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날 도와주면 나도 남작을 도와주겠소.”
“실례가 아니라면 어떻게 도와주실지 여쭈어봐도 되겠습니까?”
“…킬리안.”
“킬리안 비셔스 말입니까?”
“그렇소. 알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가 국경 안으로 들어온 것 같소.”
라켈 역시 알고 있었는지 크게 놀라지 않았다.
“그렇다면 놈을 잡아야겠군요.”
“물론이오. 사울 왕자는 놈을 잡기 위해 이 토벌전을 일으켰지만, 결국 실패했소. 결국 공은 우리에게 넘어 온 셈이지.”
“그럼 잡으면 되지 않겠습니까? 놈의 병력은 대부분 몰살당했다던데.”
“그게 쉬운 일이라면 벌써 놈을 잡았겠지. 쉽지 않을 거요. 특히나 남작의 힘만으로는 더더욱. 내가 킬리안이라면 소라드 지방에 머물 거요. 왕국 수도나 대도시까지 들어가는 건 놈으로서도 위험할 테니까. 소라드 지방은 놈 같은 범죄자가 숨기에는 적격인 곳이지.”
“그래서요?”
“남작이 날 돕는다면 나도 남작을 돕겠소. 내가 불가피하게 적국 왕자와 맺었던 협약 문제가 잘 넘어가게 된다면, 남작이 킬리안을 잡는 데 협조하겠소. 그리고 킬리안을 잡은 공은 온전히 남작의 몫으로 돌아가게 해 주겠소.”
머리를 굴리던 남작은 나쁘지 않은 제안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자작이 적국 왕자와 협약을 맺은 일을 나쁜 방향으로 부풀려 퍼뜨린다고 자신에게 이득 될 건 거의 없다.
그렇다면 차라리 자작 쪽의 부탁을 들어주고, 이후 킬리안을 잡거나 막는 일에 협조를 받아내는 게 이득일 것 같았다.
최소한 자신이 손해 볼 제안은 아니며, 자작이 거짓 제안을 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계산을 끝낸 남작이 말했다.
“알겠습니다.”
“고맙소.”
“말씀하신 왕자와의 협상 말입니다. 그 일을 묻어 버릴 방법이 있습니다.”
“무엇이오?”
“왕자도 왕자지만, 그와 함께 괴물도 움직이지 않았습니까. ‘검은 흉성’ 말입니다.”
“그래서?”
“괴물은 괴물로 상대하라는 말이 있지요. 괴물이 나타났으니 또 다른 괴물을 이 일에 끌어들여 그쪽 일은 완전히 맡겨 버리고 자작님의 치부는 묻어 버리는 겁니다.”
라켈 남작의 말에 세드 자작도 감을 잡았다.
“또 다른 괴물이라면…….”
“네. 가르시아 남매 말입니다.”
“그들을 이 일에 개입시키자?”
“네, 자작님.”
“사실 나도 그 생각은 했었소. 하지만… 어떻게?”
라켈은 정치꾼 특유의 능글맞은 미소와 함께 말했다.
“제게 맡겨 주십시오. 저와 자작님 모두에게 좋은 결과가 나올 수 있도록 손을 써 보겠습니다.”
* * *
전쟁 영웅은 전쟁이 끝나면 가치가 떨어지는 법이다.
‘구국 영웅’이라 불리는 존재라도 예외는 아니었다.
“죽어라!”
살기 어린 남자의 외침과 함께 몬스터들이 추풍낙엽처럼 쓰러졌다.
땅을 걸어 다니는 몬스터는 물론, 하늘을 나는 몬스터들도 마찬가지였다.
몬스터들을 쓰러뜨리는 건 한 명의 남자였다.
짙은 보랏빛 판금 갑옷을 차려입고 양 손에 나눠 쥔 쌍검을 휘두르는 남자.
한 손보다는 양손으로 다루는 게 맞지 않을까 싶은 크고 두꺼운 쌍검에는 마법의 기운이 일렁였다.
왼쪽 검은 열기로 이글거렸고, 오른쪽 검은 냉기로 싸늘했다.
남자가 검을 휘두를 때마다 열기와 냉기가 함께 움직이며 몬스터를 베어 나갔다.
쌍검을 자유자재로 휘두르는 남자의 실력은 무시무시했다.
불길, 혹은 냉기가 닿는 곳마다 몬스터가 죽어 나자빠지고, 바위나 고목도 불타거나 얼어붙었다.
백 마리도 넘어 보이는 몬스터를 혼자서 밀어붙이는, 그야말로 일인 군단이라 칭할 정도의 위용이었다.
잠깐 사이에 몬스터 무리는 대부분 처치됐다.
땅을 걸어 다니는 놈들은 전멸했고, 하늘에 떠 있는 십여 마리만 간신히 살아남았다.
