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그 계획을 세운 게 킬리안과 제온이다.
킬리안은 자신이 세운 계획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막상 그 계획을 실행하자니 걱정 되는 부분이 있었다.
“저쪽에서도 우리가 그렇게 움직이리라 예측하지 않겠나.”
킬리안의 말에 제온도 동의했다.
“맞습니다. 우리가 장기전을 바라는 만큼 저쪽에서는 단기전을 바라겠지요. 토벌군에 바보들만 모여 있지 않는 이상 우리 계획을 방해하며 최대한 빨리 일망타진하려 들 겁니다.”
“네 말 대로 저들이 많은 병력으로 우릴 포위하고 일망타진하려 한다면, 우린 어디로 움직여야 하지?”
“으음…….”
잠시 생각하던 제온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가멜다 왕국 쪽으로 이동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가멜다 왕국에서 우리를 환영할 것 같나?”
“물론 그럴 리 없습니다. 소수 인원이라면 모를까 대규모의 병력을 이끌고 가멜다 왕국에 들어가는 건 자살 행위입니다.”
“그런데?”
“하지만 가멜다 왕국 근처로 이동하는 것만으로도 저들에게 부담을 줄 수 있을 겁니다. 가멜다 왕국과 다르센 왕국은 휴전 조약을 맺은 상태. 아무리 왕자라 하더라도 우릴 잡으려고 함부로 군사 행동을 벌여 휴전 조약을 깰 각오는 하기 어려울 테니까요.”
“과연.”
킬리안은 물론 항상 제온과 으르렁대는 칼립소마저도 제온의 의견에 동의했다.
“그럴 듯한데? 가멜다 왕국 국경 근처에도, 또 국경 안에도 우리 아지트가 몇 있잖아?”
“그래. 우리는 그쪽으로 이동하고, 나머지가 여기저기로 분산해서 놈들의 시선을 끌면 충분히 숨거나 후퇴할 수 있을 거다. 필요하면 우리가 가멜다 왕국으로 들어갈 수도 있고.”
그러자 킬리안이 말했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숨거나 후퇴하는 것으로 끝나면 우리는 놈들에게 얕보일 것이고 율렌 섬 모두에게 얕보이겠지. 나와 하얀 까마귀가 율렌 섬 모두에게 얕보인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 것 같나?”
제온도, 칼립소도 킬리안이 무슨 말을 하는 지 알아들었다.
킬리안은 폭군이었다.
대화보다는 공포를 무기 삼아 율렌 섬의 암흑가를 지배해 왔다.
그런 킬리안이 토벌군을 상대로 저항 없이 숨거나 도망치기만 하면 킬리안을 향한 공포는 줄어들거나 사라질 것이다.
공포라는 무기가 사라진 폭군이 권좌를 지킬 수 있겠는가.
“좀 더 적극적으로 싸울 방법을 찾아볼까요?”
“왕자의 목을 베지는 못해도 다신 우릴 칠 생각을 못 하도록 겁을 줘야지.”
“쉽지 않을 겁니다. 피해도 클 테고요.”
“상관없다. 피해 없이 얻을 수 없는 건 아무것도 없으니.”
제온은 지금 킬리안에게 ‘아군의 피해를 감수하기는 어렵다’는 한가한 소리를 할 때가 아님을 깨달았다.
또 킬리안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었다.
상대가 강하다고 겁먹은 닭처럼 도망치면 당장은 살겠지만 결국 조직 전체의 몰락을 가져올 수 있다.
그래서 참모 입장에서는 참으로 어려운 일이지만, 킬리안의 말이 잘못된 방향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쉽긴 않겠지만 어떻게든 해 보겠습니다. 두목.”
“그래야지.”
킬리안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칼립소가 그런 킬리안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두목. 그럼 저는…….”
“가능한 많은 토벌군을 죽일 준비를 해라. 왕자나 검은 마녀의 목을 따지는 못해도, 많은 적들의 목을 따서 네 존재 가치를 증명해라.”
그런 일에는 칼립소가 전문이다.
칼립소는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네. 두목.”
제온과 칼립소는 앞으로의 일들은 준비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홀로 남은 킬리안의 눈빛이 번득였다.
“사울 왕자라고 했던가. 놈이 계속 날 방해한다면…….”
지금은 사울 왕자를 죽이기 어렵다.
하지만 적을 상대하는 방법이 죽이는 것만 있는 건 아니다.
공포와 고통으로 스스로 포기하게 만드는 방법도 있다.
킬리안은 죽이는 건 물론 공포와 고통의 전문가이기도 했다.
어떻게 하면 공포를 느끼게 하고, 고통을 줄 수 있는지 잘 알았다.
상대가 고귀한 신분이라 해도 말이다.
* * *
토벌군은 갈레트 지방의 변방 지역에 도착했다.
