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했더니 무능한 적국 왕자였다-60화 (60/232)

60화

“그대가 가져 온 드레스가 나쁜 건 아니에요. 하지만 수도의 유행과는 다소 어긋난 물건이라서요.”

“그렇군요. 할 수 없지 않습니까. 1왕자님 생일이 이틀 남았는데 그 사이 드레스를 맞출 수는 없을 테니.”

“내가 가진 드레스가 있어요.”

“네?”

아이나가 화들짝 놀랐다.

아이나의 표정에서 무언가를 읽은 사울은 재빨리 그녀의 오해를 풀기 위해 말했다.

“내가 입으려 마련한 건 아니에요. 장차 나와 약혼을 하거나 결혼할 상대에게 주라는 명분으로 온 드레스들이지요.”

“그, 그렇군요. 왕실에는 그런 선물도 들어오는 겁니까?”

“그래요. 나 같은 사람에게도 여러 가지 이유로 많은 선물이 들어왔지요.”

그동안 곁가지 취급을 받았지만 사울 역시 왕위 계승권을 가지고 있다.

물론 지금의 사울에게 왕위 계승 가능성은 거의 없다.

다른 왕자들에 비하면 세력도 없고, 뚜렷한 성과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가능성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기에,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사울에게 미리미리 선을 대려는 자들이 있었다.

“그, 그렇다고 해도 드레스가 몸에 맞지 않으면 아무 소용없지 않을까요?”

“마법으로 옷을 만들기는 어려워도 크기를 조정하는 건 쉬운 일이니까요. 왕실에 그런 일을 잘 하는 마법사도 몇 있고요.”

“그럼 감사히 받겠습니다.”

고개 숙여 감사를 표한 아이나는 문득 곁에 있던 카스텔을 바라보았다.

무도회에 참석한다면 카스텔도 드레스를 입어야 하지 않을까.

“카스텔 씨도 드레스를 입으시나요?”

생각 없이 한 질문에 카스텔이 짧게 대답했다.

“나는 귀족이 아닙니다.”

무도회는 참석하지만 드레스는 안 입는다는 뜻임을 알아들은 아이나가 놀란 표정으로 사울을 바라보았다.

사울은 의미심장한 미소로 답했다.

지난 반년 간 카스텔을 겪어 온 아이나도 알만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 * *

사울은 자신의 궁전인 ‘상아궁’으로 손님들을 안내했다.

궁전 중에서는 검소한 곳이지만 어디까지나 왕궁 기준에서다.

왕궁에 들어설 때부터 주변 풍경에 눈을 떼지 못하던 아이나는 상아궁의 화려함과 웅장함에 감탄한 기색이 역력했다.

사울은 아이나가 상아궁을 마음껏 구경할 수 있도록 내버려 두기로 했다.

상아궁의 시녀들과 하인들이 그런 사울 일행을 맞이했다.

“어서 오십시오, 전하.”

“그동안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반년 넘게 상아궁을 비웠지만 일하는 사람들의 면면은 그대로였다.

떠나기 전까지 상아궁의 관리를 책임졌던 그레이도 익숙하게 명령을 내렸다.

“전하가 궁을 비운 사이 특별한 일은 없었나?”

“보시다시피 그대로입니다.”

“그런 것 같군. 여기 이분은 홉킨스 가문의 영애이며 전하의 손님이시네. 잘 모시도록.”

“알겠습니다. 그럼 카스텔 님은?”

“늘 머무르던 곳으로 모시도록 하게.”

“네.”

사울 혼자 쓰기에는 지나치게 큰 상아궁이라 빈 방은 많았다.

그레이는 홉킨스 가문의 영애에 대한 불편함을 접어 두고 아이나를 가장 화려한 손님방으로 모셨다.

아이나와 카스텔이 여장을 풀러 가자 사울은 잠시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돌아왔군.”

중얼거리는 사울의 눈에 비친 상아궁의 풍경은 떠나기 전과 한 치도 다를 바 없었다.

하지만 떠났던 자신은 꽤 달라졌다.

외모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지언정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은 달라졌을 것이다.

어린 왕자가 먼 변경 영지까지 가서 토벌전을 치르고 왔다.

절반뿐인 성공이지만, 어쨌든 승리를 거두고 성과도 있었다.

반년 전보다는 훨씬 존재감이 커졌을 것이다.

덕분에 이제는 더욱 과감하고, 자신감 있게 움직일 수 있을 것이다.

동시에 더욱 조심하게 움직여야 했다.

특히나 왕위 계승권에 관심이 있는 것으로 보이거나, 함부로 어떤 파벌에 붙는 건 피해야 했다.

‘아직 왕위 계승에는 관심도 없고 괜히 오해를 살 필요는 없지. 그보다는 가멜다 왕국과 접촉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게 나아.’

이 시간에도 전생의 원수들은 가멜다 왕국에서 잘 먹고 잘 살고 있을 것이다.

그 생각만 하면 속이 뒤틀렸다.

