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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했더니 무능한 적국 왕자였다-54화 (54/232)

54화

“이런 무례한….”

“전하. 저 자를 쫓아내십시오!”

사울은 손을 들어 주변을 제지했다.

그리곤 다시 사신에게 말했다.

“그대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다. 우린 군대를 이끌고 원정을 나온 입장이고, 그쪽은 국경을 지키는 입장이니까. 하지만 우린 칼을 뽑았고, 지금 우리가 상대하는 적은 그대의 나라가 아닌 킬리안 비셔스다. 설마 메로빙거 자작이 킬리안 비셔스를 비호하는 건 아니겠지?”

사울의 말에 사신이 즉각 대답했다.

“물론 아닙니다. 킬리안은 율렌 섬의 공적이니까요.”

“그 율렌 섬의 공적을 치기 위해 우리 왕실과 홉킨스 가문이 함께 군사를 일으켰다. 그리고 아직 그대의 나라에는 아무런 피해를 주지 않았지. 그런데 우리 토벌군을 돕지는 못할망정 방해한다면 킬리안을 비호하는 것이라고 밖에는 볼 수 없지 않겠나?”

사울의 말에 사신은 잠시 할 말을 찾지 못했다.

하지만 미욱한 인물은 아닌지 금방 할 말을 찾아냈다.

“전하. 두 나라는 삼백년 간 싸워 오지 않았습니까. 그렇기에 저희도 귀국을 순순히 믿을 수는 없습니다.”

“그건 그렇군.”

어차피 지금 눈앞의 사신을 상대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사울은 대화 상대를 바꿀 필요를 느꼈다.

“협상이 가능한 상대와 직접 협상을 하고 싶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책임자인 메로빙거 자작, 아니면 그 수준의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 책임자와 이야기를 하고 싶다. 만난 자리에서 확실히 결정하고, 토벌군과 가멜다 왕국 모두 그에 따를 수 있도록.”

“…….”

잠시 생각하던 사신이 고개를 숙였다.

“자작님께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렇게 하도록.”

그렇게 사신은 떠나갔다.

보고 있던 기사들이 한마디씩 했다.

“가멜다 왕국 놈 아니랄까봐 무례하기 그지없군.”

“휴전 조약만 아니었다면 곱게 보내지 않았을 것인데.”

사울은 사신과의 만남에서 특별히 불쾌함을 느끼지는 않았지만, 기사들이 떠들도록 내버려 두었다.

어차피 믿고 의논할 만한 사람은 따로 있었다.

“다음 협상 자리에는 메로빙거 자작이 직접 나올 가능성이 높습니다.”

‘믿고 의논할 만한 사람’인 아르멜의 말에 기사들이 한마디씩 했다.

“정말 그놈이 직접 나오리라고 생각하는가?”

“여우처럼 간교한 놈이라고 들었는데.”

기사들의 의문에 아르멜이 조곤조곤 말했다.

“우리 쪽에는 왕자 전하가 계십니다. 전하가 직접 협상을 요구했으니 그쪽에서도 우리 제의를 받아들인다면 자작이 직접 나설 것입니다.”

“전하와 메로빙거 자작의 만남이라… 문제가 되진 않을까?”

“전하께서 결정을 하실 일이지요.”

천막 모두의 시선이 사울에게 쏠렸다.

그 시선의 의미는 분명했다.

혹여나 세드 메로빙거 자작과 만나고, 그 결과가 좋지 않게 나온다면?

그 책임은 사울 본인이 질 수밖에 없다.

“자작이 직접 나온다면 만나지 않을 이유가 없지.”

사울의 결정에 아르멜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말했다.

“곧바로 준비하겠습니다.”

“그렇게 하도록.”

* * *

두어 번의 조율 과정을 더 거친 뒤 마침내 협상 자리가 결정되었다.

사울과 세드 메로빙거 자작이 직접 만나 토벌에 관련된 문제를 해결하기로 한 것이다.

만나는 장소는 토벌군이 머무르는 진지 근처로 결정되었다.

직접 나오기로 한 세드 메로빙거 자작 입장에서는 상당히 큰 결심을 한 셈이었다.

토벌군이 가만히 머무르는 것도 아니고 킬리안 추적을 위해 계속 움직이고 있는 와중에 적진으로 찾아가는 셈이었으니 말이다.

물론 사울은 협상 결과와 별개로 안전을 보장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렇지만 적국 왕자의 약속을 믿고 책임자가 직접 움직이는 건 상당한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사울은 호위 병력과 함께 약속 장소인 벌판에서 세드 자작을 기다렸다.

상황이 상황이라 뒤늦게 약속이 파기될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저기 오는군.”

멀리 피어오르는 흙먼지를 본 사울은 이글 아이 마법을 시전했다.

독수리처럼 날카로워진 시야에 대여섯 명이 말을 타고 오는 게 보였다.

