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그가 향한 곳은 사울의 천막이었다.
자객처럼 남의 눈길을 피해 조용히 사울의 천막에 접근하니 익숙한 마법의 기운이 느껴졌다.
‘자객 걱정 따윈 하지 않아도 되겠군.’
사울의 천막에는 카스텔이 함께 있었다.
멋모르고 자객 따위가 와도 곧바로 카스텔의 먹잇감이 될 것이다.
실제로 아르멜은 사울의 천막에 접근하는 순간 자신을 훑는 듯한 마나의 느낌을 받았다.
천막 안에 있던 카스텔이 자신의 존재를 감지한 것이리라.
만에 하나 허튼짓을 하면 그 즉시 머리와 몸이 분리되거나 생포당할 것이다.
아르멜은 작게 웃으며 천막 밖을 지키고 있던 경비병에게 말했다.
“전하께 알려라.”
“네.”
천막 안으로 들어간 경비병이 다시 나와 말했다.
“들어오십시오.”
사울의 천막으로 들어가니 예상대로의 광경이 보였다.
사울과 카스텔이 함께 있는 모습이었다.
자신이 머무르는 천막의 세 배는 큰 천막이라 둘이 머무르기에도 공간이 부족하지 않았다.
사울은 천막 중심에 의자를 놓고 앉아 무언가를 읽고 있었고, 카스텔은 구석 바닥에 앉아 눈을 감고 명상에 잠겨 있었다.
“전하.”
“그래. 알아봤어?”
“네. 기사들의 반응은 나쁘지 않습니다.”
사울의 명령은 간단했다.
자신의 행동에 대한 기사들의 반응을 알아보라는 것.
“기사들의 반응이 어땠지?”
“전하의 능력에 감탄하는 모습이 역력했습니다.”
“아부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물론 아부가 없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진심으로 전하께 감탄한 모습이었습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였으니까요.”
“나에게 감탄한 것 말고 특별한 반응은 없었어?”
“기사들 역시 이 토벌전을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다소 무리해서라도 어떻게든 성과를 내려 하는 것 같습니다.”
“다소 무리해서…라.”
사울은 상급자가 말하는 ‘다소 무리한다’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았다.
공을 세우기 위해 병사들을 몰아댄다는 뜻이다.
사울도 병사들을 몰아대면 당장은 더 좋은 성과가 나오는 것은 알고 있다.
더군다나 이번 토벌은 사울이 총책임자로, 자신의 결단에 따라 토벌군을 얼마든지 굴릴 수 있다.
하지만 전공을 위해 병사들을 무리하게 굴려 쓸데없는 피해를 보고 싶지 않았다.
전공에만 혈안이 되어 병사들을 소모품으로 사용하는 지휘관들을 많이 봤다.
그런 지휘관들은 당장의 전투는 승리할지 몰라도, 병사들의 신뢰를 잃어버린다.
병사들의 신뢰를 잃은 부대를 몰아세워 당장은 전공을 올릴 수 있지만, 결국은 비참하게 패배하곤 했다.
전생 때 병사들과 함께 전장에서 무던히도 굴렀던 사울은 그 점을 아주 잘 알았다.
“기사들이 너무 병사들을 몰아대지 않도록 해 봐.”
“무슨 말씀이십니까?”
“급여를 두 배, 세 배로 올린 덕분에 병사들의 사기는 드높지. 그런 점을 이용해서 무리하게 몰아세울 필요는 없어. 그랬다간 역효과를 부를 테니까.”
“…….”
그런 사울을 바라보던 아르멜이 조금 감탄한 표정으로 말했다.
“전하께서는 정말 신기한 분이십니다.”
“무슨 소리야?”
“전하께서는 이 영지에 오기까지 평생 수도를 벗어나 본 적이 없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분이 전장에 대해서 잘 아시는 것처럼 행동하시고, 실제로 잘 아시는 것처럼 보이시니 말입니다.”
물론 사울은 전장에 대해 잘 알았다.
전생의 기억 덕분이었다.
물론 전생 이야기는 함부로 꺼낼 수 없다.
오히려 철저히 숨겨야 할 일이다.
사울은 이런 질문을 받을 때를 대비하여 준비한 답변을 꺼냈다.
“공부를 많이 했거든.”
“그러십니까? 하지만 공부만으로는 알 수 없는 일도 많은데, 전하께서는 그런 것들도 잘 아는 것처럼 보이십니다.”
“그래? 공부를 열심히 한 보람이 있군.”
사울은 말을 돌리기로 했다.
“어떻게든 하얀 까마귀를 토벌하고 킬리안을 생포하거나 없애야 해. 하지만 쓸데없는 피를 흘릴 필요는 없지. 혹시나 기사들이 전공에 눈이 멀어 쓸데없는 일을 하지 않도록 감시해.”