썬더 버드.
사람보다 몇 배는 큰 까마귀를 닮은 몬스터로서, 숙련된 전사나 마법사도 가볍게 상대할 수 없는 몬스터들이다.
저들이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것도 이 주변의 몬스터들 중 최강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남자는 썬더 버드 무리를 보고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썬더 버드 무리를 비웃으며 검을 치켜들었다.
하지만 무언가를 느낀 듯 치켜든 검을 거두었다.
남자가 검을 거둔 직후, 날카로운 소리가 들려왔다.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날아온 화살이 썬더 버드 무리를 덮쳤다.
어림잡아 수십 발은 되어 보이는 화살 세례에 썬더 버드 무리는 순식간에 전멸했다.
이 모든 것을 예상한 남자는 미소와 함께 머리를 쓸어 넘겼다.
아직 청년이라 부를 수 있을 만큼 젊은 얼굴.
호쾌한 이목구비에 살벌한 눈빛.
큰 키에 비해 그렇게 크지는 않은 체구.
짧게 깎은 갈색 머리.
마검사 ‘베일 가르시아’.
그리고 베일과 거의 나이 차이가 나지 않아 보이는 젊은 외모.
곱고 단정하지만 날카로운 눈빛.
여자 치고 큰 키에 늘씬한 몸.
마궁수 ‘마리안 가르시아’.
베일의 누나이기도 한 마리안은 방금 전 썬더 버드 무리를 전멸시킨 활을 치켜들었다.
마리안의 활은 일반적인 활과는 달랐다.
생긴 것만 따지면 대단하기는커녕 보잘 것 없었다.
왼쪽 손에 걸친 건틀렛에 자그마한 활대가 장착되어 있고, 시위가 매달린 게 고작이었다.
흔히 쓰이는 장궁이나 석궁에 비하면 크기도 작고 구조도 간단하여 화살을 제대로 날릴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하지만 마리안에 대해 널리 알려진 사실이 있다.
마리안의 활 솜씨는 율렌 섬 최고이며, 전장에서 그녀의 활을 우습게 본 자들은 모두 죽었다는 것을.
베일이 율렌 섬 최강의 전사 중 한 명이라면, 마리안은 율렌 섬 최강의 궁수 중 한 명이다.
실제로 ‘가르시안 남매’는 6년 전쟁 당시 맹활약 했고, 패전을 거듭하던 가멜다 왕국을 구하고 다르센 왕국과 대등한 입장에서 휴전 조약을 맺도록 만들었다.
그야말로 다르센 왕국 입장에서는 원수, 가멜다 왕국 입장에서는 구국 영웅들이었다.
베일이 그런 누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다녀온 일은 어떻게 되었어?”
“여러 가지 소식을 가지고 왔어.”
“보나마나 시시한 이야기뿐이겠지.”
베일은 큰 흥미가 없다는 듯 몸을 돌렸다.
마리안이 가져온 소식이라 해 봤자 뻔했다.
절반은 중앙 정계에서, 나머지 절반은 그 외 지역에서 온 소식일 것이다.
가멜다 왕국과의 전장을 활보하던 시절이라면 모를까, 지금은 큰 흥미가 없었다.
꿈틀거리는 몬스터를 확실히 끝장내는 베일을 바라보던 마리안이 말했다.
“대부분의 소식들은 재미없는 것들이야.”
베일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말했다.
“뭔가 재미있는 소식이 있는 거야? 그래 봤자 시시한 이야기들 뿐이겠지.”
“대부분은 그래. 하지만 한 가지 정말 특별한 소식이 있어.”
“뭔데?”
“카스텔.”
카스텔.
그 이름을 들은 베일의 움직임이 멈췄다.
가멜다 왕국에서는 검은 흉성이라 불리는 자, 카스텔.
과거 베일이 이긴 상대이자 가르시아 남매가 상대한 적들을 통틀어 가장 강했던 존재다.
가르시아 남매는 6년 전쟁의 막바지에 카스텔과 싸웠고, 치열한 싸움 끝에 이겼다.
그날 이후 가르시아 남매, 특히 카스텔과 직접 검을 마주하며 싸운 베일은 불멸의 명성을 얻었다.
몰락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보잘 것 없던 청년이 나라를 구했으니까.
지금껏 가르시아 남매가 꺾지 못한 적은 없다.
가멜다 왕국을 멸망시킬 기세로 날뛰던 카스텔도 결국 무릎을 꿇었다.
하지만 카스텔은 그녀와 직접 검을 맞댄 베일에게 있어 잊지 못할 최고의 맞수였다.
카스텔과의 대결이 깔끔하게 시작되어 마무리되었다고는 할 수 없기에 더욱 그랬다.
