세상 살아가는 방식이다.

목적은 뻔히 보이지만 사울 입장에서도 다 받아 주어야 했다.

적을 만들 필요는 없으니까.

“네. 한 곡 추시지요.”

사울은 계속 파트너를 바꾸며 몇 곡 춤을 추었다.

그러다 연회장 한쪽이 소란스러워졌다.

오늘의 주인공인 실베스터 왕자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사울은 아이나와 카스텔을 대동하고 실베스터가 있는 쪽으로 향했다.

이미 실베스터 주변에는 눈도장을 찍기 위한 사람들이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다.

조금 전 카리스, 제비아와 화기애애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안젤로 경도 어느새 실베스터 곁에 있었다.

“탄신을 축하드립니다. 폐하.”

“고맙소. 공작.”

실베스터는 이어 다가온 카리스와 제비아와도 인사를 나누었다.

“참석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전하. 고맙다. 카리스.”

카리스도, 제비아도 밝은 표정으로 실베스터의 생일을 축하해 주었다.

서로의 표정만 보면 왕위 계승권을 두고 다투는 사이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하지만 사울의 눈에는 보였다.

얼굴은 웃고 있지만 수면 아래에서는 치열한 견제가 벌어지고 있음을.

아직 서로 칼부림을 벌일 만큼 사이가 벌어지지는 않았지만, 실베스터와 카리스는 더 이상 우애 깊은 형제가 아니었다.

형제라기보다는 경쟁자였다.

‘역시 왕위 계승권이라는 건 정말 피곤하군.’

이 복잡한 분위기를 깨트린 건 이 나라에서 가장 높은 사람이었다.

“국왕 폐하 들어오십니다!”

국왕 마렌의 등장에 순식간에 분위기가 바뀌었다.

연회장의 누구도 국왕이 지켜보는 앞에서 ‘물밑에서의 왕위 계승권 다툼’ 따윌 진행할 생각은 못 했다.

등장만으로 주변을 정리한 마렌은 먼저 실베스터에게 치하의 인사를 했다.

그리곤 다른 왕자와 왕녀들에게도 한마디씩 했다.

“조나단. 앞으로도 계속 왕국을 위해 힘쓰도록.”

“네, 아바마마.”

바로 위의 형인 조나단의 치하가 끝나고, 다음은 사울의 차례였다.

마렌은 자신에게 예를 차린 사울에게도 덕담을 해 주었다.

“이번에 네가 세운 공을 잊지 않겠다. 앞으로도 계속 왕국을 위해 힘을 쓰거라.”

“네, 아바마마.”

외지에서 고생하다 온 아들을 대하는 것 치고는 말이 짧았지만, 사울은 신경 쓰지 않았다.

오늘은 실베스터의 생일이고, 주인공 역시 실베스터다.

아바마마가 자신에게 관심을 두지 않는다고 섭섭해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파티는 계속되었다.

자신에게 접근하는 영애들 모두와 춤을 춘 사울은 아직 자신의 곁에 있는 두 여자와는 춤을 추지 않았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사울은 먼저 카스텔에게 말을 걸었다.

“선생님. 한 곡 추실까요?”

카스텔은 고개를 저었다.

사울도 이럴 줄 알았고, 예의상 한 말이다.

이어 사울은 아이나에게 말했다.

“한 곡 추실까요?”

아이나는 카스텔과 달랐다.

“네. 전하.”

곧 사울은 아이나와 춤을 추기 시작했다.

아이나도 명색이 귀족 영애라 춤에 서투르지는 않았다.

왕자 기준으로 보면 부족한 점이 많았지만, 굳이 흠잡을 만큼 엉망은 아니었다.

덕분에 두 사람은 별문제 없이 춤을 출 수 있었다.

“…….”

사울과 춤을 추는 아이나는 긴장한 표정이 역력했다.

춤을 실수하지 않으려 노력하는 것이리라.

덕분에 끝까지 문제없이 춤을 출 수 있었다.

이렇게 실베스터의 생일 파티도 끝났다.