“알겠습니다. 하지만 저의 힘만으로는 그들을 제어하는 게 쉽지 않을 겁니다.”
“필요하다면 나나 선생님의 이름을 빌려도 좋아. 대신 나나 선생님의 이름을 빌릴 일이 있으면 나중에라도 철저히 보고해. 나도 모르는 사이 내 이름이 팔리는 건 사양이니까.”
“명심하겠습니다. 전하.”
비로소 오늘 할 일을 모두 마친 아르멜은 천막에 들어올 때처럼 조심스럽게 나갔다.
사울은 아르멜이 한 말을 되씹어 보았다.
‘전장에 대해서 잘 아시는 것처럼 행동하시고, 실제로 잘 아시는 것처럼 보이시니 말입니다.’
날카로운 지적이다.
역시 너무 자신을 드러낸 걸까.
하지만 사울 스스로 주도하여 시작한 토벌전에서 그 정도의 존재감도 보여 주지 않으면 상황을 제대로 이끌어 나갈 수 없다.
끌려다니지 않으려면 다소 무리해서라도 자신의 실력을 보여 줄 필요가 있다.
‘앞으로 좀 더 조심해야겠어.’
다짐하며 사울은 카스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여전히 카스텔은 바닥에 앉은 채 명상 중이었다.
하지만 방금 전 대화는 다 들었을 것이다.
어떤 의미로는 카스텔이야 말로 사울의 최측근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카스텔에게도 자신의 진의가 모두 드러나면 안 된다.
언젠가 등에 칼을 꽂을 생각이니 더더욱.
“선생님. 그만 나가도 될 것 같아요.”
사울의 질문에 카스텔은 눈을 감은 채 말했다.
“저는 여기에서 자도 상관없습니다.”
“나도 상관없지만… 우리가 같은 천막에서 자는 건 쓸데없는 오해를 받을 수 있으니 다른 곳에서 자도록 해요.”
“전하를 지키는 것도 제 임무입니다. 그리고 이런 곳에서 전하와 멀어지면 유사시에 제대로 전하를 지켜드릴 수 없습니다.”
“바로 옆에 천막을 하나 더 치는 건 어때요?”
“정 전하가 불편하시면 천막 밖에서 자겠습니다.”
“천막도 안 치고?”
“제 몸은 마법으로 지킬 수 있습니다.”
“…….”
이럴 때 카스텔의 모습은 그레이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보호해 주는 건 고맙지만, 과보호를 하는 느낌이랄까.
카스텔이 저렇게 ‘임무’ 운운하는 한 말릴 수 없다.
사울은 별수 없이 카스텔의 뜻을 따랐다.
* * *
다음 날 아침.
생각할 것이 많은 탓인지, 아니면 불편한 천막에서 잠든 탓인지 사울은 일찍 눈을 떴다.
부스스한 차림으로 천막 밖으로 나가니 아직 기상 시간이 아니라 주변이 조용했다.
천막을 지키던 경비병이 그런 사울을 보고 각 잡힌 자세로 인사했다.
“일어나셨습니까. 전하.”
“수고가 많군.”
“감사합니다.”
경비병이 졸거나 딴 생각을 한 기색은 없다.
다른 경비병들도 마찬가지였다.
군기가 제대로 잡힌 모습에 사울은 안도감을 느꼈다.
아직은 부대가 제대로 돌아간다는 뜻이니까.
‘지금은 이렇지만 장기전으로 돌입하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라. 가능한 속전속결로 끝내고 싶지만 쓸데없이 아군 피해를 키우는 것도 막아야 하니…….’
총책임자가 아닐 때는 이런 걱정을 해 본적이 없었다.
아랫사람의 입장에서 위에서 내려오는 방침에 그대로 따르거나, 그 방침을 거역하지 않는 범위 하에서 어떻게든 자신과 휘하 병력의 목숨을 지키고 공을 세우기 위해 노력했을 뿐이다.
지금은 사울이 결정을 내리면, 그 책임 또한 사울이 져야 한다.
책임 전가를 하는 방법도 있지만 전생의 자신이 가장 혐오하던 행동을 스스로 할 수는 없는 일이다.
목표는 두 가지다.
어떻게든 킬리안을 생포하거나 베고, 가능한 아군 희생을 줄이는 것.
“말은 쉽지.”
중얼거리며 주위를 둘러보던 사울은 천막 근처에서 자고 있는 사람을 발견했다.
잠든 상태에서도 숨길 수 없는 마나의 기운이 아니었다면 잠든 거지나 시체라고 착각했을 것이다.
바닥에 대충 천 한 장만 깔고 거지처럼 잠든 건 카스텔이었다.
어이가 없어진 사울이 경비병에게 물었다.