패배 후 은거한 뒤 아무런 움직임을 보이지 않던 그녀에 대한 소식이 있다?
베일로서는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카스텔은 다르센 왕국 수도에 처박혀 있다던데. 다시 기어 나오기라도 했대?”
“그렇나봐.”
“…정말?”
“정보가 들어왔어. 카스텔이 국경 지대 근처에 나타났다고.”
정말로 심상치 않은 정보였다.
카스텔이 자기 나라 수도나 가멜다 왕국과 먼 곳에서 돌아다닌다면 크게 신경 쓸 일이 아니다.
비록 패하고 큰 부상을 입었지만 재기 불능 상태는 아닐 테니까.
그런 카스텔이 국경 지대에 나타났다?
그 자체로 가멜다 왕국에 대한 도발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만에 하나 그렇다면 가르시안 남매도 다시 움직여야 하지 않겠는가.
“카스텔이 왜? 다르센 왕국 놈들이 휴전 조약을 깨려는 건가?”
“공식적인 정보와 비공식적인 정보 모두 그건 아닌 것 같다고 해.”
정치니 정보니 하는 골치 아픈 일들은 베일의 관심 밖이었다.
그리고 그런 일들은 대개 누나인 마리안이 전담했다.
하지만 베일도 전장에서 구른 경험이 있기에 마리안의 말뜻을 충분히 알아들었다.
“누가 우리에게 접촉을 해왔어?”
“그래. 국경 지대에 무슨 자작이라던가.”
“내가 신경 써야 할 만한 사람이야?”
“그 정도까진 아니야. 멍청하지 않은 장군 중 한 명. 딱 그 수준이지. 하지만 그와 지방 행정관이 보내 온 정보는 확실히 볼 만한 이유가 있었어. 공식적으로 온 정보보다 좀 더 자세했거든.”
그러면서 마리안은 서류 몇 장을 내밀었다.
서류를 받아 읽은 베일이 눈살을 찌푸렸다.
“카스텔이 얼마 전 성인식을 치른 어린 왕자 곁에 붙어 있다고?”
“나도 처음에는 믿기 어려웠지만 확인해 보니 사실이야.”
“카스텔이 국경 지대까지 온 이유라는 게 도적을 잡기 위한 것이다?”
“확실한 정보 같아. 너도 들어 봤지? 하얀 까마귀.”
몇 년간 중앙 정계에는 발도 들이지 않고 몬스터만 사냥해 온 베일이다.
그런 베일도 하얀 까마귀와 그 두목인 킬리안 비셔스의 악명은 들었다.
“악마 토끼풀을 파는 도적 놈들 말이지.”
“그래. 그것들을 토벌하겠다고 가멜다 왕국에서 군대를 일으켰고, 어느 정도는 성공한 모양이야. 킬리안의 목을 베지는 못했지만.”
“그 일을 사울이라는 어린 왕자가 주도했고, 그 곁에 카스텔이 있었다…….”
“그런 이야기지. 공식 정보에서도 그렇게 말했고, 그 자작이라는 자가 보내온 정보에서도 결국 같은 말을 했어. 좀 더 자세한 이야기들이 담겨 있었지만.”
그저 정보를 보고 들었을 뿐인데 베일의 눈이 불타올랐다.
이제 시체가 된 수많은 몬스터들과 싸울 때보다도 더욱 거센 불길이었다.
그런 동생의 모습에 마리안이 작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우리가 왜 쫓겨 오다시피 했는지 잊지 마.”
“쫓겨 오다니. 누나. 말이 심한데?”
“그게 사실이니까. 지금까지 무리하면서 죽이고 싶은 놈은 다 죽이고, 혼내고 싶은 놈들도 다 혼내줬잖아? 덕분에 나라 안팎에 우리에게 이를 가는 놈들 천지야. 더 이상 함부로 움직이면 안 돼.”
누나의 말에 베일이 피식 웃었다.
“그럼 내게 이런 말을 하는 이유가 뭐야?”
“함부로 움직여서는 안 되겠지만, 신중히 움직일 준비를 하라고.”
“과연. 카스텔이 움직이기 시작했다면 우리가 필요해 질 날이 올 것이다?”
“그렇지. 한동안 국왕 폐하나 귀족 나리들은 우릴 만나고 싶어 하지 않았지만, 카스텔이 움직인다면 이야기가 달라져. 머잖아 어떤 형태로든 우리에게 접촉해 올 거야.”
누나의 말을 이해한 베일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렇군. 이번에야 말로 카스텔을 없앤다면…….”
베일과 공감한 마리안도 작게 웃었다.
“우리가 완벽한 승자가 되는 거지. 율렌 섬의 누구도 우리에게 맞서진 못할 거야. 하지만 그날이 오기 전까진 문제를 일으키지 않아야 해. 알았지?”
“누나 말대로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