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사울이 생각을 정리하는 사이 기사들도 걱정스런 목소리를 냈다.
“교활한 놈들. 가멜다 왕국을 끌어들일 생각인가.”
“혹여나 놈들이 가멜다 왕국 영토로 도망치기라도 하면 토벌은 다 틀린 일이오.”
“그래. 도적놈들을 잡자고 가멜다 왕국의 국경을 넘을 수는 없는 일 아닌가.”
듣고 있던 아르멜이 말했다.
“정보부 소속 기사로서 말씀드리자면 킬리안이 가멜다 왕국으로 넘어갈 가능성은 희박합니다.”
“정말 그런가? 만에 하나 놈이 가멜다 왕국과 손이라도 잡는다면…….”
“가멜다 왕국은 적국입니다만 멍청이들은 아닙니다. 킬리안 같은 악당과 손잡고 나라 안에 암 덩어리를 키우려 하진 않을 겁니다. 정보부에서도 킬리안과 가멜다 왕국이 손을 잡을 가능성에 대해 알아본 적 있습니다만, 그럴 일은 거의 없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확실한가?”
“정보라는 건 하나의 가능성입니다. 그리고 정보부의 일은 정보를 취합해 가능성이 높은 방향으로 예측을 하는 것이지요. 따라서 확실하다고는 말 할 수 없지만 킬리안과 가멜다 왕국이 손잡을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는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물론 뇌물을 통해 몇몇 관리나 귀족들을 구슬려 이용할 수는 있지만, 그건 우리 왕국도 마찬가지니까요.”
아르멜의 조리 있는 설명에 기사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울도 마찬가지였다.
“내 생각도 같아. 놈이 직접 국경을 넘기는 힘들 거야. 그 순간 가멜다 왕국과 킬리안이 한 패라고 몰아붙일 수 있을 테니까. 악마 토끼풀 재배자에 교단에서는 이단자 혐의까지 받는 놈이니 그를 받아 주기는 힘들겠지.”
“그렇습니다. 전하.”
“하지만 킬리안 본인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겠지? 자기 목숨이 달린 일인데 그 정도도 모르고 행선지를 정한 건 아닐 거야.”
이번에는 아이나가 말했다.
“우리와 가멜다 왕국의 충돌을 일으키려는 것 아닐까요?”
“그럴 가능성이 높겠지요.”
토벌군과 가멜다 왕국의 군대가 충돌하는 건 킬리안 입장에서 최고의 각본이다.
당연히 사울은 그 각본대로 놀아줄 마음이 없었다.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어느새 밤이 깊었다.
모두들 잠들 시간이 된 가운데, 사울은 특별히 명령을 내렸다.
“밤에도 경계를 단단히 하도록.”
“네, 전하.”
야습은 전력이 약한 쪽이 유용하게 쓸 수 있는 전략이다.
사울은 최소 며칠 동안은 밤에도 엄격하게 경계를 세울 것을 명령했다.
사울 본인도 다소 불편하지만 잠들 때도 갑옷을 벗지 않기로 했다.
마법 검도 침대에서 손이 닿는 곳에 놓았고, 만에 하나를 대비하여 단검도 베개 밑에 놔두었다.
불편한 차림으로 잠들려는 찰나 방문객이 찾아왔다.
“전하.”
“들어와요.”
사울의 천막을 찾은 건 갑옷 차림의 아이나였다.
“늦은 시간에 무슨 일이지요?”
“감사 인사를 드리러 왔습니다만, 괜찮으신가요?”
감사 인사라는 말에 사울은 작게 웃었다.
“감사 받을 정도의 행동을 한 적은 없는데요.”
“그렇지 않습니다. 전하의 배려 덕분에 무사히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배려가 아니에요. 기대지요.”
“기대라고요?”
“나는 그대가 배려를 받아야 할 만큼 약한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오히려 기대할 만한 사람이고, 지금까지 기대를 충족해 주었지요. 그리고 이번 전쟁을 통해 그대에게 좀 더 많은 것을 기대하고 있고요.”
사울의 말에 아이나의 눈이 커졌다.
“…전하.”
“우리 왕실과 그대 가문의 복잡하고도 미묘한 관계에 대해서는 잘 알아요. 그렇지만 나는 우리가 잘 지낼 수 있다고 생각해요.”
사울은 입에 발린 말을 하지 않았다.
확실히 아이나는 결혼 상대는 몰라도 친구나 동료로서는 훌륭한 인재였다.
왕실과 홉킨스 가문의 미묘한 관계가 마음에 걸렸지만, 역으로 생각하면 아이나와의 친분을 통해 그 미묘한 관계를 좀 더 좋은 쪽으로 만들 수 있지 않겠는가.
그 일을 해낸다면 사울에게도 큰 보탬이 될 것이고 말이다.
이 정도의 인재를 얻는 건 쉽지 않을 것이라는 현실적인 이유.