자신의 궁으로 돌아가려는 사울에게 시종이 다가왔다.

“전하. 폐하께서 찾으십니다.”

“아바마마께서? 언제?”

“10분 뒤에 응접실로 오라 하십니다.”

“알았어.”

사울은 아이나와 카스텔을 먼저 돌려보내려 했지만, 시종이 덧붙여 말했다.

“두 분도 함께 오시라는 명령입니다.”

결국 사울은 아이나와 카스텔을 대동하고 응접실로 향했다.

응접실에 도착하니 먼저 기다리는 손님이 있었다.

“뭐야. 아바마마께서 너도 부르셨냐?”

조나단이었다.

뿐만 아니라 둘보다 먼저 온 손님도 있었다.

응접실 문이 열리며 모습을 드러낸 루시아였다.

조나단이 루시아에게 물었다.

“누님도 여기 계셨나요?”

“그래. 조나단이 먼저고, 사울은 조나단 차례가 끝나고 들어가면 될 거야.”

“아바마마께서 대체 왜 저희를 부르셨지요?”

“대단한 일은 아니야. 각자가 맡은 책무 때문이지. 그럼.”

루시아가 나가고, 부름을 받은 조나단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들어갔다.

잠시 기다리고 있으니 오래잖아 조나단이 나왔다.

조나단의 표정이 밝은 걸 보니 나쁜 소리를 들은 것 같지는 않았다.

“전하. 들어오십시오.”

“알았어.”

사울은 아이나와 카스텔을 대동한 채 응접실에 들어갔다.

“아바마마. 부르셨습니까.”

사울의 말과 함께 카스텔과 아이나도 예를 표했다.

“그래. 당분간 너희들을 개인적으로 만날 시간이 없을 것 같아 불렀다.”

“영광입니다.”

“사울. 카스텔. 그리고… 아이나 홉킨스.”

이름이 불린 아이나가 긴장된 표정으로 말했다.

“네. 폐하.”

“아는지 모르겠지만 홉킨스 가문 영애가 왕궁에 발을 들인 건 그대가 처음이다. 영주나 그 후계자가 발을 들인 적은 있지만, 영애가 발을 들인 적은 없었지.”

마렌의 말에 아이나는 더욱 긴장한 채로 말했다.

“여, 영광입니다.”

“영광이라. 그렇게 받아들여준다니 고맙군.”

“…….”

“그렇게 긴장할 것 없다. 그대를 탓하거나 시험하려는 게 아니니. 오히려 감사의 인사를 하고 싶다.”

“제가 어찌 폐하께 감사를 받겠습니까.”

“나는 왕이지만 아버지이기도 하다. 듣기로 그대는 내 아들을 많이 도와주었다는군. 아들의 은인에게 감사를 하는 건 당연한 일이지. 아이나 홉킨스. 그대에게 감사를 표한다.”

“영광입니다. 폐하.”

듣고 있던 사울은 마렌이 진심으로 감사를 하는 것인지, 심술을 부리는 것인지 궁금했다.

심술이라 해도 그렇게 나쁜 의도는 아닌 것 같다는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할까.

이어 마렌은 카스텔에게도 말했다.

“부족한 내 아들을 계속 돕는 그대에게도 감사를 표하고 싶다.”

“네. 폐하.”

마지막으로 마렌은 사울에게 말했다.

“새로운 일을 맡을 것이라지?”

“네, 아바마마.”

“루시아는 네가 이번 일도 성공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하고 있더군.”

“누님이 그렇게 말씀하셨습니까?”

“뜻밖인가?”

“솔직히 말씀드리면 어느 정도 예상했습니다. 누님이 제가 실패할 것이라 생각했으면 처음부터 그 일을 제안하지도, 맡기지도 않았을 테니까요.”

자신만만한 사울의 말에 마렌은 작게 웃었다.

“패기가 있군. 그래, 젊을 때는 패기가 넘치는 게 좋지. 하지만 사울. 지난 번 네 임무에서 성공도 겪었지만, 실패도 겪었다는 것을 잊지 않았겠지?”

