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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했더니 무능한 적국 왕자였다-38화 (38/232)

38화

과거에 비해 정치권력은 많이 줄었지만, 여전히 빛의 교단은 무시할 수 없는 존재다.

위에서는 왕부터 아래에서는 길거리의 거지까지 공식적으로는 ‘빛의 아이들’이다.

설령 교단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해도 왕자의 몸으로 함부로 말할 수 없었다.

밀스도 사울의 말뜻을 알아들었다.

“그렇습니까. 그럼 어떻게 해야 전하의 ‘현실의 벽’을 낮출 수 있겠습니까?”

“글쎄요. 일단 나는 왕자라 왕실에 조금이라도 부담이 될 수 있는 일은 할 수 없어요.”

“물론입니다. 전하께 그런 위험을 강요할 생각은 없습니다.”

“또 우리가 힘을 합쳐 어떤 성과를 거두든, 공은 잘 나누도록 하고요.”

공을 세우면 독차지는 안 된다.

사울은 이것을 못 박고 싶었다.

이단자를 잡는 건 큰 건수지만, 자칫 그 공을 교단 측이 독점할 우려가 있다.

물론 이타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왕자로서 이타적인 모습을 보이며 교단과 협력하는 것은 언젠가 정치적인 자산이 될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왕위 계승권이 있는 왕자의 몸으로 지나치게 이타적인 모습을 보여 주는 건 쓸데없는의심을 살 수도 있다.

아직 사울은 왕위 쟁탈전에 끼어들 마음은 없었고, 그렇다면 너무 민심을 끌어들이는 것도 좋지 않았다.

때로는 눈앞의 이득을 탐하는 게 도움이 될 때도 있다.

그것이 사울의 결론이었다.

이런 사울의 말에 밀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전하.”

“고마워요. 약속을 지킨다면 나 역시 기꺼이 이단자들을 상대하는 데 협력하지요.”

“물론입니다.”

서로 입장을 정리한 가운데, 마침내 이야기가 본론으로 접어들었다.

“교단에서는 이단자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고, 또 어떻게 처리할 생각인가요?”

“킬리안 비셔스에 대해 아시지요.”

“어느 정도는요.”

“교단에서는 이단자와 킬리안 사이에 연줄이 있다는 건 어느 정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콜리타 대신관님의 의견도 같으시고요.”

“그렇다면 킬리안을 잡아들이는 게 순서이겠군요.”

“네, 전하. 하지만 문제가 있습니다.”

“킬리안의 세력이 막강해서 잡기 어렵다는 말인가요?”

“그것도 있습니다만, 그는 이곳저곳에 연줄이 있습니다. 가멜다 왕국은 물론, 다르센 왕국에도 말입니다.”

“연줄이라…….”

크게 놀랄 이야기는 아니다.

킬리안은 율렌 섬에서 가장 큰 세력을 가진 범죄자다.

아무리 거물 범죄자라도 혼자서는 살아남기 어렵다.

부패한 귀족이나 관리 등의 비호를 받아야한다.

그런데 연줄 이야기가 이상하게 마음에 걸렸다.

고민하던 사울은 그 이유를 깨달았다.

며칠 전 자신을 찝찝하게 만든 사건이 떠오른 것이다.

‘설마 가멜다 왕국 놈들이 내가 이곳에 머무르는 이유를 알게 된 게…….’

증거는 없지만 앞뒤는 맞다.

킬리안이 사울을 견제하기 위해 사울에 대한 정보를 가멜다 왕국 쪽에 뿌렸다면?

그래서 상황 파악을 위해 첩자가 잠입한 것이라면?

생각할수록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새삼 사울은 킬리안을 빨리 잡아들여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따지고 보면 자신이 먼저 싸움을 걸었다.

저쪽에서 분노한 것도 당연한 일이다.

분노한 적이 또 무슨 짓을 하기 전에 빨리 잡아들여야 한다.

“킬리안과 이단자가 어떤 형태로든 손을 잡고 있고, 그들이 이런저런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이것이 내 의견인데 어떻게 생각하나요?”

“일리 있는 말씀입니다.”

“이단자의 실체는 분명하지 않지만 킬리안의 실체는 분명해요. 그렇다면 그를 먼저 잡는 게 어떨까요?”

사울의 말에 잠시 생각하던 밀스가 고개를 저었다.

“분명 일리 있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교단에서는 증거 없이 함부로 움직일 수 없습니다. 물론 킬리안이 악명 높은 범죄자라는 건 잘 압니다. 하지만 이단자가 아닌 악인을 심판하는 건 세상의 법이지, 신의 법이 아닙니다.”

“킬리안이 이단자와 어떤 형태로든 손을 잡고 있는 게 분명한데요?”

“증거 없이는 함부로 움직이는 것을 대신전에서 허락하지 않을 겁니다.”

사울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마냥 편한 대로는 되지 않는군.’

사울에게는 정체도, 세력도 알기 힘든 이단자보다는 킬리안 비셔스가 더 큰 문제다.

