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어떻게 봐도 킬리안을 잡기는 어렵게 된 것 같다.
이제 그만 포기해야 할 때일까.
“그럼 우리 왕국에서는 하얀 까마귀를 뿌리 뽑았다 할 수 있는 건가?”
“좋게 생각하면 그렇게 볼 수도 있을 겁니다.”
‘좋게 생각하면’.
냉정하게 평가하면 달리 볼 수도 있다는 뜻이다.
아르멜의 신랄한 말에 사울은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하는 데 까지는 해 봐야지. 끝내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면 거둔 것에 만족해야 할 테고.”
“그렇습니다. 전하. 왕국도, 홉킨스 가문도 이번 토벌전으로 잃은 것 보다는 얻은 것이 더 많으니까요.”
“이제 와서 아부하는 건 아니겠지?”
“진심입니다.”
확실히 아르멜은 이제 와서 사울에게 아부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사울 본인도 아첨꾼을 좋아하지 않았고.
누구든 도움이 되는 존재를 곁에 둬야 하는데, 아첨꾼은 득보다 실이 많은 존재일 수밖에 없다.
“좋아. 하는 데까지 해 보고 놈들이 국경을 넘은 게 확실해지면 바로 귀환한다.”
“네, 전하. 승전보를 준비하겠습니다.”
“승전보라.”
아군보다 적을 더 많이 죽였고 전략적 목적도 어느 정도 달성했으니 이대로 토벌전이 마무리되어도 ‘승전’이라 칭할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진정한 승리를 거두었다고 할 수 있을까.
사울은 그렇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없었다.
* * *
며칠 후.
국경 근방까지 움직이며 킬리안 일당을 추격한 사울은 마침내 현실을 인정하고는 기사들을 불러 모았다.
모일 수 있는 기사들이 모두 모인 가운데 사울이 입을 열었다.
“킬리안과 소수의 부하들이 국경을 넘은 것 같다.”
사울의 말에 누구도 크게 놀라거나 하지는 않았다.
대부분 예상했던 일이었기 때문이다.
한 기사가 질문했다.
“전하. 그럼 앞으로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적국이 우리와의 약속을 어기지 않았으니 우리도 약속을 어길 수는 없겠지.”
“그럼 철군하실 생각입니까?”
“좋은 방법이 없다면.”
사울의 말에 기사들 대부분이 고개를 끄덕였다.
기사들 중에는 분명 직접 킬리안 비셔스의 목을 베는 공을 세우거나, 그에 관여하고 싶어 하는 자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가멜다 왕국의 국경을 넘으면서까지 공을 세우고 싶어 하는 자는 없었다.
이는 휴전 조약을 깨는 것이자 사울과 세드 메로빙거 자작의 조약을 깨는 것이다.
개인적인 욕심으로 그런 짓을 하면 목숨이 몇 개나 있어도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사울도, 다른 기사들도 국경을 넘어간 킬리안을 잡을 묘수를 떠올리지 못했다.
침묵 속에서 사울은 입을 열었다.
아니, 열려고 했다.
‘이만 돌아간다.’
현 상황에서 가장 적절한 방법이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다른 방법이 없다.
하지만 원하는 결과를 모두 얻지 못하고 돌아가자니 아쉬움이 남았다.
조금 더 강했다면 킬리안을 잡을 수 있었을 텐데.
아니면 카스텔과 같이 다녔다면 조금 더 나은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었을까?
자신이 총책임자로 나선 첫 번째 전장을 되돌아보던 사울에게 누군가 말했다.
“돌아가시는 게 좋겠습니다.”
아르멜이었다.
“전하. 다음 기회가 있을 겁니다.”
아이나도 말했다.
다음 기회.
썩 좋아하는 표현은 아니지만, 지금으로서는 최선이다.
“알았다. 돌아갈 준비를 해라. 어쨌든 우리들이 이긴 전투이니 그대들은 물론 병사들에게까지 공에 따라 대가를 받을 수 있도록 하겠다.”
“네, 전하!”
기사들 대부분이 철군 준비를 하러 사울의 천막을 나갔다.
아르멜과 아이나만 남은 가운데, 사울이 아이나에게 말했다.
“그동안 수고 많았어요.”
“별말씀을.”
“많은 일이 있었지요. 어쩌다 보니 킬리안과 직접 칼을 맞대기까지 했고. 아쉬운 건 킬리안을 잡지 못했다는 것이지만 그래도 그대와 영주군이 세운 전공은 잊지 않겠어요. 수고하고 희생 한 만큼 보답을 주도록 하겠어요.”
“정말 감사합니다. 전하.”
아이나가 다소곳이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아르멜이 말했다.
“전하.”
