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냉철함으로만 따지면 아바마마도 능가하지 않을까.
사울은 분위기를 녹이기 위해 푸근하게 웃으며 말했다.
“누님.”
“어서 와.”
루시아는 잠시 서류를 밀어 넣고 맞은편에 앉은 사울을 바라보았다.
친하지도 않고 대하기도 어려운 루시아지만 사울은 굳이 루시아의 눈빛을 피하지 않았다.
눈빛을 피할 일을 한 적이 없고, 그렇다면 비굴해 질 필요도 없으니까.
잠시 사울을 바라보던 루시아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키가 조금 컸구나.”
“맞아요. 덕분에 연회복도 몸에 맞지 않아서 마법으로 고치라는 명령을 내린 참이에요.”
“몸도 좀 더 다부져지고 눈빛도 조금 달라졌어.”
“칭찬이지요?”
“칭찬? 글쎄. 기껏 변방까지 가서 시간만 허비하고 돌아왔다면 그게 문제 아닐까?”
신랄한 루시아의 말에도 사울은 미소를 거두지 않았다.
“그럼 이렇게 말하지요. 왕자로서 시간을 허비하지 않았다고.”
“당연한 일이야.”
“또 누님에게는 감사의 인사를 해야겠지요.”
“감사? 나에게?”
“네. 누님이 붙여 준 기사에게 꽤 도움을 많이 받았거든요.”
“그래? 아르멜이 마음에 들었나 봐?”
“상당히 유능하더군요. 누님 사람이 아니라면 제 사람으로 만들고 싶을 만큼.”
“네 사람이라.”
순간 안경 너머 루시아의 눈이 번득였다.
“이제 본격적으로 날개를 펼 생각인가 봐?”
“그렇다고 할 수 있지요. 저도 이제 성인이니 왕자로서 한 사람/의/ 몫을 할 나이가 되었으니까요. 누님은 제가 날개를 펴는 게 마음에 안 들어요?”
루시아는 안경을 고쳐 쓰며 말했다.
“넘치는 의욕으로 왕국에 해를 끼치는 왕자보다는 의욕 없이 조용히 지내는 왕자가 나은 법이니까.”
“제가 왕국에 해를 끼칠 것이라 생각해요?”
“그런 결론을 내렸다면 이렇게 널 만나는 대신 행동에 나섰을 거야. 네가 왕국에 도움을 줄 존재가 된다면 도와야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막아야겠지.”
“조국에 해를 끼칠 마음은 없어요.”
“그 말이 진심인지 모르겠어.”
아무래도 루시아는 사울에 대한 의심을 품은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면 처음부터 그랬다.
사울이 성인식을 치르고 변방으로 나갈 때 가장 의아해한 게 루시아였다.
자신의 성인식 날 이런 말을 한 것도 기억났다.
‘명심해. 왕실의 일원으로 태어났으면 무엇보다 왕국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해. 네가 무엇을 원하든, 왕국의 영광보다 우선이 될 수는 없어.’
루시아는 계속 날카로운 눈빛으로 사울을 응시했다.
사울 역시 그런 루시아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피할 이유도 없었다.
조국, 다르센 왕국에 해를 끼칠 마음이 없었으니까.
아직까지는 말이다.
한참 사울을 바라보던 루시아가 말했다.
“앞으로는 어떻게 할 생각이야?”
“며칠 쉬었다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려고요.”
“그래? 그럼 이 일은 어때?”
루시아가 문서 한 장을 내밀었다.
아마도 사울을 위해 준비한 문서인 모양이었다.
일단 사울은 문서를 읽어 보았다.
문서에 적힌 내용은 대충 다음과 같았다.
최근 이종족들 간에 심상찮은 움직임이 포착되고 있다.
이 심상찮은 움직임은 홉킨스 가문 영지에서 거주하고 있는 이종족들과도 관련이 있는 것 같다.
나아가 중립 지대에서 거주하는 이종족, 심지어 가멜다 왕국과도 연계된 것 같다.
문서를 다 읽은 사울이 물었다.
“근거가 있는 이야기인가요?”
“확신할 수는 없지만 의심이 드는 상황이야. 아르멜의 이야기도 비슷했고.”
“아르멜에게 이 건을 조사시켰나요?”
“그래.”
문서에서 홉킨스 가문 영지가 언급되는 것을 보면 아르멜이 영지에 있을 때 따로 조사를 한 모양이다.
사울을 보좌하고 홉킨스 가문 사람들을 감시하는 것만으로도 바빴을 아르멜이 이종족의 수상한 움직임까지 조사했을 줄이야.
“역시 유능한 녀석이군.”
“어때. 흥미 있어?”
“흥미는 있어요. 그런데 이종족 문제는 함부로 다루기 어려울 건데요?”
이종족은 엘프, 드워프, 오크 등 인간은 아니지만 지성을 가진 종족을 뜻한다.
