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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했더니 무능한 적국 왕자였다-59화 (59/232)

59화

얼마 지나지 않아 부름을 받은 아이나가 방에 들어왔다.

“아버님. 부르셨어요?”

인사를 한 아이나가 자리에 앉기 무섭게 던칸이 본론을 꺼냈다.

“조금 전 파티 자리에서 사울 왕자가 이런 말을 하더구나. 너를 수도로 데리고 가고 싶다고.”

“네, 아버님.”

“네 표정을 보아하니 너와 사울 왕자 사이에서는 이미 이야기가 오간 모양이구나.”

“언질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넌 수도에 가고 싶은 거고?”

“네, 아버님.”

그런 아이나를 바라보던 던칸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딜 가든 우리 가문의 안위를 우선시할 자신이 있느냐?”

“물론입니다. 아버님.”

“그럼 되었다. 네 뜻대로 하거라.”

던칸의 말에 아이나는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아버님이 이렇게 선선히 허락해 주실 줄은 몰랐는데 말이다.

“허락하시는 건가요?”

“그래.”

아이나는 얼굴을 활짝 펴며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아버님!”

그런 아이나를 바라보며 던칸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가능하다면 이 아이만은 순수한 채로 남겨두고 싶군. 쉽지는 않겠지만.’

* * *

며칠 후 사울은 카스텔과 그레이, 아르멜, 그리고 아이나까지 데리고 영지를 떠났다.

“그럼 전하. 안녕히 가십시오.”

“언제든지 다시 찾아오십시오.”

영주와 소영주, 가신들의 인사에 사울은 속으로 쓰게 웃었다.

언동은 정중하지만 입에 발린 인사라는 게 확연히 드러났다.

아이나를 데려가는 것과는 별개로 사울이 다시 오지 않는 것을 바라는 눈치였다.

사울은 만에 하나 불쾌한 감정이 드러나지 않으려 노력하며 마차에 탔다.

“마차에 타는 것도 오랜만이군.”

무심결에 사울이 중얼거리자 맞은편에 앉은 그레이가 맞장구를 쳤다.

“그러게 말입니다. 앞으로는 웬만하면 마차를 타고 다니십시오.”

마차를 타고 다니며 위험한 일을 하기는 어렵다.

그레이의 말인즉, 안전하게 행동하라는 뜻이다.

사울은 다시금 속으로 쓰게 웃었다.

스스로 위험을 즐기는 성격이라 생각해 본 적은 없다.

하지만 눈앞의 그레이, 어쩌면 다른 사람들도 사울이 위험을 즐기는 성격이라 생각하고 있을지 모른다.

그만큼 어린 나이에 왕자의 몸으로 위험한 일을 많이 한 건 사실이니까.

‘형님 생일이 지나면 지금보다 더 바빠지고, 더 위험한 일도 계속할 것 같지만…….’

사울은 굳이 이 말을 입에 담지 않았다.

조금 어색해진 사울은 시선을 돌렸다.

그레이와 함께 맞은편에 앉은 카스텔과 아이나의 모습이 보였다.

카스텔은 별 생각이 없어 보였고, 아이나는 긴장한 표정이었다.

“선생님은 수도에 돌아가면 특별히 하고 싶은 일이 있나요?”

질문을 받은 카스텔이 곧바로 대답했다.

“특별히 없습니다.”

“그렇군요.”

정말 카스텔답다.

어떻게 보면 생각이 없는 사람이라 느낄 수 있지만, 다르게 보면 어떤 상황이 와도 대처할 수 있기에 생각을 안 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빈틈이 없다는 말이다.

언젠가 카스텔에게는 복수를 할 것이다.

하지만 카스텔은 어떤 상황에서든 그녀다운 모습을 보여 주며 빈틈을 보이지 않았다.

지금은 선생님이라 부르는 저 괴물보다 강해질 수 있을까.

그리고 괴물을 쓰러뜨릴 수 있을까.

머릿속이 복잡해진 사울은 아이나 쪽으로 눈을 돌렸다.

아이나는 평소와 달리 다소 긴장한 것처럼 보였다.

“그대는 왕국 수도에 가는 건 처음이지요?”

“네, 전하.”

“수도에서 하고 싶은 게 있다면 미리 생각해 둬요.”

“그렇게 말씀하셔도 뭘 해야 할지…….”

“그럼 개인적으로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나요? 내가 도와줄 수도 있어요.”

사울의 말에 아이나는 조심스레 말했다.

“실은 만나고 싶은 분이 두 분 있습니다.”

“누구인가요?”

“한 분은 드레이크 러셀 백작님이십니다.”

“드레이크 러셀 백작… 과연.”

드레이크 러셀 백작.

왕국에서 명성 높은 귀족 가문인 러셀 가문의 현 수장.