“할 말이 있어?”
“네. 앞으로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글쎄. 둘 중 하나겠지. 홉킨스 가문 영지에 더 머무르던가, 아니면 슬슬 수도로 돌아가 보던가.”
“제 생각에는 일단 수도로 돌아가 보시는 게 어떨까 합니다.”
“그게 좋을 수도 있겠어.”
왕자가 꼭 수도에 머무르라는 법은 없다.
하지만 사울은 토벌을 명분삼아 홉킨스 영지에 머무르고 있는 일종의 ‘손님’이다.
토벌전도 끝난 이상 언제까지 홉킨스 가문에 손님으로 머무르기도 어렵다.
“여러 가지로 생각중이야.”
“저는 빨리 돌아가시는 쪽을 권해드립니다.”
“누님의 뜻인가?”
“네. 그리고 폐하의 뜻이기도 합니다.”
폐하의 뜻이라는 말에 사울보다 아이나가 더 놀랐다.
반면에 사울은 차분하게 물었다.
“아바마마께서 날 돌아오라 하셨나?”
“직접 그렇게 명령하시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면?”
“대신 왕녀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곳에서 세울 수 있는 전공은 다 세웠으니 이제 수도에 돌아와서 앞으로의 길을 찾아보시는 게 좋지 않겠냐고.”
“그건 누님의 의견이지.”
“그렇습니다. 또한 제 의견이기도 합니다. 전하께서는 홉킨스 가문 영지 같은 곳에 손님으로 머무르기엔 아까운 분이니까요. 그리고 폐하의 의중도 왕녀님과 비슷할 겁니다.”
“그런가.”
생각해 보면 어느덧 홉킨스 가문 영지에서 머무른 지도 반년이 넘게 흘렀다.
그동안 얻은 게 적지 않다.
실전 경험, 그리고 홉킨스 가문과의 교류로 아이나라는 유능한 동료를 얻었다.
또한 눈앞의 아르멜도 누님의 부하지만, 이번 토벌전을 통하여 깊은 관계를 만들어 놨다.
하지만 그렇다고 언제까지나 홉킨스 가문 영지에 머무를 수는 없다.
홉킨스 가문에서도 자신을 받아 주는 데 슬슬 한계를 느끼고 있을 테니까.
‘일단 돌아가는 게 낫겠군. 마침 형님 생일도 멀지 않았으니.’
생각하던 사울은 결정했다.
“좋아. 영지에 소식을 전하고 수도로 돌아갈 준비를 해 줘.”
그러면서 사울은 아이나를 돌아보았다.
사울이 왕국 수도로 돌아간다는 말에 무언가 안타까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사울은 그런 아이나에게 제안했다.
“그대도 나와 함께 수도에 가지 않겠어요?”
“네? 전하와 함께요?”
“그래요. 나는 아직 그대와 헤어지고 싶지 않으니까요.”
아르멜이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끼어들었다.
“전하, 외람된 말씀이오나 공과 사는 구분하시는 게…….”
사울은 아르멜의 말을 잘랐다.
“무슨 말이야? 나는 아이나가 수도에서도 활약할 만한 인재라고 생각되어 제안한 것뿐인데. 설마 아이나가 무능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그건 아닙니다만.”
“아르멜도 공과 사를 구분해 줬으면 해. 어떤 가문 출신이든 왕국에 충성하는 인재는 환영해야지. 언제 가멜다 왕국과의 전쟁이 재개될지 모르잖아?”
“…….”
아르멜의 입을 막은 사울은 다시 아이나에게 말했다.
“나는 그대의 능력을 높이 사고 있어요. 홉킨스 가문에 유능한 사람들이 몇 있지만, 영지를 떠나기는 어렵겠지요. 하지만 그대라면 다를 거예요.”
“제가… 전하와 함께 왕국 수도에?”
“그래요. 그대라면 왕국 수도에서도 분명 두각을 나타낼 거예요. 수도 사람들이 그대의 능력을 알아주지 못한다면 내가 책임질게요.”
쭈뼛거리는 것도 잠시, 아이나의 표정에 점점 화색이 돌았다.
수도에 가고 싶어 하는 게 분명했다.
사울은 조용히 기다렸고 마침내 아이나가 결정을 내렸다.
“허락을 받는다면, 꼭 데리고 가 주십시오. 전하.”
“물론이지요.”
* * *
다음 날.
정식으로 철군 명령이 내려지고 토벌군은 다르센 왕국 쪽으로 진로를 돌렸다.
사울과는 따로 움직이던 카스텔도 진중에 복귀했다.
이 소식은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세드 자작에게도 빠르게 전달되었다.
“자작님.”
“어서 오시오.”
