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중립 지대의 대신전이라. 들은 적이 있어요. 콜리타라는 분이 신관장으로 있다던가.”
“맞아. 하지만 머잖아 신관장이 바뀔 거야.”
“무슨 일이라도 있나요?”
“대단한 일은 아니야. 신관장 나이가 80이 가깝거든. 곧 은퇴하고 새로운 신관장이 부임한다해”
“설마 그 일에 관여하라는 건 아니지요?”
“당연하지. 교단을 함부로 건드릴 수는 없지. 하지만 신관장이 바뀌면 대신전의 움직임도 바뀔 거야. 어쩌면 이종족 문제, 나아가 어둠의 세력을 상대하는 데 변화가 있을지 모르지. 네가 할 일도 그쪽이야. 신전 주변에서 이종족과 관련된 문제를 처리하며 그쪽의 상황이 어떻게 달라지는 지 알아보고 행동해.”
말로는 쉬울지 모르나 꽤나 골치 아픈 일이다.
하지만 사울은 발을 빼지 않기로 했다.
골치 아프고 어려운 만큼 제대로 처리하면 그만큼 인정받을 수 있는 기회였다.
빛의 교단과 이종족, 어둠의 세력, 거기에다 가멜다 왕국까지 뒤엉킨 상황이다.
그런 상황 속에서 공을 세운다면 얻는 게 많을 것이다.
큰 공을 세우지 못해도 이 정도 규모의 일은 경험하는 것만으로도 얻을 수 있는 게 많았다.
결단한 사울이 말했다.
“최선을 다 할게요.”
그러자 루시아가 재회 후 처음으로 미소 지었다.
“부탁해. 동생.”
“네. 누님.”
루시아가 미소 지은 채 말했다.
“그 일에는 홉킨스 가문 영애도 도움이 될 거야.”
“그렇겠지요.”
홉킨스 가문은 이종족과 많은 교류를 해 왔다.
덕분에 영지 안에서는 물론 밖의 이종족들도 홉킨스 가문을 높이 친다고 들었다.
그러한 홉킨스 가문의 영애가 함께한다면 도움이 되면 되었지 방해는 안 될 것이다.
하지만 유능한 인재는 많을수록 좋은 법이다.
“복잡한 일이니 좀 더 많은 도움이 필요해요.”
“무슨 도움?”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자기 한 몸 지킬 줄 알고 머리도 잘 돌아가며 각종 실무에 능통한 인재가 필요하지요.”
“아르멜 말이야?”
“네.”
“좋아. 그 녀석도 널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으니.”
얻을 것을 얻어낸 사울이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요. 아바마마든, 누님이든 실망시키지 않을게요.”
루시아는 미소 지으면서도 번득이는 눈으로 말했다.
“그래야 할 거야.”
“그리고 한 가지 부탁이 있어요.”
“부탁? 무슨 부탁?”
“아이나가 누님을 개인적으로 만나고 싶어하더군요. 누님을 동경하는 것 같던데.”
이 말은 뜻밖이었는지 루시아가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날 동경한다고?”
“네. 한 번 만나줄 수 있어요?”
“그러지. 시간이 나면.”
* * *
루시아와 이야기를 끝낸 사울은 쉬면서 파티 참석을 준비하는 것으로 시간을 보냈다.
그동안 보지 못했던 책도 보고, 아이나의 말 상대를 하면서 모처럼 여유롭게 시간을 보냈다.
물론 몸이나 감각이 둔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카스텔에게 훈련을 받고 스스로 수련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아이나 역시 소원대로 루시아와 만남을 가졌다.
그 자리에 사울이 동석하지는 못했지만, 아이나는 루시아와의 만남을 꽤나 만족스러워했다.
‘정말 대단한 분이십니다. 저도 더욱 분발해야겠어요.’
마침내 1왕자 실베스터의 생일이 찾아왔다.
왕실의 장자이자 카리스와 더불어 가장 유력한 왕위 계승권자인 실베스터의 생일 파티는 화려하게 치러졌다.
“세상에…….”
실베스터의 궁전인 ‘에메랄드궁’을 본 아이나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검소한 변방 귀족 출신인 그녀의 눈에는 사울이 거주하는 상아궁도 굉장히 크고 화려한 곳으로 비쳤다.
그런 상아궁보다 훨씬 화려한 에메랄드궁의 위용은 루시아의 눈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명색이 귀족 영애라는 듯 아이나는 금방 정신을 차렸고.
익숙하지 않은 드레스 차림으로 조심스럽게 사울을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선두에 사울이, 그 곁에 아이나가 걷는 가운데 두어 걸음 뒤에는 카스텔이 있었다.
화려한 연회복을 입은 사울,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아이나는 이 연회장에서는 평범한 차림이었다.