물론 사울은 똑똑히 기억했다.

며칠 전에도 마렌은 비슷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는가.

굳이 비슷한 이야기를 반복한다는 건, 그만큼 잘 기억하라는 뜻이다.

“기억하고 있습니다. 아바마마.”

“네 공이 과보다 크기에 너의 실패를 크게 책망하지 않았다. 하지만 비슷한 실패를 반복하면 너에 대한 믿음이 사라질 수 있음을 명심하거라.”

“명심하겠습니다. 이번에는 꼭 완벽하게 임무를 성공하겠습니다.”

마렌의 얼굴에 미소가 짙어졌다.

“기대하고 있으마.”

“네. 아바마마.”

마렌은 카스텔과 아이나에게도 한마디 했다.

“카스텔.”

“네. 폐하.”

“앞으로도 내 아들을 많이 도와주기를 바란다. 그리고… 아이나.”

“네. 폐하.”

“그대의 가문과 왕실은 언제나 복잡한 관계를 유지해 왔지. 하지만 나는 그대의 가문에 해를 끼칠 마음이 없다. 그대의 가문이 왕실과 나라에 충성한다면 나 역시 그대의 가문이 가진 권한을 보장할 것이다. 나아가 그대나 그대의 가문이 공을 세운다면 그에 걸맞은 보상도 충분히 할 것을 약속하겠다. 그렇게 알고 내 아들과 왕실, 그리고 국가를 도와주길 바란다.”

“명심하겠습니다. 폐하.”

이렇게 사울 일행의 국왕 알현도 끝이 났다.

* * *

실베스터의 생일 파티가 끝나고도 사울은 며칠간 더 상아궁에서 머물렀다.

그런 사울을 찾는 자들이 있었다.

주로 사울과 연을 맺길 원하는 귀족 가문의 초청이었다.

사울은 이러한 초청은 정중히 거절했다.

초청에 응해 친구를 만들수록 자신의 입지는 탄탄해질 것이다.

하지만 아직은 세력이나, 왕위 계승에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이고 싶었다.

그래서 파티에 참석하는 것 대신 조용히 휴식을 취하며 다음 임무를 준비하는 것으로 시간을 보냈다.

덕분에 준비는 순조로웠다.

또 루시아에게 요청한 지원군도 도착했다.

“다시 뵙습니다. 전하.”

“어서 와.”

상아궁에 찾아온 아르멜은 함께 있던 카스텔, 아이나와도 인사를 나누었다.

“여기 앉아. 마침 임무 이야기를 하던 참이야.”

“네, 전하.”

아르멜까지 자리에 앉자 사울은 탁자 위에 펼쳐져 있던 지도를 가리켰다.

“이제 우리가 갈 곳은 여기 중립 지대의 대신전, 일명 세 번째 대신전이지요. 나는 이 곳에 대해 아는 게 많이 없어요. 이곳에 대해 잘 아는 사람 있나요?”

사울의 질문에 아이나가 먼저 대답했다.

“제가 두 번 가 본 적이 있습니다.”

“어떤 곳이지요?”

“마지막으로 간 건 2년 쯤 전의 일입니다. 다르센 왕국에도, 가멜다 왕국에도 속하지 않은 곳 치고는 꽤 안정적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안정적이라. 그렇다면 대신전 안팎에서 공격을 받을 걱정은 안 해도 될까요?”

“제 기억으로는 그렇습니다.”

이런 아이나의 경험은 사울이 책에서 본 내용과 같았다.

중립 지대는 두 종류로 나눌 수 있다.

모두에게 버려진 땅과 이종족들이 선택한 땅.

모두에게 버려진 땅은 척박한 환경과 가득 찬 몬스터들로 위험하고 무질서했다.

그에 비해 이종족들이 선택한 땅은 주기적인 관리가 있어 비교적 안전했다.

이번에 사울이 가게 될 중립 지대는 이종족들이 거주하는 땅이다.

대신전과 대족장 세네카를 중심으로 한 두 개의 큰 세력이 있어 비교적 안정적인 곳으로 꼽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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