그를 잡아야 가멜다 왕국의 첩자에 대한 진실도 알 수 있을 테고, 앞으로의 활동도 편해질 테니까.

가능하면 이쪽이 손해 보지 않는 형태로 교단의 협조도 받고 싶었는데 그건 어려운 것 같다.

그런 사울의 눈에 아르멜이 보였다.

아르멜은 자신의 부하라고도 할 수 있지만, 동시에 루시아 왕녀의 대리인이다.

지금껏 아르멜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왕녀의 대리인으로서 사울이 터무니없는 일을 하지는 않았다는 뜻이다.

아르멜이 영민하지만, 그에게 하나하나 물어가며 일을 처리할 마음은 없다.

하지만 중요한 자리니 만큼 조언 정도는 들어도 나쁘지 않을 듯 했다.

아르멜은 물론, 가능하면 카스텔까지도.

“잠시 자리를 비워 주겠어요? 좀 더 책임 있는 대화를 위해 왕실 사람들과 의논할 게 있어요.”

잠시 대화를 끊고 나가 달라는 말이다.

아무리 사울이 왕자라지만, 꽤나 무례한 말이다.

하지만 밀스는 자신의 앞에 있는 게 누구인지 잊지 않았다.

다르센 왕국의 왕자.

가능성은 낮겠지만 법적으로는 왕위 계승권도 가지고 있는 소년.

율렌 섬, 나아가 이 세계 어디서든 존경받는 빛의 교단의 사람이라도 함부로 대할 수 없다.

“알겠습니다. 전하.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 말씀이 끝나면 불러 주십시오.”

“그대의 배려에 감사해요.”

무례한 왕자로 보이고 싶지 않던 사울은 마지막까지 예의를 차렸다.

그 덕분인지 밀스는 조금도 불쾌한 기색 없이 밖으로 나갔다.

그렇게 밀스가 밖에 나가고, 카스텔이 작게 손짓했다.

동시에 주변 마나의 흐름이 살짝 변했다.

카스텔이 마법을 쓴 것이다.

이 방에서의 말소리가 절대로 밖에 새어 나가지 않도록 마법을 걸었을 테다.

아르멜도 상황을 눈치 챈 듯 귓속말을 하지 않고 보통 목소리로 말했다.

“조마조마했습니다. 전하.”

“내가 실수를 할 줄 알았어?”

“그럴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다행히 대화를 잘 이끌어 나가셨습니다. 이런 협상 경험이 있으십니까?”

“배운 적이 있지.”

‘사울’이라는 이름으로 이런 협상을 한 경험은 많지 않다.

하지만 ‘롤랜드’라는 이름으로 협상을 한 적은 꽤 있다.

능력은 인정받지만 지위는 높지 않은 하급 장교로서 조직 안팎에서 협상을 한 적이 많았으니까.

전생 이야기를 할 수는 없기에 배웠다고 얼버무렸고, 아르멜은 의심하지 않았다.

“의견을 말해 봐. 내가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전하께서 킬리안을 직접 잡으려 하시는 건 좋은 일입니다. 왕자의 몸으로 어지간한 범죄자와 얽히는 게 꼭 좋다고 할 수 없지만, 킬리안은 어지간한 범죄자가 아니니까요. 놈을 잡을 수만 있다면 전하는 물론 왕실, 아니 왕국 모두에게 도움이 될 것입니다. 물론 악마 토끼풀 판매자나 중독자들에게는 철천지원수가 되겠지만요.”

“이단자를 상대하는 건?”

“물론 그 또한 전하와 왕실, 왕국 모두에게 좋은 일입니다.”

“루시아 누님도 기뻐하겠지?”

“부정하지는 않겠습니다.”

킬리안 비셔스, 이단자.

하나만 잡아도 앞으로 사울의 경력에 큰 도움이 될 것이며, 둘 다 잡는다면 더 말할 것도 없다.

그 정도의 공적을 세우면 자신의 존재감을 확실히 알릴 수 있고, 그를 바탕으로 힘을 모을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위험 부담은 있겠지만 감수할 가치는 있다.

위험 부담을 감수할 생각이 없었다면 왕자의 몸으로 변방 영지까지 오지도 않았을 테니까.

“그렇다면 이대로 계속 밀고 나가도 되겠지? 선생님 생각은 어때요?”

질문을 받은 카스텔이 짧게 대답했다.

“모르겠습니다.”

“아, 네.”

카스텔에게는 어려운 이야기였던 모양이다.

이어 사울의 시선을 받은 아르멜이 말했다.

“두 가지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습니다.”

“뭐지?”

“하나는 며칠 전 제가 붙잡은 가멜다 왕국의 첩자 말입니다.”

“킬리안이 보냈을 것이다?”

“…짐작하셨습니까?”

“확신은 없어.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면 앞뒤가 맞으니까.”

“그럼 첫 번째 말씀은 드릴 필요가 없겠군요. 두 번째는… 교단 이야기입니다. 교단이라고 무조건 믿어서는 안 됩니다.”

사울도 빛의 교단과 왕실과의 미묘한 관계를 모르지 않았다.

공식적으로는 교단과 왕실은 서로 협력하는 좋은 관계다.