카스텔은 정말로 눈에 띄는 복장을 했다.
꽤 고급스럽게 만들어졌지만, 절대 파티용 의상은 아닌 것 같은 로브 드레스였다.
그나마 ‘로브 드레스’를 입고 온 게 다행이었다.
주변에서 봐주는 사람이 아니었다면 ‘로브 드레스’가 아닌 ‘로브’만 입고 들어왔을 테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스텔의 복장은 상당히 눈에 띄었고, 사람들의 눈총을 샀다.
“어머, 이번에도 저분은 저런 복장이셔.”
“정말 알 수 없는 취향이라니까.”
지나가던 귀족 영애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카스텔을 향한 눈길과 수군거림에 사울은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 보면 카스텔은 반년 전 자신의 성인식 때도 비슷한 복장을 했었다.
그땐 다른 것에 신경 쓸 여유가 없어서 카스텔의 복장이나 그를 향한 수군거림에는 신경도 못 썼다.
조금 여유가 생긴 지금 보면 카스텔은 확실히 눈에 띄는 존재였다.
작위도 없고 옷차림에도 관심이 없지만, 그래서 모두의 눈길을 끈다.
마음만 먹으면 귀족 작위 정도는 쉽게 따낼 수 있는 사람이지만 관심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평민으로 살아간다.
어떤 의미에서는 정말 자유분방한 사람이랄까.
저런 카스텔을 보고 있으면 사울이 품은 과거의 원한도 무의미해지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원한을 잊지는 않았다.
아니, 잊을 수 없었다.
전생의 자신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어머니와 여동생까지 죽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더더욱.
그 모든 불행의 시발점은 결국 카스텔이니까.
“…….”
사울은 아이러니한 기분을 떨쳐 내기로 했다.
파티를 즐기러 온 게 아니라 왕자로서의 의무를 수행하러 온 것이다.
사울은 밝은 미소를 지으며 사람들을 맞이했다.
“오랜만입니다. 전하.”
“전하께서 큰 공을 세우셨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폐하께서 마음이 든든하시겠습니다.”
사울을 본 귀족들도 하나같이 웃으며 인사를 해 왔다.
예전과는 꽤 달라진 모습이었다.
예전에는 사울이 가끔 이런 자리에 참석해도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
어쨌든 왕자라 눈이 마주치면 정중히 인사를 해 왔지만, 그 외에는 무관심하다는 게 피부로 느껴졌다.
사울이 주인공이던 성인식 날을 제외하면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사울과 눈이 마주친 자들은 물론, 그렇지 않은 자들이 먼저 인사를 해 왔다.
이 파티의 주인공인 실베스터만큼은 아니겠지만 꽤나 주목받는 존재가 된 것이다.
‘나에 대한 평가가 오르고 있는 것이겠지.’
아직 사울이 왕위에 오를 것이라 생각하는 귀족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과거보다 존재감이 커졌다는 건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파티에서 사람들과 얼굴도장 찍는 일을 썩 좋아하지 않는 사울이었지만, 지금은 최선을 다해 모두와 인사했다.
한 명이라도 더 친구를 만들어도 부족할 판에 적을 만들 수는 없었으니까.
한창 인사를 하던 중 낯익은 사람이 보였다.
이번에는 사울이 먼저 다가가 인사했다.
“형님. 오랜만이에요.”
사울 바로 위의 형, 4왕자 조나단 다리우스였다.
조나단도 사울을 보고 반갑게 인사했다.
“정말 오랜만이구나.”
“파티 전에 한번 찾아뵐까 했는데 형님이 바쁘시더군요.”
“그렇지. 알다시피 내가 요즘 하는 일이 많아서 말이다.”
사울 기억에 따르면 조나단은 이틀 전 원정에서 돌아왔다.
자신이 이끄는 부대와 함께 대규모 훈련을 하고 왔던가.
솔직히 사울은 조나단이 바쁘다며 거드름을 피우는 게 우스웠다.
루시아처럼 정말 일을 많이 하는 사람도 저렇게 생색내지는 않는데 말이다.
하지만 사울은 굳이 자신의 생각을 입 밖에 내 형제간의 우애를 깰 마음은 없었다.
“고생 많으셨겠어요.”
“그렇다마다. 천 명이 넘는 병력을 내 손발처럼 통솔하는 게 보통 일이 아니더라고.”
“조만간 몬스터 토벌전에 나설 예정이시죠?”
“그렇게 되었다.”
“조심하세요.”
속마음을 잘 숨긴 덕분에 조나단과의 재회는 큰 문제없이 끝났다.
그런데 조나단은 사울 뒤쪽에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저 레이디는 누구냐?”
레이디, 아이나는 사울이 아닌 다른 왕자가 자신을 지목하자 조금 당황한 기색이었다.