명목상으로는 홉킨스 가문의 영지지만, 영주가 있는 곳과는 멀고 중립 지대와 가까운 탓에 통제력이 거의 미치지 못하는 곳이다.
사울은 야트막한 언덕에 올라 주변을 둘러보았다.
지형이 험하지는 않지만 건조하고 메마른 사막과 같은 황무지.
인간은 물론 동물도 살기 힘들고 별다른 자원도 없어 버려진 쓸모없는 땅이다.
하지만 토벌군 입장에서는 목적지인 중립 지대로 향하는 요충지였다.
사울은 토벌군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해가 지고 있어 모두들 야영 준비에 한창이었다.
일단 이곳을 전진 기지로 삼고 본격적으로 움직일 것이다.
사울은 언덕에서 내려와 간부들이 회의장으로 쓰기 위해 친 천막으로 들어갔다.
모일만한 간부들은 모두 모여 있었다.
윗자리에 사울이 앉자 아르멜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전하.”
전보다 더 중요한 자리라 아르멜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아르멜은 먼저 큰 지도를 펼쳤다.
“지금 토벌군은 홉킨스 영지의 변경까지 와 있습니다. 조금만 더 가면 영지를 벗어나게 되고 공식적으로 우리 왕국은 물론, 적국도 점령하지 않은 중립 지대에 접어들게 됩니다.”
그러자 영주군에 속한 기사가 말했다.
“토벌군이 중립 지대에 오래 머물면 가멜다 왕국 놈들도 좋아하지 않을 겁니다.”
사울도 동의했다.
가멜다 왕국의 존재는 이 토벌전을 장기전으로 끌고 갈 수 없는 또 하나의 이유였다.
물론 가멜다 왕국에서도 킬리안 비셔스의 목을 베는 것을 싫어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가 판매하는 악마 토끼풀은 다르센 왕국은 물론 가멜다 왕국마저도 병들게 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중립 지대에서 적국 군대가 움직이는 것을 가만히 보고 있을 리는 없다.
“역시 가멜다 왕국 쪽도 생각을 해 둘 필요가 있겠군.”
사울의 말에 아르멜도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전하.”
“우리가 먼저 통보를 하는 게 낫겠나? 아니면 그쪽에서 먼저 반응을 보이기를 기다리는 게 낫겠나?”
사울의 질문에 왕국군 소속 기사가 말했다.
“우리가 얕보일 필요는 없습니다.”
“저쪽에서 먼저 반응을 보이도록 하자?”
“그렇습니다. 전하.”
이 지역의 문제는 현지인들이 잘 아는 법이다.
이 지역에서 주둔하고 있는 왕국군 기사가 말했고, 영주군 소속 기사도 반대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저들의 말을 따라도 문제가 없을 것이다.
생각을 정리한 사울이 말했다.
“좋아. 그럼 일단은 무시하도록 하지. 하지만 가멜다 왕국에게 트집 잡힐 일이 없도록 병사들의 단속을 엄하게 하도록.”
“네, 전하. 그런데 만에 하나 가멜다 왕국 쪽에서 갑자기 문제를 일으킨다면……?”
“누구든 중립 지대 안에서 토벌군을 공격하는 자가 있다면 철저히 응전하도록.”
중립 지대는 누구도 다스리지 않는 땅이다.
다르센 왕국에서 다소 신경 쓰이는 군사 활동을 한다 해도 가멜다 왕국에서 이를 제지할 권리는 없다.
그렇기에 군사적 문제를 일으킨다면 싸워 물리칠 뿐이다.
이런 정론이라 할 수 있는 사울의 말에 반대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자 사울이 다시 아르멜에게 물었다.
“하얀 까마귀 쪽에서는 특별한 움직임이 있나?”
“어제 정찰병의 보고에 따르면 아직까지는 특별한 움직임이 없었다고 합니다.”
“어제의 보고라면 지금 이 순간 움직이고 있을 수도 있겠군.”
“네, 전하. 오늘 다시 보고가 올 것입니다.”
“알았다. 그럼.”
이렇게 회의가 끝났다.
특별히 더 보고할 게 없던 아르멜은 자신의 천막으로 가려 했다.
그런 아르멜을 몇몇 토벌군 간부들이 붙잡았다.
“이보게.”
“무슨 일이십니까?”
“잠시 이야기 좀 할 수 있겠나.”
“물론입니다.”
간부들은 왕국군 소속이 절반, 영주군 소속이 절반이었다.
이번 토벌전을 성공적으로 진행하려면 이 지역에서 잔뼈가 굵은 저들의 도움이 필수적이다.
아르멜은 예의 바른 태도로 간부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무슨 일입니까?”
“아니, 대단한 건 아니고. 전하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전하에 대한 이야기요?”
예상한 일이기에 아르멜은 여유롭게 말을 꺼낼 수 있었다.
“전하께 부탁할 게 있으면 제가 대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물론 전하께서 제 말을 들어 주신다는 보장은 없지만요.”