전생의 원한을 풀지 않으면 현생을 제대로 살 수 없다.

다음에 무엇을 해야 할 지는 거의 결정했다.

남은 건 부딪쳐 보는 것뿐이다.

‘그러려면 최소한의 왕자 노릇도 해야겠지.’

생각을 정리한 사울은 시녀를 불렀다.

“형님 생일에 입을 만한 옷을 가져와 줘.”

“네, 전하.”

시녀 몇 명이 상아궁에서 가장 화려한 옷들을 가지고 왔다.

어지간히 안목이 없는 사람이라도 최고급 재료와 최고의 장인이 동원되어 만든 옷이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을 만큼 잘 만든 연회복이었다.

지나치게 사치스럽거나 화려한 옷이 아니냐는 걱정은 할 필요 없다.

다른 왕자들은 이보다 더 화려한 복장을 입고 나타날 테니까.

사울은 몇 벌의 연회복 중 마음에 드는 것을 점찍었다.

“이것으로 하지. 한번 입어 볼까?”

사울은 점찍은 연회복을 입어 보았다.

반년 전 상아궁을 떠나기 전에 한번 입어 보았던 옷이다.

불과 반년 전이니 별문제가 없으리라 여겼지만, 그렇지 않았다.

“조금 끼는 것 같은데?”

“그, 그렇군요. 전하. 전하께서 좀 더 커지신 것 같습니다.”

“그렇군.”

한창 성장기인 사울이 지난 반년 동안 키도 크고 몸도 조금 더 다부져진 탓에 옷이 맞지 않게 된 것 같다.

미리 입어 보지 않았다면 꽉 끼는 옷을 입고 파티에 참석하는 망신을 당할 뻔했다.

“마법사에게 맡겨서 수선해 둬.”

“네, 전하.”

왕궁에는 이런 일을 전문적으로 하는 ‘수선 마법사’도 있었다.

다른 일 대신 옷이나 도구 따위를 마법으로 고치거나 수선하는 일을 전문적으로 하는 수선 마법사는 왕국 수도가 아니면 찾아보기 힘든 존재였지만 말이다.

대충 할 일을 마친 사울은 여장을 풀고 잠시 쉬려고 했다.

때마침 찾아온 시종이 아니었다면 말이다.

“전하. 폐하께서 찾으십니다.”

“아버님이?”

“네. 지금 바로 폐하의 궁으로 오라하십니다.”

피곤했지만 국왕의 명령을 어길 수는 없다.

사울은 옷차림을 바로 하고 곧바로 아버지의 궁으로 달려갔다.

어느새 카스텔도 사울에게 합류했다.

“아바마마가 선생님도 불렀나요?”

“네, 전하.”

사울과 카스텔은 국왕 마렌이 머무르는 궁으로 달려갔다.

수많은 경비병과 시종을 거쳐 국왕의 방에 다다르니 편한 차림으로 차를 마시고 있는 마렌의 모습이 보였다.

“아바마마. 다녀왔습니다.”

사울이 먼저 예를 갖추며 인사했다.

카스텔도 나름대로 예를 갖추었다.

그런 둘의 모습에 마렌은 흐뭇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 다녀왔느냐. 별일은 없었고?”

“여러 일이 있었지만 무사히 다녀왔습니다.”

“네가 보낸 보고와 다른 사람들이 보낸 보고를 읽어 보았다. 전쟁에서 이겼고, 얻은 것도 있지만 모든 것을 얻지는 못했더구나.”

마렌의 냉정하고 정확한 평가에 사울은 고개를 숙였다.

“제 미숙함 탓이었습니다.”

“그래. 자신의 미숙함을 아는 건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다. 누구라도 미숙할 수 있고 실수를 할 수 있지. 다만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새겨듣겠습니다.”

“알았다. 그리고 홉킨스 가문의 영애를 수도에 데리고 왔다고?”

“…네. 아바마마.”

“왜 데리고 왔는지는 묻지 않으마. 하지만 네 행동으로 인해 벌어질 일에 대해 책임질 각오는 한 것이겠지?”

벌어질 일.

왕실과 홉킨스 가문과 복잡하고도 미묘한 관계를 말하는 것이리라.

사울의 행동을 책망한다기보다는 경고하는 것에 가깝다.

사울은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

“그렇습니다. 모든 것을 각오했고, 만에 하나 문제가 생기면 회피하지 않고 책임을 지겠습니다.”

“그럼 되었다. 너도 이제는 자신만의 세력이나 인재를 가질 때가 되었으니.”

“네. 아바마마.”

본론을 마친 마렌이 푸근한 표정으로 말했다.

“지금이 아니면 시간이 없어 돌아오자마자 불렀구나. 이만 돌아가서 쉬어도 좋다. 이틀 뒤 네 형의 생일 파티에는 꼭 참석하거라.”

“알겠습니다. 아버님.”

마렌이 카스텔과 따로 할 말이 있다는 걸 깨달은 사울은 홀로 밖으로 나갔다.