거리가 가까워지면서 마법을 쓰지 않은 사람들도 다가온 자들을 알아볼 수 있었다.

먼저 눈에 띄는 건 가장 훌륭한 말을 타고, 가장 화려한 갑옷을 입은 중년 남성이었다.

풍성한 수염을 기르고 곳곳에 주름 잡힌 얼굴을 보면 나이가 많아 보였지만, 근육질의 장대한 체구를 보면 또 그렇게 나이가 많지 않아 보이기도 했다.

저 중년 남성이 아마 세드 메로빙거 자작일 것이다.

중년 남성 뒤에서 따르는 청년의 모습도 눈에 띄었다.

낯익은 얼굴.

먼저 사신으로 찾아왔던 청년이었다.

약속 장소에 도착하자 세드 자작 일행은 말에서 내려 걸어왔다.

그리고 선두에 있던 중년 남성이 말했다.

“그쪽이 다르센 왕국의 사울 다리우스 왕자님이시오?”

“그렇다.”

사울은 주도권을 쥐기 위해 최소한의 예의만 갖춘 채, 고압적으로 행동했다.

세드 메로빙거 자작도 그런 ‘적국 왕자’의 태도를 눈치 챈 모양이었지만, 일단 낮은 신분으로서 예의를 갖추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반갑다.”

세드 메로빙거 자작이 사울 맞은편에 앉았고, 그가 데려온 사람들이 주변에 포진했다.

그것만으로도 주변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창칼을 빼들지는 않았지만 무장을 한 채로 다르센 왕국과 가멜다 왕국의 병력이 서로 바라보고 있다.

양쪽 모두 당장은 칼부림 할 생각이 없었지만, 일이 잘못되면 어떻게 될지 장담할 수 없어 서로를 철저히 경계했다.

“…….”

한편 사울은 심경이 복잡했다.

세드 메로빙거 자작을 보는 건 처음이지만 전생 때부터 들었던 이름이다.

전생 때는 만난 적은 없지만 그래도 아군이었는데 이젠 적의 입장에서 서로 마주하고 있다.

‘이래서는 안 되지.’

이것은 시작일 뿐이다.

사울의 삶의 목표를 이루려면 앞으로도 수많은 가멜다 왕국 사람들과 마주하게 될 것이다.

개중에는 전생에 얼굴을 트고 지낸 사이도 있을 것이다.

사울은 이 또한 일종의 예비 과정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앞으로의 복수를 위한 예비 과정 말이다.

그를 위해서는 지금의 협상을 반드시 성공해야 한다.

감정에 휘둘려 실패하면 모든 계획이 틀어진다.

그러기 위해 사울은 먼저 양국의 해묵은 원한을 언급하며 협상을 시작했다.

“이 자리에서만은 우리 왕국과 그대 나라의 원한을 잠시 잊기로 하지.”

사울의 말에 세드도 일단은 동의했다.

“알겠습니다. 저는 물론 왕자님도 휴전 조약을 깰 권리는 없을 테니까요.”

사울과 세드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휴전 조약을 깰 수 없다는 건 양쪽 모두가 동의하는 일이다.

공감대 속에 사울은 한마디를 덧붙였다.

“나는 휴전 조약이 유지되는 한 그대의 나라에 위해를 끼칠 생각이 없다. 하지만 오늘 협상 자리에서 결정된 사항을 지키지 않는다면 그대와 그대 나라에 반드시 보복하겠다.”

어린 왕자의 패기 넘치는 말에 세드 자작은 흠칫했다.

그러다 이내 작게 웃었다.

“내 아들 말대로 보통이 아니시군요.”

“아들?”

사울의 시선이 세드 자작 뒤에 있던 청년을 향했다.

자작이 오기 전 먼저 사울을 찾아왔던 사신.

저 청년이 자작의 아들이었던가.

“꽤나 유능한 아들을 두셨군.”

사울의 말에 자작도 지지 않고 말했다.

“그건 이쪽에서 할 말입니다. 설마 왕자님께서 이 정도의 인물이신 줄은 몰랐습니다.”

성인식을 치른 지 1년도 되지 않은 애송이 치고는 대단하다는 말이다.

상대를 높이는 것인지, 비꼬는 것인지 애매한 화법이었지만 사울은 관대하게 넘어가기로 했다.

“자작. 그대는 킬리안 비셔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지?”

“당연히 놈의 죽음을 바랍니다. 놈의 죽음을 원하는 건 우리 왕국과 다르센 왕국의 의견이 일치하는 몇 안 되는 부분일 테니까요.”

“그렇다면 이야기가 빠르겠군. 알다시피 나는 킬리안을 토벌하기 위해 여기까지 왔다. 그리고 휴전 조약을 깨트릴 생각도 없고, 따라서 그대의 나라에 어떤 위해도 끼칠 마음이 없으니 그대 역시 우리 일을 방해하지 말기를 바란다.”

“그게 전부입니까?”

“내가 바라는 건 그게 전부다.”