과거 인간들은 율렌 섬 대부분을 차지하는 건 물론 율렌 섬의 이종족들을 착취했다.
이에 이종족들은 인간들에게 불만이 많았다.
노예 제도가 좋은 예였다.
700년 전 율렌 섬에서는 노예 제도가 폐지되었고 노예들도 해방시켰다.
하지만 이 때 해방된 건 인간 노예뿐이었다.
이종족 노예들은 여전히 자유를 억압받았고 이는 종족 전쟁을 발발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수많은 피를 흘린 종족 전쟁은 이종족 노예의 해방을 결정하며 종전되었고, 이종족 노예들은 노예 제도가 폐지된 지 500년 만에, 즉 지금으로부터 200년 전에 자유를 얻게 되었다.
이종족 노예 제도가 폐지된 후에는 율렌 섬에서 인간과 이종족들 간에 대규모 분쟁이 일어난 적은 없다.
두 왕국은 자기들끼리 전쟁에 바빠 이종족에게 크게 관여할 겨를도 없었다.
덕분에 이종족들은 중립을 지키며 비교적 평화로운 시기를 보냈다.
홉킨스 영지의 이종족처럼 인간들과 어느 정도 교류하며 살아가는 자들도 있었다.
지금은 다르센 왕국도, 가멜다 왕국도 이종족을 섣불리 건드리려 하지 않았다.
적국을 상대로 싸우기도 바쁜데 이종족까지 건드려 좋을 게 없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홉킨스 가문처럼 이종족들을 아군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대부분의 이종족들이 중립을 고수하고 있어 큰 성과는 없었지만 말이다.
그만큼 이종족 문제는 쉽지 않았다.
도적을 상대하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일일지 모른다.
루시아도 물론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물론 이종족 문제는 쉽게 해결할 일이 아니지. 솔직히 말하자면 네가 이종족 문제를 모두 해결하거나 그들과의 관계를 획기적으로 개선하리라고까지는 기대하지 않아.”
“그렇다면 왜 제게 그 일을 맡기는 거지요?”
“이종족 문제는 하나의 해결책으로 단숨에 풀 수 있는 게 아니니까. 그 문제는 퍼즐과도 같지. 수많은 퍼즐이 헝클어져 있고 그것들을 하나하나 맞춰 나가는 게 필요해.”
“결국 퍼즐을 맞추는 역할을 하라?”
“모두 맞추라고는 하지 않겠어. 언젠가 이종족들도 조국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조금이라도 퍼즐을 맞춰 보는 게 어때?”
예상치 못한 제안을 받은 사울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종족 문제는 왕국에서도 쉽지 않은 문제 중 하나다.
그 문제를 자신더러 모두 해결하라 했다면 불가능한 요구라 할 수 있었고, 거절했을 것이다.
하지만 거기까지는 요구하지 않는다.
처음부터 끝까지 퍼즐을 모두 맞추는 게 아니라, 적당히 맞추면 된다.
그 정도라면 할 수 있지 않을까.
또 이종족을 상대하는 건 나쁘지 않은 일일 것이다.
이종족은 인간과 다른 문화와 문명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인간과는 다른 특별한 능력이나 기술을 가진 자들도 많았다.
인간과 이종족의 사이가 썩 좋지 않음에도 이종족의 능력이나 기술이 인간들의 전쟁에 쓰이는 경우도 종종 있을 정도였다.
‘이종족 문제라… 쉽지는 않겠지만 잘 하면 큰 기회가 될 수 있을지도.’
고민에 빠진 사울에게 루시아가 말을 보탰다.
“이 문제는 킬리안 비셔스와도 관련되어 있어.”
“네?”
지금 이 자리에서 들을 것이라 예상치 못한 이름에 사울의 눈이 커졌다.
“그자와 이종족 사이에 관계가 있나요?”
“대족장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더군.”
“대족장…….”
사울은 루시아가 말한 대족장이 누구인지 잘 알았다.
율렌 섬에서 대족장이라 불리는 자는 한 명뿐이니까.
율렌섬의 모든 이종족을 지배하지는 않지만, 모든 이종족 위에 군림하는 자.
엘프 족의 우두머리이자 다른 종족들에게도 존경받는 자.
대족장 세네카.
“대족장 세네카가 왕국과 접촉했다는 말인가요?”
“그래.”
“무슨 일로?”
“너도 아는 일일 거야. 어둠의 세력.”
“…….”
분명 킬리안 비셔스는 어둠의 세력과 모종의 관계가 있었다.
아직 조사 단계지만 그들과 손을 잡았다고 해석할 만한 정황/이/ 분명 있었다.
설마 그 문제에 이종족들도 개입했다는 말인가.
“대족장 세네카도 어둠의 준동을 걱정하고 있나요?”
“그런 모양이야. 우리가 모르는 정보를 가지고 있는 것 같기도 해.”
“…….”
“놀랐어?”