“선생님이 왜 여기서 자고 있지?”
경비병도 난감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저희도 작은 천막을 치거나 침낭이라도 드리려고 했지만 사양하셨습니다.”
알 만했다.
일개 경비병이 카스텔을 푸대접할 리는 없고, 카스텔이 귀찮다는 이유로 노숙자처럼 잠들었을 것이다.
편안한 얼굴로 잠들어 있는 모습을 보니 깨울 마음도 들지 않았다.
“전하.”
고개를 돌리자 갑옷 차림의 아이나가 보였다.
“일찍 일어났군요?”
“전하야말로 일찍 일어나셨군요.”
“이래저래 생각할 게 많아서요.”
보아하니 아이나도 사울과 비슷한 이유로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한 모양이었다.
당연한 일이다.
이 토벌전은 아이나 개인의 경력에도 큰 영향을 미칠 것이며, 나아가 홉킨스 가문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테니까.
신분은 달라도 처지가 비슷한 아이나에게서 동병상련을 느꼈다.
“어디 아프거나 불편한 곳은 없나요?”
“저는 괜찮습니다. 그보다 카스텔 씨가…….”
노숙자처럼 잠든 카스텔의 모습에 아이나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사울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선생님은 보통 사람과는 좀 다른 분이시니까요.”
“그, 그러시군요.”
“보기에는 저래도 마법으로 스스로의 몸을 보호하고 있을 거예요.”
“그럼 다행입니다만.”
잠시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해가 떠오른다 싶더니 기상나팔 소리가 울렸다.
모두들 움직일 시간인 모양이다.
사울은 돌아가려는 아이나에게 한마디 했다.
“그대는 회의장에서 아무 말이 없더군요.”
“네, 저는 아직 미숙해서 그런 자리에서는 특별히…….”
어제 회의 자리에는 아이나도 있었다.
아무런 의견도 내놓지 않았기에 존재감이 없었을 뿐이다.
의견이 없다고 탓할 것은 없다.
아직 어린 아이나는 실력과 별개로 경험이 부족할 수밖에 없고, 경험 많은 기사들 사이에서 좋은 의견을 내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사울은 아이나가 아무 생각이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돌이켜 보면 의견이나 생각이 없는 건 아니지만 이런 상황에 익숙하지 않아 실수하지 않으려 몸을 사리는 것 같았다.
싸울 때는 당당하고 자신만만하던 아이나였는데 말이다.
사울은 전생의 기억을 떠올리며 아이나에게 조언했다.
“책에서 이런 글을 본 적이 있어요. 지나치게 거만한 장교는 성공하기 어렵지만, 지나치게 겸손한 장교도 성공하기 어렵다고.”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대는 영주의 딸이 아닌 한 사람의 전사나 기사, 혹은 장군으로서 크게 성공하기를 바라지 않나요?”
“…….”
아이나는 사울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없다.
오직 사울 스스로의 짐작으로 한 말일 뿐이다.
잘못짚은 것이라면 아이나의 심기를 꽤 불편하게 만들 수도 있다.
다행히 사울은 잘못짚지 않았다.
아이나는 한 방 먹은 표정을 지었지만, 불쾌한 기색은 없었다.
그것을 증명하듯 아이나가 물었다.
“저 같은 사람이 경험 많은 기사들 사이에서 함부로 이야기를 해도 되겠습니까?”
“자신을 비하할 필요는 없어요. 그대는 영주의 딸일 뿐만이 아니라 훌륭한 전사에요. 영주의 딸이자 훌륭한 전사라면 어떤 자리에서든 발언권을 가질 만한 자격이 있는 셈이지요. 거만한 것은 나도 좋아하지 않지만 지나치게 겸손한 것도 바람직하지는 않은 것 같아요. 특히 그대의 능력을 제대로 펼치고 싶다면 더더욱.”
“…….”
잠시 말이 없던 아이나가 무언가를 결심하고는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전하.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후훗.”
이것으로 아이나도 좀 더 자신감 있게 활동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생각에 미소 짓던 사울은 아이나의 다음 질문에 순간 당황했다.
“전하께서 말씀하신 책 제목을 알 수 있을까요? 그렇게 좋은 책이라면 저도 읽어 보고 싶습니다.”
굳이 제목을 대라면 ‘전생의 깨달음’.
출처는 책이 아니라 사울의 전생이었던 롤랜드의 삶이다.
진실을 밝힐 수 없던 사울은 말을 얼버무렸다.
“이런. 책 제목이 기억나지 않는군요.”
“그렇습니까… 정말 안타깝군요. 전하, 조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무언가를 깨달은 아이나는 자신의 일과 준비를 하러 떠났다.
사울도 오늘의 일과를 위해 준비를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