“아니, 그런 게 아닐세.”
“그럼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러니까 이번 작전 말일세.”
“말씀하십시오.”
왕국군 기사는 잠시 주저하다 본론을 꺼냈다.
“전하께서 정말 킬리안을 잡으려 하시는 건가?”
“당연하지요. 그래서 토벌군을 결성했고, 전하께서도 직접 나오신 것 아닙니까.”
“물론 그렇지만 아무리 그래도 전하께서 직접 나설 일은 아니지 않는가. 가멜다 왕국과의 전쟁이라면 모를까, 도적 놈 상대로…….”
이런 말 또한 예상 범위 내였기에 아르멜은 여유롭게 받을 수 있었다.
“그 도적이 보통 도적이 아니지 않습니까. 킬리안 놈을 놔두면 결국 놈이 파는 악마 토끼풀이 왕국 전체를 집어삼킬 겁니다.”
“그거야 잘 알고 있네만.”
아르멜은 말을 하는 왕국군 기사도, 아직 말이 없는 영주군 기사도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 지 깨달았다.
저들이 함부로 입 밖으로 꺼내기 힘든 말이라면 이쪽에서 해 주어야 대화가 이어질 것이다.
“전하께서 이 일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거나, 나아가 일종의 유희라고 생각하신 겁니까?”
아르멜이 정곡을 찌르자 기사들이 단숨에 사색이 되었다.
“그, 그럴 리가 있나?”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우리가 전하께 그런 불경스러운 생각을 할 리가 있겠는가?”
“괜찮습니다. 아직 어리신 전하를 의심하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니까요.”
“그런 게 아니래도!”
말로는 아니라고 해도 눈빛이나 표정은 숨기기 어려웠다.
아르멜은 작게 웃으며 말했다.
“제가 드릴 수 있는 말씀은 전하께서는 이 일을 무척 진지하게 생각하고 계신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지금까지는 실수 없이 뛰어난 모습을 보여 주고 계시지요.”
아르멜의 말에 기사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말일세.”
“연설도 잘 하시고 병사들의 마음을 잘 아시는 것 같았어.”
“조금 전 회의에서도 상황을 잘 파악하고 계시더군.”
“혹시 전하께서 참전 경력이 있으신가?”
기사의 질문에 아르멜이 고개를 저었다.
“제가 알기로는 없습니다. 전하께서는 성인식을 치르고 얼마 안 되어 이 영지에 오셨으니까요.”
“그렇겠지. 최근에는 왕실 분들이 직접 개입할 만큼 큰 전쟁도 없었고.”
“신기한 일이군. 전하께서는 이런 일에 익숙해 보이셨는데.”
이 점은 아르멜도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영민한 사람이라도 경험을 쌓지 않으면 하기 어려운 일이 있다.
타고난 머리로 빨리 배우고 익숙해질 수는 있겠지만, 경험하지 않은 일을 경험자처럼 익숙하게 하는 건 어렵다.
특히 병사들의 마음을 잘 알고 그것을 어루만져 주는 연설을 하거나, 실전 상황의 회의실에서 어색하지 않게 행동하는 건 경험 없이는 정말 어렵다.
그것이 아르멜이 아는 상식이었다.
그렇지만 사울은 그런 상식을 넘어섰다.
성인식을 치른 지 1년도 안 되었고 참전 경험도 없는 왕자가 실전을 앞두고 그렇게 익숙하게 행동할 줄은 몰랐다.
“확실히 전하께서는 대단한 분이십니다.”
“동감이네. 하지만 전하께서는 대외 활동을 거의 하지 않으셨다고 들었는데.”
“저도 그렇게 들었습니다. 하지만 대단한 분인 건 분명합니다. 루시아 왕녀님께서도 전하를 높이 치고 계시니까요…….”
“루시아 왕녀님이?”
루시아 다리우스의 명성은 변방에도 널리 알려져 있었다.
정계나 사교계에서 활동하는 것 보다는 왕국 정보부 ‘회색 그림자’에서 활동하며 어린 나이에 왕국 정보계의 거물이 된 여인.
왕위 계승권 다툼에 뛰어들지는 않았지만,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뛰어들 수 있으리라는 평을 받는 왕녀.
아르멜이 그런 루시아의 부하라는 사실도 널리 알려졌다.
그 때문에 나이도 많고 지역에서 잔뼈가 굵은 기사들은 물론 영주도 아르멜에게 함부로 대하지 못한 것이다.
그런 루시아가 사울을 주시하고 있다면 보통 일이 아니다.
기사들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정말 이번 원정이 중요하겠군.”
“무슨 수를 쓰더라도 성과를 내야 하겠어.”
기사들과 이야기를 마친 아르멜은 자신의 천막으로 돌아갔다.
그리곤 밤늦은 시간까지 기다렸다 남들의 눈을 피해 슬며시 천막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