“조금은요. 설마 지금 이 자리에서 이종족 모두가 떠받드는 대족장의 이름까지 나올 줄은 몰랐으니까요. 설마 나더러 그를 상대하라는 말은 아니겠지요?”
“걱정 마. 그런 무리한 요구를 하진 않아. 대족장을 상대하는 건 나로서도 버거워. 하지만 대족장은 이종족 사이에 어둠의 세력이 퍼지는 걸 걱정하고 그 문제에 킬리안 비셔스가 얽힌 것 역시 걱정하고 있어. 그리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 왕국과 신전, 심지어 가멜다 왕국의 협조도 구하고 있지.”
“그래서 제가 할 일은요?”
“네 곁에 있는 홉킨스 가문의 영애와 함께 이종족에 관련된 일들을 조금씩 처리해 봐. 그 일을 성공적으로 처리하면 우리 왕국으로서도, 네 개인에게도 얻는 일이 많을 테니까.”
확실히 나쁜 이야기는 아니다.
잡으려다 실패한 킬리안 비셔스는 물론 이종족, 어둠의 세력, 거기에다 가멜다 왕국까지 얽힌 이야기가 아닌가.
이런 큰 규모의 일에서 두각을 나타낸다면 사울의 경력에도 굉장한 도움이 될 터.
문제는 이 일이 어떻게 흘러갈지 예측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일의 실체부터가 두루뭉술하지 않은가.
이종족 문제인지 뭔지 처리하러 갔다가 시간만 낭비하는 꼴이 되지 않을까 염려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잘 흘러가면 장차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독특한 이종족의 지식이나 기술은 자신만의 무기가 될 수 있다.
실제로 이종족 기술이나 지식을 이용하여 강해지는 인간들도 종종 있었다.
카스텔은 사울의 자질에 한계가 있다고 평했다.
어느 정도 강해질 수는 있지만 최강자를 노리긴 어렵다는 것이다.
카스텔의 말이 곧 진리는 아니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카스텔의 평가가 아닌가.
다룰 수 있는 힘은 클수록 좋다.
비록 최고의 선생에게 배우고 있지만, 더 강해지고 싶다.
어쩌면 이종족과의 만남이 그 계기가 되지 않을까.
‘이종족과의 만남이라… 어쩌면 내게도 큰 도움이 될지 몰라.’
고민 끝에 결론을 내린 사울이 말했다.
“알았어요. 아바마마께서 허락하신다면.”
사울의 말에 루시아가 피식 웃었다.
“허락하실 거야.”
“…….”
짧은 말이지만 사울 귀에는 의미심장하게 들렸다.
저런 자신감은 사울에게 말을 꺼내기 전에 이미 아바마마께 허락을 받았거나, 앞으로 꼭 허락을 받아낼 확신이 있어야 나올 수 있다.
그만큼 아바마마께 총애를 받는다는 뜻이겠지.
1왕자 실베스터와 2왕자 카리스는 유력한 왕위 계승권자다.
1왕녀 루시아는 실력으로 왕국 정보부의 거물이 되었다.
4왕자 조나단도 군사적으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고 들었다.
사울이 노력하는 것처럼 다른 왕자와 왕녀들도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각각의 뜻을 품은 채.
따지고 보면 사울은 형님이나 누님에 비해 뒤쳐진 몸이다.
뒤쳐진 만큼 더욱 노력해야 한다.
왕위 계승권과는 별개로 돋보이는 자가 되어야 한다.
그렇게 얻은 지위와 힘은 언제나 유용하게 쓰일 테니까.
그 목적이 개인적인 복수라도 말이다.
“이종족 일을 맡는다면 무엇부터 처리해야 할까요?”
루시아가 지도를 꺼냈다.
이제는 사울의 눈에도 익숙한 갈레트 지방과 그 주변을 묘사한 지도였다.
지도 중심부에 위치한 홉킨스 가문의 영지와 그 주변의 중립 지대.
수도로 돌아오기 전 사울이 활동했던 곳이다.
루시아는 지휘봉으로 사울이 활동했던 곳에서 조금 떨어진 곳을 짚었다.
갈레트 지방의 이웃인 ‘솔레도 지방’이었다.
“여기가 어디인 줄 알겠어?”
루시아가 짚은 곳은 유명한 곳이었다.
“대신전이지요?”
“맞아.”
율렌 섬에 대신전은 단 세 곳뿐이다.
다르센 왕국의 수도에 하나, 가멜다 왕국의 수도에 하나.
그리고 두 나라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은 중립 지대에 속한 세 번째 대신전.
다르센 왕국이나 가멜다 왕국의 대신전은 인간 왕국 수도에 위치한 만큼 철저히 인간 위주로 돌아갔다.
동시에 속한 땅의 나라의 입김 또한 적지 않았다.
반면에 중립 지대의 대신전은 다르다고 들었다.
어느 나라의 입김도 닿지 않고, 또 인간 외의 이종족들도 많이 있다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