그리고 개인적인 호감까지 겹쳐 아이나는 사울에게 ‘포기하기 어려운 인재’가 되었다.
아이나도 사울의 마음을 모르진 않았다.
물론 홉킨스 가문의 안위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하지만 가문의 안위가 유지된다면, 눈앞의 왕자 곁에 좀 더 있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변방의 영지에서 평생 지내거나 적당한 귀족 가문과 혼인하여 일생을 보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보다는 좀 더 넓은 세상에서 마음껏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고 싶다.
사울이라면 그 기회를 만들어 줄 수 있지 않겠는가.
게다가 자신을 한 사람의 전사이자 뛰어난 인재로 존중해주는 사울에게 호감이 생겼다.
“내 말뜻 알아듣겠지요?”
“네, 전하.”
“그대를 향한 견제나 방해는 내가 막아 줄 테니 그대는 이번 전쟁에서 그대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도록 해요.”
“명심하겠습…….”
아이나의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사울의 표정이 굳어졌다.
아이나도 마찬가지로 표정이 굳어졌다.
“전하, 이건?”
“야습인가!”
생각보다 빨랐지만 예상했던 일이다.
놀라는 것도 잠시, 사울은 침대 곁에 놓아둔 마법 검을 집었다.
아이나도 갑옷 차림인데다 도끼까지 차고 있었기에 곧바로 전투태세를 취할 수 있었다.
사울과 아이나가 느낀 야습의 징조는 외부에서 침입해 온 마나의 기운이었다.
그래서인지 아직 천막 밖의 보초는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 같았다.
사울은 일단 보초에게 알렸다.
“누군가 침입한 모양이다.”
“네? 아, 알겠습니다. 전하!”
보초는 영문을 모르면서도 일단 목소리를 높여 비상사태임을 알렸다.
다른 곳도 아닌 왕자의 천막에서 흘러나온 외침에 순식간에 진지 전체가 비상 태세에 돌입했다.
그리고 사울이 느낀 마력의 주인은 오래잖아 그 정체를 드러냈다.
야영지 곳곳을 밝힌 횃불에 침입자의 모습이 드러난 것이다.
“아니…….”
“네 놈은……?”
헝클어진 은발에 검은 가죽 갑옷 차림.
날카로운 얼굴에 타오르는 듯한 눈동자 그리고 손끝에는 가느다란 빛이 일렁인다.
토벌군이 잡으러 온 그 자가 분명했다.
“킬리안 비셔스!”
누군가의 외침에 킬리안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맞아.”
그러면서 킬리안이 손을 뻗었다.
그의 손끝에서 흘러 나간 빛이 그의 이름을 외친 병사에게 날아갔다.
둘 사이에 꽤 거리가 있었지만 빛은 순식간에 날아가 병사를 베었다.
베인 병사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쓰러졌다.
“저놈을 잡아라! 죽여도 좋다!”
근처에 있던 기사가 명령을 내렸다.
이에 병사들이 일제히 킬리안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들 누구도 킬리안의 몸에 창칼은커녕 손가락 하나 닿지 못했다.
병사들의 공격을 여유 있게 피한 킬리안은 미소와 함께 손을 튕겼다.
킬리안의 손짓에 따라 가느다란 빛이 번개처럼 날아가 병사들을 베었고, 순식간에 열 명이 넘는 병사가 쓰러졌다.
“후훗.”
피를 본 킬리안의 미소가 짙어졌다.
그의 시선이 화려한 갑옷을 걸친 기사 쪽을 향했다.
킬리안을 잡아죽이라는 명령을 내린 장본인이기도 했다.
자신을 향한 킬리안의 눈빛을 본 기사가 떨리는 목소리로 명령했다.
“저, 저놈들을 포위해라!”
병사들이 킬리안 주변을 포위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킬리안 곁에 있던 다크 엘프, 칼립소가 움직였다.
칼립소가 빼든 단검이 그녀의 손을 떠나는가 싶더니 이내 움직이던 병사 몇이 날아온 단검에 맞아 쓰러졌다.
그 광경을 본 기사는 더욱 놀랐다.
“칼립소까지…….”
적들이 야습을 한 것 자체는 놀랄 일이 아닐지 모른다.
하지만 설마 킬리안과 칼립소 같은 거물들이 몸소 찾아올 줄이야.
칼립소가 그런 기사를 보고 씩 웃었다.
“높으신 분 몸에는 칼이 어떻게 들어가는지 볼까?”
장난스러운 말과 함께 칼립소는 기사에게 단검을 날렸다.
긴장하고 있던 기사는 자신을 향한 공격에 본능적으로 검을 휘둘렀다.
공격당한 기사는 뛰어난 무술 실력에 마나도 조금이나마 다룰 줄 알았다.
덕분에 날아오는 단검을 무사히 쳐낼 수 있었다.
그러자 칼립소가 놀란 척 말했다.
“어머, 대단한데. 내 공격을 막아 낼 줄이야.”