하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치열한 정치적 다툼이 벌어지고 있었다.

과거에 비해 교단의 정치적 권력은 훨씬 약해졌고, 권력이 약해진 교단의 영향력도 점차 줄어갔다.

영향력이 줄어든 교단이 과거의 영광을 회복하기 위해 여러 가지로 움직이고 있다는 건 비밀도 아니었다.

세상의 시선 때문에 대놓고 권력을 탐하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아르멜의 조언도 그 방향일 줄 알았다.

하지만 아르멜의 조언은 예상과 다소 달랐다.

“제가 아는 정보에 따르면, 교단 쪽에도 킬리안의 연줄이 있습니다.”

“뭐라고?”

“일부 교단군, 심지어 신관들이 킬리안과 연줄이 있습니다. 신관장은 교단의 치부라고 생각하여 이야기 하지 않은 것 같지만 그 사실을 모르지는 않을 겁니다.”

“그랬군.”

처음 듣는 이야기다.

하지만 크게 놀랍지는 않았다.

세상 어딜 가든 착한 놈과 나쁜 놈, 청렴결백한 놈과 부패한 놈이 있다.

교단이라고 크게 다를 건 없다.

그렇기에 하얀 까마귀의 뇌물을 받는 신관이 있어도 놀랄 건 없다.

잠시 생각하던 사울이 문득 물었다.

“그럼 다른 곳에도 킬리안의 내통자가 있겠군?”

“네?”

“왕실이나 회색 그림자에도 킬리안과 내통하는 놈이 있지 않을까?”

이유 없이 민감한 질문을 한 게 아니다.

아르멜의 진지한 대답을 듣고 싶었다.

“…제가 아는 한은 없습니다. 어디까지나 제가 아는 한은.”

아르멜은 대답을 피했다.

비겁하다고는 할 수 없다.

일개 조직원이 감히 왕실이나 자신이 소속된 조직의 치부를 말하기는 어려운 법이니까.

“그렇단 말이지. 알았어. 그 외에 내가 또 알아야 할 게 있을까?”

“알려드려야 할 정보는 다 전달드렸습니다.”

“좋아. 그럼 신관장을 다시 불러와.”

다시 불려온 밀스에게 사울이 말했다.

“이렇게 하지요. 나와 그대들이 협조하여 킬리안과 이단자를 모두 쫓고 잡는다. 킬리안은 내가 상대하고, 이단자는 교단이 상대한다. 그리고 서로 긴밀하게 연락을 주고받으며 협조하여 양쪽 모두 확실히 잡아 악의 뿌리를 뽑는다. 어때요?”

“일리 있는 말씀입니다.”

세부적인 조건들을 조율하는 데 이야기가 오갔지만, 큰 줄기는 사울의 제안과 같았다.

그렇게 생각보다 빨리 합의를 마치고 사울과 밀스는 서로 악수했다.

“그럼 잘 부탁해요.”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전하.”

* * *

사울이 영지에 머무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왕실에서도 홉킨스 가문에 지원을 보냈다.

‘왕자의 여행비’라는 명목으로 적지 않은 자금 지원이 들어왔다.

덕분에 홉킨스 가문은 금전적으로는 아무런 부담이 없었다.

사울이 오래 머물수록 영지 재정이 윤택해지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재정 문제와는 별개로 신경이 쓰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칼랜드.”

자신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소영주 칼랜드를 부른 던칸이 질문했다.

“사울 왕자가 신전으로 갔다는 말 들었느냐?”

“네.”

“아이나는 함께 가지 않았지?”

“아르멜이라는 기사와 카스텔, 두 사람만 데리고 갔답니다.”

“그렇군. 요즘 아이나는 어쩌고 있나?”

“며칠 전에 넌지시 물어 보았는데, 아르멜이라는 기사 때문에 전처럼 왕자와 친하게 지내기 어렵다고 했습니다.”

“그런가.”

아르멜이 아이나를 견제하는 것일까.

어쩌면 아르멜은 영주나 소영주는 물론, 아이나마저 의심하는 것일 지도 모른다.

“신전에서 무슨 일로 왕자를 부른 것인지 알겠느냐?”

“신전이 우리 가문을 적대하지는 않을 겁니다. 듣기로 이단자 문제가 있다던데, 그 일 때문인 것 같습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지만, 만에 하나라는 게 있으니 안심할 수가 없다. 예전에는 아이나를 통해서 왕자 쪽의 동태를 알 수 있었지만 이제는 그것도 쉽지 않다니…….”

아르멜이 노리는 게 이것이었을까.

아이나와 사울이 친하게 지내는 것을 막아 아이나가 자기도 모르게 정보원 노릇을 하는 일을 원천 차단하는 것.

아르멜은 젊지만 결코 만만치 않은 인물이었다.

변방 영지에까지 명성이 전해진 ‘얼음 왕녀’ 루시아의 부하가 아닌가.

아르멜이 루시아의 명령을 듣던, 왕실의 명령을 듣던 영주 입장에서는 예전보다 부담이 두 배로 늘어난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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