아버지가 카스텔과 무슨 말을 할지 궁금하기는 했다.

하지만 문 밖에 경비병이 눈을 번득이고 있어 허튼 짓을 할 수없었다.

그렇게 사울은 자신의 궁으로 돌아갔다.

카스텔과 둘만 남은 마렌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지난 반년의 시간을 그 아이는 어떻게 보냈지?”

질문을 받은 카스텔은 자신이 본 사울의 ‘반년’을 곧이곧대로 이야기했다.

카스텔이 달변가는 아닌지라 이야기는 두서가 없고 정리되지도 않았다.

하지만 마렌은 두서없는 이야기 속에 담긴 핵심과 진실을 꿰뚫어 볼 수 있는 귀가 있는 남자였다.

카스텔의 이야기를 모두 들은 마렌이 작게 웃었다.

“그 아이의 시간은 물론 네 시간까지 낭비하는 건 아닌지 걱정도 했지만 쓸데없는 걱정이었나보군.”

“그렇습니다. 폐하.”

카스텔의 말에 마렌의 웃음이 커졌다.

여느 사람이라면 국왕의 말을 이런 식으로 맞받아치지는 않을 것이다.

죽고 싶어서 안달이 난 게 아니라면 말이다.

상식적인 사람에게는 나올 수 없는 이런 솔직함은 마렌이 카스텔을 총애하는 이유 중 하나였다.

“이미 말했지만 그 아이 곁에 머무르는 건 어디까지나 네 뜻에 달려 있다.”

“…….”

“그 아이는 아마도 자기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점점 더 큰물로 갈 것 같구나. 홉킨스 가문 영지에서 할 만큼 했으니 새로운 무언가를 추구하겠지. 그게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이 수도에 머무르는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럼 너는 어떻게 할 텐가?”

카스텔은 미리 대답을 생각해 둔 듯 거침없이 말했다.

“전하 곁에 좀 더 있겠습니다.”

“이제 과거의 원한은 잊었나?”

과거의 원한.

카스텔의 원한을 가진 상대 중 살아 있는 자는 딱 두 명뿐이다.

적국의 영웅, 가르시아 남매.

그 중에서도 카스텔과 1:1 대결 끝에 그녀를 패배시키고 크나큰 상처를 안겨 주었다고 알려진 베일 가르시아.

진실은 조금 달랐지만, 큰 줄기에서 보면 크게 거짓된 이야기는 아니다.

그리고 카스텔이 자신에게 치욕을 안겨 준 가르시아 남매를 잊지 않고 있다는 건 마렌도 잘 알았다.

“그들의 소식을 알고 계십니까?”

“적국의 영웅들은 너와 비슷한 길을 걷고 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평화 속에서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더군.”

알 만했다.

전시의 영웅은 평화 속에서는 입지를 잃어버리기 쉽다.

그것이 ‘휴전’이라는 이름의 일시적인 평화라 할지라도 말이다.

카스텔도 6년 전쟁 후 귀족 사회에서는 썩 좋은 대접을 받지 못했다.

그것은 승자인 가르시아 남매 역시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제가 그들과 싸울 기회가 있을까요?”

“아직은 아니다. 너나 가르시아 남매가 직접 전장에 나설 정도면 휴전 조약이 파기된 후에나 가능하지. 나는 그럴 마음이 없고 저들도 마찬가지다.”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당분간 전하를 도와드리겠습니다.”

“네 뜻이 그렇다면.”

이 말을 끝으로 카스텔도 마렌의 방을 나섰다.

* * *

마렌과의 대화를 마치고 돌아온 사울은 이번에도 편히 쉬지 못했다.

“왕녀 전하께서 전하를 찾으십니다.”

“루시아 누님이?”

사울이 아바마마께 불려간 사이 루시아가 부른 것이었다.

마렌과의 대화를 마친 즉시 자신을 보러 오라는 명령과 함께 말이다.

“정말 편히 쉬기 힘들군.”

푸념하면서도 사울은 루시아를 만나러 갔다.

마침 루시아에게 부탁할 일도 생겼고 할 말도 있었으니까.

* * *

루시아는 사울을 자신의 궁으로 부르지 않았다.

그녀가 사울을 부른 곳은 왕족들이 공무 공간으로 쓰는 집무실 중 한곳이었다.

사울을 기다리는 동안 루시아는 책상에서 문서를 읽고 있었다.

깔끔하게 정돈된 책상 한쪽에 문서가 쌓인 가운데, 그 중 몇 장을 펼쳐 놓고 동시에 읽는 모습이 보였다.

한 번에 한 장도 아니고 몇 장의 문서를 한꺼번에 읽는 게 가능한가?

보통 사람은 엄두도 못 낼 일이지만 루시아는 가능한 모양이었다.

지금 루시아의 모습에게서 허세나 인위적인 느낌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으니까.

사울의 인기척을 느낀 루시아가 고개를 들었다.

여전히 안경을 쓴 눈빛은 차갑고 또 날카로웠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