가멜다 왕국 국경 일부를 책임지는 세드 메로빙거 자작은 찾아온 손님을 맞이했다.
손님은 소라드 지역을 다스리는 행정관 라켈 슬리드 남작이었다.
가멜다 왕국의 국경을 책임지는 두 거물의 만남이었다.
작위는 세드 자작이 더 높았지만, 그런 세드 자작도 라켈 남작을 우습게 볼 수 없었다.
지역을 다스리는 행정관으로서 왕실과도 연줄이 닿은 존재였으니까.
그렇다고 라켈 남작 역시 세드 자작을 우습게 볼 수는 없었다.
작위가 더 높고, 군권을 쥔 존재였으니까.
양측은 서로 존대하면서 한편으로는 조심스럽게, 또 한편으로는 견제하며 이야기를 펼쳐 나갔다.
“자작님. 무슨 일로 저를 부르셨습니까?”
“적국 왕자의 일이오.”
“사울 왕자 말씀이시군요.”
“그렇소. 그에 대해 어디까지 알고 있소?”
라켈 남작 역시 세드 자작처럼 적국 왕자의 행보에 촉각을 곤두세우던 참이었다.
“슬슬 철군을 할 것 같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조금 전 새로운 소식이 들어왔소. 철군을 할 것 같은 게 아니라 확실히 철군을 하고 있는 모양이오.”
“다행이군요. 아군과 부딪치지 않아서.”
“다행이라. 뭐 그렇다고도 할 수 있겠지.”
“사울 왕자가 철군을 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주려고 부르신 겁니까?”
“남작을 부른 것은 철군 이후의 일 때문이오. 이번 일을 중앙에 어떻게 보고해야 할지 의논을 하고 싶어서 말이오.”
라켈 남작은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자신이 행정관이 된 뒤 눈앞의 세드 자작과 부딪친 적도 있다.
주로 행정 일과 군대 일이 부딪쳐서였고, 작위가 높은 세드 자작이 우위를 점했던 적이 많았다.
때문에 세드 자작에게 섭섭한 감정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지만 지금은 섭섭한 감정을 드러낼 때가 아니었다.
적국 왕자가 국경 코앞에서 군사 활동을 벌이지 않았는가.
이 일을 잘못 보고하면 문책을 당하는 건 물론, 그 이상의 처벌을 당할 수도 있다.
“우린 한배를 탔다는 말씀이시지요.”
“그렇소. 내가 그동안 남작을 섭섭하게 한 일이 있다면 지금 사과하겠소.”
“아니, 괜찮습니다.”
“고맙소. 그렇다면 어떻게든 우리의 의견을 합쳐서 상부에 보내야 하오. 나와 남작이 다른 소리를 하면 그것만으로도 이 골치 아픈 문제가 더욱 복잡해질 테니까. 우리 둘 중 한 명이 다른 마음을 품어 내분이라도 생기면 적국만 도와주는 것일 텐데 그런 일만은 피해야 하지 않겠소?”
라켈 남작은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대단찮은 가문 출신으로 6년 전쟁 이전부터 군부에서 활동하며 출세 가도를 달린 자답게 능력은 물론 정치적인 감각도 보통이 아니었다.
확실히 지금으로서는 세드 자작의 말이 최선이었다.
“동의합니다. 자작님. 그렇다면 상부에 어떻게 보고를 하실 생각입니까?”
“일단 사실 그대로 보고를 해야겠소.”
세드 자작의 말에 라켈 남작은 자신이 알고 있던 비밀 아닌 비밀을 꺼내 들었다.
“자작님이 적국 왕자와 맺은 그 협약은 어떻게 하시렵니까?”
적국 왕자와 국경 책임자가 사사로이 협약을 맺었다.
물론 그것이 최선이었고, 협약으로 인한 문제는 없었지만 자칫하면 적국 왕자와 협약을 맺었다는 사실 만으로도 반역으로 몰릴 수 있다.
사실 이것이 세드 자작이 라켈 남작을 부른 주된 이유였다.
자신보다 중앙 정계와 연줄이 튼튼한 라켈이라면 해결책을 알고 있을 테니까.
“남작이라면 어떻게 하겠소?”
“영원히 숨길 수 있다면 숨기는 게 좋겠지요.”
“영원히 숨기기 어렵다는 말이오?”
“그렇습니다. 적국 왕자가 국경 근방에서 전투를 벌이지 않았습니까. 물론 우리 왕국과 부딪치지는 않았지만, 이 정도의 일이라면 왕국 정보부에서도 조사를 할 겁니다. 저도 아는 일을 왕국 정보부가 못 알아내겠습니까?”
세드 자작은 슬슬 미끼를 던질 때임을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