사울의 말에 세드 자작이 뜻 모를 미소를 지었다.

“그 정도 조건이라면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럼 협상할 텐가?”

“하지만 협상이라는 건 주고받는 게 있어야 가능한 것 아니겠습니까?”

“무슨 뜻이지?”

“지금 문제를 일으킨 건 다르센 왕국입니다. 예고 없이 병력을 이끌고 온 것도 모자라 국경 앞에서 군사 활동을 할 테니 방해하지 말라고요? 그런 요구를 받아들일 수는 없습니다.”

“......”

“다르센 왕국 군대가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것은 물론, 우리 왕국이 무언가 얻는 것이 있어야 협상이라는 게 성립할 수 있을 겁니다.”

협상을 원하면 그에 걸맞은 대가를 내놓아라.

합리적이고 당연한 요구다.

두 나라가 동맹국이거나 무난한 관계라면 모를까, 적국 사이에 협상을 하려면 대가를 요구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아무런 대가도 받지 않고 적국 왕자와 협상을 마친다면 자작의 미래도 불투명해질 테니까.

이 정도는 사울도 예상했고, 아르멜도 조언을 했다.

덕분에 사울은 물론 주변 사람들도 특별히 동요하지 않았다.

사울은 준비한 ‘모범 답안’을 꺼냈다.

“그대는 킬리안이 어떤 놈인지 아직 잘 모르는 것 같군.”

“그게 무슨 말입니까?”

“킬리안이 단순히 깡패에 악마 토끼풀 재배자 겸 판매자라고 생각하는가?”

“그렇습니다. 그게 아니면 놈이 가멜다 왕국의 반역자라도 된다는 말이십니까?”

“그렇게 볼 수도 있지. 놈에게는 어둠과 손을 잡은 이단자의 혐의가 있으니까.”

“……!”

삼백 년 넘게 싸워 온 양국이었지만, 빛을 숭상하고 어둠을 배척하는 부분에 있어서만큼은 뜻을 같이했다.

어둠을 직접 따르는 건 물론, 어둠과 조금이라도 얽히면 반역자와 동급인 ‘이단자’로 낙인찍힌다.

어둠과 관련되면 죽는다는 말이다.

반역자를 감싸는 자 역시 반역자 취급받듯, 이단자를 감싸는 자 역시 이단자 취급받는다.

자작은 물론 왕자라도 이단자로 낙인찍히면 목숨을 부지하기 어렵다.

자작은 처음으로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킬리안이… 이단자라는 말이오?”

“정확히 말하자면 그런 혐의가 있다.”

“혐의라고?”

“아르멜.”

사울의 말을 들은 아르멜이 문서를 하나 꺼내 보여 주었다.

다르센 왕국이나 가멜다 왕국은 같은 언어를 쓰기에 세드 자작은 곧바로 문서를 알아볼 수 있었다.

빛의 교단에서 쓰는 인장이 뚜렷이 찍혀 있는 문서.

내용은 간단했다.

킬리안 비셔스 본거지를 수색한 결과 이단 행위의 혐의에 대한 증거를 일부 찾았다는 내용이었다.

“…….”

문서를 샅샅이 살핀 세드 자작이 말했다.

“가짜 문서는 아니군요.”

“물론. 그 문서는 진짜고, 킬리안에게는 이단 혐의가 있다. 이미 교단에서도 놈에 대한 조사에 나섰고 조금이나마 증거도 확보했지. 이대로 가면 머잖아 킬리안이 이단자라는 사실이 온 세상에 알려질 것이다.”

“…….”

“우린 단순한 깡패 두목이 아니라 불경스러운 이단자일 확률이 높은 괴물을 토벌하고 있다. 우리 왕국은 물론, 그대의 왕국에도 도움이 되는 일이지. 어둠을 따르는 이단자를 토벌하기 위해 우리가 대신 피를 흘려주겠다는데 그대가 바라는 ‘대가’로 충분하지 않나?”

한참 생각하던 세드 자작이 천천히 말했다.

“협조를 거부한다면?”

“적국의 귀족인 그대에게 협상을 강요할 수는 없지.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범죄자이자 이단의 혐의가 있는 하얀 까마귀 토벌에 협조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널리 알리는 것 정도고.”

사울의 말이 현실이 되면, 곤란한 건 세드 자작 쪽이었다.

나아가 세드 자작 개인의 문제가 아닌 가멜다 왕국 전체의 문제가 될 수도 있다.

다르센 왕국에서 가멜다 왕국 귀족이 ‘이단자 사냥’을 방해했다고 주장한다면?

근거 없는 주장이라면 모를까 근거 있는 주장이라면 곤란해지는 건 가멜다 왕국 쪽이다.

‘교활한 놈.’

세드는 입 밖에 낼 수 없는 말을 속으로 뇌까렸다.

눈앞의 어린 왕자가 만만치 않은 녀석이라고 들었지만 생각 이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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