왕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기사인 동시에 가장 뛰어난 기사이기도 했다.

개인의 전투 능력만으로는 전성기의 카스텔에 미치지 못했지만, 전장에서 부대를 다루고 병사를 움직이며 적과 싸우는 능력은 카스텔 이상이었다.

카스텔은 6년 전쟁의 말미에 베일 가르시아와의 결투에서 패해 명성이 다소 퇴락했다.

반면에 드레이크 러셀 백작은 카스텔의 패배 후 전장을 수습하여 다르센 왕국이 가멜다 왕국과 대등한 입장에서 휴전 조약을 맺도록 만들었다.

거기에다 귀족들에게 별종 취급을 받는 카스텔과 달리 뛰어난 화술과 정치력을 가지고 있어 다른 귀족들과도 잘 어울렸다.

그야말로 모두의 존경과 지지를 받는 거물이었다.

그와 아이나를 만나게 해 줄 수 있을까?

가능성이 낮다고 여긴 사울은 고개를 저었다.

“알다시피 드레이크 러셀 백작은 지금 이 나라에서 가장 뛰어난 기사고, 때문에 수도를 자주 비워요. 내가 떠날 때도 몬스터 토벌 문제로 수도를 비웠거든요.”

“그렇습니까… 아쉬운 일이군요.”

“다른 사람은요?”

“루시아 왕녀님이십니다.”

이건 사울로서도 예상외였다.

기사인 아이나가 왕국 최고의 기사로 꼽히는 드레이크 러셀 백작을 만나고 싶어 하는 건 당연한 일이라 예상할수 있었다.

하지만 루시아 왕녀는 기사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싸움 실력으로만 따져도 아이나가 루시아보다 위일 가능성이 높았다.

루시아가 유명한 것은 왕녀인 동시에 왕국 정보부에서 활약하고 있기 때문이다.

‘얼음 왕녀’라는 별명이 무색하지 않게 냉정하고 치밀하게 활동하며 이미 적지 않은 공적을 세웠다.

루시아가 직접 찾아내어 사형장에 보낸 첩자만 해도 수두룩했다.

어떻게 봐도 기사인 아이나가 관심 가질 만한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누님과는 만남을 주선해 줄 수 있어요. 하지만 왜 하필 누님을 만나려고 하는 거지요?”

“그분의 명성을 많이 들었습니다. 왕녀의 몸임에도 혈통보다 능력으로 인정받고 계시다고.”

“아.”

듣고 보니 순식간에 이해가 갔다.

루시아에 대한 평가는 사실 조심스럽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평가였다.

왕녀라는 고귀한 신분이 가진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고, 왕녀님께 감히 부정적인 평가를 할 사람은 없을 테니까.

하지만 사울이 보기에 ‘혈통보다 능력으로 인정받는다’는 루시아에 대한 평가는 정확했다.

사울은 가족 중 루시아와 마렌 국왕을 빼고는 크게 경계하지 않았다.

/다른 왕자나 왕가의 사람들은 사울이 먼저 눈에 거슬리는 행동을 하지 않는 한 크게 신경 쓸 이유가 없었다./

사울이 왕위 계승권을 노리는 것도 아니니 말이다.

하지만 노회한 국왕인 마렌과 냉철함으로는 마렌보다도 위로 느껴지는 루시아만은 경계했다.

설마 전생 일이 들키지는 않겠지만, 다른 이유로 책잡힐 일이 없도록 경계했다.

그런 누님을 아이나는 동경하고 있는 것이다.

신분이나 혈통보다 능력으로 인정받는 사람으로서.

‘만나게 해 줘서 나쁠 건 없겠지.’

어차피 수도에 가면 누님과도 한 번은 만나야 할 것이다.

그 자리에 동석시키는 형태라면 별문제 없을 듯 했다.

“알았어요. 어떤 형태로든 누님과 만날 시간을 마련해 보도록 하죠.”

“감사합니다. 전하.”

할 말을 마친 사울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마차 주변의 호위 병력 중 아르멜의 모습도 보였다.

카스텔, 아이나, 아르멜.

이들과 함께 움직이는 건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많은 도움을 받았다.

사울은 가능하면 앞으로도 이들과 함께 움직이는 게 나을 것이라 생각했다.

* * *

며칠간의 마차 여행은 평화로웠다.

정예 호위 병력과 함께 움직인 덕분인지 몬스터나 도적과의 조우 없이 무사히 수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오랜만이군.”

마차 창문에 비친 거대한 성문을 바라본 사울이 중얼거렸다.

다르센 왕국의 수도 레디아.

가멜다 왕국의 수도 오퍼스와 함께 율렌 섬에서 가장 큰 도시다.

왕자의 몸으로 다시 태어난 후 삶의 대부분을 보낸 곳.