분위기를 눈치챈 사울은 아이나를 대신해 말했다.
“네. 형님. 여기 레이디는 홉킨스 가문의 장녀, 아이나 홉킨스입니다.”
“홉킨스 가문?”
예상 밖의 대답이었는지 조나단의 눈이 커졌다.
하지만 놀라움도 잠시, 곧 레이디를 맞이하는 왕자의 눈으로 아이나에게 말했다.
“반갑소. 레이디. 나는 조나단 다리우스요.”
“바, 반갑습니다. 전하.”
아이나의 목소리와 행동은 딱딱했지만, 예에 어긋나지는 않았다.
조나단은 그런 아이나가 마음에 들었는지 눈웃음을 보냈다.
반면에 아이나는 여전히 딱딱한 표정이었다.
조나단이 보낸 눈웃음의 의미를 눈치채지 못한 게 분명했다.
어쩌면 눈웃음 자체를 눈치채지 못했을 수도 있다.
다행히 조나단은 그쯤에서 그만두고 몸을 돌렸다.
사울은 아이나에게 슬쩍 물었다.
“괜찮아요?”
“네, 전하.”
“혹시나 견디기 힘들면 잠시 나가서 숨을 돌려도 돼요.”
“아니, 괜찮습니다.”
사울은 아이나를 강제로 파티에 참여시키지 않았다.
그저 파티에 귀빈들이 많이 모인다고 말해 줬을 뿐이다.
단지 그것뿐이지만, 아이나에게는 굉장히 중요했다.
지금 눈도장을 찍는 게 언젠가 가문에 도움이 될 수도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아이나는 어색한 자리에도 굴하지 않고 계속 사울을 뒤따랐다.
그런 가운데 주변을 살피던 사울의 눈에 세 명의 거물이 함께 있는 모습이 보였다.
2왕자 카리스 다리우스.
그리고 카리스의 모친이자 죽은 전 왕비를 대신해 현재 왕비 자리에 앉아 있는 제비아 다리우스.
거기에다 귀족들의 수장이자 국왕 다음 가는 실권자로 불리는 안젤로 마르테스 공작까지.
파티장의 분위기에 걸맞게 세 사람의 분위기는 화기애애했지만, 그저 모여 이야기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심상치 않은 느낌이 들었다.
‘카리스 형님과 마르테스 공작이 저렇게 친한 줄은 몰랐는데.’
지금 모습만 보면 모두 모여 하나의 파벌을 형성했다고 해도 납득될 정도였다.
물론 그렇다고 단언할 수는 없었다.
속에 칼을 품은 채 얼굴로는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게 왕족과 귀족 아닌가.
사울은 모르는 척 거물들에게 다가가 인사했다.
“왕비 전하. 오랜만입니다.”
가장 윗사람인 왕비, 제비아 다리우스에게 먼저 인사했다.
제비아도 사울을 반갑게 맞이했다.
“어서 오너라.”
“네, 왕비 전하. 그리고 형님, 안젤로 경. 반갑습니다.”
카리스와 안젤로 경도 사울의 인사를 받아 주었다.
세 명 모두 말이 필요 없는 거물이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제비아 쪽이 가장 돋보였다.
40살이 넘었지만 나이에 비해 꽤 젊어 보이는 단정한 외모, 그리고 누구보다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장신구를 걸친 제비아의 모습은 그야말로 고상하고 아름다웠다.
명문가 출신으로 사교계, 나아가 정계에서도 능수능란하게 활동하며 자신의 친아들을 국왕 자리에 올리려 하는 여자.
그야말로 여걸이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사람이다.
사울은 세 거물과 인사를 주고받으며 간단하게 이야기를 나눴다.
그러던 중 안젤로가 사울을 뒤따르던 아이나에게 주목했다.
“저 레이디가 바로 홉킨스 가문의 영애인 모양이군요.”
조나단과는 달리 안젤로는 아이나가 누구인지 바로 알아보았다.
아이나는 그런 안젤로에게 긴장하면서도 어긋남 없이 예를 갖추었다.
카리스도, 제비아도 그런 아이나에게 한마디씩 했다.
“홉킨스 가문의 영애가 형님 생일 파티에 참석하다니. 왕국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일 것 같은데?”
“잘 왔어요. 모처럼 왔으니 마음껏 즐기도록 해요.”
두 거물의 인사에 아이나도 한껏 예의를 갖추며 받았다.
“영광입니다. 왕비 전하, 왕자 전하.”
아이나의 태도에는 크게 흠잡을 데 없었다.
그러자 카리스의 시선이 옷차림부터 행동거지까지 흠잡을 곳이 가득한 사람 쪽으로 향했다.
카스텔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