그러면서 칼립소는 다시금 단검을 던졌다.
이번 목표는 기사가 아닌 다른 병사들이었고, 그들은 칼립소의 공격을 막거나 피하지 못했다.
순식간에 칼립소에게 당해 쓰러진 병사들의 숫자도 열 명이 넘었다.
그때 누군가 달려왔다.
사울이었다.
물론 혼자 달려오는 게 아니라 아이나와 아르멜 등 일단의 무리를 이끌고 왔다.
“무슨 일이지?”
사울은 달려오기 전부터 느껴진 마나의 기운, 그리고 달려오는 도중 들려온 비명소리에 상황을 어느 정도 파악했다.
강력한 실력자가 나타났다는 것 말이다.
하지만 눈앞에 펼쳐진 현실은 사울의 예상을 뛰어넘었다.
“넌……!”
은발의 남자를 본 사울의 눈이 커졌다.
초상화와 글로만 알았던 상대지만 이렇게 마주하니 단박에 알아볼 수 있었다.
킬리안 비셔스.
하얀 까마귀의 수장.
이 토벌전을 일으킨 장본인.
사울이 킬리안을 알아보았듯, 킬리안 역시 사울을 알아보았다.
“사울 왕자?”
킬리안이 사울을 알아보자 모두들 긴장했다.
저 미친놈이라면 당장 사울을 공격해도 이상할 게 없다.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킬리안은 공격 대신 손을 거두고 허리를 굽혀 예를 표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왕자 전하.”
“…….”
의외로 킬리안의 동작에는 절도가 있었다.
인사 하는 모습만 보면 못 배운 도적이 아니라 고상한 귀족을 연상시켰다.
하지만 인사를 마치고 고개를 든 킬리안의 얼굴을 본 순간 사울은 깨달았다.
이놈은 제정신이 아니고, 정말 위험한 놈이라는 사실을.
일단 사울은 왕자로서 위엄을 갖추며 물었다.
“네가 킬리안인가?”
“그렇습니다. 전하.”
“이미 왕국에 돌이킬 수 없을 만큼 큰 죄를 지은 주제에 왕국 병사들을 해쳐 죄를 더하는군.”
“전하 말씀대로입니다. 어차피 저는 죽을죄를 지었으니 이제 죄를 더한들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건 네 죄를 인정한다는 것인가?”
“글쎄요. 왕자 전하.”
킬리안은 왕자라는 신분 앞에 조금도 주눅 든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비웃는 기색이었다.
심상치 않은 예감을 느낀 아르멜이 권했다.
“전하, 일단 물러나시지요.”
사울 신변의 안전을 생각하면 당연한 권고였다.
하지만 사울은 거부했다.
“저런 악당에게 등을 보일 수는 없다.”
개인적인 자존심 문제도 있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왕자이자 토벌군의 대장으로서 제 발로 나타난 적 우두머리에게 등을 보인다?
자존심이 상하는 일인 것은 물론 왕자로서의 체통에도 먹칠을 하는 일이다.
지금 자신은 전생의 하급 귀족 시절과는 다르다.
그 때는 체통이나 자존심이 목숨만큼 소중하지는 않았지만, 왕자이자 토벌군의 우두머리인 지금은 체통이나 자존심도 목숨 못지않게 소중했다.
사울은 후퇴 대신 마법 검을 치켜들었다.
“킬리안. 네게 선택권을 주겠다. 무기를 버리고 항복해라. 아니면 이 자리에서 죽을 것이다.”
킬리안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건 제가 할 말입니다. 전하. 제게 무릎을 꿇고 빌어 보십시오. 그럼 전하와 병사들의 목숨은 살려드릴 테니까.”
사울을 한껏 조롱한 킬리안은 손을 뻗었다.
그의 손끝에서 흘러나온 가느다란 빛이 곧장 사울을 향해 날아갔다.
“전하!”
아이나가 사울의 앞을 가로막으며 방패를 휘둘렀다.
빛이 방패를 할퀴었지만, 방패를 자르지는 못했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알아보기 힘든 가늘고 날카로운 자국을 남겼을 뿐.
비록 눈에 잘 보이지도 않는 공격이었지만, 아이나는 바로 깨달았다.
굉장히 위협적인 공격이었다는 사실을.
‘이것이 ‘죽음의 실’…….’
아이나도 킬리안의 ‘죽음의 실’에 대해서는 들은 적 있었다.
칼날처럼 날카롭고 강철같이 튼튼한 실을 날려 적을 베는 킬리안의 무기.
죽음의 실을 다루는 킬리안의 실력이 얼마나 뛰어난지 혼자서 수십 명, 심지어 수백 명을 베었다는 소문이 있을 정도였다.
그 소문의 진위 여부와는 별개로 한 가지는 분명했다.
마나를 다루는 실력자들이 없다면 이 부대의 병사들 모두가 달려들어도 킬리안을 당해낼 수 없다는 사실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