반년 전 사울이 떠났을 때와 달라진 건 계절뿐인 것 같았다.

드높은 성벽도, 튼튼한 성문도,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도시 풍경도 사울의 기억과 거의 달라지지 않았다.

마차 안팎의 사람들 대부분에게도 익숙한 풍경이었다.

딱 한 명을 제외하면 말이다.

“여기가 레디아…….”

눈을 반짝이며 창밖 풍경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아이나였다.

귀족 영애답게 다소곳한 자세로 앉으면서도 목을 쭉 빼 창밖을 내다보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웃음을 참기 힘들었다.

사울은 왕자로서 체면을 생각하며 간신히 참아 넘겼다.

“다행히 형님 생일에 늦지 않게 도착했군요.”

“왕자님 생신이 이틀 뒤였지요?”

“그래요.”

“준비한 선물이 마음에 드셔야 할 텐데.”

사울은 아이나가 준비한 선물을 떠올렸다.

변방 지역에서만 나는 차와 장식품 등이었다.

돌이켜 보면 1왕자 실베스터는 매년 생일 때마다 산더미 같은 선물을 받았다.

그리고 실베스터는 그 선물들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안 주는 것보다는 주는 것을 선호하지만, 자신에게 큰 선물을 주었다고 특별히 고마워하진 않는 성격이었다.

선물을 뜯어보고 좋아하거나 싫어할 나이도 지났고, 그럴 처지도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괜찮아요. 형님은 선물의 내용보다 정성과 의미를 중요시하니까.”

“의미… 그렇군요.”

아이나는 사울의 말을 알아들었다.

왕실과 마냥 편한 관계는 아닌 홉킨스 가문의 딸이 1왕자에게 직접 선물을 보낸다.

관점에 따라서는 꽤나 의미 있는 행동이 아닐 수 없다.

사울은 다르센 왕국 정계에서는 활동한 적 없지만 판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대충 알았다.

아직은 국왕이 건재하고 건강에도 별 문제가 없다.

그렇기에 후계자에 대한 부분을 명확히 결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1왕자인 실베스터나 2왕자인 카리스 둘 중 한 명이 차기 국왕이 될 가능성이 높다는 게 공통적인 의견이었다.

둘 다 능력이라면 크게 흠잡을 데 없다.

아직 젊은 왕자들이라 검증이 더 필요할지는 모르나 최소한 무능하다는 소리는 듣지 않았다.

양측의 세력도 비슷했고 각각 유리한 점과 불리한 점이 있었다.

1왕자 실베스터는 장자라는 점에서 유리했고, 2왕자 카리스는 지금 살아 있는 왕비의 자식이라는 점에서 유리했다.

반대로 말하면 실베스터는 전 왕비이던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신 게 불리했고, 카리스는 장자가 아니라는 점에서 불리했다.

실베스터와 카리스 둘 다 왕위를 노리는 건 분명했다.

이미 두 왕자 주변에는 친위 세력이 상당했다.

그런 상황에서 대놓고 한쪽 편을 드는 건 도박이다.

실베스터에게 눈에 띄게 생일 선물을 주고 잘 보였다가 정말 그가 왕이 되면 대박이지만, 그가 왕이 되지 못하면 험한 꼴을 볼 수도 있다.

사울은 아이나에게 추가로 조언해 주기로 했다.

“실베스터 형님은 물론 카리스 형님께도 인사를 드리는 게 좋을 거예요.”

“네? 아, 그렇군요.”

아이나도 귀족 영애라 사울의 말뜻을 금방 알아들었다.

그녀는 물론 홉킨스 가문 역시 왕위 쟁탈전에 끼어 들 마음은 없었다.

누가 왕이 될지 확신할 수 없다면 국왕 후보 모두와 잘 지내는 게 현명했다.

사울은 몇 가지 조언을 더 해 주었다.

변방 영지의 영애가 수도에서, 나아가 왕궁에서 망신을 당하지 않기 위해 필요한 조언들이었다.

사울 딴에는 꼭 필요한 이야기만 해 주었음에도 말이 상당히 길어졌다.

“…마지막으로 왕궁 안에서는 꼭 드레스를 입는 게 좋을 거예요.”

“갑옷은 안 됩니까?”

“안 되는 건 아니지만 귀족 여성이라면, 특히 손님이라면 왕궁 안에서는 드레스를 입어야 한다는 입장이라.”

“그렇군요.”

드레스 이야기를 들은 아이나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드레스를 챙겨 오기는 했지만, 마음에 들지 않는 탓이리라.

사울이 보기에도 아이나의 드레스는 왕궁에서 입기에는 지나치게 수수했다.

그대로 입고 무도회에 참석하면 비웃음을 살 게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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